무시선(無時禪)에 대한 성찰
<1>
지금 이 순간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리고 그로부터 깨어나 마음이 온전하게 깨어있음을 추구하는 것은 수행자들이 실천해야할 일상적인 삶의 덕목이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요동, 즉 역동적 현상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에 묶여 사는 한 마음에는 평화가 찾아들 리 없다. 자기중심성이 해체되지 않는 한 결핍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그 결핍은 욕망을 낳고 욕망은 무지를 낳으며 그 무지는 불안과 두려움을 불러옴으로써 마음의 요동은 멈추어지지 않는다.
수행의 모든 길은 집중(止)과 관찰(觀)로 이어진다.
그 대상은 자기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요동치는, 역동적인 마음의 현상이다. 간화선(止)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파장과 파동을 하나로 묶어 온전한 통찰, 즉 지혜의 완성으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하고 있으며 비파사나(觀)는 이러한 마음의 현상을 알아차리고 그로부터 깨어남으로써 열반의 길로 나아간다.
집중(止)과 관찰(觀)의 목적은 늘 깨어있음에 있다.
소태산님의 무시선 역시 늘 언제 어디서나 깨어있음에 방점을 둔다. 깨어있음이란 의식의 명료함이 전제되어야한다. 좌선을 하고 있으면서 의식이 깨어있지 못하면 그 좌선은 아무 실효가 없다. 깨어있음은 알아차림이 늘 지속되는 것이다. 매 순간 마음이 어떻게 요동하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요동치고 있는지 어떤 과정을 통해 파장과 파동이 일어나는지를 명료하게 깨달아야한다. 알아야 그로부터 벗어난 공.원.정(空.圓.正)에 도달 할 수 있으며 그를 통해 열반과 해탈의 길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과 명상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다. 선과 명상의 대상인 마음은 언제 어디서나 바로 지금 이 순간 여기를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과 명상은 무시선 무처선으로 전환되어야하는 것이다.
소태산님께서 왜 기존의 선법, 즉 불교의 간화선이나 비파사나를 통섭한 무시선 무처선을 밝히셨는가가 확연히 드러난다. 그 말씀은 언제 어디서나 깨어있으라는 그 분의 통렬한 가르침이다. 자기의식, 즉 두뇌의 파장과 파동으로부터 깨어있지 못하는 선과 명상이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무시선법을 통해 밝히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선(禪)의 궁극은 그 지속적인 깨어있음을 통해 교감 즉 중도적 이타행으로 나아가라는 것이다. 선과 명상이 자의식, 즉 <조건화된 자아>에 묶여있는 한 그것은 선(禪)의 참 뜻을 잃어버린다는 사실을 이렇게 표현하신다.
육근이 무사하면 일심을 양성하고 육근이 유사하면 정의를 양성하라!
이 때의 정의란 바로 중도적 이타행을 말함이다. 선(禪)은 <조건화된 자아>를 해체함으로써 깨어있고 무한히 열려있는 마음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따라서 선(禪)의 완성은 바로 중도적 이타행에 있다. 즉 열반과 해탈은 혼자 자족하는 자존감이 아니라 온 세상을 밝게 비추는 포월적 지혜와 그를 품어 안는 텅 빈 충만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린 일체적 교감은 필연적이다. 따라서 그 일체적 교감을 통해 그 대상과 통섭하고 조율할 수 있는 중도적 이타행 또한 필연적이다. 소태산님은 <일심(空性)이 곧 정의(慈悲)>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무시선의 강령을 그처럼 밝히신 것이다.
<2>
열반과 해탈은 잘못하면 자기중심성 안에 갇혀버린다. 즉 유아적 체험을 무아적 체험으로 착각하기 쉽다. 따라서 그에 대한 기준점을 스스로 설정하지 못하는 한 열반과 해탈은 지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소태산님은 무시선법을 통해 그에 대한 기준점을 제시하신다. 바로 나와 너와 세계를 향해 중도적 이타행(空性=慈悲)으로 발현될 수 없는 깨달음과 행위는 결국 <조건화된 자아>의 확장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을 그렇게 밝히신 것이다. 따라서 소태산님께서 밝히신 공.원.정(空.圓.正)에 바탕한 무시선법의 기준점은 자명하다.
1. 지금 이 순간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파장과 파동을 알아차리고 그로부터 깨어있는가?
2. 무명(無明)과 집착을 넘어선 초월의식, 즉 마음은 언제나 맑고 고요한가?
3. 열린 마음으로 세계를 품어 비추는, 포월적 지혜로 나아가고 있는가?
4. 내적 결핍의 파고를 넘어선 텅 빈 충만함으로 지금 내 가슴은 따듯하고 포근한가?
5. 일체적 교감과 공감능력이 나에게서 너로, 너에게서 세계로 확장되고 있는가?
그를 통해 마음을 반조하고 더 깊은 의식의 층차를 경험함으로써 우리는 열반과 해탈의 참 의미를 깨닫게 된다. 텅 빈 충만함과 포월적 지혜, 그리고 교감능력의 확장을 통한 이타행은 고금을 통해서 수행자라면 누구나 실천해야할 궁극의 좌표다. 우리는 그에 바탕할 때만이 생명이 지닌 원초적인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무지와 내적 결핍이 불러오는 고(苦)로부터 벗어나 지속적인 깨어있음, 즉 열반과 해탈에 도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