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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불러주신 우리 기드온 찬양대 감사합니다. 우리 예배는 온몸으로 드리는 겁니다. 입으로 찬양하고 또 손뼉 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고 그리고 할 수만 있으면 춤추며 예배드리면 좋아요. 아프리카에 가면 우리가 이제 2월달에 아프리카에 가지만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예배는 몸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래서 헌금을 드릴 때도 그냥 헌금 주머니가 도는 것이 아니고 앞에 나와서 한 사람씩 드리는데 저 뒤에서부터 몸으로 춤을 추면서 나옵니다.
하나님께 온몸으로 드리는 예배를 드려요. 얼마나 감동적인지 몰라요. 우리 기드온 찬양대가 찬양을 했을 때 우리 박수도 치지만 그 찬양이 그대로 하나님께 올려지기를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멘으로 이렇게 화답을 하면 좋습니다. 매 번 얘기를 해도 금방 까먹으시더라고요. 꼭 그렇게 하십시다.
네 지난 연말부터 쉬었던 사도행전 강의를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사도행전 강의 오늘이 40번째 강의입니다.
예루살렘 공회가 잘 맞춰졌어요. 율법과 복음의 문제를 해결을 하고 거기서 결의된 사항을 공문서로 만들었습니다. 법적 문서예요. 교회의 법적 문서 최초의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바나바와 바울 이 안디옥교회로 돌아옵니다. 그들이 돌아올 때 유다와 실라라고 하는 두 젊은이가 이제 함께 수행을 하면서 그 문서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돌아온 그들은 2차 선교 여행을 준비하고 또 곧바로 2차 선교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돌아와서 2차 선교여행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그 교회에 아무 일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아주 중요한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오늘은 그 부분을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베드로와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안디옥에 도착했다 하는 겁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아요. 그 일행이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에서 유다와 신라와 함께 돌아와서 조금 지내는 동안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귀한 손님이 왔어요. 그분이 바로 베드로입니다.
이 사건, 베드로가 왔던 사건 그리고 이어서 야고보의 사람들이 왔던 그 사건은 특별히 바울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길래 충격적일까? 그 일이 있고 난 다음에 바울이 2차 전지도 여행을 떠나서 아시아를 지나서 이제 유럽 그러니까 빌립보 마케도니아 지방, 오늘날 그리스 지방에 가서 전도를 하고 그리고 아가야 지방, 고린도 지방으로 가서 교회를 세웠는데 그때 거기서 편지 하나를 씁니다.
바울이 쓴 그 편지가 갈라디아서예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 편지를 쓰면서 바로 안디옥교회에서 일어났던 일을 언급을 합니다. 누가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바울은 그 일을 자기 가슴에 기록한 거예요. 충격을 받았다는 거예요. 굉장한 스트레스가 됐던 겁니다. 잊을 수가 없는 일이었어요.
그런데 고린도에서 듣자 하니 1차 선교행에서 복음을 전해서 세워놓은 교회 그리고 2차 선교여행을 하면서 거기를 지나왔어요. 그리고 관계가 좋았어요. 그런데 누군가를 통해서 소식을 들어보니까 거기가 시리아 안디옥교회에서 일어났던 그 2차 선교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일어났던 일과 같은 충격적인 일이 갈라디아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쓰면서 그전에 있었던 그 일을 언급을 하게 됩니다. 그 언급된 내용이 갈라디아서 2장 11절에서 1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금 길지만 저와 여러분들이 함께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 책만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옴에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감에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함으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내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다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그때 있었던 일을 상세하게 기록을 하게 됩니다. 그때 분위기를 우리가 이해를 해야 돼요. 안디옥교회는 바울 안디옥교회는 이제 복음을 듣고 또 바울이 와가지고 그들을 교육하면서 신앙이 자라나고 교회가 이제 부응하기 시작을 했어요. 그리고 선교사도 파송하고 놀라운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늘 걸리는 일이 있었어요. 외부에서도 그런 얘기를 자꾸 하고 자기들도 들어보니까 이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맞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아주 클리어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좀 껄쩍지근해요. 그게 뭐냐면 율법과 복음의 문제입니다. 이 사람들은 주로 이방인들 중심으로 이루어진 교회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와는 좀 다른 겁니다. 그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루살렘교회는 유대인으로서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율법을 율법 속에서 살다가 예수를 믿었어요. 구원받은 것은 율법을 지켜서가 아닙니다.
그러나 율법이 삶이었어요. 그래서 예수 믿은 다음에도 그들은 안식일도 지킬 수 있고 율법을 지킬 수가 있어요. 그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문화고 삶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방인들 율법 없이 살다가 예수를 믿었는데 앞으로 너희들이 구원을 유지하거나 그 구원을 성취하려면 율법을 지켜야 된다 이렇게 하면 이 사람들이 은혜로 구원을 받아놓고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는 율법에 가서 종노릇하는 그런 이제 상황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바울이 전한 복음은 너희가 구원을 받은 것이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다.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을 지켜서 육체적으로 무슨 공로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다. 십자가의 은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사랑 때문에 받은 거니까 율법에서 자유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자꾸 와가지고 그렇지 않다. 율법을 그래도 지켜야 된다. 그리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 뭐 여러 가지 율법과 관계된 얘기들을 하니까 또 그 얘기를 들어보면 맞는 거예요.
또 바울이 말씀을 들어보면 또 그렇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아주 헷갈리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공회를 통해서 이것이 깨끗하게 정리가 됐어요. 이방인들은 유대인들도 율법 때문에 구원받은 것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았는데 이방인들은 율법 없이 구원받았으니까 그들에게 다시 크리스천이 됐다고 해서 율법을 강요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결정을 내린 거예요.
교회의 공식적인 결정이에요. 그것이 공문서 법적 문서로 돌아오니까 이 안디옥교회 교인들은 너무나 행복한 거예요. 그동안 우리가 이게 헷갈렸는데 확실히 잘 믿었구나.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복음이 틀린 게 아니구나.
그래서 잔치 분위기가 된 겁니다. 축제를 하게 된 거예요. 너무너무 행복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데 거기에 더 놀라운 손님이 왔어요. 그것을 결정한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리더인 베드로 사도께서 거기를 방문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반갑겠어요. 그래서 잔치를 베풀고 아주 멋진 식탁을 마련을 하고 온 교회가 이 베드로 사도와 함께 식탁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는 분위기가 좋습니다. 최고의 분위기입니다.
그런데 식사를 하는데 예루살렘에서 또 손님이 왔어요. 그런데 이 손님은 야고보 사도의 사람들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는 순교당했어요. 지금 이 상황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그 반열에 들어가면서 사실은 실질적으로는 베드로보다 더 권위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이끄는 최고 지도자가 된 거예요.
그런데 이 야고보는 바울이나 바나바와 달리 유 유대인 크리스천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하기 때문에 그 유대적 문화 율법적인 문화를 크게 벗어나지를 않습니다. 거기 그 안에서 복음을 해석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야고보가 쓴 야고보서를 보면 핵심 주제가 뭐냐 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바울은 전혀 달 행함을 바울이 강조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바울은 자유 은혜 이걸 강조한다면 야고보는 관점이 조금 다른 겁니다. 똑같은 얘기인데 무게를 여기에 두는 거예요. 행함이 있어야 그 믿음이 사실 진짜 믿음이라면 행함으로 이어져야 된다.
사실은 율법적인 색깔이 있는 거예요. 특히 초대교회 당시에 이 당시에는 이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는 아직도 율법적인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 사람들이 이제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베드로가 겁이 덜컥 난 거예요. 이 사람들이 와가지고 내가 유대인들하고 식사하는 것을 보면 혹시 비난하지 않을까 또 가서 예루살렘에 가서 얘기하지 않을까 그 야고보에게 얘기할 거고 또 거기 안 믿는 그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만 그 친척들 안 믿을 거 아니에요 그래서 그런 얘기를 하면 내가 비난의 대상이 되고 요즘으로 말하면 막 악플이 달리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슬그머니 일어나서 마치 식사를 안 한 것처럼 자리를 피한 거예요.
약간 비겁하죠. 그런 모습을 보인 거예요. 그랬더니 거기 같이 앉아서 식사를 하던 유대인 크리스찬들이 베드로가 나도 그렇지 않아도 조금 찝찝했는데 베드로가 일어나네. 그러니까 또 자기들도 따라서 일어난 겁니다. 그러면 최소한 거기에 바나바 디아스포라 출신이면서 사도바울과 함께 이방인 전도를 쫙 1차 전도를 성공리하고 온 바나바라면 그래도 거기서 무게 중심을 딱 잡고 말이지 난 안 일어난다. 그래야 되는데 바나바도 덩달아서 일어나서 나가는 것입니다.
그게 이제 문제가 된 거예요. 그게 이제 안디옥 사건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은 결정이고 그것이 자기 확신이 되고 신념이 되고 자신의 정서가 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는 거. 거기에 같이 도장을 찍었지만 아직은 자기 신념이 안 된 거예요.
신앙이 지적으로만 알고 그 다 우리 신앙을 인정합니다. 십자가의 은혜, 복음의 은혜, 믿음 다 알아 마음으로 받아들였어. 그런데 그것이 신념으로 자기 신념으로 자기 정서로 뼛속까지 들어오지 않으면 이런 어려움의 순간에 비겁해집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뭐 누가 핍박하거나 예수 믿는다고 여러분들을 비난할 사람이 없지만 비난하거나 아니면 여러분들의 그 페이스북에 들어와서 막 누군가가 공격을 한다면 아마 비겁해질 사람이 몇 명은 있을 거예요.
우리 교회는 많지 않으리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이 자기 신념이 되고 의식이 되고 감정이 되고 이 복음이 자기 패러다임이 되지 않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베드로처럼 유대인들처럼 그리고 바나바처럼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오래 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해 하면서 공부하고 또 넘어졌다가 일어나고 복음에 익숙해지고 그것이 호흡이 되고 내 몸과 내면에 장착돼야 됩니다.
하루아침에 되는 건 아니에요. 그거 하다 보면 가랑비에 속옷 젖는다고 어느 날 나도 모르는 사이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근데 이 초대교회 이 당시는 지도자들조차도 비겁한 거예요. 그렇게 돼버렸어요. 베드로가 슬쩍 일어나서 자리를 피했습니다. 바나바도 피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도 다 피했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이 예루살렘 결정에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이에요.
내가 고넬리라는 사람한테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 사람이 이방인이잖아요. 그런데 우리에게 일어났던 일이 똑같이 일어났어요. 그래서 증언하면서 바나바도 결정 역할을 합니다. 사람들을 만나서 내가 1차 선교 여행을 해보니까 이런 이런 일이 일어났어. 이방인들도 하나님이 구원하셔요. 그들은 복음의 능력, 복음이 주는 자유를 알았던 사람들이에요.
어디로 여기로 알았어요? 그러나 그것이 확신으로 자리잡지 않았어요. 삶이 되지 않았어요 아는 거 하고 확신이 되는 거 하고 그것이 뼛속까지 들어가서 삶이 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단계에 있어요? 복음을 알고 인정합니까? 아니면 그게 의식화되는 거예요. 복음이 확신이 돼 흔들 수 없는 확신 그런데 그게 더 가서 아주 내 삶이 되는 단계 이 단계까지 우리가 가야 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시간도 필요하고 연륜도 필요하고 또 강한 훈련도 필요해요. 우리가 주일마다 나와서 이렇게 말씀 듣는 것도요. 계속 듣다 보면 복음의 사람이 됩니다. 자꾸 빼먹으니까 안 되는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들으면서도 딴 생각하는 분들이 꼭 몇 사람 있어요 그런 시간들을 흘려보내면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걸 계속 받아들이면서 내 영적 피가 되고 살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돼요.
그러다 보면 아는 일에서 확신하는 일로 확신하는 일에서 내 삶이 되는 일로 발전하게 됩니다. 지금 베드로 그리고 바나바는 그 단계 아직 그 높은 단계로 올라가지 못한 거예요. 그것을 보고 있던 바울이 엄청나게 화를 냅니다. 엄청나게 그리고 두 사람을 책망합니다. 내가 책망할 일이 있기로 면책하였노라 그랬어요.
면책 면책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굉장히 강한 어조입니다. 강한 표현이에요. 그것은 대양하다 대적하다 그냥 권면하고 그럴 수 있어요. 베드로 사도님 그럴 수 있어요. 정도가 아니고 아주 관계를 어쩌면 끝낼 생각으로 확실하게 매우 단호하게 얘기하는 거예요. 지금 바울이 그렇게 했다는 거죠. 베드로와 바나바는 어떤 사람이 바울의 하늘 같은 선배입니다.
그런데 이 베드로는 참 특이한 사람이에요. 어떤 진리를 위해서는 선배도 없는 거예요. 그 순간은 사실 그러면 안 되죠. 그런데 사실은 바울의 이런 단호한 태도 때문에 초대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이 지켜졌어요. 물론 좋은 방법도 있었겠죠. 근데 베드로는 그런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인데 하나님이 그걸 쓰신 거예요.
오늘날로 말하면 마치 MZ세대 같은 MZ 세대는 자기 의견이 분명하더라고요. 근데 우리만 해도요. 우리 세대는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도 그래도 선후배가 있는 거지 그래가지고 얘기도 못하고 그냥 얼버부리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근데 그것도 사실 좋은 거예요. 또 그 선배들을 존중하고 이런 것도 좋지만 또 이 MZ 세대처럼 자기 입장을 분명하게 또 말하는 것도 훌륭한 거예요. 어느 쪽을 제가 비난하는 게 아닙니다. 근데 바울은 그런 성격이었어요. 바울 입장에서는 선배들의 이런 이중적인 모습이 용납되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바울의 입장이 옳아 바울이 지금 화낼 만해요.
그런데 저도 이제 이 본문을 또 여러 번 설교도 하고 또 읽고 묵상하면서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 바울에 대한 입장의 이해도가 달라지더라고. 그래서 처음에 저도 막 은혜받고 뜨거웠을 때는 막 바울이 우상이었어요. 이야 정말 이렇게 해야지 복음을 위해서는 단호해야지 이것 때문에 사실 초대교회가 지켜진 거니까.
그런데 좀 나이가 들고 지나보니까 책망을 하더라도 꼭 그렇게까지 해야 될 필요가 있었을까 그런 생각도 하게 돼요. 조금 더 기다려주고 우리 선배님들이 아직 조금 나하고는 입장이 다르구나 마음은 그런 마음이지만 또 그다음에 일어날 일들을 감당할 용기가 없어서 그렇구나 위해서 좀 기도해 줘야 되겠다 이렇게 하면서 일을 수습해도 되지 않았을까 부드러운 리더십.
근데 바울은 그 당시에는 그런 여유가 없었어요. 그게 조금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바울의 나이가 이때가 47세쯤 돼요. 47세 50이 안 돼서 그랬을까? 제가 저도 20대 초반부터 전도사 생활을 해서 교회 일을 쭉 해왔는데 지금 돌아보면 20대 30대 40대 한 중반까지는 이 원칙 원칙을 지키는 거, 복음을 지키는 거 그런 쪽에 굉장한 무게를 두고 교회를 개척한 다음에도 이 교회를 이런 원칙으로 세워야 된다고 하는 그게 흔들리면 교회가 흔들린다는 그 생각을 했어요.
제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그렇게 하다 보니까 아주 거칠고 강한 리더십이 나올 때가 많아서 또 그 나이는 또 그럴 수밖에 없어. 사실은 돌아보면 그때 제가 무슨 도가 통한 사람처럼 한 60대처럼 이렇게 모든 걸 다 이해하는 것처럼 막 그럴 수도 있지 이렇게 가면 뭐가 되겠어요?
근데 하여튼 고 초창기를 돌아보면 그런 면에서 그렇게 한 것이 꼭 틀리지는 않다. 옳을 수도 있다. 여러분들이 마음에 안 해도 괜찮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근데 이제 나이가 들어놓고 보니까 그때 내가 표현하는 방식, 내가 그 상황을 수습하는 방식 이런 것들이 꼭 그 방법만 있었을까 조금 더 부드럽게 조금 더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면서 가도 일은 이루어졌을 텐데 근데 그 나이 때는 그게 안 됐어요.
근데 50이 조금 넘고 나니까 이게 조금씩 되더라고 그래서 그전에는 막 복음의 교회와 복음에 대한 열정과 더불어 혈기가 나왔어요. 이게 열정 같기도 하고 혈기 같기도 하고 혹시 그 일로 상처받은 분이 있다면 제가 회개하고 있으니까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틀린 건 나는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 방식 그 스타일 그 부분은 반성할 필요가 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사도바울이 이런 단호함 때문에 복음이 훼손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지만, 그러나 사도 바울도 후에 나이가 들고 이제 노 사도가 돼서 로마의 감옥에 있을 때는 굉장히 넓은 마음으로 그리고 그때 쓴 에베소서라든가 그 말기에 쓴 글들을 보면 굉장히 차원이 높은 굉장히 우주적인 그런 관점으로 복음을 해석해 나가는 걸 보게 돼요. 이게 성장한 거예요. 우리가 어떤 사람의 리더십을 이해할 때 그 사람의 상황 그리고 그 사람의 성숙도를 몇 년 믿었느냐 나이가 몇 살이냐 이런 것들을 다 따져서 그 사람을 평가해야지 그렇지 않고 어떤 단면적인 것만 가지고 평가하거나 또 자기 자신을 합리화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사도 바울은 좋은 것은 복음을 지켰다는 것이고 조금 아쉬운 것은 좀 리더십이 아직 덜 성숙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 일이 1차 선교여행과 2차 선교 여행 사이에서 오늘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제 각 직장이나 어떤 그룹에서 리더가 될 거예요. 그럴 때 이런 부분들을 고민하면서 한다면 좋은 리더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그다음에 바울과 바나바가 이제 이런저런 일로 갈라서는 일이 그 사이에 일어납니다. 2차 선교 여행을 떠나려고 할 때 이 두 사람이 갈라서게 됩니다. 얼마나 엄청난 동지였어요 복음의 동지. 그런데 그분들이 마가에 대한 일로 의견이 갈라져서 서로 갈라서게 됩니다. 37, 39절에 보면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라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르로 가고 지금 복음의 사자들이 다툰 거예요.
근데 어떻게 다투냐 힘이 아마 주먹질하고 치고받지는 않았지만 막 극한 상황까지 간 거예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이런 단계까지 간 거예요. 그래서 갈라서는 그게 초대교회에 일어난 겁니다. 이 복음 어떤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강하게 가진 사람들이 부딪히면 끝이 없습니다.
목사와 목사가 싸우면요. 해결점이 없어요. 안 믿는 분들은 싸우고도 그다음 날 어디 가서 몇 잔 마시고 어깨도 한번 풀어지기도 하지만 이 크리스천들 목사와 목사, 목사와 장로 특히 기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싸움이 붙으면 양보가 없습니다. 이분들이 자기 입장에서 서로 오는 거예요.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 이제 2차 출발을 해야 되는데 바나바 사도가 마가를 데리고 가자는 거예요.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이분은 조금 반빌리아에서 반빌리아 버가에서 돌아간 것은 괘씸하지만 그래도 기회를 줘야지 그리고 원래 성품이 그런 분이고 거기다가 자기 조카요. 그러니까 버릴 수도 없고 같이 가자. 그리고 초대교회부터 얼마나 이 마가가 역할을 많이 했어? 그 집에서 초대교회가 열리고 마가의 다락방이 생기고 얼마나 그 한 번 한 번 잘못했다고 그럴 수 있냐 데리고 가야 된다 이런 마음이었어요.
바나바는 성격상 표현하면 이런 거예요. 그래도 뭐 잘못이 있지 그래도 이런 사람이 있어요. 그래도 품어야지 함께 가야지 이게 바나바의 성품이에요.
그런데 바울은 버가에서 돌아갈 때 이미 끝난 거예요. 마음의 결심했을 거예요. 내가 다시는 마가하고 상종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2차를 준비하면서 마가는 염두에 두지도 않은 거예요. 그때 결심한 거예요. 바울의 성격은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예요. 내가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 타협이 없어 그렇게 마음에 굳은 결심을 하는 거예요.
그런 아주 지독한 성격이 있어요. 여러분들 가운데도 아마 반은 그런 분들이 있을 거예요. 바울이 그런 사람입니다. 저도 약간 바울과였어요. 바울과 그래가지고 한 번 마음에 결심하면 그게 잘 풀어지질 않아요. 제가 그 신혼 때 가족 얘기인데 우리 집사람을 기쁘게 해주려고 이렇게 꽃다발을 하나 이렇게 난 평생 그런 거 잘 안 하는 사람이에요. 근데 이제 꽃다발을 이렇게 해가지고 이미 나왔으니까 해야 돼요. 하지 마라 그런 이렇게 해가지고 집에다 이렇게 줬는데 별로 반갑지 않게 받는 거예요. 이게 그러고 이렇게 옆에다 놓고 관심이 없어요. 그래서 이제 내 마음에 결심을 한 거예요. 내가 다시는 꽃다발 선물을 안 하겠다. 아직까지 그게 안 하게 돼요.
그래 바울의 마음이 그러지 않았을까 그때 한번 이제 그런 이제 바울을 좀 이해를 해보는 겁니다. 아마 바울이 그때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바나바가 그렇게 데려가자고 하니까 냉정하게 거절을 합니다. 안 된다고 그래도 안 된다고 그만 말씀하시라고 이렇게 한 거예요.
그래서 심히 다퉜어요. 팩트는 이거예요. 그런데 코가 한 번으로 싸웠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한 번 어떤 일로 그렇게까지 싸우지는 않습니다. 그전에 감정 상하는 일들이 쌓여 있었던 거예요. 아마 처음에는 바나바 바울 바나바가 리더였어요.
그런데 가다가 보니까 누가도 그렇게 기록했지 바울과 바나바로 바꿔버려 표현은 못했지만 영 기분이 안 좋았을 수도 있어요. 근데 거기까지는 아니라고 생각을 해도 그다음에 조금 전에 있었던 일 식탁 사건 그렇죠 바나바는 원래 마음이 조는 사람이니까 거기다 바울이 막 불같이 화를 내고 달려드니까 하다가 그냥 아무 말도 못하고 당했어요. 반격을 못한 겁니다. 당했는데 감정은 상한 거예요.
이게 문제입니다. 당하고 감정 상한 것이 자꾸 쌓이다 보면 용암이 에너지가 쌓이면 분출되듯이 우리가 뚜껑이 열린다고 그러잖아요. 그 안에 어떤 에너지가 쌓이면 막 솥뚜껑도 날아가는 거예요. 어느 임계점을 넘으니까 폭발을 한 거예요. 그런 것이 아닐까 받아들인 것처럼 보이지만 야 후배가 이럴 수가 있나?
내가 바울을 위해서 얼마나 그 사도들이 인정 안 할 때 내가 사도들한테 소개시키고 또 타로스에 가가지고 10년 동안 혼자 있을 때 내가 데려다가 내가 목회하던 교회에 최고 지도자로 만들어주고 함께 지금 따라가서 지금은 내가 오히려 옆에서 보좌하는 입장이 되는데 어떻게 이 사람이 그럴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쌓여 있었던 거예요.
그것이 마가 사건으로 퍼졌다. 그래서 심히 다퉈서 그들은 헤어지게 됩니다. 지도자들도 이렇다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늘 조심해야 된다. 어떤 말을 할 때 한 번 생각하고 한 번 더 깊이 생각하고 말을 해야 됩니다. 결정 말하는 시간을 늦추고 결정을 늦춰서 손해 볼 일은 없어요. 한 번 더 생각하면 더 좋은 결론을 내릴 수 있어요. 바울처럼 목표 지향적인 사람은 주로 이런 실수를 저지릅니다. 늘 옳다고 생각하니까 확 내질러버리는 거예요. 말하는 겁니다.
그러나 한 번 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해도 한 번 더 생각하고 행동했다면 이런 결과는 나오지 않았을 거예요. 복음은 지켰지만 좋은 동역자와 다시는 보지 않는 그런 아픔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한 번 터지고 나면 이 주워 담을 때 힘들어요. 주워담을 수도 없고 터지기 전에 늘 우리가 신중하게 말하고 신중하게 표현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하는 것입니다.
바나바처럼 우유부단하고 뭐든 좋게만 하려는 관계 중심적인 사람 이 사람도 사실 문제가 있어요. 왜냐하면 이런 사람 만나면 바울 같은 사람 속이 터져 딱 명쾌하게 이렇게 하면 좋은데 자꾸 또 끌어들이고 그냥 가면 깨끗한데 자꾸 인심 쓰는 거예요. 어떤 면에서 굉장히 좋은 사람이죠. 그런데 바울 같은 추진력 있는 사람에게 너무너무 힘든 사람입니다. 속을 뒤집어 넣습니다. 그러다가 두 사람이 싸우면 이 두 종류의 사람이 싸우면 꼭 바울이 손해 봅니다.
사실 원인 제공은 누가 했어요? 바나바가 했어요 딱 보고 마가를 그냥 적당히 다른 데로 보내든지 예수님도 데리고 가겠다고 하고 자기가 자리 식탁 자리에서 일어나고 다 해놓고 버럭 화를 낸 바울이 나쁜 놈이 되는 거예요. 그렇죠 뭐 그렇게 화를 내냐고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해요. 그리고 이 양반은 바나바는 피해자의 이미지를 갖는 겁니다. 착한 사람 피해자. 그런데 이제 바울의 성격을 가진 우리 같은 사람 입장에서는 약간 바울이 억울하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관계 중심적인 사람도 늘 주의하는 게 좋습니다. 그래서 관계 중심적인 사람은 바울 목표 지향적인 사람의 상황을 이해하면서 어느 정도 중간에 타협점을 갖는 것이 대단히 좋고 이 바울 같은 사람은 또 관계 중심적인 사람을 이해하는 게 좋아요.
우리 교회 안에는 다양한 MBTI라든가 무슨 심리 검사를 하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다 내 마음 같지 않아요. 나는 이렇게 했으면 좋겠는데 저 사람은 저렇게 하면 그때 열받지 말라 이거예요. 저럴 수도 있구나. 내가 조금 양보하고 이해하면 되고 저 사람도 이해하면 진짜 우리가 천국 같은 공동체를 만들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바울이 잘했다, 바나바가 잘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거 아니에요 이 두 사람이 다 이 초기에는 미숙했다. 사도들이지만 미숙했다. 이분들이 노년에 만났다면 그랬을까 아마 그때는 성숙한 모습으로 다 받아들이면서 함께 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언젠가 저와 여러분들이 그런 성숙한 그래서 나와 다른 것도 다 받아들이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그런 단계까지 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다음에 이제 세 번째로 결국은 이제 갈라지는 겁니다. 바울은 신라를 데리고 바나바는 자기 조카 마가를 데리고 40절 41절에 보면 이제 서로 떠납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그 구브로 구브로라는 것은 바나바와 마가의 고향인 사이프로스 섬입니다. 거기로 갔어요. 그리고 정반대 방향입니다. 이쪽으로 가고 바울은 신라를 데리고 이제 내륙으로 올라가서 2차 선교 여행을 하게 됩니다.
아쉽죠. 두 사람이 잘 이해가 돼가지고 하나가 됐으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냈을 텐데 어쨌든 헤어졌어요. 초대교회의 큰 오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될 것은 그들의 그 미성숙함 때문에 다투고 갈라지고 헤어지는 일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이 멈춰섰냐 그렇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돌리시는 역사의 수레바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굴러갑니다. 하나님의 일은 계속되는 거예요. 내가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미숙해서 서로 문제가 될 수도 있고 갈라설 수도 있고 또 도중에 이탈할 수도 있고 하지만 하나님의 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흘러간다.
여러분 내가 없다고 하나님의 일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반대로 말하면 내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에 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하나님이 떨리시는 역사의 그 거룩한 순례 바퀴에 내가 올라타서 그 일에 한 몫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 내가 시험 들어서 또는 이런저런 일들로 거기서 잠시 이탈했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불행한 일이에요. 하나님 나라는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빨리 수습하고 자기 자신을 추스르고 빨리 그 역사의 수레바퀴에 올라타야 돼요.
인생은요 금방 흘러가버려 우리가 뭐 하러 삽니까? 우리는 막 아둥바둥 최선을 다해서 자기 목표를 가지고 살지만 보통 사람들이 사는 걸 보면 다 조금 많이 벌어가지고 조금 좋은 거 먹고 내가 원하는 사람 만나고 뭐 이런 것들을 인생의 목표로 생각하고 그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지만 인생을 살아보고 나서 돌아보면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사람은 살아요.
별 차이 없어요. 그게 인생이 다라면 인생은 참 비극적인 거예요. 허무한 거예요. 그 자체도 가치 있지만 그보다 더 높은 가치,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그 목적을 깨닫고 거기에 헌신하면서 살아야 먹고 마시는 것도 의미가 있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나님이 돌리시는 하나님 나라의 그 역사의 수레바퀴에 우리가 합류해서 그 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과 바나바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계속 사용하십니다.
구부르로 간 이 바나바와 그리고 마가의 일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역사의 흔적을 보면 이들이 가서 거기에 큰 부흥을 일으킵니다. 구부르라 사이프로스 섬에 가서 그리고 바나바는 거기서 순교의 재물로 하나님께 바쳐져요. 그리고 나중에 마가는 아주 성숙해지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그리고 마가복음서를 쓰고 나중에는 사도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마지막 순간에 그와 함께하는 그를 찾아가는 그런 놀라운 동역자가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처음부터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세상에 장점만 있는 사람, 단점만 있는 사람이 없어요.
예수님 외에는 모든 사람은 약점도 있고 단점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너무 큰 기대도 너무 큰 실망도 할 필요가 없어요.
원래 우리는 그런 거예요. 나 자신에게도 내가 뭐 대단하다고 생각할 것도 없고 내가 너무 바보 같고 쫓아갔다 그렇게 생각할 것도 없어요. 원래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올려드리면 하나님 내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올려드립니다.
하나님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내가 쓰임받고 싶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접수하셔 그래서 여러분들의 인생을 가장 값진 인생으로 사용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너무 자기 약점 나는 부족해가지고 내가 어떻게 제 일을 해, 어떻게 교회 일을 해 선교를 해 이런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 내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드립니다. 받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사용하시는 거 그리고 서로에게도 그렇게 대해야 됩니다. 서로 용납하기를 힘써야 돼요. 내가 내가 가진 장점 내가 또 가진 약점 저 사람에게도 있고 없고 그럽니다. 그래서 서로 이해하고 이 사람은 이게 더 좋은 점이 있겠구나 그렇게 늘 생각하면서 함께 가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아멘
그래서 너무 자신의 장단점에 집착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관계에 너무 집착할 필요도 없어요. 그냥 하나님이 하시는 그 큰 역사만 바라보면서 서로 바라보면 너는 왜 그러냐 그러냐 나는 왜 그러냐 너무 그러지 말고 그 역사의 흐름에 빨리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이 없으면 또 우리가 일을 하다 보면 이 사람이 없으면 어떡해 큰일 났네. 제가 개척해서 처음 오다 보면 몇 명 안 됐을 때 이분이 귀국하면 너무 교회에서 큰일을 했는데 귀국하면 어떡해 어떤 사람은 막 귀국한다고 할 때 막 울음이 팍 터질 때도 있어. 야 큰일 났네.
그런데 돌아보면 그분은 그분의 일을 하고 가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이 하시는 거예요. 그거 참 오래 그거 터득하는 데 오래 걸렸어요. 그래도 너무 집착할 필요도 없다 뿐만 아니라 지난 일을 너무 아쉬워할 필요도 없어요. 돌이킬 길이 없어요. 미래 일을 너무 두려워할 필요도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일은 계속되는 거예요. 그것을 우리가 믿어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실 줄로 믿습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