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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시리즈 (1)
이 여인의 신앙을 기억하라
요 12:1-8
I. 서론
오늘 본문은 “유월절 엿새 전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유월절이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성금요일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의 어린 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 유월절이 있기까지 일주일 동안 각 요일 별로 중요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1. 먼저 유월절 엿새 전인 토요일에 오늘 본문의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마리아의 향유 옥합) 2. 그 다음 날, 일요일에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3. 그 다음 날, 월요일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청결케 하십니다. 4. 그 다음 날, 화요일에 예수님께서 유대 지도자들과 논쟁하십니다. 5. 그 다음 날, 수요일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6. 그 다음 날, 목요일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최후의 만찬을 드시고, 겟세마네의 기도 후 잡히십니다. 7. 그 다음 날, 금요일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십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이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 사역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마 26: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라 하시니라”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반드시 마리아가 행한 일을 말하여 마리아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우리는 단순히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마리아가 아주 값비싼 향유를 부어드렸기 때문에, 마리아가 행한 일을 말해서 헌신을 많이 유도하도록 해라. 그래서 교회가 빨리 성장하도록 하고, 선교가 더욱 왕성하게 일어나도록 해라.” 이렇게 설명한 책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마리아가 부어드린 향유는 돈으로 바꾸어서 선교비로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마리아가 행한 일은 예수님의 장례를 위한 것입니다. 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개역개정 번역이 약간 애매모호합니다. 쉬운 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자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어라. 마리아는 내 장례를 치를 날을 위해 이 향유를 준비해 둔 것이다.’” 무슨 의미입니까? 마리아는 오래 전부터 예수님께서 어떤 죽음으로 돌아가실지를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오자, 그 동안 준비해 두었던 향유 옥합을 과감히 깨뜨려 그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드렸다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드린 사건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평범한 죽으심이 아니라 메시아로서의 죽음을 상징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메시아의 뜻이 기름부음을 받은 자인데, 마리아가 예수님께 기름을 부음으로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고백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다른 제자들은 마리아와는 달리, 이것을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 보면, 제자들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마 26:8,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마리아의 행동을 보고 분개했고, 무슨 의도로 이런 허비를 하느냐고 야단을 쳤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불과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예수님의 죽음을 몰랐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리아만 홀로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것이 오늘 설교의 핵심이고,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II. 본론
1. 첫째,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였습니다.
1~3절,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오늘 사건은 베다니에서 일어난 사건인데, 나사로의 집이 아니라 시몬의 집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막 14:3,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그런데, 시몬에 대한 이야기는 안 나오고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이야기만 나옵니다. 왜냐하면, 요한이 오늘 사건을 누가복음 10장의 사건과 연관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눅 10:38~40, “그들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의 두 사건은 일어난 시기와 장소가 각각 다릅니다. 누가복음 10장은 예수님의 사역 초기로 볼 수 있고, 장소는 나사로의 집이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12장은(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사역 말기로 볼 수 있고, 장소는 시몬의 집이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를 비교해 보면, 1) 마르다의 행동은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눅 10: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요 12:2, “마르다는 일을 하고” 2) 마리아의 행동만 변화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듣는 자에게 행하는 자로 바뀐 것입니다.
마르다의 섬김도 중요합니다. 섬김이 없이 어떻게 교회가 운영되겠습니까? 보이게 혹은 보이지 않게 섬기는 분들로 인해서 교회가 유지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섬김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듣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규모가 큰 교회에서 사역할 때, 종종 이런 말을 들을 때가 있었습니다. 교회 점심 식사를 준비하느라, 예배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교회 주차 관리를 하느라, 예배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교회 주일학교를 섬기느라, 예배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만일 예배를 드리지 못할 정도면, 그 사역은 내려놓는 것이 옳습니다. 왜냐하면, 섬김보다 중요한 것이 예배이고,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예배를 통하여 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배와 섬김 중에서 한 가지만 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예배를 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서는 우리가 올바른 믿음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설명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듣는 것만 따지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리아보다 훨씬 더 예수님의 말씀을 많이 들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불과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예수님의 십자가를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서 두 번째 요소가 나옵니다.
2. 둘째,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되, 발치에서 듣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눅 10:38~39, “그들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선 자리가 달라지면 보이는 풍경이 달라지는 법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예수님의 발치에서 우러러 보면서 들을 수도 있고, 예수님의 정면에서 똑같은 눈높이에서 들을 수도 있고, 예수님보다 높은 곳에서 아래로 내려 보면서 들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예수님의 발치에서 듣지 않게 될 때 일어나는 가장 큰 문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절대적인 것을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이 사고가 가지는 가장 큰 문제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못하고 단순히 사람으로만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흥미로운 것이 하나 나옵니다. 3~6절,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오늘 본문의 중심인물은 분명히 마리아입니다. 하지만, 사도 요한은 본문을 쓰면서 한 명을 더 염두에 두고 이야기를 이끌어 나갑니다.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을 보더라도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보다 가룟 유다에 대한 이야기가 더 길게 나옵니다. 마리아는 3절에서만 나오지만, 가룟 유다에 대한 이야기는 4~6절까지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리아와 가룟 유다를 비교하면서 본문을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와 가룟 유다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이겠습니까? 많은 것이 있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차이가 "예수님을 누구로 믿느냐"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었지만,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사람으로 믿었습니다.
1) 먼저 마리아의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동기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분들이 "마리아가 예수님을 사랑해서, 혹은 예수님께 감사해서" 라고 말합니다. 물론 마리아의 마음에는 분명히 그런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베다니에 오실 때마다 자신의 집에 머무셨고, 자신의 오빠도 죽음에서 살려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대답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만일 마리아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고, 단순히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감사의 표현으로 향유 옥합을 깨뜨렸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제자들이 말한 대로 마리아의 행동은 비난을 받을만한 행동이 되고 맙니다. 당시 예수님은 33세 정도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연대가 AD 95년에서 96년으로 학자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요한은 최소한 90년 이상을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순교한 연도를 AD 67년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과 같은 연배였다면, 70이 넘은 나이에 순교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연사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의 수명이 그리 짧은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만약 마리아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견하지 못하고 단지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만 그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다면, 납득이 가지 않는 행동이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 향유를 팔아서 앞길이 창창한 예수님의 선교사역에 보탬이 되도록 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동기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처럼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함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즉,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미리 예측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보통 사람이 가는 죽음의 길이 아니라 온 인류를 구원할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의 죽음임을 감지한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믿지 않았다면,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자발적으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결사적으로 말렸을 것입니다.
2) 이제 가룟 유다의 행동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4~6절,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사도 요한은 가룟 유다가 어떤 사람인지 한 마디로 정의합니다. "그는 도둑이라"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과 함께 사역을 하면서 선교 헌금으로 들어오는 돈을 훔쳐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절대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았습니다. 만일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었다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도둑질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예수님을 은 30에 대제사장들에게 팔기까지 했겠습니까? 그렇다면,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왜 따랐을까요? 가룟 유다는 순전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 예수님을 따른 것입니다. 선교비로 들어오는 돈을 훔쳐 가지 위해서 예수님을 따른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예수님을 따른 것입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라가다가도 자신에게 더 이상 이익이 없다고 생각하면 바로 떠나버리고 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왜 교회에 나오십니까? 우리는 왜 예배를 드리십니까? 우리는 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십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까? 아니면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입니까?
3. 마지막으로, 마리아는 언제나 예수님의 발치에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베다니라는 곳입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약 2마일 정도 떨어진 마을입니다. 베다니의 뜻은 “가난한 자의 집”이라는 말입니다. 쉽게 말씀 드리면, 베다니는 빈민촌입니다. 부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살았고, 빈민들은 예루살렘에 진입할 수 없어서 변두리 “베다니”에서 살았습니다. 조선시대에 사대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사대문 밖에서 생활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됩니다. 이 베다니가 바로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남매의 집이 있던 곳입니다. 그러니 이 남매는 빈민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예수님의 발에 부은 향유는 300 데나리온의 값어치가 있다고 합니다. 당시 1 데나리온(로마 화폐 단위)은 건강한 남자 노동자의 하루 임금이었기 때문에, 300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1년치의 연봉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빈민촌에 살던 젊은 여인이 이 향유를 벌어서 모았을 것이라고 추측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빈민촌에 사는 가난한 여인이 젊은 나이에 벌 수 있는 금액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집안에서 내려오는 가보이거나 부모님께서 평생 벌어서 모은 향유인데 돌아가시면서 마리아의 결혼 자금으로 주신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러니 이 향유는 마리아의 현재이자 미래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중한 것을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모두 바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믿는 것과 실제로 행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도 우리 삶에서 많은 경우에 그렇습니다.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믿음과 행동이 동일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이것은 마리아의 별명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별명은 "발치 여인"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마리아의 이야기가 세 번 나오는데, 모두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우리가 방금 살펴본 대로 마리아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예수님의 발치에 있었습니다. 눅 10:38-40, “그들이(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2) 그 다음은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베다니로 오셨는데, 나사로는 이미 죽고 말았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 앞으로 달려갑니다. 그런데 그 때도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있었습니다. 요 11: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여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 세 번째가 오늘 본문인 향유 옥합을 깨뜨릴 때 입니다. 3절,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여기에 무슨 교훈이 있을까요? 내가 예수님의 발치에 있다는 것의 의미는 나와 예수님 사이에 그 어떤 것도 끼어들지 않게 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샌들을 신었고, 길이 포장된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장 더러워지고 상하기 쉬운 부위가 발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발치에 앉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발치에 앉으면, 이 곳에는 아무도 없기 때문에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예수님과 가까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저의 첫 외국은 영국 런던이었습니다. 거기서 제가 처음 배운 영어 문장은 “Mind the gap”이었습니다. 영국 지하철은 만든 지가 오래되었기 때문에, 기차와 플랫폼의 간격이 넓습니다. 그래서 어느 역을 가든지 꼭 이 말이 방송됩니다. “Mind the gap”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gap을 mind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모두가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가족 문제, 직장 문제, 사업 문제, 은퇴 문제... 이유가 어떻든, 예수님과 나 사이에 무엇인가가 들어오면, 우리의 신앙은 믿음과 행함 사이가 벌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성경에서 나옵니다. 바로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최후의 만찬에서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말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실패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멀찍이서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공관복음에서 모두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마 26:58,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 막 15:54,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눅 22:54,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도 있었고,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겠다는 의지도 있었고, 대제사장의 뜰 안까지 따라가는 용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III.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발치에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예수님과 우리 사이는 얼마나 벌어져 있습니까? 신앙생활이란 결국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간격을 줄이는 싸움입니다. 그리고, 이 싸움을 가장 잘 한 사람이 마리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마리아의 신앙을 기억하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살아가면서, 우리가 지금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점검해 보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크신 은총을 베풀어 주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