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주창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유공자 현창의 문제는 우리 민족의 항일독립운동의 본질과 공산주의 혁명운동의 차별성을 혼동한 무지의 소산일 뿐만 아니라 해방전후 좌우간의 독립국가 건설을 두고 이념적 지향점과 역사적 진실을 외면한 독단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우리는 일제에 의해 국권을 강탈당한 후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국권회복 운동에 나섰고 1919년 거족적인 3.1운동으로 임시정부를 세워 조국광복운동을 전개했다.
그런데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볼세비키혁명이 일어나 공산주의 세계 혁명을 위하여 레닌이 [제국주의론]을 주창하고 코민테른을 결성하여 피압박 민족의 해방운동에 침투 지원하게 되자 우리의 독립운동 전선에도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진영의 항일독립운동과 공산주의 세계혁명을 위한 항일운동이 혼재케 되어 문제가 발생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20년 상해임시정부에 들어온 60만루불의 레닌 자금을 상해파 고려 공산당이 횡령한 비극적 사례나, 1921년 6월 22일 이르쿠츠크파 고려 공산당과 상해파 고려 공산당이 인터내셔날, 오뜨라드(원동 혁명군)의 헤게모니 쟁탈을 위해 빚어진 갈등으로 우리 민족운동 독립군 7~8백여명이 흑룡강사의 고혼으로 참살당한 [자유시 사변]등에서 볼 수있다.
그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의 정부승인의 문제를 두고 좌파 사회주의 계열의 집요한 반대나 일본 천황의 항복직후 중경임시정부 의정원에서 임시정부 해체후 귀국을 주창한 이른바 사회주의 계열의 책동등으로 볼 때, 새 국가 건설을 두고 남북의 분단은 공산주의자들의 세계혁명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따라서 노무현 대통령이 주창한 좌파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유공자 현창의 문제는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한 항일운동과 프롤레타리아 세계 혁명을 위한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항일을 혼동해서는 안되고, 또 이땅의 좌파 사회주의 계열은 서구의 사회민주주의 계열이 아닌 공산주의 근본 혁명론자들임을 전제하고 판별해야 된다.
따라서 1929년 국내 공산주의자들이 이른바 코민테른의 [12월 해제]에 따라 국내 항일의 유일당[신간회] 해체를 책동하자 공산주의 운동에서 이탈한 임원근(북한 문화선전장 허정숙의 첫 남편)과 같이 항일독립운동의 방편으로 공산주의 운동에 동참한 경우를 제외하고, 섣불리 독립유공자 현창을 한다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그 법통을 이은 대한민국의 국가적 정체성을 훼손한 반국가적 처사라고 밖에 볼 수 없다.
특히, 근래 여운형씨를 두고 모르는 사람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닌 중간파 민족주의자라고 하면서 독립유공자 현창문제를 제기하는데, 지하에 있는 여운형씨도 원치 아니하리라고 봄은 물론 이는 대한민국의 국가적 정체성을 훼손한 비극적 처사로 단정할 수밖에 없다.
여운형씨는 일찌기 중국으로 망명하여 신한청년당을 만들고 국권회복을 위해서 군사학을 전공해야 한다며 이범석 장군, 김홍일 장군과 같은 독립군 장령들을 중국 군관학교에 입학시키고, 1차대전 직후 파리 강화회의에 우리의 대표 파견들을 주선하는 등 초기에는 상당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20년 상해 임시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 척식 대신 고가렴조의 공작에 따라 동경을 방문하고 상해에 돌아와 상해파 고려 공산당에 가담했다가, 1921년 원동피압박 민족대회에 참가하고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이르쿠츠크파 고려 공산당으로 당적을 옮겨 [자유시 사변]때는 적군에 포로된 우리 독립군 재판에 배심관이 되었고, 1923년에는 국민대표자 대회에서 [조선공화국]을 만들어 소련에 츨품했다가 퇴짜 당했으며, 1943년 유언비어 유포 죄목으로 1년 징역, 3년 집행유예를 받으면서 [전향서]를 썼는데 그 내실은 KGB요원 혐의 때문이었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항복을 앞두고 총독부의 엔또루사꾸 정무총감의 종용을 받고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보장을 전제로 정권이양을 받아 건준을 만들고, 45년 9월 6일 박헌영과 더불어 종이정부[인민공화국]을 선포했으며, 1947년 7월 19일 그가 암살당해 비극적 죽음을 할 때까지 평양을 네 차례나 비밀 왕래를 하면서 그의 가족들을 김일성에게 의탁했던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그가 중간파 민족주의자이므로 독립유공자 서훈을 하자는 사람들은 그에 대하여 너무도 모르고 지하에 있는 그 분도 결코 원치 않으리라 본다.
■ 1. 상해파 고려 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고려 공산당
상해파 고려 공산당은 국내에서 러시아로 망명한 민족운동가들인 이동휘씨등이 볼셰비키 혁명이 나자 한인사회당을 만들었다가 1921년 상해에서 고려 공산당을 결성한 것이고, 이르쿠츠크파 고려 공산당은 일찍이 할아버지 아버지대에 러시아에 이주한 러시아화 된 한인들이 김철훈, 남만춘 등이 이르쿠츠크에서 1919년 소련공산당 한인지부로 결성한 것이다.
■ 2. 인터내셔날, 오뜨라드
국제군 또는 원동혁명군이라 하는데 레닌이 시베리아에서 백계러시아군과 내전에서 임시정부 군무부장 노백전 장군에게 제의. 우리 독립군들을 시베리아로 모아 대군단을 만들어 러시아 내전에 이용하고 혁명이 완수되면 약소민족 해방군으로 원동혁명(아세아 혁명)의 주력군으로 하자는 제안.
■ 3. 자유시 사변
레닌의 인터내셔널, 오뜨라드의 제안에 따라 자유시(스보드니)에 만주에서 넘어간 민족운동 독립군과 이르쿠츠크파인 오하묵이 거느린 자유대대로 불린 시베리아의 한인 빨치산과 상해파 고려 공산당인 박일리아가 거느린 사할린 부대가 고려 혁명군 군정위원을 동원 무장해제를 시키려다 빚어진 비극으로 7~8백명이 죽고, 7~8백명이 시베리아 오지 벌목장으로 유배당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