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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길~따~라 원문보기 글쓴이: 이귀희
2011년 8월 13일 토요일, 제5차 무주 답사 (맑고 비 조금)
회원님 9명이 산천초목 비경을 발하는 아름다운 무주구천동계곡과 굽이굽이 푸르름이 가득한 적상산(해발 1034m)의 고찰 안국사와 천일폭포, 와인동굴, 나제통문, 점심은 무주의 토석음식인 맛있는 어죽으로 하고, 다시 출발 칠연계곡에서 동심으로 돌아가 물장구를 치며 한참을 깔깔 거리고 답사를 마쳤다. 굽이굽이 돌다보니 출출함이 몰려와 익산에서 삼계탕으로 보신하고...... 개인 일로 참석하지 못한 회원님들께는 미안함 마져든다. 정말 훌륭한 답사였기에, 오늘은 날씨 또한 우리를 행복하게 하여 주었다. 회원님들 건강하세요.
안국사[安國寺]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북창리 934.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의 말사이다. 《적상지(赤裳誌)》에 따르면 1277년(고려 충렬왕 3) 월인(月印)이 세웠다고 하나 조선 태조(재위:1392∼1398) 때 자초(自超)가 적산산성(사적 146호)을 쌓으며 지었다고도 전한다.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과 1597년 정유재란 때 승병들의 거처로 쓰이기도 했다.
1613년(광해군 5) 증축하고 이듬해 사고(史庫)를 두어 사각(史閣)과 선원각(璿源閣)에 《조선왕조실록》과 《선원록》을 보관하고 덕웅(德雄)을 승장으로 하여 승병 92명을 두고 지키게 하였다. 이 때 사찰 이름을 안국사라고 바꿨으며, 1910년에 사고의 책을 규장각으로 옮기자 이철허(李徹虛)가 사고 건물을 경내로 이전하였다. 1968년 유정환(柳正煥)이 이 건물에 천불을 모시고 천불보전이라고 이름을 바꿨고, 1990년 초에 댐 건설로 절 지역이 수몰지구에 포함되자 1991년부터 이전을 시작하여 1993년에 절을 완전히 옮겼다. 건물로는 극락전과 천불보전·청하루·지장전·삼성각·범종각 등이 있다. 이 중 극락전은 전북 유형문화재 제42호로 지정된 전각으로, 내부에는 본래 1772년(영조 48) 제작된 후불탱화가 있었으나 최근 도난당하였으며 현재의 탱화는 최근에 만든 것들이다. 삼성각 안에는 1899년에 만든 칠성탱화가 있는데, 화기에 따르면 본래 김천 봉곡사(鳳谷寺) 극락암에 있었다. 그밖에 유물로는 범종과 괘불·괘불대·부도가 전한다. 범종은 1788년(정조 12)에 제작된 것으로 요사 옆에 걸려 있고, 1997년 8월 보물 제1267호로 지정된 안국사괘불은 1728년(영조 4)에 의겸(義謙)·의윤(義允) 등 비구니 5명이 그린 것이다. 가로 1,075cm, 세로 750cm이며 가뭄 때 이 괘불로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내린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사찰 입구에 있는 4기의 부도는 모두 석종형 부도로 조선 후기 유물이다. 고찰인 안국사 본전으로 서방극락 정토의 아미타여래와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을 봉안하였으며, 무량수전이라고도 한다.
안국사 영산회괘불탱[安國寺靈山會掛佛幀] 보물 제 1267호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괴목리 안국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불화. 1997년 8월 8일 보물 제1267호로 지정되었다. 10m가 넘는 대형 괘불도로서 임금과 왕비, 그리고 세자의 만수무강을 빌고 있으며 시주에도 많은 인원이 참가하였다. 1792년(정조 16)과 1809년(순조 9)에 후배지를 중수한 기록으로 173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연대는알 수 없다. 석가모니불을 위시하여 증청묘법 다보여래(證廳妙法多寶如來)와 극락도사 아미타불, 그리고 협시인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배치된 군집도 형식이다. 주존불인 석가불은 이상화된 불상으로서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1750년경 경상남도 고성의 운흥사(雲興寺)를 중심으로 전국 각처에서 활약한 의겸(義謙)이 화원으로 참여한 것이 주목된다. 안국사 극락전 단청설화
안국사가 자리한 이곳 적상산은 붉은 치마라는 의미의 적상(赤裳)이라는 말처럼, 붉은 단풍과 주홍ㆍ노랑ㆍ초록으로 물든 가을의 단풍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특히 안국사 극락전은 붉은 단풍 빛깔처럼 아름다운 단청에 관한 설화와 함께 그 흔적이 전하고 있다. 전해오는 옛 이야기는 극락전 단청을 할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안국사의 주 법당으로 극락전을 지은 스님이 단청불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심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하얀 도포를 입은 한 노인이 나타나 “제가 지금부터 100일 동안 단청을 할 테니 극락전에 하얀 막을 치고 물 한 그릇만 넣어 주되 절대로 그 안을 들여다보지 마시오”라고 말하였다. 스님은 범상치 않은 노인을 말을 깊이 새기며 궁금증을 억누른 채 노인에게 단청불사를 맡긴 채 무사히 끝나기를 부처님께 기도하는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 구름이 걷히고 단풍이 떨어질 무렵의 어느 날, 스님은 천막 속의 단청불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함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단청이 시작된 지 99일째 되던 날 그 호기심은 극에 달하여, 하루를 참지 못하고 가만히 안을 들여다보고 말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천막 안에 노인은 온데간데없고, 붓을 입에 문 흰 학이 단청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순간 스님이 지켜보는 것을 눈치 챈 학은 완성하지 못한 단청 일을 남겨 놓은 채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인지 안국사 극락전의 뒤편 한쪽에는 딱 하루거리에 해당하는 분량의 목재가 단청이 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나뭇결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예전에는 ‘온통 학이 노닐었다’고 할 만큼 극락전에 학 그림이 많이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천장을 빙 둘러 날고 있는 학문양이 적지 않으니, 옛 이야기를 잊지 않고 소중하게 간직해가고 있는 사찰 측의 노력이 한결 운치 있게 다가온다. 선조들의 역사 보관의 지혜가 숨어있는 적상산사고지
국립공원 적상산의 860m 지점의 산정호수 위에 복원되었으며 원래는 산정호수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적상산에 양수발전소가 만들어지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적상산은 천혜의 암반으로 이루어진 자연 조건으로 인하여 일찍부터 산성이 만들어져 인근 백성들을 보호 하였던 곳으로 조선시대에 북쪽에 위치한 묘향산사고가 위험에 처하게 되자 안전한 장소를 물색하던 중에 예로부터 천혜의 요새지로 알려진 적상산에 사고가 만들어져 약 300년 가까이 단 한건의 피해도 없이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을 지켜낸 곳이다. 이곳에 사고가 만들어지면서 무주는 새로운 도약의 발판이 마련되었으며 이것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귀중한 책들을 무주 지역민들이 피와 땀으로 지켜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무주 적상산의 천일폭포
높이 약 30m 폭포다. 적상산에 있는 웅장한 폭포이며, 무주는 무풍의 무(茂)와 주계의 주(朱)를 따서 이름 지은 고을이다.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 서로 맞닿았던 요충지였다. 얼마나 피를 많이 흘렸던지 백제는 주계를 붉은 내 적천(赤川)이라 불렀고, 후에 신라가 주계를 차지하자 이름을 단천(丹川)이라 고쳤는데 이것 역시 ‘붉은 강’이란 뜻이다. 후대의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이 고장의 이름에 붉을 적자와 단자가 붙은 것을 가을 단풍 때문으로 잘못 알고 있다.
머루와인동굴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북창리 산119-5 적상면 북창리 적상산 일대에 무주군의 대표적인 특산품, 산머루와인의 참맛과 멋을 느낄 수 있는 머루와인동굴이 아름다운 자연경관, 문화유적과 함께 어우러져 있다. 무주산 머루와인의 숙성 및 저장, 판매공간이 될 머루와인터널은 와인 하우스와 머루와인 비밀의 문으로 구성돼 있으며, 지상 2층에 조성된 와인하우스(163.73㎡)에는 반딧불농특산물 판매장과 와인카페 겸 전통찻집이, 그리고 머루와인 비밀의 문(270m)에서는 와인카페와 와인시음 및 저장고 등을 만나볼 수 있다. 특히 머루와인 비밀의 문에서는 자연적으로 연중 13~17℃의 최적의 온도가 유지되며 연인들을 위한 와인, 결혼과 만남, 승진에 관한 축하 문구를 와인 병에 새겨 선물할 수 있는 애칭조각와인 택배 이벤트를 운영한다.
나제통문[羅濟通門]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雪川面) 소천리(所川里)에 있는 석굴문(石窟門). 높이 5~6m, 너비 4~5m, 길이 30~40m이다. 암벽을 뚫은 통문으로, 옛 신라와 백제의 경계관문(境界關門)이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최근에 이 굴이 삼국시대 때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때 뚫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논란이 일고 있다. 통문 동쪽은 본래 무풍현(茂豊縣), 서쪽은 주계현(朱溪縣)의 땅이었는데, 조선시대에 합쳐서 무주현(茂朱縣)이라 하였다. 무풍현은 신라의 무산현(茂山縣)으로 경덕왕 때 무풍현으로 고쳐 개령군(경북 김천)에 소속시켰고, 주계현은 백제의 적천현(赤川縣)으로 통일신라시대에 단천현(丹川縣)이라 하다가 고려시대에 주계현으로 고쳤다. 이와 같이 통문을 경계로 한 동 ·서 두 지역은 삼국시대 이래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판도와 문물이 다른 지역이었던 만큼, 600년이 지난 지금도 통문을 경계로 언어 ·풍습 등에 차이가 있으며, 사투리만으로도 두 지방 사람을 식별할 수 있다. 나제통문은 무주구천동(茂朱九千洞) 입구의 경승지이기도 하고 현재 덕유산(德裕山)국립공원 경역(境域)에 들어 있다.
무주구천동계곡
전북 무주군 설천면 두길리에 위치한 계곡. 구천동의 계곡마다 전설이 깃들어 있다. 설천면(雪川面) 소천리(小川里)에 있는 나제통문(羅濟通門), 즉 신라와 백제의 경계관문이었던 석굴문(石掘門)에서 덕유산 상봉에 이르는 25km의 계곡으로, 33경(景)으로 꼽히는 계곡미가 뛰어나 덕유산국립공원의 중심부를 이룬다. 구절양장(九折羊腸) 9,000굽이를 헤아린다는 계곡에 학소대(鶴巢臺)·추월담(秋月潭)·수심대(水心臺)·수경대(水鏡臺)·인월담(印月潭)·청류동(淸流洞)·구월담(九月潭)·금포탄(琴浦灘)·청류계(淸流溪)·구천폭포(九千瀑布)등 나제통문을 제1경으로 하여 덕유산 상봉을 제33경으로 하는 절경들이 줄을 잇는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옛날엔 구천동이라면 심산유곡의 대명사로 쓰인 적이 있다. 그만큼 구천동 골짜기가 어둡고 구불구불한 것을 두고 빗대어 말한 것이란다. 장장 70리에 걸쳐 흐르는 계곡물은 곳곳에서 기암에 부딪히고 암반을 미끄러지는가 하면 어느 때는 폭포가 되고, 빨리 치닫다가 고요한 담을 이룬다. 구천동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성불군자 9000인이 살았으므로 구천인의 둔지라는 뜻에서 구천둔(九千屯)이라 하였다가 구천동으로 개칭됐다는 등 몇 가지 설이 전해오지만 구체적인 근거자료는 없다.
칠연계곡
전북 무주군 안성면 공정리 덕유산 남서쪽 자락에 있다. 계곡물은 용추폭포·문턱폭포·칠연폭포·명제소 등 비경을 만들며 금강 상류인 구리향천으로 흘러든다. 무주구천동의 명성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기암괴석과 크고 작은 폭포가 빼어난 계곡미를 자랑하는 곳이다. 그 중에서도 계곡의 이름을 낳게 한 칠연폭포가 가장 장관인데, 한줄로 이어지는 일곱 연못 사이로 일곱 폭포가 있는 7폭(瀑) 7연(淵)이 아기자기하고 절묘한 경관을 보여 준다. 물이 맑고 차며 주변에 노송과 단풍나무가 울창해서 여름에는 피서객, 가을에는 단풍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계곡 안 송정골에 한말 일본군과 싸우다 숨진 150여 명의 의병들의 유해를 묻은 칠연의총(전북기념물 27)이 있고 입구에는 전라북도 자연학습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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