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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세종대왕의 업적을 새긴 구영릉(英陵) 신도비(보물 제1805호).
세종대왕의 무덤인 영릉은 애초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있었으나 풍수를 이유로 예종 1년(1469) 여주로 이장했다. 신도비 등 구영릉 석물들은 운반상의 어려움으로 땅에 묻혔다가 1973~1974년 발굴됐다.
세종대왕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서 조선시대 문화의 황금기를 이룩한 왕이지만 대궐 밖으로 자주 행차했고 그곳에서 자주 신하들과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셨다고<기재잡기>는 전한다. 사진 문화재청
실록은 왕을 비하하는 것을 금기시했다. 그러나 고전은 왕의 치부도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한글을 창제하고 과학기술을 발전시켰으며 유교 정치의 기틀도 마련한 세종대왕은 우리 역사상 독보적 성군으로 꼽힌다.
그런 세종대왕이 밖으로 돌아 다니기 좋아해 한 달 이상 대궐을 비우기 일쑤였고 대궐 밖에서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만취한 날이 많았다는 게 사실일까. 고전은 왕들의 전혀 다른 모습도 전하고 있다.
선조 때 문신인 박동량(朴東亮·1569~1635)이 쓴 야사집 <기재잡기>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내(박동량) 일찍이 세종 때 주서(승정원의 정7품 벼슬)의 사초(실록 편찬의 자료가 되는 기록)를 보니, 상감께서 친히 양성(안성), 진위(평택), 용인, 여주, 이천, 광주까지 사냥을 다녔는데 때로는 한 달이 지나서야 돌아오셨다가 이튿날 또 떠나곤 하였다."
세종대왕이 경기도 일원에 수시로 나들이를 나갔던 모양이다. 세종대왕은 그곳에서 백성들이 바치는 거친 음식이 마다하지 않고 받았다. " 길가의 시골 백성들이 더러는 푸른 참외를 드리기도 하고 더러는 보리밥을 드리기도 하였다. 그러면 (상감께서는) 반드시 술과 음식으로 답례하였다."<기재잡기>
그런데 세종대왕 일행은 흥에 취해서 자주 과음했던 모양이다. 기재잡기는 "사초 앞에 여섯 사람의 대언代言·승지)과 두 사람의 주서는 이름을 쓰지 않고 성만 써 놓았다. 좌대언(左代言·좌승지) 밑에 진한 먹으로 '종일토록 취해 누워서 인사불성이니 우습도다'라는 글씨를 크게 써 놓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푸른 참외와 보리밥이라면 (농번기인) 봄가을인데 정상적으로 사냥할 때가 아니며, 중요한 정무를 맡은 승지가 취해서 일을 폐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태평성대라지만 군신 간에 서로 지킬 것은 지켜야 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더 당황스러운 일도 있다. 죽천 이덕형(李德泂·1566~1645)은 <죽창한화>에서 세종대왕이 형 효령대군의 증손녀를 지방의 한미한 집안 선비와 강제로 결혼시킨 비화를 소개한다.
세종대왕은 여러 대군, 왕자들과 함께 제천정(한남동에 있었던 정자)에서 잔치를 벌였다. 마침 전국의 선비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한강을 건너느라 강어귀가 꽉 찼다. 세종은 그들 중 유독 의관이 남루하고 얼굴이 수척한 한 유생을 골라 불러오게 했다. 세종은 예를 다해 선비를 맞고 이름을 물었다. 선비는 "영남의 현석규"라고 답했다.
세종은 주위를 둘러보며 "여기 누가 혼기를 맞은 여식이 있소"라고 물었다. 형인 효령대군이 나서 "제 손자 서원군에게 혼기가 찬 딸이 있다"고 답했다. 그러자 세종은 "만일 사위를 얻으려면 이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에 효령대군은 "가문이 대등하지 못하다"고 거절했지만 세종은 "영웅이나 호걸인 선비들이 초야에서 많이 나왔으니, 이 선비집 아들과 정혼하도록 하시죠"라고 고집을 피워 결국 혼인은 성사됐다.
나라에서 특별히 배려를 해서 인지는 모르나 다행스럽게 효령대군 손자의 사위 현석규는 세조 6년(1460) 별시문과에 을과(3등급 중 2등급)로 급제했다. 그리고 훗날 벼슬이 정2품 우참찬에 이르렀다.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했으며 공사처리도 명석했다.
<죽창한화>는 "세종은 백 보 밖에서 우연히 한번 바라본 것만으로도 통달한 사람과 귀한 손님을 알아봤으니, 대성인의 식견이란 남보다 훨씬 뛰어난 법이다. 효령은 바로 나의 외가의 선조이다"고 했다.
서울의 명문가에도 훌륭한 자제들이 많았을 텐데도 굳이 시골뜨기를 형의 사위로 삼게 했는지 세종대왕의 진짜 속셈은 알 길이 없다.
고전은 비록 왕일지라도 서슴없이 비판한다. 김택영의 역사서 <한사경>은 세종대왕에 대해 고루한 유교만 떠받들었을 뿐, 내세울 업적이 없다고 깎아내린다.
"(세종은 태종이 시행한) 서얼금지법을 풀지 못했고 군포법을 부활시킬 수도 없었다. 문무를 함께 양성하고 농상(農商)을 일으키지도 못했다.
지금 세종이 남긴 업적은 유술(儒術)을 숭상하고 빈유(貧儒)를 편안히 한 것에 불과할 따름이다. 이것은 모두 고루하고 고식적인 황희와 허조 같은 무리가 잘못한 까닭이다. 황희와 허조는 혁혁한 사업이 없고 옛 제도만 삼가 지켰을 뿐이다."
5공·6공때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들이 모두 석사장교로 복무해 이 제도가 두 전 대통령의 아들들에게 특혜를 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논란이 불거졌다. 그런데 왕조국가였던 조선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
박동량의 <기재잡기>에 따르면, 조선의 13대 왕 명종이 잠저에 있을 때 신희복(愼希復·1493~1565)에게서 글을 배웠다. 명종은 스승의 예로서 신희복을 깍듯하게 모셨다. 신희복이 예순의 늦은 나이에 과거에 응시하자 스승을 합격시키기 위해 점수를 대폭 낮춰 유례없이 많은 수의 과거 합격자가 나왔다.
"무오년(1558)의 별시에서 신희복이 전시에 응시하였다. 시관이 채점을 마치고 합격한 시권(답안지)을 올리는데 희복의 이름이 없었다. 특명을 내려 차중(次中·중간 이상)의 사람을 모두 넣어 급제를 주게 하니 신희복이 비로소 방에 끼게 되었다."<기재잡기>
이처럼 무리수를 두다 보니 시중에는 별의별 말이 다 돌았다.
"그때 노(老), 미(微), 약(弱)과 공사천(公私賤)이 모두 합격하였다는 말이 있었으니, 신희복은 나이가 예순이 넘어 노요, 유조순은 문벌이 드러나지 않았으니 미요, 윤근수는 나이가 스물둘이니 약이며, 강문우는 갓 양민이 된 사람이니 천이었다."
신희복은 가까스로 과거를 통과했지만 문형(文衡)인 대제학에 이어 경기도관찰사, 정2품 우참찬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또한 젊은 나이에 과거에 합격한 윤근수(1537~1616)는 종1품 좌찬성을 지냈다.
윤근수는 영의정 윤두수의 동생이다. 낮은 신분의 강문우는 임진왜란때 길주에서 왜군과 싸웠다는 기록외 두드러진 활동이 없다. 마찬가지로 한미한 유조순 역시 특별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기자 :<배한철의 역사의 더께> -
3.들판에서 신하들과 인사불성으로 취한 세종..성군의 황당한 모습1 / 매일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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