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습-법성게 (제34차) -중론 7. 주인공에 대한 분석
나는 눈, 귀, 코, 입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살면서 갖가지 괴로움과 즐거움을 체험한다.
이렇게 지각기관과 체험하는 느낌들을 불교 용어로 ‘아소(我所)’라고 부르는데
이는 ‘나에게 소속된 것’, 또는 ‘나의 소유물’이란 의미이다.
인도에서 발생한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나에게 소속된 그런 지각기관과 그런 느낌들의 배후에 그 모든 지각기관들을 소유하고 그 모든 느낌들을 경험하는 주인공, 즉, ‘죽음으로도 파괴할 수 없는 영원불변의 자아’가 존재 한다고 보면서 그런 자아를 발견하는 것을 최고의 종교적 목표로 삼았다.
왜 일까?
그런 영원 불변의 자아를 찾아서 그것에 의지하여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럼 중론을 보자,
용수는 <중론>의 제 9<관본주품:觀本住品: 주인공에 대한 분석>에서 외도(外道)들의 이런 주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 눈과 귀 따위의 모든 지각기관들과
괴로움이나 즐거움 등의 모든 느낌들은
누군가에게
소속되어 있는데 그를 주인공(자아)이라고 부른다. “
그리고 이어지는 게송들을 통해 이를 비판하는 것이다.
쉽게 생각해 보자,
처음 시작할 때 나에게 소속되어 있다고 한 눈,귀,코,입을 나에게서 제거해도 주인공인 ‘나’는 남아 있을까?
결코 그럴 수는 없다.
용수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만일 눈이나 귀 등의 지각기관과
괴로움이나 즐거움 등의 느낌을 떠나서
주인공이 존재한다면,
무엇으로 그 존재를 파악할 수 있겠는가? “
나의 부속물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하나 하나 제거해도 '나'는 있어야 하는데 그 모든 소속된 것을 제거하고 나면 '나' 역시 사라지고 만다.
앞에서 수없이 예를 들어주었던 자동차의 경우도 되새겨 보자.
수많은 자동차 부품을 가지고 조립하여 ‘자동차’가 완성되었다. 자동차가 생겼다.
그럼 자동차가 소유하고 있는 자동차부품을 하나 하나 제거하고 나면 자동차가 남게 될까?
별반 다를 거 없는 이야기다. 조금만 더 들여다 보라!
나의 부속기관인 줄 알았는데 부속품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보니 나 역시 사라지고 만다.
내가 소유한 것이라면 이런 부속기관들을 제거해도 나만은 남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나에게 눈과 코가 달려 있다’고 말했던 것은 사실과 합치하는 판단이 아니었다.
인도에서는 다종다양한 종교와 철학들이 출현하였다.
모든 종교들과 불교의 차이점은 ‘자아’의 존재를 인정하는지의 여부에 있었다.
불교 이외의 외도와 철학에서는영원한 자아의 존재를 상정한 후 나름대로의 체계를 건립하였다.
그 성전은 <우빠니샤드>라는 고대 바라문교의 성전이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아뜨만( Aman),
요가수행의 사상적 토대인 상캬 철학에서 말하는 뿌루샤(Purusa),
벌거벗고 수행하는 자이나교에서 말하는 지와(Jiva)
이 말은 ‘영원한 자아’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이들은 이 영원한 자아를 발견하여, 그와 합치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다.
자,
그러나 불교에서는 그런 자아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런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함으로써 진정한 마음의 평화가 온다는 것이 불교의 종교관이다.
용수 역시 <중론> 제 9 <관본부품>을 통해 지각기관들을 소유한 자아, 괴로움과 즐거움을 느끼는 자아가 있다는 생각을 비판하는 것이다.
용수의 다음 말을 살펴보자,
“만일 눈이나 귀 등을 떠나
주인공이 존재한다면,
주인공을 떠나서
눈이나 귀 등도 존재하리라.“
자,
눈은 보는 작용을 ,귀는 듣는 작용을, 코는 냄새 맡는 작용을 그 성질로 삼는다. 보는 작용을 못하면 눈이 아니고, 듣는 작용을 못하면 귀가 아니며, 냄새 맡는 작용이 없으면 참된 코가 아니다.
눈,귀,코를 소유했던 주인공이 존재한다면, 주인공이 없어도 보는 작용을 갖는 눈, 듣는 작용을 하는 귀,.. 등이 존재해야 할 것이다.
이것들은 나의 소유물이 아니다.
또 이것들을 떠나 내가 별도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 하나 이들 모두는 법이다. 나의 모든 것을 이루고 있는 구성요소들이다.
이런 구성요소들이 없으면 나라는 사람은 존재할 수 없으며, 나라는 사람이 없으면 또 이런 구성요소들도 존재할 수 없다.
용수는 이를 다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법이 있음으로 인해 사람이 있음을 알고,
사람이 있음으로 인해 법인 있음을 안다.
법을 떠나서 어찌 사람이 있겠으며,
사람을 떠나서 어찌 법이 있겠는가? “
이는 곧 ‘A가 없으면 B가 없고, B가 없으면 A가 없다’ 는 ‘연기공식’의 A와B에 ‘주인공인 자아’와 ‘주인공인 자아에 소속된 법들’을 대입한 후 문장에 약간의 변형을 가하여 작성된 것들이다.
그러면서 용수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보는 자, 듣는 자, 괴로움이나 즐거움을 느끼는 자, 등이 서로 같은 자일 수도 없고(不一), 서로 다른 자일 수도 없다(不異)는 점을 논증한다.
그에 대한 설명을 보자.
“보는 자가 듣는 자이고
듣는 자가 느끼는 자라면
그런 지각기관들은
그 이면에 단일한 주인공을 가지리라.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 “
우리가 눈으로 무엇을 본다고 할 때에는, ‘보는 주체',와 '보는 작용인 눈' 과 '보이는 대상'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우리가 눈을 통해 무엇을 본다거나, 귀로 어떤 소리를 듣는다고 할 때, 방안에서 창문을 통해 바깥을 보는 사람의 모습에 빗대어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만일 눈이나 귀 등과 같은 감각기관들의 배후에 모든 감각을 수용하는 단일한 주인공이 존재한다면, 눈으로 보는 자와 귀로 듣는 자 등이 모두 동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눈으로 보는 것과 귀로 듣는 것은 서로 다른 작용이며, 단일한 것은 다양한 것과 만나지 못한다.
단일한 주인공이 다양한 지각기관과 만나기 위해 다양해질 수 도 없고, 다양한 지각기관이 단일한 주인공과 만나기 위해 단일해 질수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보는 자와 듣는자 등이 서로 다르다고 볼 수도 없다.
용수는 이들이 서로 다르다고 볼 때 발생하는 논리적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보는 자와 듣는 자가 다르고,
느끼는 자도 역시 다르다면
무엇을 보는 때에 다른 것을 들을 수도 있어야 하기에
주인공이 여럿인 꼴이 되리라“
이렇게 주인공의 실재성을 비판한 용수는 논의를 마무리 하면서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는 ‘연기공식’에 의거하여 ‘주인공에 소속된 것’들 역시 실재하지 않음을 말한다.
“눈과 귀 등
그리고 괴로움이나 즐거움 등의 느낌이
소속된 주인공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눈.귀 등도 존재하지 않으리라”
‘나’라는 주인공이 별도로 존재해서 ‘눈’을 이용해 무엇을 보고,
‘귀’를 이용해 무엇을 들으며,
‘코’를 이용해 냄새를 맡으며,
‘괴로움’이나 ‘즐거움’을 느낀다고 하는 사고방식이나 그것의 주인인 나에게
소속된 것들이라고 간주하는 사고방식 모두 우리의 생각이 제멋대로 재단해 낸 분별망상이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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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의 중론이 우리에게 조금은 난해하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 나만 그러한 것은 아니리라!
짐작을 하고, 가만히 들여다 보면서 생각을 짚어보다 보면,
오온에 대해서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과 지식, 불법을 공부 하면서 지식이 아닌 지혜로 들여본다고 나름대로 이해를 했다는 것 또한 내가 분별하고 있었음이요,
논리적으로 따져 보는데 익숙하지 않은 것에 지금까지 공부해 온 알음알이가
깨지게 되면서 겪는 혼돈이 아닐까
여기까지 7번째 주제에 대한 분석을 통해 하면 할수록 ‘아휴 머리가 아파’
하는 생각이 나름 힘들게 느끼게 된 것이고...
부딪히기전에 머리 아프다고 한 이 분별을 최대한 간단하게 짚어낼 때 분별에서 해방될 것이다.
힘내고, 힘내서 머릿속에 가득한 이 분별을 하나씩 들어내 봅시다!!
일화 두손합장
첫댓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