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목적은 우리의 목적과 다르지 않으니 바로 행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러기에 눈을 뜨면 마음을 편하게 따스하게 하는 부드러운 말과 그림이나 사진을 엽서처럼 스마트 폰에 보내준다.
고마운 일이다.
다만 무엇이든 지나치면 불편해지듯.. 너무 많다고 느껴지는 엽서라 귀찮게 여기기도 한다.
석가모니가 가출하여 6년 고행을 하고 보리수 아래에서 부처를 이룬 이유 역시 고를 멸하려고 했다지만..
고멸이 다른 말로 하면 행복 아닌가?.
4성제에 행복 대신에 고멸이 들어가 있는 것은.. 석가 당시 수행자들이 찾는 것은 고멸이란 열반을 목적으로 삼고 있었기에..
거기에 맞춘 것으로 고멸은 행복과 다르지 않다.
즉 행복하길 바라는가?.
그러면 먼저 삶이 행복하지 않음을 보아야 한다. 고제
행복해야 함에데 불구하고 행복하지 않은 이유가 무얼까?. 집착이 있기 때문이다... 집제
그럼 행복한 삶은 불가능할까?. 아니다 집착은 끊어진다.. 멸제
어떻게 하면 집착을 끊고 행복해 설 수 있을까.. 8정도를 닦으면 가능하다.. 도제
상좌불교에서 대승불교가 나오는 이유도 고를 강조하는 불교에서 행복을 강조하는 불교가 된 것은 아닌지..
인도는 여전히 고멸을 우선하니 상좌불교가 전해오고 있지만, 동 아시아는 행복을 강조하기에 대승불교가 꽃을 피운 게 아니냐는 것이다.
나는 행복을 불교에서 보고 있다.^^.
불교에 관한 유튜브를 보면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이유를 보여주는 영상이 보인다.
인도에서 불교는 이슬람교의 침략으로 사원이 무너지고 불교도는 힌두교도가 되어 사라졌다고 한다.
그런데 아트만은 없다[무아]고 가르치는 불교가 아트만을 강조하는 힌두교에 흡수가 될 수 있었을까?
인도 불교는 무아인 안아트만이라고 가르치지만 그 속에 유아인 아트만이 들어올 수 있는 틈을.. 구멍을 만들어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랬기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인도의 비슈누 신의 화신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대승불교는 인도의 수많은 신을 보살이란 이름으로 받아들였다. 아니 인도에서 각 지방마다 멋대로 믿고 있던 신들을 보살이란 이름으로 수집 정리한 것이다.
행복할 수만 있다면.. 불교든 힌두교든 무슨 상관이 있느냐 말이다.
그런데 나는 상관이 있다.
무아는 유아를 부정하듯.. 안아트만은 아트만과 달라야만 행복하니까.^^.
그리고 불자의 마지막 목표는 더 이상 높은 곳이 없는 평등한 행복[아뇩다라삼먁삼보리]으로 부처님 자리인데..
부처님이 된다는 것은 아트만이 아닌 안아트만을 깨치는 것으로 유아인 브라흐마가 되는 게 아니기에..
하여 나는 알고자 했다.
인도 불교가 만들어놓은 안아트만을 비집고 아트만이 들어올 수 있는 틈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아트만을 벗어나 안아트만을 깨치려면 무엇을 알아야만 하는가?를..
그걸 몰라도 자기 행복을 지키는 것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무엇이기에 안아트만[무아]이고.. 또 무엇이기에 아트만[아]인지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 답은 아는 이는 이미 알고 있듯이..
12처는 실제 존재가 아닌 마음이라는 것.^^.
해서 지금 하는 작업은 12처가 존재인 6근6경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인데..
세상은 별 관심이 없다. 자기 행복과 무관하게 보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