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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급하시는 하나님
출 16:4-20
대부분의 경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오해는 서로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얼굴을 마주 대하고 대화를 하고, 함께 여행을 하기도 하면서 상대편에 대해 알아가게 되면 오해도 풀리고 자연스럽게 친해지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자라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하나님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마주 대하는 시간도 별로 없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고 애를 쓰지도 않으면서 믿음이 자라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분명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분이 무엇을 기뻐하는지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기다가 망하게 되었습니다. 혹시 오늘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을 잘 아십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는 껄끄럽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아십니까?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일부러 홍해의 기적을 경험케 하고, 마라의 쓴물을 마시게 하면서 그들을 시험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가르치기 위해섭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분이시다. 홍해도 가르실 수 있는 분이시다. 우리 하나님은 치료의 하나님이시다. 쓴물을 단물로 바꾸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이 와도 상관없다. 하나님만 바라보면 된다’ 그렇습니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광야생활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겐 신앙을 훈련하는 학교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광야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통해 그들은 하나님를 깊이 알아갔습니다.
본문 출16:1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산 사이 신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지 제 이월 십오일이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월 십사일이 유월절이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지 한달 정도가 지나갔습니다. 아마 이 때쯤 그들이 애굽에서 가지고 나왔던 양식이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했겠지요. 먹을 것이 떨어지게 되자 그들은 당황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있는 곳은 광야입니다. 농사지을 곳도 없고 돈 벌 곳도 없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16:2-3) 무슨 말입니까? 그들은 ‘먹을 것도 없는 이 광야에서 어떻게 살란 말이냐? 애굽에서는 비록 노예로 살았지만 고기 가마 옆에 앉았었고, 떡은 배불리 먹지 않았느냐? 그 때에는 굶지는 않았는데, 이 광야에서 굶어죽으란 말이냐?’ 라고 모세와 아론에게 원망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치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그들은 문제를 만나기만 하면 원망부터 합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어려운 현실의 문제는 크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경험했던 홍해의 기적이나 쓴물을 단물로 바꾼 마라의 기적도 먹을 것이 떨어졌다는 현실 앞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먹을 것이 없는 현실의 문제은 이스라엘에겐 너무 큰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보다 먹고 사는 현실의 문제는 그들에게 더 크게 다가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원망부터 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의 하나님 원망은 하나님을 잘 모르는 것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먹을 것이 없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할까요?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하나님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홍해를 갈랐습니다. 쓴 물을 단 물로 바꾸는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앙생활의 아주 중요한 문제를 볼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먹을 것이 떨어졌다는 현실의 문제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 이 두 가지의 중요한 문제가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먹고 사는 것’은 농사 짖거나, 장사를 해서, 아니면 직장생활을 해서 월급을 타서 사는 것이지, 하나님이 하실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 가면 밥이 나와? 돈이 나와!’ 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까? 정말 하나님은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분이십니까? 심지어 어떤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잘 안 믿어지니까 먹고 살려면 주일날에도 직장 나가야 된다고 말합니다. 먹고 살려니까 지금 바빠서 예배드릴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먹고 사는 것’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갈등합니다. ‘예배드려야 되나? 직장가야 하나?’ ‘지금 기도해야 하나? 사람 만나야 하나?’ ‘병원가야 하나? 기도해야 하나?’ 도무지 다 헷갈립니다. 병원안가고 기도하려니까 왠지 불안하고, 그렇다고 예배 안 드리고 직장에 가려니까 찜찜하고... 혹시 우리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지금 이스라엘은 이런 자리에 빠져 있습니다.
공급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스라엘들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본문 4절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보십시오 하나님은 하늘 문을 열어서 백성들에게 양식을 비같이 내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려 그들을 먹이셨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다 합치면 최소한 150만 명이 되는 사람들을 ,그것도 40년 동안 단 한 끼도 굶기지 않고 먹이셨습니다. 사실 이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지요.
본문 14-15절에 보면 이 때 내린 만나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옵니다. 새벽에 이슬과 함께 하늘에서 양식이 내려왔는데 그들이 가만히 보니까 생긴 모양은 작고 둥글고 서리같이 생겼습니다. 색깔은 흰색을 띄고 있었습니다. 그 맛은 꿀 섞은 과자 맛이었습니다.(31절). 이런 만나가 하늘에서 눈송이처럼 쏟아져 내렸습니다.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장관이었을까요? 그런데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고 “이것이 무엇이냐?”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 ‘이것이 무엇이냐?’라는 물음이 히브리어로 ‘민 후’입니다. 희랍어로는 이 물음이 ‘만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냥 만나를 내려 배불리 먹게 하신 것만이 아닙니다. 만나를 내려주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 가르치셨고 그들의 믿음을 훈련시키셨습니다. 자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훈련시키셨습니까? 만나를 내려준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은 무엇을 배워야 했습니까?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먼저 배워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공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안에는 모자람이 없습니다.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 능히 양식을 공급하시는 하나님, 만나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은 바로 그런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먹고 사는 문제는 애굽의 바로 왕이 해결해 주었습니다. 바로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로 부려먹기 위해 그들에게 필요한 양식을 준 것입니다. ‘먹을 것을 내가 너희들에게 준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나의 노예이다’ 라고 바로가 말한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왕의 노예가 된 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육신의 양식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하나님이 그들의 필요한 양식을 채워주셨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바로를 찾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든 생명의 근원,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자로 삼아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먹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습니까? 다 내가 한 것 같지만 하나님이 주신 건강으로 우리는 삽니다. 하나님이 주신 공기로 우리는 호흡을 합니다. 하나님의 지키심으로 우리가 하루 하루 살아갈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보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이 채워주심을 믿는 자들은 더 이상 먹을 것 때문에 염려하지 않습니다. 약1:17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을 공급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주이십니다. 이제 하나님만 바로 보면 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에서 염려하지 말라고 교훈하시면서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지만 하나님이 그것들을 기르시지 않느냐’ 또 ‘들의 백합화를 보라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지만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 입은 것도 이 꽃 하나만도 못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새보다는 귀하고, 들의 백합화보다는 귀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신다면 무엇이 염려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먹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직장이 내 먹을 것을 해결해 준다고 직장을 주인처럼 섬길 필요는 없습니다. 장사하는 것에서 돈이 나온다고 장사하는 일을 하나님보다 귀하게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내 삶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 바로왕이 아니고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우리를 먹이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본문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또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6장에서 이 만나와 관련해서 놀라운 교훈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요6:49-51)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하늘로서 내려주신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만나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을 아닙니다. 만나를 먹어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온 다른 떡, 다른 만나가 있는데 곧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생명의 양식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예수님 당신 자신이 생명의 양식이 되기 위해섭니다. 그러므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광야 40년 동안을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양식이 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을 내 마음에 구원자로 받아들이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밥을 먹듯이 그 분을 묵상하고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육신도 먹이시지만 우리의 영혼도 채워주십니다. 놀라우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만나를 내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셨듯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서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길
두 번째,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통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는 지를 배워야 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려주셨는데 남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사람의 필요에 따라 공급하셨습니다. 17-18절을 보면 “...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딴에는 많이 거두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됫박으로 되어보니까 한 오멜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적게 거두었다고 생각했는데 집에 와서 되어보니까 역시 한 오멜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만나를 거두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의 물질에 대한 생각을 바르게 하셨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다 욕심이 있습니다. 다 많이 거두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욕심으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많이 거두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적게 거두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다 필요한데로 충족되었습니다.
또 하나님은 만나를 매일 매일 거두게 했습니다. 만나는 하나님이 날마다 주시는 일용할 양식이었습니다. 만나는 아침에 해가 뜨기 전에 이슬과 함께 내렸고 아침 해가 뜨면 곧 없어졌습니다. 흥미 있는 것은 이 만나는 하루가 지나면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나는 저장할 수 없는 음식입니다. 일주일 분정도, 아니면 한달 분을 미리 거두어 놓고 쌓아두면 좋겠는데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만나는 매일 매일 거두어야만 했습니다. 20절에 보면 어떤 사람들이 욕심을 내어서 많이 쌓아두어 보았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루가 지나니까 만나는 썩고 냄새나고 벌레가 나게 되었습니다.
필요한 만큼만 거두게 했다, 하루 하루 거두게 했다. 그것도 새벽에 나가서 거두어야 했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하셨을까요? 우리에게 너무 분명한 메시지를 주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많이 거두려고 욕심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에 무엇인가를 많이 거두고 많이 쌓는 일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만나는 목적이 아닙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수단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야망이나 욕심을 채워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단지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보십시오 요즘에 우리들은 하루 하루 벌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 때문에 걱정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필요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벽마다 일찍 일어나야만 했습니다. 해가 뜨면 만나는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새벽마다 매일의 필요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삶,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세상 것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날마다 바라보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삶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아주 기막힌 기도를 드린 사람이 성경에 소개되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아굴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문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이 아굴의 기도가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그가 드린 기도는 이런 것입니다.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30:8-9) 사람은 지나치게 물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신뢰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질이 우상이 되기가 쉬워요. 반대로 물질이 너무 없으면 하나님을 영광을 훼손하는 비참한 삶을 살 수도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필요한 양식을 공급해 주십시오”라는 기도가 바른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나 보다 더 중요한 예배
세 번째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보다도 만나를 내려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만나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만나의 특별한 점은 안식일에는 내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 전날 이틀 치의 만나를 거두어서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아서 안식일까지 보관하게 했습니다. 신기한 것은 다른 날에는 하루가 지나면 썩고 냄새났지만 안식일에는 만나가 상하지 않았습니다. 참 놀랍지요.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거두는 것보다 하나님께 예배하며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해섭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본질은 예배드리는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예배를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왜 예배시간이 있는지를 모릅니다. 그냥 아무 때나 가면 될 것이 아닌가? 주일날 장사가 잘 되는데 꼭 주일날 예배드리려고 장사도 그만두고 교회에 가야하는가? 또 예배는 일년에 52번이나 있는데 한 두 번 빠진다고 뭐가 대수겠는가?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것들입니다. 믿음이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안식일에 만나가 내리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은 당장 먹을 것을 염려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공급을 받고 있으면서도 염려했습니다.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은 먹을 것 때문에 걱정하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안식일에 하나님의 백성은 예배해야 합니다. 예배는 다른 것과 흥정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예배는 사람들이 한번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않은 사람들은 예배드리기 위해 하루를 허비한다고 생각합니다. 믿는 사람 중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양식과 예배사이에서 갈등합니다. 만나를 거둘 것인가? 하나님께 예배할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십일조를 해야되느냐? 말아야 하는가? 고민합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고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또 하나님의 백성들은 떡으로만 사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만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영적인 능력을 공급받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육신을 위해 밥을 먹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밥을 먹지 않고 사람은 살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배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신8:3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로 먹이셨습니까? 사람은 육신의 먹고 마시는 것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섭니다. 사람에게는 만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육신적인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진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사람의 가치는 하나님 바라보고 하나님께 순종하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분명한 한 가지 생각을 해야만 했습니다. ‘아 하나님이 위에서부터 내려지는 양식으로 우리가 사는구나.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구나! 그렇다면 하나님 바라보는 것이 사는 길이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구나!’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직전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신 후에 사단에게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 때 사단의 첫 번째 시험, 유혹이 바로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금식하신 후에 먹는 것을 가지고 예수님을 유혹한 사단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먹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먹는 것이 중요하다면 돌로 떡을 만들어서 먹으면 될 것이 아니냐’라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앞에서 말한 신8:3의 말씀으로 사단의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만약 떡으로만 살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결국 조만간 썩어질 자신의 육신만을 위해 사는 어리석은 자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는 자만이 육체의 죽음을 뛰어넘어 영원을 건져 올릴 수 있습니다.
콘웰 목사님이 필라델피아 템플 침례교회에서 시무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기도회를 마친 어느 날 저녁 목사님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십일조 헌금을 오랫동안 해 온 사람이 있는지를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일곱 명이 손을 들었습니다. 콘웰 목사님은 그들로 하여금 앞으로 나와서 간증을 하게 했는데 모두가 십일조 헌금으로 인한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 감동 깊게 간증을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일곱 번째로 나온 한 부인은 좀 머뭇거리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앞에서 간증한 사람들과는 다르게 사실 하나님께 정직한 십일조를 드리느라 참 어려운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이제 저는 나이가 많아졌고 지금 다니는 직장에서 곧 나와야 할 실정입니다. 이제 직장을 잃게 되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무런 방도가 없습니다.” 이 여인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은 모두 조용해졌고 냉냉하고 낙심한 분위기로 기도회가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 이튿날 콘웰 목사님은 당시 백화점 왕으로 알려진 존 와나메이커씨에게 점심초대를 받고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와나메이커씨는 식사를 하면서 자기 회사의 일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우리 회사에서 오랫동안 잘 근무한 직원을 위한 연금제도를 실시하기 위해 수년동안 연구를 하고 계획해 왔었는데 오늘 처음으로 25년 정도 잘 근무한 한 직원에게 평생 연금을 지급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회사의 자랑스러운 일이요, 저도 보람을 느낍니다” 그 때 콘웰 목사님은 ‘그 평생 연금을 타는 회사원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와나메이커씨는 그 최초로 연금을 받는 사람의 이름을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때 콘웰 목사님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어제 저녁에 일곱 번째로 나와 간증했던 바로 그 성도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공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는 광야 한 가운데서 만나를 내려주심으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놀라운 믿음의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마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너희들을 먹이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늘을 열어 너희의 필요를 채워줄 것이다. 적어도 너희들은 먹는 것 때문에 염려할 사람들은 아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안식일에는 먹고 마실 것을 염려해서 일하려 나가지 마라. 안식일 전날 두 배를 주겠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된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먹을 것 때문에 망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승리하십니다. 세상의 물질과 타협하지 말고 예배에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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