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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장로교에서 민주적인 의사결정 절차에 익숙해져 있던 교인이 감리교에 가게 되면 “아니 어떻게 목사님께서 그 같은 일을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실 수 있단 말인가? 교인들의 의견도 물어보지 않고!” 하고 놀라게 된다. 반대로 감리교에 익숙해져 있던 교인이 장로교회에 오게 되면, “아니, 저런 것까지 일일이 당회, 제직회, 공동의회를 다 거쳐야 하는가? 목사님이 혼자 결정해서 하시면 될 텐데!” 하고 놀라게 된다.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개신교 교파를 통해 오늘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러 모으시고 계신 것은 분명하다. 요즘은 대부분의 교회들이 교파의 특성을 상실한 채, 담임목회자의 성향에 따라 장로교인데도 마치 감리교나 순복음교회 비슷하게 색깔을 띠기도 하는데, 모르고 무턱대고 따라가기보다, 제대로 뭘 알고 따라가는 것이, 이 미혹의 시대에 자칫 엉뚱한 길로 빠지지 않는 지혜일 것이다.
●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 물질문명의 엄청난 영향력 아래 교회는 잠들기 시작했다. 이때 강력한 신앙 부흥운동이 영국에서 일어나게 되는데, 이 부흥 운동은 이후 영국의 사회와 문화, 종교 전반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다. 이 부흥을 이끈 주역은 감리교 운동의 지도자 요한 웨슬리였다. 그는 필립 샤프가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칼뱅 등과 견줬을 만큼 지구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던 인물 가운데 한 명이었다.
영국은 웨슬리의 나라로 불릴 만큼 거의 3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런던을 비롯하여 곳곳에 존 웨슬리의 흔적이 가득하다. 그의 생전의 영향력 때문인지 웨슬리의 체취를 영국 전역에서 느낄 수 있다. 웨슬리가 다녔던 명문 옥스퍼드 크라이스트 처치, 옥스퍼드의 홀리클럽, 첫 사역을 했던 브리스톨의 감리교회, 그가 노방 설교를 했던 한함마운트, 그리고 마지막 사역을 했던 런던 감리교회에 이르기까지 웨슬리와 감리교 부흥의 유산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심지어 영국국교회(성공회)를 상징하는 성 바울교회 안에도 웨슬리의 동상이 우뚝 서 있었다.
● 요한 웨슬리는 1703년 영국 중부 링컨셔 주 엡워스에서 영국 성공회 신부인 새뮤얼 웨슬리주교의 15째 아들로 태어났다.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 웨슬리는 부모의 청교도 신앙 전통을 이어받아 자녀를 가르쳤는데, 그녀는 열아홉 자녀를 낳았지만 아홉은 출생 후 며칠만에 죽거나 두 살도 못되어 죽었고, 나머지 자녀들을 최선을 다해 신앙으로 양육했다.
웨슬리는 어린시절부터 철저히 신앙중심의 생활을 했는데, 그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나는 매주 한 두시간씩 꼭꼭 성경을 읽고 기도하기를 힘써 지켰다. 매주 성찬식에 참석했다. 말이나 행실에 단 한 번이라도 실수가 있을까 하여 언제나 조심하였다. 속사람의 성결을 위하여 언제나 기도하였다.”
특히 요한이 다섯 살 때인 1709년 2월 9일 한밤에 돌연 불이 났다. 요한은 무사히 구출되었으나, 이 사건 이후 어린 요한은 양친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어머니 수산나는 평생 그 밤의 일을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요한을 '타는 불에서 끄집어낸 부지깽이' (스가랴 3:2)라고 부르며 그의 영혼을 특별히 보호하기로 결심하였고, 하나님께서 어떤 특별한 일을 시키기 위해 그를 구출 하셨다는 섭리와 소명을 강하게 느꼈다고 한다.
화재 사건 후 부모의 특별한 배려로 자라온 요한은 그가 10세 때인 1714년 런던의 챠터 하우스(Charter House)에 입학하게 된다. 집을 떠나 16세에 졸업하기까지 이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챠터 하우스의 6년은 그렇게 행복하지는 못했는데, 이유는 그가 어려운 처지의 학생이었기 때문에 부유한 학생들로부터 가끔 모욕을 당하기도 하고, 또한 식사 때에 고기는 모두 큰 학생들에게 빼앗기고 야채만 먹었다. 그는 튼튼치 못하였으므로 아버지는 그의 폐를 걱정하여 매일 아침 교정을 세번씩 뛰라고 했으며 그는 이를 잘 실행하였다.
웨슬리는 런던에서 6년간의 수도원 교육을 마치고 18세 되던 해인 1720년 교역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신학공부를 위해 옥스퍼드대학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에 진학한다. 이곳에서 웨슬리는 뛰어난 학업과 경건한 신앙생활로 다른 학생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는 대학시절부터 일생 동안 1주일에 2번씩 규칙적으로 금식했는데 이것은 청소년기 수도원에서의 수련을 통해 몸에 밴 것이라고 한다.
웨슬리는 동생 찰스 웨슬리와 함께 1726년께부터 ‘홀리 클럽’(Holly Club)을 조직, 동료들과 함께 정규적으로 기도하고 성경공부에 힘썼다. 웨슬리 형제의 홀리클럽운동은 옥스퍼드 성내 감옥의 수감자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당시 웨슬리 형제의 엄격한 경건 생활과 홀리클럽모임을 보고 동료들과 주위 사람들은 그들을 ‘질서주의자, 격식주의자’(Methodist)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경건하고 성결한 생활이 부러워서라기보다는 야유와 비판이 섞인 일종의 ‘조롱’이었다. 물론 이 같은 평가에 웨슬리 형제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성경 및 신학 연구 등에 힘쓰고, 빈민과 병자, 감옥의 죄수들의 전도에 더욱 힘썼다.
마침내 웨슬리는 옥스퍼드에서 전 과정을 수료하고 성직자로 임명되었다. 목사가 된 웨슬리는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1735년 배를 타고 미국으로 향했다. 아메리카에 있는 인디언들에게 전도를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2년 남짓한 미국 전도여행에서 영적으로 쓰라린 패배감을 안고 영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개인의 구원 체험과 관련하여 영적으로 방황하고 있던 웨슬리는, 그가 35세가 되던 어느날, 모라비안 교도들이 모인 올더스케이트 거리의 집회소에 참석하여, 놀라운 성령 체험을 하게 된다. 이 회심의 사건은 웨슬리의 생애에서 일대 전환점이자 감리교회가 탄생하게 된 시발점이 되었다.
● 이후 킹스우드 한함마운트에서 시작된 놀라운 영적 각성 운동은 웨슬리가 가는 곳마다 계속되었다.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수백명에서부터 1만5000명에 이르는 많은 군중이 몰려들었다. 산업혁명과 함께 영적으로 심히 피폐했던 당시, 마침 복음에 목말라 있던 영국의 회중들은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찢으며 웨슬리의 설교에 놀랍게 반응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울부짖는 통회의 소리, 죄 사함의 감격으로 찬양하고 기도하는 소리로 설교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웨슬리가 패역한 세대를 향해 죄의 관영과 개인과 공동체, 사회의 타락을 지적하자 사람들이 회개의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강도가 어찌나 강했던지 사람들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쓰러졌다고 한다.
이후 웨슬리가 가는 곳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이 동반된 설교,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열정으로 외치는 설교, 죄의 각성과 회심의 역사가 이어졌다. 웨슬리의 설교가 수많은 영혼을 깊은 잠에서 깨우고 강력한 도전을 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말씀과 기도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성경을 매일 읽고 묵상했으며 말을 타고 다니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아침 저녁으로 1시간씩 일과에서 손을 떼고 홀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말씀과 경건, 기도가 어우러진 신앙생활에서 우러나오는 웨슬리의 불타는 가슴이 평신도 순회 전도자들에게도 옮겨붙어 그들이 가는 곳마다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다.
● 요한 웨슬리의 유명한 설교 가운데, 호주머니가 회개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눈물을 흘리는 감정적인 회개만 아니라, 실제로 경제적인 회개를 하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웨슬레는 당시 엄청난 부자였다고 한다. 웨슬리는 말을 타고 다니면서 수천 권의 책을 읽고 또 수백 권의 책을 적었다고 한다. 그렇게 성실하게 연구한 결과 그의 신학서적들, 설교들은 엄청나게 팔렸고, 그 결과 엄청난 수익을 얻게 되었지만, 그는 목회 초기 봉급으로 검소하게 평생을 지냈다고 한다. 그는 엄청난 부자였지만, 존경받는 부자로 살았다.
그는 신앙과 부에 관련하여 이런 말을 남겼다. “어디든지 부가 늘어나는 곳에서 동일한 비율로 종교의 본질이 줄어든 것을 나는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나는 참된 종교의 어떤 갱신이 오래 지속되는 것이 사물의 본성에 있어서 어떻게 가능한지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종교는 필수적으로 근면과 절약을 산출하며, 근면과 절약은 부를 산철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산이 늘면 그 모든 가지에서 교만과 분노와 세상에 대한 사랑도 늘 것이다.”
● 요한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한 종으로 모든 면에서 매우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오히려 그의 고통이었다. 웨슬리의 첫 사랑의 상처 때문에 평생을 독식으로 살려고 했으나 48세에 과부였던 그레이스 머레이(Grace Murray)이와 결혼했는데, 그 여인은 사역자의 아내로서는 적합하지 못했다. 결국 심각한 의부증 등으로 인해 웨슬리를 괴롭히는데, 웨슬리가 말씀을 전하고 있으면 그의 아내가 뛰어 들어와 큰소리로 "당신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나요?" 라고 소리를 질렀고, 남편이 간통했다고 신문사에 수없이 일러바치기도 했다. 그들의 약혼식이 알려졌을 때, 동생 찰스 웨슬리는 "나는 하루 종일 신음을 하였으며...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설교도 할 수 없었고, 쉴 수도 없었다. 낮에도 밤에도...”라고 할 정도로 충격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같은 악처 덕분에 웨슬리가 웨슬리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결혼생활이 불행하게 끝난 반면 웨슬리가 받은 복은 컸다. 건강한 몸으로 장수한 그는 그 시대에서 가장 분주하고 많은 일을 했다. 영국 전역과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 등을 순회하며 전도집회를 열었으며 4천번 이상의 설교를 했고 일생을 통해 선교여행한 총거리가 40 만km에 달했다. 1790년 6월 28일 87회 생일을 맞은 웨슬리는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오늘부터 나는 87세가 된다. 체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을 느끼겠다. 그러나 신체 어느 부분이 고통을 느끼는 것이 아니고 생명의 물결이 멈추기까지 육체가 점점 쇠약해져 가는 것 뿐이다.”
그해 10월 웨슬리는 수섹스주 윈첼시교회 뜰에서 마지막 야외설교를 했다. 그날 설교의 제목은 ‘만날만한 때 주를 찾으며 그가 가까이 계실 때 부르라’는 것이었다. 다음날부터 그는 심한 열로 앓기 시작했다. 그는 모든 일을 중지하고 시티 로드교회에 있는 집으로 돌아와 병석에 눕게 됐다. 1791년 3월 2일, 그의 작은 방에는 열 한사람이 모여 있었다. 침상 위에 누운 웨슬리는 친지들에게 ‘평안히 계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88세였다. 그의 유해는 시티 로드교회 뒤뜰에 안장되었다.
●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1707년 12월 18일 - 1788년 3월 29일)는 감리교 운동을 주도한 잉글랜드의 신학자이자 찬송가 작곡가이다.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의 동생이다. 찰스 웨슬리는 형 요한 웨슬리와 함께 18세기에 일어난 가장 역동적 부흥 운동인 감리교 설립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이다.
린컨샤이어에서 태어났으며 웨스트민스터에서 왕실 장학생으로 공부하였고,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 처지대학의 장학생으로 공부한 후 그 학교의 전임강사가 되었으며, 그곳에서 헬라어와 라틴어로 된 고전들을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요한이 아버지의 부목사로 일하기 위해 잠시 옥스퍼드를 떠나 있는 동안, 찰스는 1728-1729년 겨울, 영적인 각성을 경험하고 ‘홀리 클럽(Holy Club)’을 시작했으며, 요한은 이후 돌아와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요한의 회심 전에 휫필드의 성경읽기운동을 지도한 사람은 찰스였다.
1735년 찰스는 형 요한 웨슬리가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신대륙 조지아 주의 선교사로 나갈 때, 형을 돕기 위해 국교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조지아 주 총독의 부관으로 함께 동행하기도 했다. 이 선교는 요한 웨슬리와 소피아 홈킨스의 이루어지지 않은 연애 사건으로 영락없이 실패하고 말았다. 찰스와 요한은 영. 육이 모두 지친 상태로 영국에 돌아왔다.
1738년 5월 모라비안 형제들의 사역을 통해 3일 사이에 형제는 각각 큰 영적 경험을 하게 되는데, 찰스는 성령강림절에 요한은 1738년 5월 24일이었다. 이 사건은 복음주의 부흥운동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두 사람은 함께 영국 사회를 혁명으로 이끈 위대한 감리교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찰스는 탁월한 웅변 설교가였으나 특히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 찬송가 작가로도 활동했다. 실제로 그는 4,500여 곡 이상의 찬송가를 발표했고, 3,000여 편의 원고를 남겼는데, 이것은 감리교 운동을 부흥시키는데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지 휫필드 등 위대한 설교자들에 의해 불타오른 18세기 부흥운동에 거의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749년 찰스는 웨일즈 지사의 딸 사라 그윈(Sarah Gwynne)과 결혼하여 브리스톨에 가정을 꾸몄다. 20년 동안 그는 브리스톨의 뉴룸에서 감리회를 감독하였다. 1771년에 런던으로 옮겨 시티 로드 채플(City Road Chapel)에서 설교하였다. 찰스 부부는 여덟 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그중 두 명의 아들과 딸 하나만 생존했다. 아들 찰스 2세와 새뮤얼은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랐다. 새뮤얼은 아버지의 음악적 재능을 이어받아 많은 음악을 작곡했는데. 대부분의 작품은 바하( J.S. Bach)의 성향을 띠었다.
말년에 찰스는 두 가지 문제로 형 요한과 갈등을 빚게 되었다. 하나는 목사 안수를 하겠다는 형 요한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고, 또 하나는 찰스가 형의 결혼을 반대한 것이었다. 찰스는 결국 감리교회를 떠났다. 찰스는 감리교 단체들의 활동적인 지도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후 국교회인 성공회에 몰두했으며, 형 요한보다 3년 앞서 1788년 3월 29일, 런던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주옥같은 찬송가들은 오늘날까지 기독교 역사의 귀한 보배로 남아 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에도 ‘하나님의 크신 사랑’, ‘천사 찬송하기를’, ‘예수 부활했으니’, ‘비바람이 칠 때와’,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곧 오소서 임마누엘’, ‘웬 말인가 내 형제여’, ‘천부여 의지 없어서’ 등, 주옥같은 그의 찬송이 13곡이나 실려 있다. 그동안 설교나 신학 등은 끊임없이 변화되어 왔지만, 지금도 그의 찬송은 변함없이 신앙인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 한국에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에 의해 들어왔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조선감리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18세기 영국의 웨슬리 성결운동은 19세기 미국의 성령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 때 미국의 성령운동 여파가 일본 도쿄를 중심으로 아시아에까지 옮겨붙어 동양선교회(OMS)가 조직되고 이곳에서 설립한 도쿄성서학원에서 공부한 김상준 정빈 등 선구자들에 의해 1907년 이 땅에 성결교회가 세워졌다. 성결론 중심의 성결교회 교리는 순복음교회의 교리로 발전됐고 오늘날 한국 교회 영적 부흥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으로 볼 때 오늘날처럼 심각한 세속화 시대에 한국 교회의 재흥과 한국 사회의 도덕성 회복을 위해서는 존 웨슬리가 우리에게 보여준 제2의 홀리클럽운동이 이 땅에 일어나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