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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392. [역경의 열매] 정영관 <1-7> “목사가 되고 싶어요” 고교 때 2년간 새벽기도
교회 못가게 회초리 치시던 아버지 대입 앞두고 “신학교에 가라” 허락
양복차림의 정영관 중앙감리교회 원로목사가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중앙감리교회 예배당에서 왼손에 성경책을 든 채 활짝 웃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여든 일생을 돌이켜보면 나도 참 바보처럼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교회를 여섯 번 옮겨가며 목회를 하면서 더 큰 교회로 가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끼니를 챙기기 어려운 형편에도 교회에 사례비를 올려달라고 요청하지도 못했다. 45년간의 목회를 마치고 2006년 은퇴를 할 때도 어떤 예우를 해달라고 말하지 못하고 빈손으로 내려왔다. 은퇴 후 살 집이 없어서 반년동안 노인요양시설을 찾아 돌아다녀야 했다. 요즘 시대의 기준으로 바라보면 나와 아내는 정말 바보천치였다.
그러나 나는 목사가 된 것을 평생 동안 한 번도 후회해 본적이 없다. 사실 내 의지로 목사가 된 것이 아니라 이 역시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으로 나를 사용하신 것이다. 이런 나의 사명에 대해 지금도 감사드린다.
그래서 은퇴 후에도 중국으로 훌쩍 떠나 큰 아들이 담임하고 있는 교회에서 8년간 조선족들을 대상으로 성경을 가르쳤는지 모른다. 이들이 목회자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중국에 웨슬리신학대학원을 설립한 것도 하나님의 사명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다.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를 통해 그동안 걸었던 종의 길을 다시 한 번 돌아보니 단 한순간도 하나님의 시선이 나를 빗겨간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중학교 3학년 때 나의 꿈은 철학자였다. 철학자가 되고 싶어서 철학개론과 서양철학사 등을 사서 읽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문학가가 되고 싶었다. 문학개론, 시문학 입문을 사서 읽었다. 시도 써보고 소설도 써봤다. 그러다 고1을 마치고 봄방학 때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다. 당시 나보다 한 살 어린 15살의 전신마비 장애인이 부흥강사로 나섰다. 얼굴은 보기 흉하게 찌그러져 있었고 입도 비틀어져 침이 줄줄 흘렀다. 그런 그가 눈앞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기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을 때 내 가슴에 커다란 돌덩이가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리고 들린 주님의 음성. ‘너의 건강한 몸을 복음을 전하는데 바치지 않겠느냐.’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이튿날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2년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기도를 나갔다. 기도를 잘 하지 못했던 나는 새벽에 교회에 가서 눈을 감고 이 말만 반복했다. “하나님, 목사가 되고 싶어요. 복음을 전하는 데 제 한몸을 바치고 싶습니다. 목사가 되게 해주세요.”
충남 청양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야소교(당시엔 기독교를 이렇게 불렀다)를 믿으면 집안이 망한다”며 내가 교회에 다니는 걸 반대했다. 교회에 가지 못하도록 주일이면 일을 시켰다. 나는 일을 하다가도 예배시간이 되면 일을 멈추고 교회로 달려갔다. 돌아오면 아버지는 늘 회초리 5개를 손에 쥐고 계셨다. 회초리가 부러질 때까지 매를 맞았지만 그럴수록 나의 믿음과 소명감은 더 강해졌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 원서를 준비하는데 아버지가 나를 부르더니 “신학교에 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새벽기도를 빠짐없이 다니는 동안 성품이 변화하는 것을 보시며 신학 공부를 허락하신 것이다. 그날 밤 나는 밤새도록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감사기도를 드렸다. 당시 경험으로 나는 이후 목회를 하며 가장 큰 비중을 ‘새벽기도’에 두게 됐다.
정리=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
* [역경의 열매] 정영관 <1> "목사가 되고 싶어요" 고교 때 2년간 새벽기도
* [역경의 열매] 정영관 <2> 교사 발령 포기하고 월급 적은 부목사로 부임
* [역경의 열매] 정영관 <3> "생활비 못대 교역자 없는 곳 파송해 달라" 자청
* [역경의 열매] 정영관 <4> 교사 봉급 죄다 털어 천막 지붕 예배당 세워
* [역경의 열매] 정영관 <5> "자는 데 방해된다" 새벽종 막은 호랑이 이장님
* [역경의 열매] 정영관 <6> 유흥가 뒷골목 있던 교회 옮겨 다목적 빌딩 신축
* [역경의 열매] 정영관 <7·끝> 카페서 시작해 청년 위한 '꿈이 있는 교회' 세워
약력=△감리교신학대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석사 △미국 풀러신학대 목회학 박사 △전 건국대 교목실장 △전 학교법인 관악학원 이사장 △기감 아랍선교회 창립 △중앙감리교회 원로목사
***[역경의 열매] 정영관 <2> 교사 발령 포기하고 월급 적은 부목사로 부임
형편은 하나님이 채워주시리라 믿어… 갈라진 교인들 사이서 시작부터 난관
감리교신학대 신학과를 다니던 1950년대 중반의 정영관 원로목사.신학교를 졸업했지만 바로 내가 갈 수 있는 교회는 없었다. 다행히 충남 지역에서 고등학교 교사 채용고시에 합격해 충남 서천고등학교 영어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나는 신학교 3학년 때부터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야간에 영어와 독일어를 가르쳤기 때문에 학생들을 가르치는 건 큰 부담이 되지 않았다. 당시 급여는 월 6600원이었다. ‘지금은 내가 목회할 교회가 없으니 3년만 교사를 하고 목회를 하자’는 생각으로 서천고 교장 선생님을 만나 부임 날짜까지 확정했다. 그런데 3일 후 논산제일교회에서 나를 찾아오더니 당장 다음 주부터 부목사로 오라는 것이었다. 생활비는 월 2000원에 쌀 두 말을 주겠다고 했다.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무엇보다도 그 어려운 교사 채용고시에 합격해 부임 날짜까지 정해졌는데 갑자기 “못 가게 됐다”고 통보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큰아버지가 충남 지역에서 초등학교 교장을 지냈고, 아버지가 중학교 교사를 했다. 형과 매형도 현직 초등학교 교사로 있는 상황에서 갑작스레 교사를 못하겠다고 하면 가족들까지 욕을 먹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당시 나는 결혼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좋은 대우를 받는 곳을 선택해야 했다. 교사는 월급이 6600원이지만 목사는 2000원이란 점도 신경이 안 쓰일 수 없었다. 당시 결혼을 약속했던 지금의 아내에게 고민을 털어놓았고, 함께 기도를 하며 하나님의 응답을 구했다. 그리곤 교회에 부목사로 가기로 결정했다. 목회할 교회가 없어서 교사를 하다 3년 후 교회로 돌아갈 작정이었는데 당장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 바로 목회를 시작하는 게 맞겠다는 판단에서다. 형편은 주님께서 채워주실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나의 목회는 이렇게 시작됐다.
목회를 한다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내가 부임했을 때 교회는 교인들이 둘로 나뉘어 있었다. ‘반대파’ 교인들은 나에게 “당신은 우리교회 부목사가 아니야”라고 소리쳤다. 설교와 심방, 주일학교 인도, 새벽기도 등 교회 사역에 전념했지만 일부 교인들은 여전히 부목사로 인정하지 않았다.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로 화해하자’는 생각에 기도실 강단 앞에 커다란 십자가를 만들어놓고 기도했지만, 반대파 교인들은 십자가를 내다 버렸다. 1년여 지나 교회를 사임하고 충주의 유송교회로 갔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수십년이 지나 나타났다. 우연히 한 목사님을 만났는데 자신이 당시 논산제일교회의 교인이었다고 했다. 그 목사님은 내가 교인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도 한 번도 화를 내거나 싸우지 않는 모습을 보며 자신도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으며 나는 하나님이 당신의 종으로 부르시는 방법은 참으로 다양하다는 생각을 했다. 인정받지 못하는 목사를 보며 ‘저런 게 목사라면 안 하겠다’고 생각할 법도 한데 오히려 그런 꼴을 보고 목사를 하기로 결심했다는 게 놀라웠다.
20여년 전에는 논산제일교회에 초청받아 부흥회를 인도하며 교인들의 환영을 받았고, 이 교회 100주년 기념행사 때는 십자가 선물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못 받았던 교인들의 사랑과 내팽개쳐졌던 십자가를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되돌려 받은 셈이다.
이 일을 회상하면 나는 이 말씀이 떠오른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역경의 열매] 정영관 <3> “생활비 못대 교역자 없는 곳 파송해 달라” 자청
무릎 찢어져 짜깁기한 옷 입고 결혼식… 주의 종의 길이라 가난 부끄럽지 않아
충북 충주 금가면 유송교회의 모습. 교회 앞에 서 있는 이가 유송교회를 세운 교사 최옥란씨.충북 충주 금가면 유송교회로 가는 길엔 작은 강이 가로막고 있었다. 교회에 가려면 나룻배를 타고 이 강을 건너야 했다. 이렇게 찾아간 교회는 작은 흙벽돌로 벽을 쌓고 지붕만 얹은 채 창문도 없는 초라한 건물이었다. 유송교회는 마을 초등학교에서 근무하는 여교사가 세웠다. 이 여교사는 주일에 학생들을 데리고 학교 앞산 소나무 아래에서 함께 찬송을 부르고 성경공부를 했는데 아이들이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려면 교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장로였던 아버지의 도움으로 땅을 빌리고 동네 청년들과 함께 흙벽돌을 쌓아 교회를 세웠다. 교인들은 10명도 채 안됐다. 나이가 제일 많은 한 집사님이 식사를 제공해주셨고 내가 머무를 사랑방 하나를 내어 주셨다. 사례비는 한 푼도 없었다. 그런데 이 동네에선 돈 쓸 일이 없어서 사례비가 없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책꽂이와 책상. 내 방에 있는 가구는 그게 전부였다. 나는 꽤 많은 책을 갖고 있었다. 신학대에 다닐 때는 책을 사기 위해 점심을 굶었다. 2학년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3년간 그랬다. 학기 초에 기숙사에 점심을 안 먹겠다고 말하면 기숙사비의 일부를 환불해줬는데 그 돈으로 책을 샀다. 을지로2가 뒷골목에 있는 혈액은행에서 헌혈을 한 뒤 받은 돈으로 책을 사기도 했다. 지금도 갖고 있는 책 중에는 표지에 ‘피 값으로 산 책’이라고 써놓은 게 있다. 이런 책들을 방에 잔뜩 비치해두니 동네 청년들이 내 방을 도서관같이 이용했다. 나는 교회 청년들과 함께 봄엔 모내기를 하고 여름엔 김매고 가을엔 벼를 베고 겨울엔 교회를 수리했다. 밤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동네 아이들을 위해 공부를 가르쳤다. 이것도 목회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다른 중학교 교감으로 가게 됐다. 내가 원했던 건 아니다.
충남 온양에 있는 삼화중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이던 한 목사님이 어느 날 나를 부르더니 “교사 자격증이 있느냐”고 물었다. “있다”고 하니 삼화중 교감으로 오라고 했다. 이 목사님은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만 학교에서 근무했다. 학교를 챙길 교감이 필요하던 차에 나를 눈 여겨 봤던 것이다. 목회를 하기 위해 교사를 그만둔 적이 있던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거절했다.
그런데 이듬해 1월 내가 삼화중 교감으로 결정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제가 분명히 안 가겠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자네를 기다리며 6개월 동안 교감 자리를 공석으로 비워뒀네. 졸업식, 학생 모집, 입학식 등 주요 행사가 수두룩한데 교감이 없으면 안 된다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삼화중 교감 겸 교목으로 발령이 났고 온양온천 변두리에 있는 작은 단칸방으로 이사를 갔다. 이렇게 두 번째 목회지를 떠나야했다.
아내와 결혼한 것도 이때쯤이다. 가진 게 없어서 겨우 결혼반지 하나를 마련해 결혼식을 올리고 셋방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결혼식 때도 무릎이 찢어진 양복을 짜깁기해 입고 나갔다. 주님의 뒤를 따르는 종의 길을 걷는다는 생각 때문에 가난하게 결혼 생활을 시작하는 게 전혀 부끄럽거나 섭섭하지 않았다.
학교생활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나의 길은 교육자가 아니라 목회자였다. 나는 아산 지역의 감리사(기감의 교역자를 지도하는 목회자)를 찾아가 “생활비를 지불하지 못해 교역자를 모시지 못하는 교회가 있다면 저를 파송해 달라”고 요청했다. 학교에서 받는 생활비가 있으니 교회에선 생활비를 받지 않아도 괜찮았다. 마침 그런 교회가 하나 있었다.
***[역경의 열매] 정영관 <4> 교사 봉급 죄다 털어 천막 지붕 예배당 세워
목회자도 없이 10년간 방치 교회 청년들과 직접 벽돌 만들어 건축
정영관 원로목사가 교회 청년들과 직접 지은 신성교회. 건물 앞에 아이를 안고 있는 이가 정 목사의 아내다.감리사에게 추천받은 교회는 충남 아산에 있었다. 주일 아침 일찍 시외버스를 타고 1시간 30분 정도 간 뒤 버스에서 내려 한참을 찾았지만 교회는 보이지 않았다. 물어 물어 겨우 찾아간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한 농가였다. 사립문에 ‘신성교회’라는 작은 간판을 걸어놓고 주일마다 목회자도 없이 청년 둘이 대청마루에 앉아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이 교회는 1953년 9월에 기도처로 시작했는데 10년이 흐르는 동안 전담교역자를 구할 형편이 못돼 더 이상 교회를 유지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건물도 없고 교인도 둘뿐이라 당연히 한 푼의 사례비도 없었다. “교감으로 있는 학교에서 월급을 받으니 내 생활비는 걱정하지 말라”며 교인들의 부담을 덜어주고 이 교회에서 다시 목회를 시작했다. 주일 아침마다 시외버스를 타고 신성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린 뒤 오후엔 동네 주민들을 찾아 다녔다. 저녁예배까지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이미 밤이 깊었다. 수요일에도 학교를 일찍 마치고 교회에 가서 저녁예배를 인도했다. 청년 둘을 놓고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며 말씀을 전했다. 이렇게 6개월을 하니 교회에 발길을 끊었던 동네 주민들이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교인도 늘었고 동네 어르신들과도 가까워졌다. 교감이 된 것은 내 의지가 아니었고 ‘울며 겨자 먹기’로 떠안은 자리였지만 동네 주민들은 전도사보다 교감이라는 것 때문에 나를 인정해줬다. 이것이 마을 주민들에게 복음을 심는데도 큰 도움이 됐다. 하나님은 그렇게 나의 목회를 이끌고 계셨다.
청년 둘로 시작했지만 교인은 금세 10여명으로 늘었다. 대청마루가 비좁아지면서 방문을 열고 건넌방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방까지 예배당으로 써야했고 급기야 강대상을 마루 아래 추녀 밑에 두고 말씀을 전했다. 이듬해 봄, 나와 아내는 아예 교회 근처로 이사를 했다.
교인 수가 늘면서 예배당이 필요했다. 돈이 문제였다. 땅도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기도뿐이었다.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고 인근 밭 300여평을 교인 한 가정과 함께 매입할 수 있게 해 주시고 그 중 100평을 쌀 세 가마니에 교회부지로 쓸 수 있게 하셨다. 교회 건축은 교회 청년들과 힘을 합쳐 직접 했다.
당시 내가 교감으로 있던 삼화중학교도 교실이 부족해 공사를 했는데 건축기사들이 쓰던 흙벽돌 제조기를 빌려서 4개월 동안 교회 청년들과 함께 벽돌 1500개를 만들었다. 기술자 2명을 고용해 직접 땅을 파서 기초를 만들고 벽돌을 건축현장까지 옮겨 벽돌을 쌓고 대들보와 서까래를 올렸다. 막상 지붕을 올리려고 보니 돈이 없어서 천막으로 덮었다. 이렇게 예배당을 짓는데 학교에서 받는 봉급을 죄다 사용했다. 감리사와 몇몇 목회자를 초청해 입당예배를 드리는데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10년 간 목회자도 없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던 교회에 사람과 건물을 세워놓은 뒤 이듬해 나는 목사 안수를 받고 다른 교회로 파송됐다.
교회를 짓느라 생긴 빚을 갚기 위해 우리 부부는 소중한 것들을 포기해야 했다. 아내는 두 돈짜리 백금 결혼가락지를 팔았고 나는 한 돈짜리 백금 반지를 팔았다. 결혼식 때 양복 대신 샀던 오디오까지 팔았더니 말 그대로 빈털터리가 됐다. 우린 결혼을 한 뒤 첫 번째 목회지이자 사랑과 정성과 재산을 쏟아 부었던 교회를 떠나야 했고 교인들은 첫 번째 담임 목회자를 보내야 했다. 교회를 나서면서 우리 부부와 교인들은 부둥켜안고 울었다.
***[역경의 열매] 정영관 <5> “자는 데 방해된다” 새벽종 막은 호랑이 이장님
설득하려 매일 찾아가 안부 묻다 친구 돼… 나중엔 “종치면 빨리들 일어나” 바뀌어
경기도 파주 봉일천교회 건물 앞에 선 정영관 원로목사 부부의 모습.신성교회를 떠나 다음 부임지로 간 곳은 경기도 파주의 봉일천교회였다. 이삿짐을 내려놓고 쉬고 있는데 밤 10시가 넘어서 한 여성 교인이 집에 찾아왔다. 손에는 고기가 들려있었다. “목사님, 예배시간에 대표기도 시키지 말아주세요. 그거 부탁드리려고 왔어요.” 고기는 청탁용이었다. 어이가 없으면서도 재밌기도 했다.
넉 달쯤 뒤 그 교인이 수요 저녁예배의 대표기도를 할 차례가 됐다. 나는 주보 대표기도 담당자에 그분의 이름을 적었다. 그리곤 그분을 만나 이야기했다. 왜 공중기도를 해야 하는지,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초등학교 교사이고 믿음도 신실했던 그분은 내 말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돌아오는 수요일 저녁. 그분은 말도 없이 교회에 나타나지 않았다.
다른 교인들은 “앞으로 그 교인은 교회에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까운 교인을 잃었다”며 뒤에서 날 나무라는 교인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다음 주 주보에도 수요 저녁예배 대표기도 담당자에 그 여성 교인의 이름을 적었다. 그리곤 찾아가서 다시 설득했다.
“언제까지 예수 믿으실 겁니까.” “평생 믿어야지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면 평생 공중기도를 안하실 생각입니까.” “시간이 지나면 하게 되겠지요.” “아뇨. 기도를 배우고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기도는 훈련입니다.”
간단하게 기도문을 적어드렸다. 그분은 내가 써준 기도문을 외워서 대표기도를 했다. 기도가 끝나자 다른 교인들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평생 처음으로 대표기도를 한 이 교인은 이후 집사를 거쳐 권사가 돼 속장, 여선교회 회장으로 열심히 교회를 섬겼다. 그리고 우리교회 첫 여성 장로가 돼 지방 여선교회 회장까지 역임했다.
나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초종(初鍾)을 치고 교회에 들어가 호롱불을 키고 빗자루로 예배당 바닥을 쓸었다. 방석을 깔고 기도를 하다가 4시30분이 되면 재종(再鍾)을 친 뒤 새벽기도회를 인도했다. 고등학생 때 교회에 간다고 아버지에게 회초리가 부러질 정도로 종아리를 맞았던 나는 새벽기도를 통해 믿음을 키웠고, 신학대에까지 갈 수 있었다. 나에게 새벽기도회는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우리 동네엔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동네를 좌지우지하던 ‘호랑이 이장’이 살고 있었다. 그가 어느 날 교회를 찾아와 무서운 눈을 부릅뜨고 새벽종을 치지 말라고 한 것이다. 그날부터 난 새벽기도를 하며 이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간구했다. 그리고 매일 이장을 찾아갔다.
이장은 마을에서 외톨이였다. 그를 매일 찾아가며 대화하고 가까워지는 건 쉽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매일 찾아가 이런저런 안부를 물었다. 그러다보니 호랑이 이장님도 웃는 얼굴에 침을 뱉지는 못했다. 30대 초반인 나와 환갑이 넘은 노인은 좋은 친구가 됐다. “동네 사람들 자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며 새벽종을 치지 말라던 이장은 그 후 새벽종소리가 나면 “젊은 놈들아, 빨리빨리 일어나라”고 했다.
시간이 흘러 봉일천교회에서 중앙감리교회로 옮겨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봉일천교회가 있던 마을에서 사람이 왔다. “이장님이 병환이 위독해 돌아가실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목사님을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서울에서 달려가 상봉한 뒤 사흘 만에 이장님은 세상을 떠났다.
***[역경의 열매] 정영관 <6> 유흥가 뒷골목 있던 교회 옮겨 다목적 빌딩 신축
부임 후 예배당 재건축 놓고 고민… ‘신앙 바로 세우기’ 새벽기도 먼저
1981년 4월 철거되기 전의 중앙감리교회 모습.만 4년간의 봉일천교회 목회를 마치고 1969년 3월에 서울 종로 한복판에 있는 중앙감리교회 부목사로 부임했다. 종로거리는 한밤중에도 네온사인 때문에 대낮처럼 밝았다. 교회에 들어오는 골목길에는 술집 여관 나이트클럽 카바레 등이 즐비했다. 신학대를 졸업한 뒤 줄곧 시골목회만 한 나에게 종로거리는 별천지였다. 나는 1969년 3월 16일(주일)에 ‘적신호 앞에 있는 한국교회’라는 제목으로 부임설교를 했다. 평소 80여명이 나왔었는데 부목사가 온다는 소식에 남자 49명, 여자 65명, 총 114명이 출석했다.
그리고 1년 후 담임목사가 됐다. 내 나이 서른다섯이었다. 중앙감리교회는 1890년 초대 선교사인 아펜젤러에 의해 세워진 감리교의 모(母)교회 중 하나다. 오랜 전통의 교회를 30대의 젊은 목사가 담임한 것은 초유의 일이었다. 교회는 낙후될 대로 낙후돼 있었다. 뒷골목 안에 초라하게 서 있는 교회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두려움과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바로 새벽에 나가 예배당 구석에 있는 의자에 꿇어앉아 기도를 시작했다.
우리교회는 내가 부임하기 10년 전에 교회 건축을 결정했다는데 이뤄지지 못했다. 나는 건축보다 신앙을 바로 세우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에 ‘신앙 바로 세우기 운동’을 시작했다. 몇몇 교인들과 함께 철야기도를 시작했다. 수요 저녁 예배를 마치면 항상 예배당 앞쪽 강단 앞에 둘러앉아 밤새 기도했다. 방한시설이 전혀 안 돼있어 겨울엔 찬바람을 막기 위해 벽과 바닥에 비닐과 천을 덮고 무릎을 꿇었다. 교회에 올 때 이불을 들고 오는 이들도 있었다. 매일 아침 6시에 모여 1시간30분 동안 성경공부를 하고 토스트와 삶은 계란, 커피로 아침식사를 같이 한 뒤 직장과 학교로 흩어졌다.
건축헌금을 하기 시작했다. 전교인이 매월 1만1400원씩 2년을 넣으면 30만원을 받을 수 있는 적금에 가입했다. 이 금액을 생일에 감사헌금으로 내면 전액 건축에 쓰겠다고 광고하자 전교인이 동참했다. 한 권사님은 회갑잔치를 하려고 모은 돈을 건축헌금으로 드렸고, 어떤 교인은 결혼반지를, 어떤 이는 아이 돌 반지를 냈다. 3년이 지나자 무려 3000만원이 모였다.
교인들은 교회 건축 부지를 옮기는 게 좋겠다고 했다. 교회 주변에 술집이 많아 교인들이 드나들기가 불편했고 복잡한 골목에 들어서 있어 교회를 찾아오기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전교인이 기도로 새 성전 부지를 찾던 중 인근에 880평 규모 부지와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 본부 사무실이 있던 2층짜리 건물을 발견했다. 우린 대지 한 편에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리다가 기감본부가 이사 간 뒤부터 2층짜리 건물에서 예배를 드렸다.
교회 건축을 하는 동안 나는 여러 번 전셋집을 옮겨 다녔다. 서울 마포구에 새로 분양하는 아파트가 있어 건축위원들은 담임목사 명의로 사자고 했지만 나는 극구 거절해 ‘재단법인 기독교대한감리회 유지재단’ 명의로 구입했다. 1983년 1월 9일 성전 건축공사를 마치고 눈물의 입당 감사예배를 드렸다.
서울의 도심지라는 입지조건과 급격한 도시화라는 시대적 요건에 맞춰 다목적 빌딩으로 건축했고 우리는 건물 이름을 ‘하나로빌딩’으로 지었다. 지금도 종각역에서 나오면 피맛골 뒤편으로 지하 3층 지상 12층의 하나로빌딩이 보인다. 이 이름은 ‘하나님께로, 동서남북이 하나로’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우리 모든 교인들의 신앙고백이자 이 건물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결의의 표현이다.
***[역경의 열매] 정영관 <7·끝> 카페서 시작해 청년 위한 ‘꿈이 있는 교회’ 세워
감리교에서 45년간 목회 외길 보람… 은퇴 후에도 교회와 좋은 관계 감사
1983년 2월 완공된 중앙감리교회 모습.중앙감리교회에서 목회하며 하나로빌딩의 지하공간을 교육관으로 사용했다. 지하실에 ‘제이씨하우스(J-C House)’라는 카페 형식의 청년교회를 만들어 교회학교 및 청년들을 위한 열린 예배를 시작했다. 교회 안에 또 다른 교회를 만든 것이다. 교회 청년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친구들을 초청해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하면 우리 교회 부목사면서 이 청년교회를 담당한 하정완 목사가 다가가 신앙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때가 1997년으로 서울 시내 최초의 청년카페였다. 학창시절 아버지에게 매를 맞으며 교회를 다녔던 나는 청소년과 청년 사역에도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었다. 송정미 최인혁 최덕신 좋은씨앗 등 유명 CCM가수들과 신인가수들을 초청해 공연도 했다. CCM 공연장이 없던 시절 제이씨하우스는 CCM 가수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다. 해가 거듭되면서 청년들의 수가 점점 늘어 하나로 빌딩 지하에서 모임을 갖기가 어려워졌다. 우리교회에서 5000만원을 지원해 종로구 북촌마을에 새로운 예배처를 구했다. 35명의 청년들과 함께 젊은이교회인 ‘꿈이 있는 교회’를 시작했다.
교회 창립 100주년을 맞아 경기도 파주에 하나로중앙교회를 개척했다. 우리 교회에서 10년 넘게 부목사로 헌신했던 최헌 목사를 담임목사로 파송했다. 1998년 8월30일 기공예배를 드린 뒤 건축공사를 시작해 1999년 2월에 눈물의 봉헌예배를 드렸다. 마치 정성을 다해 기른 자식을 결혼시켜 새살림을 내주는 것 같은 감격과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교회의 교육적 사명을 다하기 위해 교회 110주년 기념사업으로 분규 중이던 관악여자정보산업고등학교를 인수해 서울관광고등학교로 특성화한 뒤 명문 기독교학교로 발전시켰다.
목회라는 직업은 그 성격상 보수를 위한 직업이 아니기 때문에 보수에 대한 정해진 기준이 없다. 그래서 교회와 목사 간의 아가페적 사랑만이 유일한 기준이다.
나는 감리교회 목사로 45년, 그 중 38년을 중앙교회 목사로 오직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목회한 뒤 은퇴했다. 교회를 건축하기 전에는 교회를 건축해야 하니까, 교회를 건축한 다음은 빚을 갚아야 하니까, 빚을 갚은 후에는 선교와 교육과 사회봉사의 사명을 다해야 하기 때문에 생활이 어려워도 생활비를 올려달라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은퇴를 앞둔 우리 부부는 노후에 대한 준비가 전혀 돼있지 않았다. 살 집도 없었고 노후 생활 대책도 없었다. 세 아들은 모두 외국에서 목회를 하고 있기 때문에 나와 아내가 은퇴 후 함께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은퇴를 1년 반 앞두고 양로원 등 노인요양시설을 찾아다녔지만 교회나 교인에게 은퇴 후 예우문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중앙감리교회는 내가 살던 38평형 목사관과 목회를 위해 타고 다니던 승용차, 목회 공로금 1억원, 매월 생활비를 지원해주기로 결정했다. 중앙감리교회의 아가페적인 목사 사랑이었다.
나는 이임예배에서 “하나님께서 지난 38년간 나에게 사랑하는 중앙감리교회를 맡기셨던 것처럼 후임 정의선 목사에게 이 교회를 맡기셨으니 온 교회가 후임 목사님을 도와 교회를 부흥시켜 달라”고 당부한 뒤 큰 아들이 목회하고 있는 중국으로 떠났다. 이는 중앙교회에 대한 나의 아가페적인 사랑이었다. 나와 교회가 이렇게 아름다운 관계로 남아있게 하시고 멋지게 원로목사의 삶을 살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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