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세이 - 중일전쟁(1937), 일제의 전쟁 야욕과 한국의 황폐화
1. 일본은 1937년 사소한 사건을 핑계로 전격적으로 중국을 대대적으로 침략했으며 베이징과 난징을 비롯한 중국의 대도시를 점령했다. 특히 1937년 12월에 점령한 난징에서는 2개월 사이에 30만 이상 되는 시민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분으로 분열되었지만, ‘서안사변’을 계기로 일시적인 합작을 통해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였다. 일본의 전쟁 확대는 ‘조선’을 전쟁 기지화 및 병참화할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식민지 통치의 급격화된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2. 일본은 조선을 철저하게 식민지 국가로 종속시킬 필요성이 있었다. 그것은 조선인을 징병했을 때 일본에 대한 반항을 근본적으로 봉쇄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런 목적으로 전방위적으로 조선인의 민족적 색깔을 지워버리고 일본에 대한 철저한 복종을 목표로 하는 ‘황국신민화’ 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조선어 사용이 금지되었고 내선일체를 주장하면서 일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황국서사’를 낭독하게 하였다.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창씨개명’을 요구하였고 전국에 신사를 설립하여 강제로 참배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강압을 통해 조금의 저항이라도 막아버린 후 ‘육군특별지원병제도’를 통하여 군사적 모집을 실시하였다. 친일적 언론이나 인물들을 동원해 독려하고 찬양하게 하였던 것이다. 당시 <조선일보>의 사설을 통해 이러한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다. “금번 지원병 제도의 실시는 위정당국에서 위로는 일시동인의 성려를 봉체하고, 아래로는 반도 민중의 애국열성을 보아서 내선일체의 대정신으로 종래 조선민중의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던 병역의무의 제일 단계를 실현케 하는 것이다.”
3. 조선인 특별징병제도를 통해 매년 지원병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이러한 증가에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는데 근본적으로 일본의 물리적 압력과 선전단체의 강압에 의한 결과라고 보는 주장과 ‘전민족적 협력’이라는 시각으로 바라보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협력’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당시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 혜택과 신분적 상승을 미끼로 던져진 징병제도를 하층신분의 사람들이 받아들였고 그러한 결과 지원병 수가 늘어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표면적인 이유를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하층민들이 지원할 수밖에 없던 사회경제적 어려움이 더 큰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에 자발적으로 나갈 수밖에 없을 만큼 현실의 고통이 심했다는 하나의 반증이 아니었을까?
4. 일제의 사회적 억압은 제도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일시적으로 허용되었던 친목단체 형태의 조직도 용납하지 않았다. 기독교인들이 동호인 형태로 운영하던 ‘수양동호회’와 ‘흥업구락부’ 등이 반일이라는 이유로 탄압받았고 관계자들은 감옥에 투옥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 ‘수양동호회’를 통해 민족의 자강운동을 전개하였던 안창호가 병이 악화되어 사망하였고, 안창호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이광수는 커다란 충격을 받게 된다. 결국 ‘수양동호회’ 사건은 이광수가 일제에 대한 전폭적인 협력을 약속한다는 서약을 통해 해결되게 된다. 이때 이광수를 비롯하여 ‘전영택, 주요한, 현재명, 홍난파’ 등도 친일서약서를 쓰고 풀려나는 것이다. 이 사건은 조선 지식인들의 ‘친일’과 관련된 근본적인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즉 중일전쟁 이후 변화된 일본의 군국주의적 경향은 조금의 자립이나 민족적 자강에 대한 시도도 금지시켰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오로지 일제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서춘의 다음과 같은 기록은 시대의 상황을 짐작하게 해준다. “소화 5년(1930)까지 21년간은 조선 사람 2,300만명 거의 전부가 정신적으로 일본인이 아니었지만 만주사변의 결과 조선의 독립은 도저히 바랄 수 없는 것을 깨닫게 됐다.”
5. 조선의 비극은 국내에서만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1937년 8월 소련의 스탈린은 연해주에 살고 있던 약 17만 5000명의 고려인(카레스키야)를 강제로 중앙아시아로 이주하도록 명령했다. 연해주의 황무지를 개척한 고려인들을 갑자기 또 다른 황무지인 중앙아시아로 쫓아버리는 명령이었던 것이다. 일본과의 접촉을 막는다는 핑계를 내새웠지만 사실 고려인이 개척한 땅을 러시아인들에게 제공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이것을 추진하면서 민족적 저항을 차단하기 위해 조선의 지식인을 약 2500명 총살하면서 반발을 억눌렸다. 강제 이주의 참혹한 과정 속에서 1만이 훨씬 넘은 사람들이 추위와 기아 그리고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으며, 정착하는 과정 속에서도 수많은 희생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나라 잃은 민족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참혹한 현실을 보여주는 사례이며, 강대국의 쇼비니즘에 의한 폭력적 행위였던 것이다. 고려인들의 비극은 대한민국이 건국되었지만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 소련 땅에 거주하던 수많은 민족들의 모국들은 자기 민족들을 조국에 귀환시키기 노력했지만 한국은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6. 이렇듯 1930년대 중반 이후 조선과 만주 그리고 연해주에 살고 있던 조선인들은 거대한 역사의 격류 속에서 무력하게 떠밀려야만 했다. 누구도 삶과 생존을 책임져주지 않은 상황에서 각자도생의 고통 속에서 존재하여만 했던 것이다. 이 시대를 고찰할 때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인 역사적 논쟁이 발생한다. 하나는 한국 자본주의의 기원과 관련된 논쟁이며, 다른 하나는 ‘친일’에 대한 규정에 관한 논쟁이다. 만주사변으로 만주를 점령한 일제에 의해 조선의 많은 기업들도 만주에 진출하였고 그 중에는 <경성방직>과 같이 엄청난 부를 축적한 기업도 생겨난 것이다. 미국의 역사학자인 애커드는 『제국의 후예』라는 작품을 통해 이러한 상황이 조선인 기업가의 성장에 결정적이었으며 한국 50대 재벌의 창시자 중 60%가까이가 식민지 사업경험을 갖고 있다고 분석하였다. 신자유주의자들의 ‘식민지 근대화론’에 기초한 또 다른 견해들은 이러한 기업들의 적응력과 활동력이 한국 경제 발달과정에서 중요한 유산이 되었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조선의 사업 참여는 일본의 병참화 정책에 의한 산물이었으며 다수 민중의 고통을 전제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서구가 갖고 있던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한 역사관의 관점이 담겨있다는 비판하는 입장도 강하게 존재한다. 역사적 사건이나 변화는 분명 하나의 결과만이 파생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가져다 준 다양한 효과에 대한 검증은 필요하다. 하지만 기술적, 행정적 장점을 주었다는 이유로 그것이 지향했던 근본적인 억압과 착취의 성격을 희석시키려는 의도는 분명하게 파악해야 한다. 모든 행위는 결과와 함께 의도와 원인까지 포함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7. 이러한 역사의 논쟁은 ‘친일파’에 대한 논쟁으로까지 연결된다. 현재 친일을 넘어 ‘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는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인 의도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친일했다는 옹호론도 제법 존재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홍난파’이다. 홍난파는 <성불사의 밤>이나 <봉숭아> 등과 같이 민족적인 노래를 작곡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감동을 주었지만, 식민지 말기 강요에 의해 작곡한 몇 편의 군가 때문에 친일인사로 지목되었는데 이러한 평가는 과도하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역사적 논쟁은 사실을 정확히 밝히고 평가한 후에 객관적인 처벌이나 그것을 극복하는 화해와 용서의 순서로 전개되어야 함에도 한 번도 제대로 사실에 대한 객관적 검증을 거치지 않은 채로 각자의 이념적인 잣대로 파편적으로 의견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해방 후, <반민특위위>를 통해 각자의 잘못을 평가하여 거기에 합당한 처벌이나 관용이 주어져야 했지만 정치적 이유로 무산되었기 때문에 지금도 ‘역사전쟁’은 끝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첫댓글 - 역사의 흐름과 생존, 개인과 민족? 국가? 사회? 글쎄........... 누구 목소리가 더 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