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인생의 밤을 지나라!
욥기 38:1-24
욥이 세 친구와의 긴 변론의 과정이 끝난 후에 제4의 인물인 엘리후가 등장해서 욥으로 하여금 그의 삶을 하나님께로 나아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도록 도전했던 내용을 우리는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드디어 하나님께서 친히 등장하셔서 욥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살펴보게 될 내용입니다.
사실 우리는 욥기의 서막인 1장을 읽으면서 욥이 자신에게 다가온 그 엄청난 역경과 시련 앞에 담대하게 서서 이렇게 외치는 부분을 통해 큰 감동과 도전을 받았습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그런데 욥기는 1장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우리는 38장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욥기가 1장에서 끝나지 않고 38장에 이르기까지 긴 변론의 과정을 거쳐야만 했던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욥기의 서막에 나타난 욥의 모습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모습입니다.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승리하는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역경과 폭풍우를 담대하게 맞서서 이기는 그의 모습은 우리들에게 큰 감동과 도전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38장에 이르는 동안 욥은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세 친구들과 기나긴 변론의 시간을 보내면서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 억울함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말씀 좀 해 보세요. 왜 잠잠하십니까?”
욥의 이 자기 방어는 마침내 한계선을 넘어서, 자기가 전적으로 옳고 의롭다고 주장합니다. 그와 같은 욥의 주장은 의로운 자기에게 이유 없이 이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이 잘못되었다는 논리에까지 가게 되고 맙니다. 욥이 그의 세 친구들과 더불어 변론을 주고 받을 때 그 토론의 핵심이 되는 중요한 원리는 ‘인과응보의 원리’였습니다. 세 친구는 계속해서 욥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욥이여, 네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너에게 나쁜 일이 생길 수는 결단코 없다. 너에게 이 고통이 임한 것은 반드시 네가 그만한 나쁜 일을 범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너의 숨겨진 잘못과 죄악들을 모두 고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거라.”
이것이 욥의 세 친구들의 변론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들 세 친구들의 변론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42장에서 밝히십니다. 욥기 42장 7절에서 하나님은 욥을 두둔하십니다. 그러므로 세 친구와 욥의 변론에서 사실상 승리자는 욥입니다. 세 친구는 변론 과정에서도 욥을 항복시키지 못했고, 설득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세 친구들과의 변론에서 욥이 모두 합당한 발언만을 한 것은 아닙니다. 이 논쟁을 벌이는 동안에 욥 자신도 자기를 변호하는 과정에서 인과응보의 원리를 적용했습니다.
“나는 옳다. 나는 의롭다. 나는 절대로 잘못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나에게 이 시험을 주시는 하나님이 잘못하신 것이다.”
욥이 여기에까지 이르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이 욥에게 마지막 혹독한 책망을 하시는 것을 우리는 40장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욥기 40장은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1절과 2절의 말씀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욥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계속해서 나와 시비할 것이냐? 논쟁을 할 것이냐?”
그러자 그 다음 절에서 욥이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3절부터 5절까지의 말씀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 대답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욥의 이 대답이 있은 다음에 8절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8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중심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욥이나 그의 세 친구들의 문제 해결을 위한 접근 방법이, 그들의 삶을 형성하는 가장 중심 되는 원리가 무엇인가를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의 차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율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이 계명이 항상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메시지는 간단히 요약해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라”이며, 나머지 하나는 “하지 말라”입니다. 했으니까 나는 옳은 것이고, 안 했으니까 나는 옳은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차원이고 수준입니다.
“나는 해야 할 것을 했습니다. 따라서 나는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 율법의 차원과 도덕적 수준은 우리의 삶의 양식 속에서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율법 그 이상의 삶을 요구하십니다.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의 삶은 율법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은혜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마십시오. 만일 우리가 행한 것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면 우리 가운데 구원받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율법을 파괴한 율법의 범법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는 율법 아래에서 정죄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에서 진노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율법대로 하자면 우리는 다 심판을 받고 지옥에 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무조건 용납하시고 용서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그 분으로 내가 대가 없이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 이것은 율법이 아닙니다. 이것은 율법 이상의 것입니다. 은혜입니다. 이제 이 은혜로 말미암아 주의 자녀된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율법적인 수준과 차원 이상의 삶을 요구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이 욥기를 통해서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신앙의 경험을 아주 잘 설명해 주는 하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중국 그리스도인의 간증입니다. 이 사람은 농사를 짓는 사람인데 불신자의 논과 나란히 붙은 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논은 지형상 항상 물이 고여 있도록 된 논이고, 불신자의 논은 항상 물이 빠져나가도록 된 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불신자는 밤중에 몰래 이 그리스도인의 논에 와서 물을 다 빼어가고는 했습니다. 그 날도 이 그리스도인이 아침에 논에 나가보니 자기 논에는 물이 다 빠져 있고, 그 옆의 논에는 물이 찰랑찰랑 차 있었습니다. 이 그리스도인은 대뜸 불신자인 논 주인에게 따졌습니다.
“아니, 본래 우리 논에 있던 물을 왜 다 빼 갔습니까?”
이 말에 그 불신자는 자기는 절대로 물을 빼 오지 않았다고, 그냥 저절로 흘러들어 왔다고 잡아떼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화가 잔뜩 난 채로 물을 다시 자기 논에 가득 채워놓고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이 되니 역시 물이 옆 논으로 다 들어가 있었습니다. 이 믿는 친구는 또 한바탕 따지고 물을 채워 놓았습니다. 이런 물대기 싸움을 며칠 계속했는데, 싸울 때마다 믿는 친구의 주장은 이것이었습니다.
“본래 이 물은 내 논에 고여 있던 물이었으므로 내 논의 물을 내가 쓰고 보호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러면서 한편 그의 마음에는 평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리는 시간에 하나님께 간절히 물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당연히 취할 권리를 취하는데도 제 마음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옆 논 주인이 잘못해서 그를 깨우치는 데에도 평안이 없습니다. 제 마음이 평안하지 못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게 기도하는 가운데 이 친구의 마음 속에 이런 질문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너는 왜 너의 올바름만 생각하고 주장하느냐? 그 이상의 일은 할 수 없더냐? 왜 네 논의 물이 필요한 이웃에게 스스로 물을 대 주지 못하느냐?”
이 그리스도인 친구에게 깨우침이 왔습니다.
“아, 그렇군요. 저는 제가 옳다는 사실만 우기고 있었지, 제 도움과 사랑이 필요한 이웃에게 무엇을 베풀어야 할지에 관한 더 높은 수준의 삶을 향해서는 눈을 감고 살았군요.”
그 날 저녁, 이 믿는 친구는 논에 나가 옆 논 주인이 오기 전에 자진해서 그의 논에 물을 대 주었습니다. 잠시 후 옆 논 주인이 여느 날과 다름없이 몰래 물을 빼내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는 자기 논에 이미 물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금방 그 이유를 알아차렸습니다.
다음 날, 그는 이 믿는 친구를 찾아와서는 고개를 숙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동안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당신이야말로 진짜 그리스도인입니다. 당신의 마음 속에 있는 그 예수를 나도 알고 싶습니다.”
그래서 전도가 이루어졌다는 간증입니다. 이 사건은 내가 옳고 당신이 그르다고 따지는 것 이상의 삶을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성숙한 성도의 응답을 보여준 아름다운 사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누가 내 오른빰을 칠 때, 그때 가장 정당한 나의 행동은 무엇이겠습니까? 율법에 의하면 나는 그에게 달려가서 두 주먹으로 힘껏 그를 치는 것이 정당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행동은 내 왼빰까지 돌려대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욥기를 통해서 이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이 오는 이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해 머물러 서서 그리스도인답게 삶을 사는 이 성숙한 삶에 대한 도전 앞에 나는 응답할 수 있겠는가?”
오늘 우리가 봉독한 38장의 내용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세계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창조자다. 내가 바다를 만들었다. 내가 새벽의 빛을 만들었고, 내가 어둠을 만들었다. 내가 변하는 계절을 만들었고, 별들의 움직임을 만들었다. 내가 번개를 만들었고, 구름을 만들었으며, 비를 만들었다. 이 자연의 세계 속에 나타난 나의 전능성과 지혜를 욥 너는 보지 못하는가?”
그런데 흥미롭게도 욥이 계속해서 하나님께 묻고 있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이 고통과 불행을 당해야 합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욥이 물었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 대답 대신에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38장 1절부터 3절까지에서 하나님이 욥을 향해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은 이것입니다.
“내가 이 땅을 만들고 있었을 때에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누가 이 태양과 이 달의 거리를 만들었느냐? 바닷물을 누가 만들었고, 흘러가고 있는 저 바닷물의 조류를 누가 움직이고 있느냐? 네가 명하여 아침이 오고 밤이 오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이 메시지의 초점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이 말입니다.
“나 여호와가 창조자야. 네가 창조자가 아니야.”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은 피조물이면서도 자기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연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초라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만물의 영장이라고 거들먹거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인간이 하나님이 되려는 착각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이 되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이 본능을 추켜세운 것이 바로 사탄의 첫 번째 도전이었습니다. 생각나십니까? 마귀가 맨 처음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를 찾아와서 던졌던 미끼가 무엇입니까? 창세기 3장 5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그래서 내가 말하는 것이 항상 정당하고, 내 판단은 항상 옳다는, 이 인간의 제한성과 한계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기 우상화의 본능과 실증을 우리는 욥이 말하는 항변 속에서 발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옳습니다. 그리고 내가 옳다면 하나님이 틀리신 것입니다.”
이렇게 항변하는 욥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항변과 이 철학을 가지고 나에게 도전하고 있는 너는 누구냐? 내가 하늘을 설계하고 땅을 창조할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39장을 통해 생명의 신비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39장 전체는 동물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염소, 암사슴, 들나귀, 들소, 타조, 말, 매, 독수리 등의 동물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들 동물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내용은 이것입니다.
“이 생명의 신비를 네가 아느냐? 누가 그들을 지었는가? 누가 그들을 기르는가? 이 모든 동물들은 내가 만들었을 뿐 아니라 내가 그들을 기르고 있다. 그런데 하물며 인간이랴? 네가 당하고 있는 이 고통과 아픔에 대해서 너는 왜 어찌하여 이 고통을 주느냐고 말하지만,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내가 안다. 내가 무지하게 그것을 섭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창조주이며 전지전능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40장에 들어오면 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욥이 드디어 침묵하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욥에게 한 번 물어보십니다. 그 내용이 2절의 말씀인데,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그러니까 이런 말씀입니다.
“그래도 네가 할 말이 있느냐? 아니면 그만 두겠느냐?”
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비로소 욥이 깨닫습니다. 4절의 말씀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제가 참으로 어리석은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무슨 말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손으로 입을 가리울 뿐입니다.”
욥이 이런 자세로 나오는 것은 처음입니다. 지금까지 욥은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변론했습니다. 어쩌면 그 변론은 지루한 변론이었습니다. 세 친구들과 욥의 대화의 내용을 보십시오. 그들은 인과응보의 원리에 따라 했던 말을 하고, 또 했습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원래 변론이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몇 시간을 이야기를 해도 그 내용은 그것이 그것입니다. 했던 말만 계속해서 되풀이 할 뿐입니다. 결코 생산적이지 못합니다. 신앙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인생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논쟁하지 마십시오. 변론을 좋아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이 사실을 욥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인간됨의 한계와 연약한 존재임을 알아갑니다. 그렇습니다. 고통과 고난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붙잡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았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욥이 깨달은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욥이 보인 반응이 무엇입니까? 42장 1절부터 5절까지의 내용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이것이 욥기의 가장 중요한 절정의 고백입니다. 드디어 욥은 깨달았습니다. 이 깨달음의 절정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제가 지금까지 하나님에 대해서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눈으로 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욥이 자신이 왜 이유 없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그 해답을 얻었습니까? 아닙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왜 이런 고난을 허용하시는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욥이 하나님을 알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어떤 문제를 두고 기도할 때 그 문제에 대한 대답을 얻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응답보다 더 놀라운 것, 곧 하나님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이 깊은 기도, 이 간구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욥이 체험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욥은 자기가 묻고 있는 물음에 대한 속 시원한 대답을 얻지 못했을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이 고난의 문제를 끝없는 신비의 베일 속에 그대로 묻어두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과의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계시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욥은 하나님을 교리적으로는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동안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도 그런 것은 들어서 압니다. 제가 교회에 나온 지 몇 년인데요? 하나님이 누구시냐고요?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무소불능하신 분이지요.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이시고요.”
욥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이렇게 말합니다.
“전에는 그것을 귀로만 들어서 알았는데 이제는 눈으로 봅니다. 이제는 체험으로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그 사실 앞에 제가 무릎을 꿇습니다.”
그렇습니다. 욥은 이전에는 귀로, 지식으로만 알았던 하나님을 이제는 눈으로, 온 몸으로 알았습니다. 욥은 이제 하나님을 자기의 전 존재를 통해서 경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6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하나님은 회개를 통해서 인생에 대한 깊고 새로운 의미의 깨달음을 얻은 욥에게 새 삶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이 욥을 축복하신 것은 아닙니다.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 보면, 욥이 전에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의 갑절을 얻기는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 때문에 욥이 축복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여기에서 축복의 문제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욥기를 그런 축복의 차원에서 보는 것은 욥기가 우리들에게 주고자 하는 깊은 교훈에 대한 모독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욥의 새 삶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이 마지막 장에서 우리가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결론이 하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결론을 그냥 지나칩니다. 하나님이 이 마지막 부분에서 새로운 삶을 얻은 욥으로 하여금 행하게 하시는 새로운 사건 하나가 있습니다. 욥을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감사로 그 자리에 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욥이 그 친구들을 위해서 무엇을 합니까? 10절의 말씀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사랑하는 여러분, 축복 이전에 있었던 더 중요한 이 사건을 놓치지 마십시오.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욥은 하나님으로부터 귀중한 깨달음을 얻은 후에 자기를 괴롭혔던 친구들, 위로한답시고 찾아와서 위로가 아닌 상처를 입혔던 그 친구들을 원망하기보다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을 빌어줍니다. 내 가슴에 칼을 들이댄 이웃들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옳고 그르다는 수준을 이제 넘어선 것입니다. 그는 시험을 통해서 놀라운 수준 앞에 도달한 것입니다.
욥은 사실상 이 시험에서 합격한 사람이 아닙니다. 욥이 승리자입니까? 아닙니다. 실패자입니다. 그러나 이 실패를 통해서 욥의 인격은 놀랍게 변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잘못하지 않은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에서 고난은 있을 수가 있는데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내 가슴에 칼을 던진 이웃들을 축복하면서 살아갈 수가 있는 이 놀라운 성숙된 삶의 차원을 욥은 붙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사셨던 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잘못이 있어서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예수님의 삶의 차원을 인과응보의 원리를 가지고 보려는 사람은 영원히 그 분의 삶의 비밀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 분의 고난은 그 분의 잘못이나 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고난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묻습니다.
그 고난 속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변호하셨습니까?
억울하게 법정에서 매를 맞으시고, 죄인 취급을 당하시고, 침 뱉음과 조롱을 받으시고 골고다의 언덕을 올라가시는 이 모든 과정에서 단 한 번이라도 주님이 자기를 변호한 일이 있습니까?
이사야서는 주님의 이 사건을 어떻게 묘사합니까? 이사야 53장 7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옳고 그르다는 것을 가지고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은 그보다 더 높은 차원의 하셔야 할 일을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주 앞에 감사하고,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시비를 뛰어넘은 이 놀라운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도 이러한 차원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땅의 것을 가지고 시시비비를 가리며 싸우지 말고, 저 영원한 하늘의 것을 바라보며 차원 높은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욥기를 통해서 이제 십자가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 예수님의 삶의 차원!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이후로부터는 시시하게 이웃과 싸우지 마십시오. 당신이 잘못한 것이 없다고요? 그래서 당신이 잘못하지 않았고, 틀리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변호하고 계십니까? 당신이 살아야 할 삶의 모습이 겨우 그런 것입니까?
주님을 생각하십시오. 우리의 주님은 잘못한 것이 있으셔서 그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까? 그 분이 죄가 있으셔서 이방인의 법정에서 개처럼 끌려 다니고 헤롯에게 그 모욕과 멸시를 받으셔야 했습니까? 그런데 그 분은 왜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셨습니까?
자기 방어는 소극적인 차원입니다. 자기 방어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이나 하는 이야기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자기 변호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해를 받는 이 과정에서 주님이 지키셨던 이 무겁고도 깊은 의미의 침묵을 깨달으십시오. 그리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그들을 위해서 차라리 기도하신 예수님의 심장을 가져보십시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과 같은 삶, 이 삶의 차원으로 욥을 끌어 올려 그의 인격을 승화시키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욥기의 결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솔직히 저와 여러분은 언제나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이 수준의 삶을 떠나서 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내가 옳고, 너는 그르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부부관계에서도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때문에 서로 저 잘 낫다고 싸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욥기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시시한 삶이야. 변호할 필요도 없다. 따질 필요도 없다. 주어라. 축복하거라. 네 가슴에 칼을 대고 있는 형제와 이웃들을 축복하여라.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여라. 사랑하여라.”
살아가다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억울한 고난이 오거든 그 고난의 이유를 묻지 마십시오. 다만 해야 할 일을 하십시오. 나보다 더 지혜로우신 하나님이 알아서 이 고통을 주셨을 것입니다. 인생의 밤을 맞이했을 때, 이 밤을 지나 새벽을 준비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이 고통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끝까지 감사하는 삶을 사십시오. 그리고 섬김과 축복의 삶을 형제와 이웃들에게 남기십시오.
이것이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극한의 고난과 핍박과 죽음 앞에서도 자신들이 왜 이 고통과 핍박을 당해야 하는지를 묻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의 성품을 닮기를 소원하면서 자신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돌을 던지는 저들을 향해 용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들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이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2014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송년주일 아침에 저와 여러분에게 욥기를 주신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모두가 새해를 준비하면서 지금까지는 귀로만 들었던 그 하나님을 온 몸으로 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고난 가운데서도 그 이유를 묻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가운데 섬김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하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오늘 우리가 지나는 이 밤은 새벽의 여명을 준비하는 요람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인생의 밤을 지나십시오. 그리하여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보다 성숙된 인격으로 새해를 맞이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