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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스크랩 원불교의 발원과 소태산 박중빈
강나루 추천 0 조회 92 13.12.02 09:0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기획]
역사 속의 영광 ⑦ -
원불교의 발원과 소태산 박중빈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고향이 있다. 가능한 한 그 고향은 많은 추억과 감동, 자랑거리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자랑스러운 역사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 문화적 자부심은, 자기의 땅에 대한 긍지로 연결되는 귀중한 정신적 자원이 되기에 역사에 대한 이해와 성찰을 통해 자신감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본 지는 이 같은 시각과 관점에서 우리 지역의 역사적인 사건과 사실, 그리고 문화사들 중 우리나라 역사구도와 연관되는 주요한 사건들을 집중 조명해보고자 기획특집 <역사 속의 영광>편을 마련한다.  - 편집자 주


원불교는 우리 고장 백수 길룡리 출신 박중빈이 1916년 개창한 한국 특유의 민족종교이며 세계종교이다. 원불교에서 일컫는 성지는 박중빈이 탄생하여 개교한 영광 백수의 영산성지와 교화의 장을 연 익산성지(익산시 신룡동), 교리를 초안하고 교강을 발표한 벽산성지 등인데 개법성지인 우리 고장 영광은 박중빈의 생가, 기도터인 삼밭재, 마당바위, 대각을 이룬 노루목, 제자들과 함께 바다를 막아 이룬 정관평 방언답 등이 있어 성지 순례를 위해 전국의 교도뿐 아니라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1935년 조선총독부가 펴낸 『조선 유사종교』에 따르면 박중빈이 개창한 종교는 당시만 하더라도 원불교가 아니고 불법연구회란 종교 연구단체였다. 

오늘날과 같은 원불교란 이름을 가지고 종헌을 선포한 것은 해방 후인 1947년의 일이므로 원불교는 이때부터 공칭 종교교단이 됐다.

원불교 교단에서는 그가 16세 이후 도사를 찾아 헤매다가 참선구도 3년만에 대각을 이뤘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백수와 법성을 중심으로 박중빈의 청년시절에 같이 교류했던 노인들의 말을 빌면 ‘천도교 보천(증산)교 등 여러 유사종교를 접해가며 종교적 진리를 깨치려고 방황하다가 결국 불교에서 바른 길을 찾았다’고 전한다.

이쯤에서 당시 한반도 종교의 시대적인 양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 옛날부터 우리 민족도 숱한 신앙이 존재했는데 일반적으로 태양숭배, 동물숭배와 같은 자연신앙의 형태를 띤 종교를 가져왔고 이것이 고래의 민간신앙이다.  그 후 대륙과 교통이 활발해지면서 불교가 전래되고 유교, 도교가 들어와 서로 공존하고 배척도 하는 가운데 각각 당대의 정신계를 지배했다. 물론 그러한 종교와 사상은 이웃나라 일본문화에 까지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근세에 이르러 개화의 물결을 타면서 기독교가 유입되고 기울어가는 국운을 개탄하며 무기력해진 유불선 3교와 西敎에 대응하는 신흥 종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보국안민 광제창생을 주창하는 동학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동학을 바탕으로 민족종교인 천도교가 발생하고, 뒤이어 증산교(보천교)가 출현한다. 증산교는 천도교와 쌍벽을 이루었다.

원불교의 교조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가 세상에 태어난 1891년도 바로 이 시기이다. 당시는 일찍이 없었던 격동의 시기이고 일대 전환의 시대였다. 19세기 말엽엔 서구 열강의 침략주의가 기세를 올리면서 세계전쟁의 기운이 감돌고 급속한 과학문명의 발달로 인류 정신세력은 그 주체를 잃어 갔다. 안으로는 조선의 국정이 극도로 피폐되고, 외세의 침범으로 국가 존망이 경각에 달려 있었다. 누백년 내려온 불합리한 차별제도 아래서 수탈과 탄압에 시달려온 민중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당시의 시대적 위기를 두고 박중빈은 후일 이렇게 설파했다. 

<과학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물질을 사용해야할 사람의 정신은 점점 쇠약해지고 물질의 세력이 날로 융성하여 정신을 지배하므로 이처럼 사람이 도리어 물질의 노예가 되니 어찌 파란고해가 없으리요...>라 개탄하면서 <이제부터는 묵은 세상을 새 세상으로 건설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 설법은 결국 원불교 개교의 동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원불교 『교리전서』 총편 제 1장에 나오는 핵심글귀가 된다.

당시 한반도의 종교계는 유불선 3교의 정체성이 흐려지면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게 되는데 산중에 칩거한 불교, 허례와 공론으로 본질이 훼손된 유교가 그렇듯 당대의 종교들은 그  시대상에 부응하지 못하는 한계를 고스란히 내보이며 일없는 이들의 양생술로 그림자만 남아 있게 되었다. 천주교도 숱한 박해를 받아 겨우 명맥을 유지했고, 동학은 갖은 어려움 끝에 숨을 고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 밖의 여러 교파들은 혹세무민으로 민심을 혼란시킬 뿐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민중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새로운 삶에 대한 갈망으로써 새로운 성자에 의 한 새 사상, 새 종교를 더욱 기다리게 된다. 이 때 박중빈이 등장한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 박중빈의 탄생과 대각大覺

박중빈은 1891년 이곳 백수 길용리 영촌 마을에서 평범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7세 때부터 자연현상과 인생에 대하여 특별한 의문을 품고 도를 구하며 고행을 하던 중, 23세되던 해 길룡리 노루목 당산 옆 움막에 들어가 3년간의 구도 정진 끝에 ‘만유(萬有)가 한 체성(體性)이며 만법(萬法)이 한 근원(根源)임’을 깨닫고 20년에 이르는 종교적 방황을 중지했다. 이 때가 1916년으로, 원불교는 이 해를 원기(圓紀)로 삼고 있다. 

  어떤 이는 원불교를 불교의 한 분파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런 견해는 옳지 못하다. 원불교는 불교와는 달리 한국에서 성립되었고, 후천개벽사상을 담고 있어 민족종교적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박중빈의 구도과정에서도 불교와 직접적인 관련은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원불교교사》 <교법의 연원>에 보면 박중빈의 발심(發心) 동기나 구도과정이 부처와 부합하는 점이 많아 불법을 주체로 삼고 교법도 이를 응용한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원불교와 불교는 근본적인 면에서는 서로 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원불교는 불교의 분파가 아닌 새로운 교단으로서 개혁과 창조를 기본으로 하며, 이를 위해 시대화·생활화·대중화를 혁신의 표준으로 삼는다. 그는 불교의 진리에는 공감하되 구세(救世)종교가 되기 위해선 보다 적극적인 시대적응과 의식절차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낀 듯싶다. 신앙대상도 불교의 등상불(等像佛)에서 불성(佛性)을 일원상으로 상징한 법신불 일원상으로 바꾼 연유도 거기에 있다.

그는 대각 후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를 주창하고 미신타파, 문맹퇴치, 저축조합 운동을 통해 일제의 침탈로 인한 혼란한 시국 속에서 희미해가는 민족의 혼을 일깨우고, 땅에 떨어진 인륜의 정신을 바로 세우고자 했다. 먼저 저축조합을 만들고 금주 금연운동을 실시했다. 이 조합은 저축기금으로 숯장사를 해 자금을 늘렸고 이듬해 돛드래미(帆懸洞)에 복숭아 과원을 조성하는 한편 간척사업에 들어갔다. 2년만에 길이 1,632M의 둑을 쌓아 바다를 막고 2만 6천여 평의 농토를 만들었다. 박중빈과 그의 동지들은 이 같은 대역사(大役事)에 성공하자 종교적 관심으로 모였던 당초의 뜻처럼 불교에 대한 공부를 계속하면서 보다 적극적인 종교의 체계화 작업에 착수했다.

1919년 10월, 그와 그의 일행은 전북 부안 내변산에 봉래정사를 짓고 불교의 현대화 이론을 정립한다. 5년만인 1923년 김제출신 서중안을 만났고 그의 권유로 1924년(원기 9년) 익산 북일면 신룡리(현 신룡동)에 있는 보광사에서 불법연구회 창립총회를 가졌다. 

원불교는 초기 교단부터 공부와 사업의 병진을 지향해 왔으며 익산에 총부를 정하면서 교서발간, 훈련법, 의례개혁, 체제정비, 산업기관설립 등으로 새로운 제도와 기관을 일으켜 험난한 시국정세 속에 신앙 공동체를 형성했다.


생활종교, 대중 종교를 외치며 민족과 인류의 희망,

미래를 여는 정신개벽의 종교로 발돋움

박중빈과 창립회원 30명은 엿장사를 시작했고 농지 6정보를 소작지로 얻어 농사를 지으면서 ‘불법시생활(佛法是生活) 생활시불법(生活是佛法)’의 생활을 했다. 교화, 교육, 자선의 이념을 바탕으로 낮에는 산업기관에서 근로에 힘쓰고 밤에는 공부와 훈련을 통해 민족갱생 운동을 펼친 것이다.

1935년 8개지부 8백여 회원을 확보한 이 연구회는『조선불교혁신론』이란 책을 내고 「불교 교리는 출가(出家) 수행자(修行者) 본위에서 재가(在家) 대중(大衆) 본위로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인도불교를 한국적 불교로 만드는 것이 현실적이란 개혁론을 바탕으로 교리를 한글화하고 무신적(巫神的)인 요소도 배제시켰다. 박중빈은 이같은 불교의 한국화 작업 도중 1943년 53세의 나이로 타계하고 그의 대를 이은 송규 정산종사 때 원불교란 교명이 붙여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 영광에서 발원한 원불교는 그때부터 생활종교, 대중의 종교를 높이 외치며 민족과 인류의 희망이요, 미래를 여는 정신개벽의 종교로서 발돋움하게 된다.

1971년 교도들은 박중빈이 수도했던 대각지인 길룡리 노루목에 「만고일월(萬古日月)」이란 기념비를 세웠고 이 일대를 성역화하고 있다. 박중빈은 원불교에서 대종사(大宗師)라 부르는데 기념비문은 ‘그의 가르침이 해(日)와 달(月)처럼 영원(萬古)히 빛나리라’는 뜻이다.    현재 원불교는, 국내 6위의 교세로 120만에 이르는 신도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출처 : 영광신문 (2008.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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