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거나 받아들일 준비되어 있지 않은 데 누군가 자신에 대해서 '날 것의 삶'을 털어 놓는다면 당황스럽다. 그것이 도벽, 성적인 욕망 등 쉽게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라면 더욱 그렇다. 5월 숭례문학당 선택논제연구모임 책 <두려움은 소문일 뿐이다>를 읽고 난 느낌이 그랬다. 작가는 도벽에 대한 고백을 "해명"을 하고자 함이라고 말한다.
'돈에 관한 혼돈 속으로'라고 스스로 이름 붙인 이 작읍을 이미 시작했고, 내 삶의 이 시기에 할 수 있는 만큼의 추적과 해명을 하고자 한다. 해명의 상대는 우선 나 자신이며, 해명의 목적은 그 시절에서부터 계속 이어져 현재에 닿은 나 스스로를 잘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함이다. p.16
이번에 처음 만난 작가 최현숙은 구술생애사 작가이자 소설가이다. 정치에 몸담았던 10년의 세월 후 요양보호사와 독거노인 생활관리사로 노인 돌봄의 삶을 살던 그녀는 2020년부터는 홈리스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다. 타인의 삶에 대해 구술생애의 글을 쓰던 그녀는 이 책 <두려움은 소문일 뿐이다>에서 자기의 생애를 서술하고 있다. 인지 저하가 온 엄마와의 천일의 기록인 <작별일기> 등의 작품이 있다.
작가는 이 책에서 "까기의 기술(?)"을 시전한다. 그녀가 까는 대상은 자신이며 가족이다. 고상하게 책장을 넘기던 사람에게 이런 "까기의 기술"은 불편할 수 있다. 적당한 거리 두기가 예의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이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부러움을 느끼기도 한다. 너무도 솔직한 작가를 보면서 예의와 배려라는 이름으로 적당히 자신을 포장하고 사는 삶을 돌아보게 한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르바가 생각난다. 왜 조르바를 읽고 나서는 불편하지 않았는데 이 책은 그랬을까를 생각해보니 이 책은 '최현숙'이라는 사람의 삶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봤고, '조르바'는 '허구'라는 적당한 거리를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의 글을 통해 저자의 관점을 만나본다.
개인적으로건 정치적으로건 나는 모든 결혼 제도를 반대한다. 결혼은 사회 구성원들의 재산과 자원을 대물림하게 하는 가장 보편적이고 막강한 제도이자 관습이며, 따라서 사회의 빈부격차를 유지. 강화한다. 그러니 부자들이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제도에 복속하고 활용할 일이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물려줄 재산과 자원은 고사하고 빈곤과 그로 인한 갈등, 상처를 대물림학 한다. 물론 가족 간 친밀감과 돌봄이 사람과 관계에 주는 긍정적 요소들이 많지만, 그 친밀한 관계라는 게 여차하면 평생 동안의 징그러운 굴레가 되어버리곤 한다. p.79
이 부분은 선택논제에서 가장 많이 선택된 부분이기도 하다. 나도 그랬다.
결혼 제도와 가족의 결속력은 어린 새끼를 돌보아 성장하게 하는 요건이지만, 가족 간 갈등과 상처를 야기하고 사회 불평등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그 징그러운 궁지의 막강함에 진저리를 치며 나 역시 여러 시행착오를 통과하며 내 길을 만들어가는 할머니로서, 아들네 부부와 랑랑도 관습과 제도 바깥의 사람과 상황에 대해 자신을 열어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즐겁게 살아갈지를 고민하며 공정과 균형을 위해 늘 흔들리기를, 마음으로 바란다. p.140
이 부분을 읽으면서 손자들을 보면서 결혼제도에 대한 생각이 흔들리기를 바라는 마음을 읽었다. 그렇다고 가족간의 결속력을 다지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공정과 균형을 위해 열린 사고를 가지겠다는 뜻으로 생각했다.
2009년 글쓰는 사람이 되고부터는 몸으로 하지 못하는 다양한 현장 속 실천을 글로라도 떠벌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내 시선은 사실 기록을 위한 꼼꼼한 관찰이 목적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시선의 대상자들에게는 폭력일 가능성이 크다. 대상자는 내 의도는 고사하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조차 모른 채 시선을 받아내야 하며, 그가 가진 시선의 폭력에 관한 기억과 해석과 감정 등을 고스란히 떠올리게 될 거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이해이고, 이를 위해서는 경로 탐색과 시간이 필요하다. p.163
글을 쓰는 사람이 주의할 점, 특히 현장의 삶을 기록하는 사람이 조심해야 할 점을 서술하고 있다.
늙음을 불호를 넘어 두려워하고들 있다. 두려움의 뒷면은 혐오다. 대체로 혐오의 이유는 낯섦이이만, 늙음은 널려 있으니 낯설 것도 없다.늙음에 대한 두려움은 실체없이 흉흉하게 떠도는 소문일 뿐이다. p.260
노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혐오'를 생각하게 된다. 경계를 나누는 것, 노시니어존으로 걸어가면서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보다는 분노이다. 역지사지를 생각하며 살아야겠다.
나보다 상당히 나이가 적은 사람들의 글이 현재의 내게 깨달음이나 사고의 전환을 만들어 줄 때가 잦다. 혹은 새롭기는 하지만 내 사고나 삶이 전환되지는 않는, 말하자면 몸이나 사고의 익숙함을 깨뜨리지는 못하는 경우들도 있다. 시대의 문화와 습이 모두 관계하는 문제다. 이럴 경우 우선은 상대의 문제인지 내 문제인지 그 사이 무엇 때문인지를 판단하지 않고, 지금 그와 나는 다르다 정도로만 정리해 두고 기회 있을 때마다 들여다보려 한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의 글을 통해서는 깨달음이나 사고의 전환보다는 경륜과 나와 다른 여지 혹은 내게 미지/미경험인 것들에 대한 그들의 느낌이나 생각을 알아두고 최대한 열린 태도를 만들어 두려 한다. 그러니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서는 시선의 풍부함을 얻고, 나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들에게서는 관점의 전환을 자극받는 편이다. 당장 배운다기보다는 그냥 알아두고 열어두는 거다.
배움이란 내가 직접 접촉하거나 겪어내지 않고는 얻기 어렵다. '접'이 중요하지만 '촉'이 있어야 오래 함께 한다. p.268
다시 읽어보는 이 책에서 이 구절이 가장 마음에 든다. 책을 여러 번 읽을 때 좋은 점은 마음이 가는 문장이 바뀐다는 것이다.
홈리스, 정신장애인, HIV 감염인과 에이즈 환자 들과 함께 놀려면 경계를 넘어 내 길을 벗어나야 한다. 우선 내 삶의 터전과 언어를 떠나야 하고, 계급에 대한 관점과 페미니즘도 찢으며, 양심이니 윤리니 상식 따위는 물론 질병과 장애에 관한 규정과 구분도 의심하면서 처지에 주목해야 하고, 법과 사회질서가 누구를 위한 질서이고 보안인지를 노려보아야 한다. 여성다움이 학습된 것이라면 어떤 피해자성 또한 학습된 것이라는 의심을 놓지 말아야 한다. p.353
홈리스현장에서 활동하는 저자의 모습은 서울역이나 지하차도에서 만나는 노숙인들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1회성이 아닌 그들 옆에서 "즐겁게 놀며 싸우는" 삶을 살아가는 저자를 어쩌면 우연히 만나게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