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구 상암동 일본군 장교 관사다.
이 관사는 1930년대 일제 강점기 일본군 경성사단이 중국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세운 것이다.
근대 주거와 군인 관사에 대한 연구대상으로서 가치와 시대의 아픔을 간직한 역사적, 교육적 가치가 있는 건물이다.
1930년대 상암동 일대에는 경의선을 통해 전쟁 물자를 수송하던 일본군 대규모 병참기지가 있었다.
1930년대 건립되어 1945년 광복 이후 국방부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가 1960년대 민간에 매각되었다.
1970년대에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되어 1990년대 초까지 쓰레기 매립지 인근에 있어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2005년 서울시 SH공사가 마포구 상암2지구 택지개발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발견했다.일본제국주의의 아시아 침략을 여실히
보여주는 문화유산으로 보존 가치을 인정받아 상태가 양호한 2개 동을 상암동 부엉이근공원으로 옮겨 복원했다.
대위급 숙소와 소위·중위급 장교숙소로 이용되었던 건물은 전시관으로 조성하였다.당시 생활상을 알 수 있도록 각종 도구와
살림살이를 그대로 복원하였다.마당에는 우물과 두레박, 정원 등을 당시 모습대로 복원하였으며 두 개의 건물 사이에는
방공호도 복원했다
소위중위급 장교 관사다. 이 건물은 일반적인 구조로 거실과 현관, 3개의 방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일본가옥형태다.
소 중위급 관사 앞에 이 관사의 규모와 구조를 알려주는 안내판이 마련되었다.
이 관사 내부에는 1919년 3.1독립혁명에서 활약한 유관순 열사 등 애국투사와 김구 주석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등
애국지사의 사진과 기록을 설치했다. 의자와 책상을 마련해 놓고 학생들에게 민족역사를 가르치는 강의실로 활용하고 있었다.
일부에서는 이 관사를 '네거티브 유산'이라고 보존를 반대하고 있다고 한다. 비록 어둡고 자랑스럽지 못한 유산이라고 하더라도
그것 역시 우리 역사의 일부임에 틀림없다.이 일본군 장교 관사 안에 우리민족의 독립역사에 관한 기록들을 넣고 강의실로
재활용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소위·중위급 장교숙소와 대위급 숙소 건물의 중간에 있는 방공호다.실제로 이곳에 있던 방공호가 아니고 재현해 놓은 것이다.
실제 1930년대 설치되었던 방공호의 구조와 내용을 알려주는 설명판이 현장에 설치되었다.
일본식 가옥의 지붕 구조를 알 수 있는 전시물이다. 흙과 잡목을 올리고 그 위에
기와를 올리는 한옥과는 달리 널빤지 위에 기와를 올리는 방식을 취한 것을 알 수 있다.
대위급 장교의 관사건물이다. 이 관사는 고급장교에 해당하는 주임관 4등급으로 소위중위급 관사와 달리 벽난로가 설치된 것을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이밖에 가장 규모가 큰 영관급 장교에 해당하는 중좌(중령.주임관 2등급 ) 관사도 있었으나, 복원하지는
않고 기록으로만 남겼다.
대위급 장교 관사 내부를 살폈다. 한지를 바른 문이 실내를 더욱 밝게 해주는 등 실내가 정결해 보였다.
대위급 장교 관사의 내부 구조를 알려주는 모형물이 당시 관사의 건물을 이해할 수 있게 도움을 주고 있다.
1882년 임오군란을 빌미로 경비대를 상주시켰던 일본은 1894년 동학혁명이 발생하자 자국보호를 명분으로 군대를 주둔시켰다.
정부는 동학농민군과 전주화약 후 철병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군을 앞세워 내정을 간섭하고 1894년 7월 23일 경복궁 불법 점령 후
청일전쟁을 도발하였다. 청일전쟁(1894년 7월 25일~1895년 4월 17일) 중 일본군에 의한 농민군 피해는 3~40만명에 달했다.
이는 일본이 아시아에서 자행한 최초의 대량학살이었다.1904년 일본은 자신이 도발한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한국주차군'을
설치하고 한국 강점을 위해 '을사늑약'을 강제한 후 '통감부'를 설치했다.이에 반대하여 전국에서 궐기한 의병을 무력으로
진압하였으며 이때 의병 17,799명이 사망하였다.특히 호남의병을 '남한대토벌작전(1909년 9월~10월)이란이름으로 탄압하였고
충북 제천에서는 마을사람 전체가 일본군에 의해 학살되기도 하였다.의병탄압의 종결은 곧이어 대한제국의 강점으로 이어졌다.
일본의 대한제국 강점은 데라우치와 하세가와 등 군 출신의 조선총독에 의한 무단통치로 이어졌다.
대한제국을 강점한 일본은 7천여명의 경찰로 조선을 지배하였으며 1915년 12월 24일 조선군 2개 사단을 편성하여 용산(20사단)과
나남(19사단)에 배치하고,용산에 조선군 사령부를 설치하여 상주병력에 의한 지배체제를 확립하였다. 조선군은 한반도를 포함한
만주(20사단)과 시베리아(19사단)을 작전구역으로 한 부대였다.
1919년 3.1운동과 만주일대의 독립군 진압도 수행하였는데 홍범도 김좌진 장군에 의한 청산리전투는 이들을 상대로 한 전과였다.
조선군은 1931년 일본의 만주침략 당시 전선의 후방을 담당하였고 1937년 중일전쟁에 참여하였으며 북간도의 항일유격대도
탄압하였다.
중일전쟁이 확대되면서 한반도가 대륙병참기지화 되었고 경부선과 경의선은 일본과 중국전선을 연결하는 통로가 되었다.
수색역(水色驛)은 대구 대전 용산 평양과 함께 전쟁수행을 위한 거점이었다.
조선군은 조선총독부와 함께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과 국민총력조선연맹을 들어 사람과 물자를 통제하며 전쟁을 지원하였다.
조선군은 필리핀 뉴기니아 버어마전선 등으로 파병되었으며 한인들은 군인과 군수산업체의 노동자 그리고 위안부로 강제 동원
되었다. 1945년 들어 패색이 짙어지자 일본은 '본토결전'을 준비하였고 조선총독부는 미군의 상륙과 공습에 대비하여 제주도 등
해안 지역에 진지동굴을 구축하고 도시에서는 소개도로를 확보하고 방공호를 구축하는 등 총력전에 대비하였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8년 한국정부를 압박하여 용산일대 100여만평에 일본군 기지를 신설하였다.
용산에는 한국(조선) 주차군 사령부, 조선군사령부, 제20사단사령부를 비롯하여 보병 기병 포병부대가 배치되었고
조선총독관저도 지었다.수색에는 1908년 경의선 수색역이 설치되었다. 일본은 수색평야와 숲이 우거진 이곳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하여 1910년 이전에 헌병출장소를 설치하였다.대륙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수색일대의 전략적 가치가 높아져 일본군 번영이
확대되면서 상암동 군관사단지가 조성된 것으로판단되며 1937년부터 평양 부산과 함께 수색에도 대규모 철도조차장(操車場)이
설치되면서 수색일대가 개발되었다.
일본군 장교 관사 앞 큰길 건너편에 일본인학교가 있다.
서울 강남구 개포동에 있던 일본인 학교가 2010년 9월 이곳 상암동으로 이전한 것이다.
일본인학교는 일본군관사가 복원완료된 시점인 2010년 9월27일 개교했다. 유치원에서 중학과정까지 가르치며
학생수는 400여명 정도다. 원래는 강남구 개포동에 학교가 있었으나, 상암동에 택지가 조성되면서 서울시로부터
부지를 사들여 교사를 신축 이전한 것이다. 이 일본군 장교 관사를 놓고 일부 시민은 이렇게 우려했다.
“일본군 관사가 일본인 학생들에게 우월감을 심어줄 우려가 있지만 반대로 이곳을 지나는 우리나라 학생들은
매일 그 관사 건물을 지나며 ‘치욕의 역사’를 만나야 한다.”
치욕의 역사도 역사다. 그 역사에서 치욕을 다시 당하지 말아야 하겠다는 교훈을 얻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