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conomics 200602432
이원석
'데드맨 워킹’ 이라는 영화는 사형제도에 관해 객관적인 입장을 취할려고 노력하였다 생각합니다. 매튜의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강간과 살인장면, 유가족들의 비애 그리고 기자회견을 통한 나치 추종과 인종차별적인 모습과 동시에 매튜의 나약한 인간적인 모습, 인권 변호사 바버의 노력 그리고 헬렌의 종교적인 힘 즉, 사랑을 통해 메튜를 구원하는 장면 등, 감독은 제 3자의 위치에서 제도적인 사형의 한 광경을 보여줌으로써 저를 비롯한 저희 조원들로 하여금 끝없는 토론과 끊임없는 여운을 남겨주는 인상 깊은 영화였습니다.
“사형제도가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올바른 수단이 되고 있을까?”
“과연 인간이 인간의 생명을 놓고 심판할 수 있는 힘과 권력을 지니고 있을까?”
“더 나아가서 그렇다면 진정한 정의로운 사회란 무엇이며,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사형제도는 정의를 빙자하며 자본과 소수 권력자들이 법을 다스리는 한, 존립의 정당성을 찾을 수 없습니다. 사형수들은 대부분 매튜처럼 빈자들이거나 흑인들을 비롯한 유색인종들 입니다. 매튜와 함께 범행을 저지른 파트너는 자본의 힘으로 좋은 변호사를 구하여 사형을 면하였고 매튜는 그렇지 못하여 같은 무게의 형벌임에도 불구하고 사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여론과 감정에 앞서는 대중들의 따가운 시선으로 인해, 인간의 목숨을 다루는데도 서둘러 사회의 질서와 안정을 우선시하면서 거짓말 탐지기를 비롯한 무죄의 여러 가지 가능성을 다시 입증할 충분한 여유도 주지 않았습니다. 사형제도도 국가 테러리즘의 한 종류라 생각됩니다. 사형수 개개인의 여러 환경과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 힘 있는 자들의 권력형 패러다임인 왜곡된 사회 구조적인 측면을 배제한 채, 개인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 씌우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화려한 휴가’ 에서 사회의 안정과 정의를 구호로 광주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한 것처럼 국가에 의해 조직된 사형의 예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쌍둥이 빌딩 테러로 인한 미국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이라크 침공 또한 우리는 정의로운 전쟁, 명분 있는 전쟁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한 인간이 행한 살인이건 사회 전체가 처벌하는 살인이건, 살인은 이루어져서는 안됩니다. 사회는 ‘법’ 이라는 제도를 통하여 개인의 생명의 존엄성을 무력화시킵니다. 하지만 이 ‘법’ 이라는 제도는, 정의로운 국가 실현을 위해 인간이 계약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헌법을 규정하였고, 헌법의 시행 또한 모든 개인의 암묵적 동의 하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형은 국가와 사회전체가 한 개인의 생명을 앗아간다고 볼 수도 있지만, 결국은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하나의 살인인 것 입니다. 과연 인간이 인간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힘이 정당화 될 수 있느냐가 의문입니다. 더 나아가 법은 그 어느 존재보다도 신격화 되어, 인간이 인간을 위해 만든 하나의 ‘제도’ 라는 도구가 인간을 지배하며,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지는 최소한의 권리 즉, 인권을 침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형 제도를 찬성하는 그들은 ‘법’이라는 제도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이러한 주객전도 현상마저 불가피하다며 이를 수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정의(正義)의 정의(定義)는 마치 “악행을 저지르는 자는 단죄해야 한다” 라고 외치는 것 같습니다. “과연 그들이 주장하는 정의가 진정한 정의일까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매튜의 사형 집행과정과 관을 묻는 장면에서, 메튜의 가족은 물론 피해자 유가족들의 표정도 모두 하나같이 침울했습니다. “정의가 실현되었는데도 왜 모두의 표정이 하나같이 어두웠을까요?” 더군다나 매튜의 죽음으로 인해 복수심이 충족되었어도 미움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유가족들에게 메튜의 죽음으로 인해 죽은 자식들이 되살아 돌아와 그들에게 남겨진 상처가 치유되는 것도 아니고, 매튜의 가족에게 또 하나의 상처만을 남겼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주장하는 정의는 과연 누구를 위한 정의일까요?” "사형수건 죄수건 모든 개개인의 인권을 평등하게 보장하는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기보다는 사회 질서와 안정적인 권력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소수 엘리트집단을 위한 그들의 장난감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헬렌을 비롯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메튜를 인간보다 못한 아니 짐승보다도 못한 괴물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죄를 극구 부인하며 인간 말종 괴물이였던 매튜는,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헬렌의 관대한 사랑을 느낀 후 흐느껴 울며 죄를 뉘우치고 회개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인간으로서 느껴졌습니다. 그리고는 순간에 법에 의해 사형 당하고 맙니다. 이 장면을 보며 저는 생각했습니다. 사형에 대해 가장 고뇌하는 사람들은 사형수들을 일상으로 대하는 교도관들일 거라고... 왜냐하면 그들 앞에 선 사형수의 상당수는 매튜와 같이 자신의 죄에 반성하고 뉘우치는 존엄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격화된 제도의 힘에 의해 어쩔수 없이, 그들에게 있는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존엄성을 파괴해야만 하기 때문이고요.
‘진정한 정의’ 란 개인에게는 인권을 보장하고, 국가 전체로는 사회의 질서를 안정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정의는 ‘사랑’을 통해 더욱 빛을 발한다고 생각됩니다. 계산되고 치밀하게 짜여진 우리들의 차가운 이성과 판단보다는, 헬렌 수녀가 매튜에게 준 그 엄청난 사랑의 힘인 ‘인간애’ 를 통하여 법이라는 제도위에 인간이 우위에 설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될 거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법이라는 제도는 매튜를 괴물로 여겼지만 인간애는 그를 인간으로 여기며 두려워하지 않고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헬렌과 메튜 사이에
제도와 권력이 만든
유리벽과 창살이 있었지만,
‘사랑’ 은
그것들을 부수고
헬렌으로 하여금 매튜의 어깨에 손을 얹게 한 것처럼….
송기호 정치외교학과 (조장님)
이재황 경제학과
이원석 경제학과
정규혁 법학과
박지현 언론정보전공
이혜리 통번역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