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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의 의미와 목적 (고전 11:23-26)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프랑스의 한 신부가 카드놀이를 무척 좋아했다. 너무 좋아한 나머지 그는 어디를 가나 카드를 가지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시골의 한 마을로 미사를 하려고 갔는데, 그만 성찬 준비물을 가지고 가지 않았다. 급한 마음으로 이리저리 수소문해서 포도주는 구했지만, 성찬에 사용할 떡은 구하지 못했다. 결국 떡을 구하지 못한 채로 미사는 시작이 되었고, 하는 수 없이, 그리고 아주 태연하게 자기 주머니에 들어 있던 카드를 꺼내 찢어서는 신도들의 입에 넣어주었다. 어찌 되었든 미사는 아무 말 없이 끝이 났고, 신부는 돌아오는 길에 농부들이 서로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오늘 미사가 조금 이상하지 않았나?” “뭐가 이상하단 말인가?” “성찬식이 조금 다른 것 같았는데” “아니, 나는 오늘 참 은혜를 많이 받았는 걸. 예전에는 살과 피를 주시더니, 오늘은 뼈와 피를 주시지 않던가..” “그랬나???”
이 이야기가 무슨 의미인지 아시는지? 이 이야기는 성찬에 대한 천주교의 주장 즉 화체설(化體設)의 허실을 말해주고 있다. 화체설이 무엇이냐 하면, 성찬의 잔과 떡이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살과 피로 변화된다는 주장이다. 시간 관계상 길게 설명해 드릴 수는 없지만, 이 화체설이 왜 문제가 되냐 하면, 화체설을 그대로 신봉하게 되면 포도주와 떡도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의 예화에 나온 농부는 떡이 변해서 예수님의 뼈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개신교는 이와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즉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좀 더 쉽게 말해서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억하게 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하는 수단일 뿐이다.
천주교에서는 7성례를 가르치는 데 반해 개신교에서는 세례와 성만찬만을 성례로 본다. 세례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예식이라면 성만찬은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의 돌아가심을 기념하는 예식이다. 세례는 불신자가 신앙에 입문하는 예식이라면 성만찬은 믿는 자의 믿음을 도우며 은혜를 더하게 하는 예식이다. 성찬은 예수님께서 제정하여 주신 예식이다. 바울은 교회에서 행하는 성찬식은 우리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것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제정하여 주신 것이라는 것이다.
이 성찬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현이요 증거이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3년여 동안 공생애를 지나면서 그들과 함께 먹고 그들과 함께 생활했고 그들과 동고동락하셨다. 그리고는 이제 십자가를 앞두고 유월절에 마지막 만찬을 준비해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베풀고 계신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에게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 사랑의 표현이 이 예수님의 성만찬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예수님을 선물로 주시고,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 생명을 우리에게 십자가에서 선물로 주신 것인데, 이 사랑의 선물을 표현하는 것이 성찬이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께서 죽을 죄인조차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시고 속죄양으로 희생의 제물이 되셨음을 믿는 믿음이다. 그분의 죽음과 더불어 대속의 은혜를 믿고 거룩하게 살고자 애쓰는 이들의 모든 죄는 용서함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요, 그 성만찬은 바로 십자가 사건을 우리에게 예표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성만찬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깨닫고,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신 그 예수님의 사랑을 체감할 수 있다면 이 성만찬이야말로 큰 축복이 되는 것이다.
웨스터민스터 소요리 문답은 ‘주의 성찬은 곧 성례이니 그리스도의 정하신 대로 떡과 포도즙을 주며 받는 것으로 그 죽으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합당하게 받는 자들은 육체와 정욕으로 참여함이 아니요. 믿음으로써 그 몸과 피에 참여하여 자기의 신령하게 받는 양육과 은혜중에서 장성함으로 그의 모든 효험을 받음이다.’라고 하였다.
성례(聖禮)는 성화(聖化)시키는 은혜의 통로(수단)로 세례와 성찬이 있다. 세례는 1회뿐인 예전(禮典)으로, 죄에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사는 것을 표시하고, 성찬은 빵과 포도주를 받은 일에 의해, 그리스도와의 지속적인 교제를 표시하며, 반복적으로 행할 수 있다.
성찬은 바울이나, 사도, 교회가 만든 예식이 아니기에 요한 웨슬리 목사도 자신이 목사이면서도 평생 계속해서 성찬을 받았다. 얼마만큼 성찬을 받았느냐 하면, 일생동안 평균 4일에 1회 성찬을 받았는데, 회심 2년 후인 1740년에는 98회, 1782년에는 2일에 1회, 노년의 마지막 몇 년간은 3일에 1회, 1791년 죽기 전 6주 동안은 15회 성찬을 받았다. (김진두, 웨슬리의 실천신학, 170)
바울은 [주의 만찬]이라는 말을 사용(고전 11:20) 주의 만찬은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날 밤, 예루살렘에 있는 이층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한 만찬을 가리키는 말이다. 예수님은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아시고,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제자들에게 먹게 하시며 이것은 자기의 몸이며,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자신의 언약의 피라고 하시고, 죽으심을 기념하며 이 기념의 만찬 즉 성찬을 행하도록 분부하셨다.
주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을 상징하는 성찬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은 자의 징표로서 행하는 믿음의 표현이다. 성도는 이러한 성찬을 통하여 주의 죽으심의 의미를 상기하고 기념하며 복음을 증거하여야 한다.
또한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마심으로써 서로가 하나 됨을 확인하는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 사람으로 태어났으므로 서로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1. 성찬의 의미
성찬이라는 말은 영어로 '유카리스트'(Eucharist)라고 한다. ‘감사를 드린다’는 뜻의 헬라어에서 나온 말로서 ‘주의 만찬’ 혹은 ‘거룩한 교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초대교회에서는 전체 교인들이 함께 식사를 하는 공동 식사시간이 있었다. 각 가정에서 음식을 준비해 와서 공동식사 시간을 통해서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이다. 이 공동식사를 가리켜서 초대교회에서는 '아가페 식사'라고 했다. 혹은 사랑의 식사라는 의미로 ‘Love Feast’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회식은 공동식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1부 사랑의 식사가 끝나면 두 번째 식사를 실시하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가르쳐 주셨고, 유산으로 물려주신 성찬식을 거행하는 것이다. 이때에는 다락방에서 문을 닫은 채, 비공개적으로 했기 때문에 ‘비밀의 식사’ 혹은 ‘밀의 식사’라고 불렀다.
1. 기념하며 영적으로 임재함을 믿는 신앙적인 의미가 있다.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을 향해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기념한다는 뜻은 예수님의 죽으심만을 단순하게 기억하고 기념한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모든 일을 포함한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 육신으로 오셔서 스스로 섬김의 종으로 사시면서 백성을 치유하시고 위로하시고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후 지금은 우리 가운데 성령으로 친히 동행하시는 모든 삶의 모습을 우리가 닮아가고 구체화시킨다는데 그 뜻이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단순한 육체적 고통만이 아니기 때문에 사랑의 봉사, 헌신의 생활, 남을 위하여 대신 고통을 받고 손해를 본다면 무엇이나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것이 된다.
마 16:24 [예수를 따르는 길]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2. 교제하며 감사하는 실제적인 의미가 있다.
성찬을 ‘Communion Service’ 혹은 ‘The Holy Communion’라고도 하는데 이는 교제를 뜻하는 말이다. 성찬이 음식물을 매개로 한 사귐의 면에서 이름 붙여졌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구약에 있어서의 희생제 커뮤니온 서비스물과도 중요한 관계가 있었다. 그러므로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한 지체가 된 사람들로서 사람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같은 목적과 같은 방향을 추구하고 서로를 위한 합심기도를 통해 신앙의 성숙을 이루게 된다.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심을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일로 설명하고 있다.
고전 10:16-17 우리가 주님의 식탁에서 포도주를 마시며 주께서 축복해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은 그 포도주를 마시는 사람이 모두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의 축복을 함께 나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한 덩어리의 떡을 쪼개어 함께 먹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다같이 나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7)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같은 떡을 먹고 그리스도의 한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떡과 잔을 나눔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성취된 신비한 결합에 참여하게 된다. 이것은 성도들이 무엇인가를 시작함으로써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믿음을 통해 성도들과 연합을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이다. 주님과 교제하며, 성도와 교제하며, 복된 삶을 살아야 한다.
또 성찬이라는 말을 ‘Eucharist’라고도 하는데 이는 감사를 뜻한다. 주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기 전에 감사하신 사실에 관련되어 있다.
고전 14:16 만일 여러분이 방언으로만 하나님을 찬미한다면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당신과 함께 찬미할 수 있겠습니까? 또 여러분이 감사드릴 때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한다면 어떻게 함께 감사드릴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감사가 유카리스트이다. 따라서 우리를 위해 베푸신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일에 대해 진정한 감사를 드리는 것이 바로 성찬이다. 성찬은 주의 만찬에 참여하며 하늘 식탁을 미리 맛보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주님을 기념하며 영적으로 임재함을 믿는 신앙적 의미가 있다. 교제하며 감사하는 실제적 의미가 있다. 이런 의미를 되새기며 자신을 분별하고 동참하며 은혜와 복을 누리시기를 바란다.
2. 성찬의 목적
그러면 예수님이 이 예식을 제정하여 주신 목적은 무엇일까? 바울이 말하는 이 예식의 목적에는 세 가지가 있다.
1. 예수님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본문 고전 11:23-25에 주님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라고 하셨다. ‘기념하라’라는말씀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라는 뜻으로, 우리는 이 예식을 행하면서 주님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이 2천 년 전 이 땅에 오신 것을 기념하고, 이 땅에 오셔서 가르치신 것과 본을 보인 것을 기념하라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 떡을 먹을 때는 죄인을 위해 몸을 버리신 주님을 생각해야 한다.
또 잔을 들 때는 나 같은 죄인을 위해 피를 흘리신 주님을 생각해야 한다. 그 은혜를 깊이 생각하는 예식이 이 성찬식이다. 주님은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양손과 양발에 못이 박혀 몸이 찢기신 분이다. 또 물과 피를 다 흘리신 분이다. 왜 주님이 그렇게 몸을 찢고 피를 다 흘리셨을까? 우리가 지은 죄와 허물 때문이다.
이사야 53장에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그렇게 말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라고 했다.(5-6절)
이 십자가의 도를 깊이 생각하라는 뜻이다. 우리가 다 죄를 지어 사망의 길로 갔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가 받을 죄악을 주님에게 담당시키신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몸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셨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누구 때문에 영생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잘 기억해야 한다.
왜 이 떡을 떼면서 ‘이것은 내 살이고 내 몸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잔을 주면서 이것은 내 피’라고 말씀하셨을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생명의 떡이시기 때문이다(요 6:48-51).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내가 받는다는 것이다. 그분의 몸과 그분의 모든 피, 그분의 전 인격을 내가 모셔 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이 잔을 들면서 그분의 생명을 생각하고 그분의 피를 생각하고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고 말한 것이다.
요 11:25-26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죽은 자를 일으키고 그들에게 다시 생명을 주는 자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죽는다 하여도 다시 살 것이다.
26)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다. 마르다야, 네가 이것을 믿느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곧 나를 위한 사건이라고 믿는 자에게는 그의 살을 먹고 피를 먹는 것과 같이 내 안에 예수의 영이 존재하고 역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와 주님은 연합되어 하나가 되었고 그래서 우리의 삶은 주님과 더불어 사는 삶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엄청나다.
겉으로 보기에는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그 속에 예수님의 영이 있고 없다는 엄청난 차이가 나게 되는 것이다. 즉 살리는 영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천국과 지옥의 차이가 있다. 그래서 성찬 시 천국과 지옥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은 조만간 다 죽을 것이고, 죽은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고 그 후에는 영원한 지옥과 천국이 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오리 새끼와 병아리를 갓 부화시켜서 호숫가에 갖다 놓으면 병아리는 물을 본체만체하는데, 오리새끼리는 물을 보자마자 빨리 들어가서 헤엄을 친다. 왜 그럴까? 오리새끼는 헤엄치는 본능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헤엄치는 법을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물을 보자마자 들어가 헤엄을 치는 것이다. 이처럼 동물들은 영혼이 없으므로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내세를 생각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영적인 존재요, 영생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본능적으로 갖고 있다. 그러나 죄를 지어 영혼이 어두워져 있지만 종교심을 갖고 있어서 하나님을 찾지만, 죄인은 곧바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오직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서만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라고 위로하셨다. 이것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1에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땅의 천막 집이 무너지면, 다시 말해서 우리가 죽어 이 육체를 떠나면 하늘에 있는 새로운 몸, 영원한 우리 집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 집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입니다.’라고 했고, ‘만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지금 이 세상에서만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비참한 존재일 것입니다.’ 라고 했다(고전 15:19).
이것은 바로 주님의 십자가로 인한 것인데, 이를 잘 잊어버리기가 쉽다. 세상 일을 해야 하고 바쁘게 살다보니 잊어버리기가 쉽다. 주님은 이 큰 은혜를 잘 잊어버리는 우리의 맹점을 잘 아셨기 때문에 이와 같은 성찬식을 제정하여 떡을 먹고 잔을 나누면서 주님을 기념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러므로 주님이 그렇게 몸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신 희생 때문에 죄 사함을 얻게 되었고 평화스러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이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떡을 먹고 잔을 마시면서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또 그동안 죄 가운데 산 것을 회개하며 또 앞으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이 예식에 참여하는 것이다.
2. 성찬식은 우리의 사명을 다짐하는 목적이 있다. (전하라).
본문 26절에 보면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 의미를 되풀이해서 선포해야 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예식을 계속하십시오.’라고 했다. 우리는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시는 것은 과거의 주님을 기념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의 사명을 다짐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의 사명이 무엇일까? 인류의 죄와 허물 위해 몸을 찢고 피를 흘리시고, 돌아가신 후 사흘만 부활하신 주님을 전하는 것이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때까지 미래의 소망을 갖고 우리는 이 사실을 전해야 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만,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승천하사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실 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분부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라고 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다시 오리라’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 모든 고통과 괴로움, 이 세상에서 겪는 어려움은 다 해결이 될 것이다. 성도들에게는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이것이 제일 큰 소망이다. 그러므로 이날까지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환난과 어려움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주신 하나님 아들을 전하는 것이다. 내가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아는 자라면, 그 구원의 은혜를 전하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사명인 것을 알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이 복음 전하기를 힘써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얻은 자의 첫째 본분인 것을 알아야 한다. 주님은 이것을 위해서 우리를 이 땅에 남겨놓으셨다. 또한 이를 위해 우리에게 건강과 물질, 재능, 시간도 주셨다. 우리에게 주신 가정공동체도 우리끼리 오순도순 살라고 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이루어 다시 오실 주님을 전하라는 것이다.
우리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도 다시 오실 주님을 전하는 것이 사명이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해야 할 많은 일들이 있다. 우리도 자식들 사랑하고, 자식을 키우고, 직장에서 일하고 돈을 벌며,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사회인으로서의 사명이 있다. 그러나 이 가운데서 우리의 가장 중심적인 사명, 으뜸가는 사명은 우리 주님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다 버리시고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 흘리신 주님의 은혜,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주님이 오실 때까지 해야 할 우리의 사명이다. 바라기는 우리가 이 예식을 거행하면서 우리 속에 한 영혼을 귀중히 여기는 마음, 주님의 죽으심을 땅 끝까지 전하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들이 회복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3. 성찬식은 우리의 영적 혈연관계를 확인시켜 주는 예식이다. (공동체를 섬기라)
고전 10:16-17 우리가 주님의 식탁에서 포도주를 마시며 주께서 축복해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은 그 포도주를 마시는 사람이 모두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의 축복을 함께 나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한 덩어리의 떡을 쪼개어 함께 먹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다같이 나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7)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같은 떡을 먹고 그리스도의 한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는 한 피에 참여한 자이며, 한 몸에 참여한 자라는 말씀이다. 누구의 피에 참여한 자이고 누구의 몸에 참여한 자일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 자라는 말이다. 이것은 쉽게 말해서 주님의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요 자매라는 뜻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다. 물론 우리들의 혈연관계를 뜻하는 말이지만, 우리의 신앙적인 관계는 그보다 더 진한 것이다. 이것을 확인하는 예식이 바로 성찬식이다. 우리의 신앙적 혈연관계를 확인하여 교회 공동체와 이웃을 잘 섬기는 자가 되라는 뜻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인간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가장 가까운 관계는 가족관계일 것이다. 피를 나눈 부모님과 형제, 자녀들이 있다. 그리고 세상에 나가 여러 가지 관계를 형성한다. 같은 학교를 나온 친구들, 같은 직장에 다니는 동료들이 있다. 이웃에 함께 사는 사람들, 한 민족, 한 국가에 속해 함께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모든 인간적인 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가는데, 우리에게는 또 다른 한 관계가 있다. 이것은 육신적인 관계가 아니라 영적인 관계이다. 신앙으로 이루어진 관계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 때문에 한 형제, 자매, 가족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신앙의 한 공동체, 가족이다.
이 세상에 살다 보니 이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는 중요시하면서 성도들끼리의 관계는 소홀히 하며 살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마치 우리가 세상 사람들하고 더 가까운 것처럼 착각하며 살 때가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의 관계는 이 땅에서 끝난다. 가족관계도 이 땅에서 뿐이고, 이 땅을 떠나면 더 이상의 가족관계는 없다. 우리의 친구나 연인관계도 이 세상에서 끝이지 세상을 떠나면 그 관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으로 이루어진 신앙 관계,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루어진 영적인 관계는 이 세상의 다른 관계보다 약한 것 같지만, 이 관계가 영원한 것이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육신의 가족들이 찾아왔을 때 ‘누가 나의 모친과 형제와 자매들인가?’ 하시고는,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천국까지 영원히 남는 관계는 바로 이 믿음의 관계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이 관계를 소홀히 한다. 그리고 혈연적인 관계,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관계만 중요시하고 살아가기가 쉽다. 이런 것을 아시기 때문에 주님은 성도들을 불러 모아 떡과 잔을 나누게 하시면서 영적인 관계를 다시 확인하게 하시는 것이다.
가족들은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더 가까워지고 가족적인 사랑이 튼튼해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런 성찬식을 통해서 비록 우리들이 육신적인 가족들처럼 많은 음식을 자주 나누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의 몸을 상징하는 떡을 나누고 또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나누면서 우리가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요 자매들인 것을 확인해야 한다.
3. 성찬에 참여하는 자세
1. 합당하지 않게 성찬을 먹고 마시는 것은 죄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참여해야 한다(27절).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면 죄가 있다. 그렇다면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신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의미를 모르고 먹고 마시는 것을 뜻한다.
본문에서 부자들은 가지고 온 성찬을 먼저 먹은 성찬의 의미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찬이 주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라는 사실, 떡과 포도주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는 사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가 누구든지 하나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성찬에 참여할 때,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저 교회에서 때가 되었으니까 하는가 보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자세를 가지고 관습적으로 생각없이 참여하는 것은 합당치 않은 태도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진지한 자세로 참예하지 않고, 아무런 생각 없이 가볍게 성찬에 임하는 것도 합당치 않다. 지은 죄를 회개하는 마음 없이 그 죄를 그대로 품고서 성찬에 참여하는 것도 합당치 않다. 형제에 대한 미운 감정을 그대로 품고서 성찬에 참여하는 것도 합당치 않다. 또한 목사님이 어떻게 집례하는지 보려 하지 마라. 멀뚱멀뚱 앞만 바라봐서도 안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께서 나 때문에 당하신 고난을 묵상해야 한다.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주님께서 죽으신 것을 기억하면서, ‘주님, 내가 범한 죄를 용서해주세요. 주님, 오늘도 우리 가족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상처를 주었습니다. 주님, 오늘도 내 형제와 이웃을 비난했습니다. 주님 용서해주세요.’라고 회개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찬을 받아야 한다. ‘주님, 나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지요? 얼마나 아프셨습니까? 이제 내가 주님께 내 삶을 드리겠습니다.’라는 마음으로 준비하여야 한다.
2.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는 자기를 살펴야 한다(28절).
성찬을 받기에 앞서 자기를 살펴야 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➊ 성찬의 의미를 내가 바로 알고 있는가? 바로 알지 못하는가?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나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과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 살을 찢어주시고, 나의 죄 사함을 위해서 피를 흘렸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인가, 믿지 않는 사람인가? 이 떡과 잔이 십자가에서 찢어주신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내가 믿는가, 믿지 않는가?’ 나 자신의 믿음을 살피라는 것이다.
➋ 자기의 행실을 살피라는 것이다. 교회가 일치하고 단결하는 일에 내가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가족이나 친척, 이웃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는지? 형제우애에 잘못된 것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훌륭한 강해 설교자로 알려진 존 맥아더(John MacArthur)목사가 시무하는 교회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목사님이 광고하였다. ‘다음 주일에는 세례 교인 이상의 성도들은 모두 성찬에 참여하시게 됩니다. 그러나 저기 두 자매는 성찬에 참여할 수 없음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공포합니다.’ 왜 이렇게 냉정한 광고를 하였을까? 첫 번째 자매는 남편과 별거하고 아직 이혼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남자와 사귀면서 계속 성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교회가 수차례 경고하였지만, 말을 듣지 않았고, 두 번째 자매는 혼인도 하기 전에 애인과 동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김남준, 성찬과 언약, 132)
무슨 이야기일까? 자기를 살필 줄 아는 사람이 성찬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종교개혁 당시 작성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는 ‘누가 주의 상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였다.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의 죄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의해 자기의 죄가 사하여지고 남아 있는 연약성도 가려졌음을 믿는 사람, 또한 자신의 믿음이 더욱 강하여지고 돌이킨 삶을 살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사람이 참여할 것입니다.’(김남준, 성찬과 언약, 133)
➌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참여해야 한다. 성찬에 있어서 의례적인 절차도 중요하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의미를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 론
성찬을 통해서 받게 되는 축복 웨슬리 목사님은 ‘성찬은 모든 신자의 거룩한 의무이므로 모든 가능한 기회에 지속적으로 성찬을 받아야 한다’라고 하면서, 성찬을 통해서 ‘죄의 용서를 얻고 영혼이 강건케 함을 얻으며, 완전한 성결에 이르게 된다’라고 했다(김진두, 웨슬리의 실천신학, 167-170). 그렇다. 성찬을 통해서 죄를 용서함을 받고 평안을 누리게 된다. 영혼이 강건케 됨으로써 의욕을 되찾게 된다. 살맛을 느끼게 된다. 또한 성찬을 통해서 날마다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된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살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57에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능력으로 내가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내 능력으로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살 수 있는 존재이다. 음식을 먹으면 그 음식이 우리 몸에 소화가 되어서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살 수 있는 것처럼, 성찬에 참여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은 성도는 능력있는 삶,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지 못하고 있었고, 이에 커다란 실망에 휩싸여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에게 동행자 한 명이 나타났다. 두 제자는 그 동행자와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동행자는 성경을 풀어 설명했지만, 그 설명을 들으면서도 두 제자는 메시아가 고난을 받고 부활하심으로 영광을 얻으시고 인류의 구원자가 되시리라는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날이 저물어, 함께 머물게 되었을 때 그 동행자는 떡을 가지고 축사한 후, 떼어 그들에게 주었다.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 그리고 자신들의 앞에 계신 분을 알아보았다. 그 동행자는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셨다.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를 밝히 보여준다. 성찬을 통해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 부활하신 주님을 내 삶의 능력으로 모셔 들일 수 있다.
한 성도가 병상에 누워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그분을 찾아가 성찬식을 했다. 경건하게 성찬을 행하며 그분에게 죄의 고백을 하도록 하였고, 진심으로 죄사함의 확신을 갖게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게 했다. 그러자, 그 후에 이 성도의 병이 나았다. 성찬을 통해 치유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