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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름과 기원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시 99:5).”
지난 한 주 동안도
우리를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
결실의 계절인 가을을 맞아
주의 전에 나와 예배할 때
우리의 심령을 풍성케 하시니 감사합니다.
세상에서 흐트러진
우리의 중심을 바로잡아 주시고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사나 죽으나
로마서 14장 7-13절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
이라고 합니다.
살아 있어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이랍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의 구원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죽는다고 해서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린 죽음 앞에 서면
두렵고 작아집니다.
왜냐하면!
죽으면 실패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살아도 성공이고!
죽어도 성공입니다.
왜그렇습니까?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얼마나 대단 한 것인지 아십니까?
이사야 43장을 봅시다.
사 43:1-3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말씀을 하신다고 합니다.
야곱아!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조성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너는 내 것이라고 합니다.
야곱은 우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의 이야기로 들어야 합니다.
구속이니, 조성이니, 지명이니, 부르심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행하신 일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행하신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란?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주어진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구원이 지켜지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믿어진다고 한다면
두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말을 합니까?
야곱(이스라엘)이 지금
두려운 환경에 처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강대국들 틈에 끼어서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고
물이 엄몰하는 환경과 같고
불 속에 갇힌 것과 같은 환경입니다.
이건 저주 받은
이 세상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지금 야곱이
저주 가운데 있는 겁니다.
그래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를 아시고
하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는 이 모든 것들이
내가 조성한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환경을
허락한 것이라고 합니다.
모두가 물속에서 빠져 죽어야 하고
불에 타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너를 붙잡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노아가
홍수 속에서 살아난 것과 같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풀무불 속에서 살아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붙잡고 있음을
너는 내 것이라고 하고
지명하여 불렀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야곱을 내것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네가 물 가운데 지날 지라도
물결이 너를 엄몰치 못하겠고,
불 가운데 지날지라도
불꽃이 너를 사르지 못한다고 합니다.
물과 불은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저주를 말합니다.
물은 땅에서 일어나는
저주를 말하고,
불은 하늘에서 주어지는
저주를 말합니다.
그러니
영적 권세로부터도 지켜주고
세상 권세로부터도
지켜 주신다는 말입니다.
쉬운 말로
사단의 참소로부터도 막아주고
세상의 고난 속에서도
지켜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런가요?
하나님이 야곱을 구속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구속이란?
값을 치르고 산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야곱을,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값을 지불하였다는 것입니다.
어떤 값을 지불하였나요?
그 아들을 내어주는 값을
지불하였습니다.
왜? 값을 지불하고 사왔느냐 하면
야곱을 죄의 노예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야곱을 마귀가 붙잡고 있었습니다.
마귀가 죄와 사망이라는 권세로
야곱을 붙잡고
종처럼 부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귀에게
예수님을 속전으로 주고
야곱을 사 온 것입니다.
쉬운 말로
예수와 야곱을 맞바꾼 겁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위하여
엄청난 값을 지불하였기 때문에
야곱을 포기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지켜내야 합니다.
애굽과 구스와 스바를 내어 줄지라도
야곱을 포기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애굽과 구스와 스바란
이 세상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은
이 세상을 다 준다고 해도
바꿀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이 다 망해도
자기 백성들만큼은
하나님이 지켜 낸다는 말씀입니다.
소돔 고모라의
불 심판 속에서 건져준 롯처럼
멸망 받는 세상에서
건져 주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같이
값을 주고 산 자기 백성들에게
이 사실이 믿어지게 하시려고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물 같고 불 같은 세상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사도들을 통해서 보여 주었고
또한 초대교회 성도들을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주의 것이란 말은
주께서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책임을 져 주신다는 것은
간섭을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만 믿어진다고 한다면
세상 말로 대박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두려워하지 않을수 있습니다.
언제 두려움이 엄습합니까?
믿음이 약할 때 아닙니까?
예수님을 믿다가 보면
스스로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이거 내가 진짜 예수를 믿기나 하는 건가?
내 믿음이 진짜인가?
의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런 의심이 언제 듭니까?
내 자신을 볼 때입니다.
그것도 자기가 정한 기준에
미달 될 때입니다.
즉 신자가 되어서 이 정도는 되어야
신앙이 있다고 여기는 상한선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정한 기준에 합당하면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기준에 미달하면
믿음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말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고,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데
실상은
자기 행위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이 떨어 졌다고 생각하면
어떤 행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던 일에
강도를 더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일 수도 있고,
충성 봉사일 수도 있고,
착하게 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종교성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종교성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성이 열심으로 일어나면
믿음이 있다고 여기고,
종교성이 떨어지면
믿음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나쁘단 말이 아닙니다.
또한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열심히 하세요.
하지만 이것을
우리의 신앙에 척도로는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척도가 되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믿음이 연약한 자들처럼
먹고 마시는 것과
날을 지키는 것으로
자신의 신앙 여부를
가늠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왜?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자기 몸으로 행하는 것에 의미를 둡니까?
이는 인간들 속에 있는
타고난 종교성으로
신앙을 가늠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연약한 자들은
먹고 마시는 것과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것을
신앙으로 붙잡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에 근거를
자기 행위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주일성수를 잘하면 신앙 있음으로 여기고,
주일성수를 못하면 신앙 없음으로 여기고!
착하게 살면 신앙 있음으로 여기고,
나쁘게 살면 신앙 없음으로 여기고!
찬송가를 부르면 신앙이 있다고 여기고,
유행가를 부르면
신앙 없음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도 마찬가지에요.
이러한 신앙관을 가지게 되면
계속해서 자기 행위로
신앙의 여부를 판단하게 되어요.
성(聖)과 속(俗)을
세상 적인 것으로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집에서 쉬면서 집안일을 충실히 하면
죄를 안 짓는다고 생각하고,
반대로 밖으로 나가 친구들과 어울리고 즐기면
죄를 짓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은 죄 그러면
자기 행실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죄관을 가지고 있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예수를 안 믿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자기가 죄다 아니다 라고
판단하는 그것이
죄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하신다고 합니다.
책망이 무엇입니까?
틀렸다는 겁니다.
뭘 책망한다고 합니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책망 하십니다.
이는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죄관과 의관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예수 바깥의 세상과
예수 안에서의 죄관이 다른 것입니다.
예수 밖에서는
인간들이 정한 기준의 죄관이 있습니다.
이름하여 윤리 도덕입니다.
윤리 도덕은
인간의 행실을 근거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인간의 행실을 가지고
죄다 아니다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적 사관에서 보면
이게 죄인 것입니다.
왜? 그럽니까?
성경은 인간 자체를
죄인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인간 자체가 죄인이라고 한다면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인간에게서 발생 된 것을 가지고
죄다, 아니다, 라고 판단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가 되는 것입니다.
속된 말로 죄인은
착하게 살아도 죄고,
악하게 살아도 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의 행실을 가지고
이건 선이고, 저건 악이라고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인간 자체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간이 그렇습니다.
죄인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인간의 행실을 근거로
선이다 악이다 판단하는 그것이
곧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한 죄는 따로 있습니다.
시편 2편을 봅시다.
시 2:7-12절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12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포고령을 내렸습니다.
어떤 포고령인가 하면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 세상에 보냈는데
그를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그를 영접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진노를 끌어 붓겠다고 합니다.
인간들은
예수 안 믿으면 저주 받는다는 것을
믿지도 않고
받아들일 수도 않습니다.
사람들은 예수 안 믿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세상에 내린 포고령에는
그 아들에게 입 맞추지 않으면
저주 하겠다고 합니다.
이게 하나님이 세상에 던진
죄의 기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기준으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이 정한 죄의 기준은
오직 하나
그 아들에게 입을 맞추었느냐입니다.
그 아들에게 입을 맞춘 자는
죄 없는 자이고!
그 아들에게 입을 맞추지 않은 자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인간들 세상에
새로운 죄관을 던져 주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기준에 합당치 않으면
저주하십니다.
그렇다고 예수 믿으면
아무렇게나 막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일을 하신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 1-14절을 보면.
어떤 왕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에
백성들을 초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 사정 때문에
참석하지 않은 겁니다.
그러자 왕이 대노하면서 군사들을 보내서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지 않은 자들을
다 도륙을 했습니다.
이건 구약의 유대인들을
심판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왕이 다시 훈령을 내립니다.
이제는 자기 동네를 따지지 말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혼인잔치에 참석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잔치에 참석을 했습니다.
왕이 혼인잔치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
예복들을 입혀주라고 했습니다.
이제 왕이 손님들을 맞이하려고
잔치 장으로 나와보니
어떤 사람들은
예복을 입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이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을
몽땅 내어 좇으라고 합니다.
이건 신약의 이방인들을
심판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왕의 아들 혼인잔치는
천국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천국 비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천국에는 어떻게 가느냐
왕이 준비해 놓은
옷을 입고 가는 겁니다.
그 옷은 바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난 의(義)를 말합니다.
여기서 살펴볼 것은
심판은
왕이 정한 기준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왕이 정한 기준은
바로 왕이 부르면
자기 사정을 따지지 말고 참석하는 것이고!
자기 옷을 입고 오지 말고,
왕이 준비한 옷을 입고 오라는 것입니다.
자기 옷은 자기 의를 말하고,
왕이 준비한 옷은
왕이 준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 옷은 자기 행함이고,
왕의 옷은 예수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앞세우고
오라는 것입니다.
이걸 신자들은 받아들이는데,
불신자들은 받아들이지 않아요.
불신자들이
왜? 받아들이지 않나요?
이는 인간의 상식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왕이지만
어떻게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죽일 수 있단 말입니까?
이건 인간 세상에서는
없는 일인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 자기 사정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금방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을 가느라 참석하지 못했어요.
또 어떤 사람은 회사 일이 급해서
출근 하느라 참석하지 못했어요.
어떤 사람은
몸이 아파서 참석하지 못했어요.
세상 왕이라고 한다면
정상 참작을 해 줍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참작해 주지 않는 것입니다.
구약의 시편 2편에서
그 아들에게 입 맞추지 않으면
진노를 하는 것과,
신약의 마태복음 22장에서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진멸을 하는 것 속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슨 공통점입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인간의 사정을
봐 주지 않는건가요?
이걸 오늘 본문에서
힌트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기때문입니다.
누구 것이라구요? 주님의 것입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니고 주의 것입니다.
이게 답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입니다.
만물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창조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다고 하면
창조주이신 하나님으로부터
피조가 된 인간들이
창조주인 하나님 앞에서
자기 사정을 핑계로
하나님의 명을 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을 어긴다는 것 자체가
곧 자기 주제를 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죄인 것입니다.
죄가 뭐냐?
자기 생각으로 사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 사정을 내어 놓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벗어나겠다는 것입니다.
독자적인 인생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죄가 몰고 온 현상입니다.
군대에서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군대는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다.
무슨 말입니까?
네 생각대로 하지 말고
상관의 명령에 따르라는 것입니다.
군대에서는
부하의 생각은 중요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상관이 하라고 하면
예! 라고 하여야지
핑계를 대면 안 됩니다.
이게 군대에서의 법입니다.
이 법을 어기면 영창 갑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군대의 상관이 되어서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아들에게 입을 맞추라고 합니다.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에
참석하라고 합니다.
그럼 예! 하고 따라야 합니다.
이유를, 토를 달면 안 되어요.
이걸 성경에서는 순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는 것입니다.
묻습니다.
나는 누구 것이라고요?
하나님의 것입니다.
인정 하십니까?
우리는 우리 스스로 살 권세도 없고
죽을 권세도 없어요.
죽이고 살리는 것은
하나님 마음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멀쩡한 사람이 죽을 때에는
다 죽어야 할 이유가 있어서 죽는 것이고!
살게 하실 때는
다 살게 하실 이유가 있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다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럽니다.
참새 한 마리도 천부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참새보다
더 귀한 자라고 합니다.
참새를 지키시는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 아들들을 지켜주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을 보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들에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합니다.
이건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다 필요해서 일으킨
사건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들이 닥치면
놀라지 말라고 합니다.
로마서 8:38-39절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합니다.
주님의 것이란
죽는 것이나 사는 것이나 간에
그 어떤 현재의 일이나 장래의 일이나 간에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것이란 뜻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것이 되었기에
자기를 위하여 살수도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을 수도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소유가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랑할 수가 업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다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나의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주님의 소유된 사람들입니다.
먹고사는 문제만이 아니라
은혜와 은사를
다 주님께로부터 거저 받은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느냐?
절대로 끊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안심하고
감사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사는 것입니다.
용서받았기 때문에
용서하고 사는 것이고!
정죄당하지 않기 때문에
정죄 할 수가 없으며!
판단 받지 않기 때문에
판단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너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합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는 말씀은
나는 내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내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의 삶은 나를 위해서,
즉 나를 증거하고
나를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증거하고
주님을 세우기 위한 삶입니다.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주님을 증거하기 위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나는 주님의 은혜 때문에 삽니다'는
이것이 바로 주님을 증거 하는 삶이고
주님의 것으로서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신자의 삶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흘리신 그 피만이
나의 생명임을 증거하며 살아갈 때
그것이 바로
먹든지 마시든지
주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고,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서 죽는 삶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눈을 여시고 귀를 여시고 마음을 열어서
내가 어디에서 구원을 받았고
어떤 은혜를 입고 사는지를 알게 하옵소서.
우리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자도 없는
온전히 주님의 것으로
주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받아 누리는
신실한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봉헌기도
존귀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
주의 이름을 높이며 기쁨으로 바친
봉헌의 손길을 기억하여 주옵소서.
드린 예물을 받아 주시고
드린 손길마다 복을 내려 주옵소서.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않게 하시고,
때를 따라 돕고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하여 주옵소서.
성도들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여 주옵시고
아픈 성도들은 주의 손길로 치료하여 주시고,
각 가정을 인도하셔서
믿음으로 범사에 감사하며,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살게 하옵소서.
축도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기로
결단하고 돌아가는 성도들에게
영원토록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