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곡 인회 조부님 비석 설명(1) 4월 둘째 일요일 전주 서곡시제에서는 목사공파 후손 19반상(전략장군집 7, 선략장군집 6, 도사공집4, 생원집 1, 공덕집 1)의 시제를 모십니다.
이번에는 코로나19 때문에 서곡 시제는 취소했지만 그동안 빠지지 않고 시제를 모셔 왔고 우리 공덕집에서 비교적 다른 집보다 많은 인원이 참석한 편입니다. 워낙 시제가 많으니까 시제 보낼 순서(제향기 순서)를 붙여 놨는데 다섯 집으로 분류한 것은 목사공의 아들 어모장군이 정략장군, 선략장군, 경상도사, 생원, 흠 5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흠은 거소 불명으로 참석치 않고 우리 공덕집을 별도로 넣은 것입니다.

그런데 왜 공덕집을 따로 넣었냐면 공덕집이 종원수도 많고 시제 참석도 비교적 많이 참석하기 때문에 편의상 공덕집 1반상이라고 따로 적어 놓은 것이지 우리 집안도 엄연히 정략장군 집에 속합니다. 정략장군은 원래 5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인경, 인후는 손이 없고 인길은 도사공집으로 양자를 갔으며 인희와 인회 2분이 남았는데 큰 아들 인희 집은 11개 집안으로 나누어 져 있으나 인회 집은 오산집과 공덕집 2개로 내려오기 때문에 우리 공덕집이 종원 수가 가장 많습니다. 여기서 모시는 시제는 29世부터 35世까지 모시는데 워낙 많아서 한번에 3반상씩 모시는데 인회 조부님은 31世이기 때문에 우리 공덕집은 4번째에 모십니다. <서곡 시제 모시는 모습>

다른 집안은 서곡에서 21世부터 35世까지 시제를 지내는데 우리 공덕집은 31世 인회 조부님 한분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계자 조부님을 이장할 때 성수 이사님은 서곡으로 이장을 주장해서 혹시 서곡에 모시는 것 아닌가 생각했는데 산정리에 모시게 된 것입니다. 저도 서곡시제 모실 때 여러 번 참석해서 시제 지내기 전에 인회 할아버지 묘지와 비석은 찾아 가 봤지만 한자 위주로 되어 있어서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인회 조부님 묘지>

이 묘지는 1991년도에 전주 택지개발로 길 건너편에 있던 묘지가 이장된 것인데 무슨 이유인지 목사공 종중에서 위치를 인희 조부님 밑으로 정해 10년 만에 다시 옮겼습니다. 그 당시 비석은 땅에 묻고 낡은 둘레석을 바꾸면서 2011년 3월에 새로운 비를 세운 것입니다. <인회 조부님 비석 전면>

이 새로운 비석은 전면에 “學生全州李公麟會 配 孺人扶安金氏 之墓 合兆 乾坐”라고 큰 글씨로 새겨져 있습니다.
비문 내용은 벼슬을 하지 않은 전주이씨 인회와 부인 부안김씨가 북서쪽을 등진 자리에 잘 어울려 있다. 라는 뜻이 새겨져 있습니다. 비석문은 일반적으로 전면부터 시작해서 좌측면과 뒷면, 우측면까지 새겨져 있는데 인회 할아버지 비문도 그런 식으로 새겨져 있는데 이번에 산정리에 이장한 계자 조부님 비석은 생졸(生卒)년대를 좌측면에 따로 새겼습니다. 좌측면에는 비석 본문 내용으로 “學生全州李公鱗會墓表”라고 시작되는데 그 뜻은 전면과 똑같이 “벼슬를 하지 않은 전주이씨 인회 묘지 표석”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글자 수 면적을 감안해서 다른 비석에는 대부분 생략하고 있습니다. 묘표의 뜻은 무덤 앞에 세우는 푯돌 즉 죽은 사람의 이름, 생년월일, 행적 등을 새기는 비석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비석에다 다시 누구의 묘지라고 제목을 새길 필요는 없는데 새긴 것 같습니다. 측면에는 묘표라는 제목부터 시작해서 한 줄당 43자씩 6줄이 있고 뒷면에는 15줄이 있어서 띄어쓰기가 없기 때문에 글자 수는 900자 이상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인회 조부님 비석 좌측면>

비문에 새겨진 글씨체가 무슨 글씨체인지 아름답고 깨끗하게 새겨져 있어서 보기가 좋습니다. 다만, 문장이 띄어쓰기도 없고 토씨 외에는 거의가 한자로 되어 있어서 요즘 사람들은 쉽게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인회 조부님 비석 뒷면>

그리고 마지막 우측면에는 그 집안의 추진위원들 명단이 올라와 있는 것 같은데 면적이 여유가 있어서 그런지 글자 크기가 좀 더 커서 보기가 쉽고 편합니다.

인회 조부님 비문에는 추진위원으로 진오 종손부터 시작해서 오산집 종손인 영민을 포함해 14명이 새겨져 있는데 사실은 인회 조부님은 영민 종손이 큰집인데 맨 뒤에 새기고 그 당시 공덕종중 이사들이 앞에 새겨져 있습니다. 여기에 진오 종손이 인회 조부님의 15세손으로 되어 있는데 목사공에서 근래에 세운 비석에는 묘지 당사자를 포함해서 세고 있지만 사실은 14세손을 잘못 계산한 것 같습니다. 잘 못 계산했다기보다 상대하세(上代下世) 때문인지 이 비석을 근선(조심하여 선택해서 쓴 글)하신 목사공 종중의 남규 어르신은 세손을 세는 데 기준을 포함해서 세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장된 계자 조부님 추진위원은 계로부터 세면서 후손 孫자를 빼고 12세 진오, 11세 동진이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조상은 조(祖)자를 붙인 것처럼 후손도 손(孫)자를 붙이는 것이 당연한데 왜 손(孫)자를 안 붙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인회 조부님 비석을 보면 거의 한자로 새겨져 있는데 원래 조선시대 비석은 한글이 없고 한자로 되어 있어서 읽기가 난해했는데 그래도 여기서는 토씨라도 한글로 되어 있어서 다행입니다. 주변에는 아직도 한자를 주장하는 노인 분들이 더러 있는데 이분들은 한글 문법을 잘 몰라서 그런 경우도 있지만 한자를 잘 모르는 젊은 사람보다 유식하다는 것을 은연중으로 나타내려는 분들도 있으니까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저도 한문은 잘 모르지만 읽기 쉽게 띄어 쓰고 아는 대로 설명을 해 보겠습니다.
다음은 비문 내용에 대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틀리더라도 그냥 재미있게 읽어 보시고 잘못 된 부분은 알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