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의 증조부인 김한신과 부인 화순옹주의 묘. .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증조부인 김한신과 화순옹주(和順翁主)의 합장묘이다. 김한신은 1720년(숙종 46) 영의정 김흥경(金興慶:1677∼1750)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유보(幼輔), 호는 정미와(精美窩), 시호는 정효공(貞孝公)이다. 13세 때 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혼인하여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졌다. 그뒤 오위도총부 도총관, 제용감제조 등을 지냈다.글씨를 잘 쓰고 시문에 능하였다.특히 팔분체(八分體)의 글씨와 전각(篆刻)에 뛰어났다. 김한신이 38세인1758년 사도세자와의 말다툼 끝에 벼루를 맞고 세상을 떠났다. 화순옹주는 이에 격분, 영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열흘 동안 식음을 전폐한 뒤 남편의 뒤를 따라 숨을 거두었다. 영조는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면서도 부왕의 뜻을 저버린 데 대한 아쉬움 때문에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고 후에 정조가 하사했다. 옹주는 조선왕조의 왕실에서 나온 유일한 열녀라고 한다. 가까운 곳에 김한신과 화순옹주의 합장묘가 있다.
▲화순옹주 홍문. 김한신은 영조의 둘째딸 화순옹주의 남편으로 김한신이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화순옹주는 14일을 굶어 남편의 뒤를 따랐다고 한다. 영조는 아버지의 말을 따르지 않고 죽어 불효라 하여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으나 후에 정조가 열녀문을 내렸다고 하며 조선왕실에서 나온 유일한 열녀라고 한다.
▲천연기념물 백송이 있는 백송공원 백송은 자라면서 나무 껍질이 벗겨져 흰색을 띄어 붙여진 이름으로, 백골송(白骨松),백피송(白皮松)이라고도 한다. 중국이 원산지이며 우리나라에는 조선시대에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이 가져다 심었다고 한다. 예산용궁리 백송은 추사김정희가 1809년(순조9년) 청나라 연경에서 돌아오면서 가져와,고조부 김흥경의 묘 입구에 심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1962년12월 7일 천연기념물 제106호로 지정되었다. 에산용궁리 백송은 수령 약2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14.5m, 둘레4.77m이다. 본래 줄기가 밑에서부터 세 갈래로 갈라져 있었으나 줄기 두 개는 죽고 줄기 하나만 남아있다. 나무껍질은 거칠고 흰색이 뚜렷하
다.
▲추사고택에서 택시로 삽교천 구양교로 이동 후 인증 사진 남기고 바로 신례원역으로 이동하여 귀가함
▲무한천이 삽교천과 만나는 합수점이다.
▲삽교천은 잠시 삽교호에 머물렀다 아산만으로 흘러간다.
4봉수지맥을 3구간으로 나누어 진행하여 오서산입구에서 시작하여 금북정맥 마루금에서 분기하여 이곳 삽교천에서 끝나는 45km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