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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사람들⑧ - 요셉
(히 11: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크기와 모양에 따라 믿음의 모습은 제 각기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창세기 50:24~25의 내용에 대한 인용입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시켜 마침내 선조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실 것을 확실하게 믿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그 때 자신의 뼈를 가지고 갈 것을 유언하였습니다. 요셉의 믿음은 죽음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의 생애 속에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사건은 형들이 자기를 구덩이에 빠트려 죽이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 준 가나안 땅으로 그의 뼈를 가져다 장사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왜 많고 많은 장지가 있을 터인데 거기에 자신의 뼈를 묻으라고 했을까요? 요셉의 이복형들이기는 하지만 아버지 한 분의 핏줄을 이어받은 형들이 자기에게 죽음에 이르게 했던 땅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저주요 아픔이지만 요셉은 지난 세월 돌이켜 보니 그 때의 사건은 그에게 큰 은혜의 현장임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 사건이 요셉의 생애를 변화시키게 되었는지 오늘은 요셉의 이야기를 통하여 그의 믿음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믿음에는 죽음이 담겨 있습니다.
요셉은 야곱이 지극히 사랑했던 라헬의 자식입니다. 야곱의 어머니는 리브가입니다. 리브가는 창세기 24장에서 그의 성격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이 주인의 아들인 이삭의 배필을 구하기 위하여 열흘길을 걸어 나홀 성에 이르렀을 때에 리브가는 물을 길러 오게 되고 엘리에셀은 이 처녀에게 마실 물을 요청하지 리브가는 기꺼운 마음으로 우물에서 물을 길어 종에게 뿐 아니라 낙타 열 필에게 배불리 먹입니다. 그 당시의 우물은 깊어 사닥다리를 타고 내려가 물을 길어 물동이 담아 어깨에 메고 나와야 하는 엄청난 수고가 따릅니다. 그럼에도 이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헌신적인 모성애가 강한 여성입니다. 게다가 남성성이 깃들여 있는 활달하고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 줍니다. 여자의 매력에 대하여 잘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성스러우면 남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을 그렇지 않습니다. 남자에게는 영성성이 그리고 여자에게는 남성성이 조금은 가미가 되어야 매력이 있습니다. 탤런트 김수미씨가 신문에 게재한 칼럼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60이 넘어 주위에 친구들을 살펴보니 아주 여성스럽고 순종적이며 남편을 위하여 그렇게 헌신하였던 여자들이 남자들로부터 구박을 받고 배척을 당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해가 안 되더라고 했습니다. 남자의 심리를 모르면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남자는 여자를 바라 볼 때 자기 어머니에게 느꼈던 향수(鄕愁)를 찾으려고 합니다. 야곱이 처음 라헬을 만났을 때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직관적인 야곱은 한 눈에 하트가 그려지면서 라헬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던지 그녀를 얻기 위하여 삼촌 라반의 집에서 머슴살이 7년을 수일같이 여기며 기쁨으로 감당했다고 성경에서 말씀합니다. 그런 라헬을 통하여 오랫동안 기다려 요셉을 보았으니 더욱 사랑스러운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야곱은 외골수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과 일에 몰두하는 사람으로 주위를 돌아 볼 줄 모릅니다. 라헬만을 사랑하는 그의 모습은 그의 처인 레아나 실바 빌하에게는 질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세 여자가 둘러 앉아 부슨 이야기를 했겠습니까? 당연히 자기들의 사랑을 빼앗아 간 라헬에 대하여 미움이 득실거리며 그런 자기들의 마음을 나눴을 것입니다. 그러다 라헬이 베냐민을 낳고 세상을 떠납니다. 그렇게 사랑했던 라헬을 잃고 아들 요셉의 모습에서 라헬을 찾습니다. 요셉에 대한 사랑은 집착에 가깝습니다. 창세기 37:3에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라헬의 죽자 미움의 Target은 자연스럽게 요셉에게 옮겨집니다. 모이기만 요셉의 흉을 봅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과 무척 친근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에 형들의 잘못된 행위들을 그대로 일러바치기 일쑤였습니다. 그럴 때 마다 야곱은 요셉의 편을 들어 다른 형제들을 야단을 치다 보니 요셉의 형제들도 눈에 가시처럼 보여서 요셉에 대한 반감이 커갑니다. 그들의 어머니까지 합세하여 요셉을 흉보고 욕을 해댑니다. 창세기 37:6~7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라며 자기의 꿈을 신기한 듯 형제들에게 말합니다. “그 후에도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꾸짖지만 그 말을 마음에 간직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은 머리끝까지 요셉에 대한 분노가 차올랐습니다. 사람은 누구에 대한 분노의 감정과 미움이 들어찼것을 함께 나누다 보면 시너지(synergy)효과가 생겨 한층 더 미워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어머니가지 가세하였으니 다할 나위 없이 미움의 감정이 폭발 직전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미움은 요셉을 죽이기로 작정합니다. 도단에서 양 떼를 칠 때에 요셉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그들에게 가자 그들은 한 구덩이에 던져 죽이기로 결의합니다. 이스라엘 지역은 강우량이 매우 적습니다. 섭씨 40도를 넘나드는 무더운 긴 여름철에는 비가 내리지를 않으며 늦은 가을과 봄철에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릴 뿐입니다. 그러하기에 옛날 이스라엘 지역에는 사람들이 땅에 구덩이를 많이 파놓고 이른 바와 늦은 비를 저장하여 식수와 농사를 위하여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건조한 여름철에는 이미 구덩이의 물은 고여 있지 않고, 진흙만 남게 됩니다. 사람들이 이러한 구덩이에 빠지면 다른 사람이 구출해주기 전에는 자기 힘으로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진흙 속에서 나오려고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더 깊이 진흙 속에 빠져 들어가 죽게 된다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물 없는 구덩이로 에 넣었다고 하는데 요셉은 바로 이러한 진흙 구덩이 속에 던져졌습니다.
얼마나 기막힌 현실입니까? 형들을 향하여 애원하는 목소리가 온 평원을 진동하였을 것입니다. “형님들! 내가 잘못했어요! 나를 살려 주세요!”소리쳐 도움을 요청해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구덩이에 빠져 이제는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얼마나 기막힌 현실입니까? 형들께 애원하여도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육신의 형제가 나를 도울 수 없습니다. 시편 40:2에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주님만이 기가 막힐 구덩이에서 나를 건지실 수 있습니다. 이제는 요셉은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 나를 이 죽음의 구덩이에서 건져 주세요! 내가 잘못했습니다. 나의 잘못을 용서해 주세요!”라고 외치며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의 뇌리 속에 주마등(走馬燈)처럼 지나가는 자기의 허물과 죄들이 떠올려 집니다. 이제껏 그는 죄라고 여기지 않았던 것들입니다. 아버지에게 형제들의 허물을 그대로 전했고, 그가 꿈을 꾼 것을 말했을 뿐입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행하였던 그것들이 상대방에게는 상처가 되고 분노를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었다고 생각하여 회개하며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회개하는 순간 형들에 대한 분노가 사라지고 용서를 하게 되고 이를 통하여 이룰 하나님의 선명한 뜻을 깨닫게 됩니다. 훗날 그에게 찾아 온 형제들에게 요셉이 이렇게 고백합니다.창세기 50:20~21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나는 죽을 것 같은 환경에서 어떤 것을 회개하였는지 적용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이제는 끝이로구나! 생각하니 그동안 어머니 라헬과 아버지 야곱을 통하여 받은 사랑이 스쳐 지나가면서 자기의 짧은 삶을 정리하여야겠다고 생각하여 하나님께 자기의 영혼을 부탁드립니다. 누가복음 17:33에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10대에 이 진리를 터득했습니다. 죽을 준비를 하고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내맡겼더니 얼마 후에 유다 형이 “요셉아! 일어나라 우리가 너를 웅덩이에서 끌어 내줄게”라며 형들이 밧줄을 내려 요셉을 끌어 올렸습니다. 그리고는 말합니다. “너를 미디안 상인에게 넘길 터이니 어디를 가든지 건강하게 살아만 있어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너의 생명을 보전하실 것이다” 죽음에서 살아난 감격이 요셉의 온 마음을 타고 들어옵니다. 죽음에서 건짐을 받은 부활의 신앙은 그에게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산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전도서 9:4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 죽은 사자보다 산개가 낫다 어떻게든 살아만 있으면 하나님이 그를 살리심을 믿었습니다. 죽었다 살아났기에 산 그 자체가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이스마엘 사람인 대상에게 노예로 팔려도 살아있는 것만으로 감격합니다. 살았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됨을 깨달았기에 보디발 집에 하인으로 팔려도 감사합니다. 살아있는 감격에 빠진 사람은 무슨 일을 해도 즐거움으로 그리고 부지런하게 행할 수 있습니다. 그의 모습은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한 에너지를 갖고 있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끈덕지게 유혹합니다. 그 당시 애굽은 최고의 문명과 문화를 자랑하는 나라로서 거기에 버금가는 향락문화도 발달되었습니다. 여인들의 화장술을 세계 최고 였고 그들이 사용하는 향품도 최고였습니다. 육식을 하고 더운 지역이라 땀이 많이 분비되어 이를 방지할 수 있는 향수사업이 지금까지도 엄청나게 발달되어 있습니다. 보디발의 오늘 날의 경호대장입니다. 막강한 권세를 지닌 자답게 아내도 뛰어난 미모의 여자를 얻었을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미모와 섹시한 몸매를 가지고 풋풋한 향수를 날리며 접근해 오는 것을 뿌리치는 것은 대단히 힘듭니다. 그러데 요셉을 단호하게 이를 거절합니다. 왜 그렇지요? 그는 죽음의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 유혹에 빠져 죄를 지으면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그로 하여금 단호하게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이 되었던 것이지요.
베드로전서 4:12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라고 하였습니다.
함부로 죽고 싶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죽음이 내게 해당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에 해당한 것입니다. 어떻게든 살아만 있으면 하나님은 나를 도우십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겪게 하시는 이유는 이 과정을 통하여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믿음에는 꿈이 담겨 있습니다.
요셉에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라는 것과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라는 꿈입니다. 이 꿈은 자기 형제들보다 더 뛰어나리란 기대를 갖게 합니다. 또한 '일어서다'란 동사 '야차브'는 단순형 재귀태(Niphal)의 분사로서 '선채로 계속 있었다'란 뜻입니다. 이는 한번 확립된 형들에 대한 요셉의 우위 신분이 계속 지속될 것을 상징합니다. 또한 별의 숫자와 요셉의 형제들 수가 일치하는 것을 보아 해와 달은 각각 그의 아비와 어미를 상징하는 것(10절)임을 알 수 있는데 따라서 이 꿈은 이스라엘 전체 가문에 대한 요셉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되어집니다. 우리가 요셉의 꿈을 생각할 때,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요셉이 꾼 꿈은 요셉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7세의 요셉이 꾼 꿈은 그가 마음에 품고 있던 소원에서 비롯된 꿈이 아닙니다. 내가 형들보다 성공해야 되겠다는 강한 열망으로 그런 꿈을 꾸게 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요셉이 그 꿈을 꾼 것은 불가항력적인 일이고, 자신의 의지나 희망과는 관계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 꿈이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기 때문에, 요셉이 꾸었더라도 그의 것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셉이 어릴 때부터 큰 그릇이 될 인물이었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청소년기의 요셉을 잘 기록한 창세기 37장에 보면, 그는 이복형들의 잘못을 아버지 야곱에게 고자질하던 자였습니다. 고자질쟁이 요셉을 의롭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자녀들을 키워보니 고자질해서 혼자만 빠져나가는 것보다는 형제들의 허물을 감싸주는 것이 부모를 더 기쁘게 합니다.
따라서 요셉이 그 꿈을 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인 은혜로 요셉이 그 꿈을 두 번이나 꾸게 하셨던 것입니다. 어릴 때는 몰랐지만, 하나님의 모든 꿈이 이루어지고 나서야 자신이 꾼 꿈은 자신의 가족과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이 꾸었고 마침내 이루어진 이 꿈은 누구의 것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꿈이었습니다. 이 꿈이 부활의 믿음을 지니게 될 때 해석되어지고 믿을 수 있었습니다.
요셉이 억울한 일을 당하여 옥살이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부딪히면서도 낙심하거나 되돌아서지 않았던 이유는 그에게 담겨 있었던 꿈이 그를 이끌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영롱한 꿈이 그의 어두운 삶을 비취는 한 줄기 빛과 같았습니다. 꿈이 있는 사람을 결코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잠언서 29:18에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치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여기서 묵시란 ‘하존’(@/zj)으로 ‘이상’ 'vision'을 말합니다. 제임스 번역에 보면 분명히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Where there is no vision, the people perish"(잠 29:18) 즉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꿈이 없으면 망할까요? 생각을 해보세요. 내일에 대한 꿈이 없는 사람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게 되고, 단지 말초신경만 자극하는 육신의 쾌락에만 도취되어 제멋대로 행동하다가 결국 망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꿈이 없다고 생각을 해보세요. 지긋지긋케 못된 남편(아내), 방탕한 자녀, 혹은 나를 괴롭히는 아무개가 가면 갈수록 그 상태가 나빠져서 그로 인해 내 마음이 더욱 상하게 된다면, 그리고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더욱 꼬여진다면, 그리고 질병도 더욱 악화되어 조금 있으면 나는 죽고 만다면, 우리는 살아갈 희망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셋째로 믿음에는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지혜란 무엇일까요? 분별력입니다. 로마서 12:2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분별하다’는 ‘도키마조’(dokimavzw)란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흔들어 시험(test)하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데는 흔들림이 있습니다. 내 삶의 기저(基底)가 흔들리고 내가 의지했던 것들이 흔들리며 위기감이 생기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냅니다. 굳이 이 과정을 겪어야 되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이 과정이 우리로 하여금 힘들게 하고 낙심하게 합니다. 흔들리는 환경을 바라보고 거기에 초점을 맞추면 절대로 문제의 해답은 찾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내 생각을 접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 이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먼 바다를 항해하는 배는 성능이 좋은 모터와 바닷길을 안내해주는 정확한 내비게이션을 갖추는 것이 필수입니다. 그렇지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어떤 것을 원할 것인가? 뛰어난 성능의 모터와 평범한 내비게이션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그럭저럭한 모터와 정확한 내비게이션을 택할 것인가를 강요받는다면 후자를 선택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일 것입니다. 평범한 모터는 탁월한 성능의 모터보다 목적지에 조금 더 늦게 가게 해주겠지만 만약 내비게이션이 정확하지 않아 엉뚱한 곳으로 갔다면 이만저만한 낭패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모터라면 하나님의 뜻은 내비게이션이다. 열심히 기도하고 노력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해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면 눈물이 쏙 빠지는 고생이 앞을 가릴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희생적인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지만 정작 하나님의 뜻을 찾는 데는 소홀히 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특히 삶의 덫에 빠져 전전긍긍하고 있는 처지라면 남은 기회나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고통스런 덫에서 빠져나오려면 정확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깨달아 삶에 적용하는 일이 필수적입니다.
요셉은 자기에게 둘러쳐 있는 낙심어린 환경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는 지혜를 활용했습니다. 7년 풍작을 거두고 7년 흉년의 때를 대비하는 것 이것이 지혜입니다. 흔히 축복의 때에 지혜가 흐려질 수 있습니다. 그 축복의 풍성함이 오랫동안 지속될 것 같은 착각속에 거기에 파묻혀 삽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사람은 이 풍작이 무엇을 의미하고 무엇을 이루시고자하는 하나님의 뜻인지를 알기에 풍년 때에 흉작을 대비해서 곡간을 짓고 쌓아 두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은 영적인 풍년의 때입니다. 언제든지 말씀을 읽고 들을 수 있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반드시 영적인 흉년의 때가 온다는 사실입니다. 아모스서 8:11~12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내게 주어진 환경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달라고 구하십시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그 분의 뜻을 알려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으면 이제는 순종하십시오! 거기에 하나님의 선하심이 나타날 것입니다.
넷째는 믿음에는 나눔이 담겨 있습니다.
영국의 세기적인 여배우였던 오드리 햅번이 1993년 63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1년 전에 아들인 셥 헵번 퍼러에게 셈 레벤슨(Sam Levenson) 이 지은 <Time Tested Beuty Tips>라는 시를 남겼습니다. “아름다운 입술을 갖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보아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갖고 싶으면 하루의 한번 어린이가 손가락으로 너의 머리를 쓰다듬게 하라!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으면 너 자신이 혼자 결코 걷고 있지 않음을 명심해서 걸어라! 사람들은 상처로부터 복구되어져야 하며 낡은 것으로부터 새로워져야하고 병으로부터 회복되어야 하고 무지함으로부터 교화 되어야 하며 고통으로부터 구원 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결코 누구도 버려서는 안 된다. 기억하라, 만약 내가 도움을 주는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 당신이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손은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 분은 십자가에서 당신의 피 한방울 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5:12에서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조건 없이 나누는 것이 사랑입니다. “네가 내게 이렇게 하면 사랑할게”가 아닌 거저 주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나눔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여러분이 믿음의 사람인지를 점검해보려고 하면 나는 내 것을 다른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는 것을 기뻐하는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내 것으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면 내 안에 예수님의 생명 즉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애굽과 인근에 7년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 흉년의 절박한 환경에 요셉이 쌓아놓은 곡식이 사람들을 살리는 일을 합니다. 내가 형통할 때 내가 건강할 때 이를 가지고 나누라는 하나님의 Sign입니다. 누가복음 6:38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0:35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나눔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나는 내게 주어진 환경과 시간을 통하여 나눔이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어떤 노력을 기우리고 있는지 살펴보시고 적용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