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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說 허준(許浚) 第63話>
- 이은성 지음 / 소설 동의보감
對決 第一
충청도 진천 버드네에서 허준이 보상없는 의료행위를 하다가 집으로 돌아온 그 낙방한 가장을 맞아 요즘 허준의 집은 더없이 평화로웠다.
취재는 떨어졌어도 인심이 허준의 집을 뜨겁게 감싸고 있었다. 사네 죽네 온갖 마름질에 살기 바라면서 그 고단한 세상살에 지쳐 허기져 쓰러진 이를 두어 번 어깨나 흔들곤 지나치는 모진 인정을 발휘하면서 그래도 때로 사람들은 자기가 행할 수 없는 마음, 자기가 직면해 온 상황에 누군가가 대신 나선 것을 알면 그제야 그게 누구인가 되돌아 보는 한가닥 썩지 않은 마음씨들을 지녔나보았다.
그것이 옳은 줄을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는 자괴 ...
이래서는 아니 되며 사람이면 저래야 하리라는 삶의 가치와 덕목을 너무도 익히 알면서도 또 행하지 아니한다 하여 세상이 자기만 들어 욕하는 바도 아니기에 지나쳐버린 숱한 기억 속의 부끄러움 하나를 허준이란 인간이 말없이 바로 잡았더라는 소문 하나.
없는 이웃을 도와주고 약한 자를 부축해주었다는 너무도 간단한 인정 한자락.
그건 나도 할 수 있었으며 너도 할 수 있었으며 세상 사람 인두겁을 바로 쓴 자라면 어쩌면 그 누구나 할 수 있는 행위를 그가 행한 것뿐인데 낯선 사람이면 그토록 가혹하고 이기적이며 모질던 인정이 어느 순간 또 세상 이웃을 향한 너무도 당연한 옳은 일 하나에 그토록 열광해 마지 않는 것도 인간들의 수수께끼였다.
"저 집이 허준이의 집이데이."
곧장 가던 길도 곁으로 돌아나와 사람들이 산비탈 보잘것없는 허준의 집을 가리키며 자랑스러운 얼굴을 했다.
"길 나가면 모두 네 인사를 하구 해서 오히려 내가 면구스러워 마치 자식 이름 팔아 떡이나 팔러 다니는 에미 꼴이 됐으니."
흉년이라 인절미에서 수수팥떡으로 채웠던 떡목판을 한나절도 안되어 떨이하고 돌아온 어머니 손씨의 말이었다.
"대체 그 허준이란 의원이 사는 산음이란 데가 추풍령 이쪽인가 저쪽인가?"
"이런 무식한 것 봤나! 산음이 강원도땅이지 추풍령고개는 왜 나와?"
추풍령은 넘어보았으나 더 이상의 지명은 꿸 자신이 없는 친구에게 동행한 객이 세상 잘난 인물은 다 제 고장으로 끌어들이고 싶은지 번쩍 경상도 산음 고을을 강원도땅에 옳겨놓았다.
"우리 외가집이 거창입니더. 허준이 사는 산음캄은 바로 도랑 하나 사이라예."
이런 자랑은 산음을 비껴가는 나루나 고갯길 아래 주막에서 쉬지 않아도 될 걸음을 주막 툇마루에 앉아 공연히 술 한잔 시켜먹는, 산음과 지리가 가까운 사람들의 자랑이었다.
"와요?"
자기 동생처럼 아침부터 나타나 허준의 남매를 데리고 매미도 잡아주고 모래무지도 잡아주는 동리 아이들이 언덕 위에서 내려와 두 아이에게 다가서는 과객을 가로막고 물었다.
"무슨 소문들은 기 있어서 그렇다. 야들이 허준이 그분 자식가?"
"그렇심더. 우리캉 한마실에 삽니더."
"그래, 이리 온나."
과객이 두 아이를 불러 턱없이 정전 한 닢씩을 두 아이의 주먹에 쥐어 주고 오히려 자랑스러워했다.
"괜찮다 받아라. 나도 니 아부지를 전에 한번 본 적이 있다. 엿 사묵고 싸우지 말고 잘 놀거래이."
버드네 병자들과 아무 상관이 없을 산음 사람들이 두 아이에게 인정을 쓰며 허준이와 한고장에 살게 된 것을 즐거워했고 그 수많은 소문을 날마다 한아름씩 듣는 김씨는 다시 그 얘기를 시어머니께 전하며 눈물이 나도록 날로 남편이 자랑스러웠다.
소문처럼 세상 사람들을 미치게 하는 일도 없다.
"허준이 집에 돌아왔다모?"
"왔다 다시 갔다카더라."
"어디로?"
"어디긴, 이제 그 사람 얼굴 보기 어려운 거 아이가. 진주, 고성, 밀양 쪽까지 급한 병도 없는 놈까지 덩달아 찾아오느라 요새 산음 어간 주막들은 허준이 찾아오는 사람들로 대목 만났다카두만."
"에이, 장돌뱅이 되지 말고 나도 의원이나 한번 돼볼 거로 ..."
"와? 지금도 안 늦다. 꼭 의원짓을 해야 허준이처럼 이름이 나나. 장돌뱅이 중에 허준이처럼 되거라."
"나도 언제 우리 어무이 해소병이나 고쳐드리러 한번 찾아가보야 할긴데 ..."
급한 사람은 달려가고 여유가 있는 사람은 벼르며
이미 허준의 이름은 유의태의 이름을 능가하고 있었다.
물론 그 능가는 유의태와 같은 의술에 대한 신뢰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촌로들은 그 두 사람을 산음의 두 '의'로 규정했다.
그 산음의 두 '의'에서 의는 유의태요 또 하나의 의는 허준이란 뜻이었다.
이 규정에 산음 사람들은 이의가 없었다. 그러나 산음 밖의 사람들은 허준을 더 위에다 놓으려 했다.
두 사람의 의술에 대한 경쟁을 본 바도 들은 바도 아직은 맞붙었다는 얘기도 없다. 그러나 태산같이 높던 유의태의 이름과 견주어진 허준이란 새 이름을 사람들은 상쾌하게 여겼다.
그가 새 사람이라는 신선함에서, 또 허준이 과거 유의태의 문하에 있다가 파문당하고 축출당했다는 흥미로운 인연에서 산음 밖 사람들은 신인 허준을 기대하고 성원했다. 그리고 멀잖아 필연적으로 벌어질 두 사람의 대결을 고대해 마지않았다.
"다시 길을 떠난 후 돌아올 기약은 없었다 하시오."
집에 병자와 환자들이 몰리고 가마가 줄을 잇자 허준은 아내 김씨에게 일렀다.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행방에 대해 엄하게 함구령을 내렸다. 그리고 어머니 손씨에게 그 이유를 설명했다.
세상 소문이 너무나 침소봉대로 커진 일, 또 자기로 인해 스승의 집안에 풍지박산이 난 데 대한 죄스러움. 또 있다.
지난날 성대감댁 정경부인을 낫운 일이 새삼 신기다 어떻다 거론되며 인근에 몰려든 병자들이 유의태의 집을 지나쳐 너도 나도 자기의 집으로 찾아드는 데 이르러선 허준은 아연할 따름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소문에 좌우되어도 허준은 알고 있었다. 스승 유의태의 의술의 경지는 자신의 재주보다 아득히 구름처럼 높다는 것을. 또 허준은 생각한다. 의술은 누구와의 경쟁도 아닐 것이요 자기 이름을 드러내는 수단은 더더구나 아닐 것이다.
자기가 아는 대로 자기가 배운 대로 자신이 믿는 대로 정성껏 대처하는 것만이 자신을 완성하는 길일진대 세상의 소문에 충동질당하여 스승 유의태와 이기고 지는 경쟁 따위는 흥미가 없었다.
진다는 것은 불을 보듯 자명한 일이요, 아니 지고 또 져서야 마침내 자기보다 우월하고 앞선 이를 따라잡을 마음의 터도 마련이 되리라,
그러나 결코 유의태 그 사람과 침통을 풀어들고 맞서고 싶진 않았다.
허준이 이번 길에 안 것들 - 세상 소문이 두려움을 알았고 세상의 소문이 지닌 허황함을 또 알았다.
자칫 그 허명에 정신을 팔다가는 잠시 세상 사람들의 흥미나 충족시킬 결코 얻을 것도 없다는 것을 ...
허준은 날마다 어디서 왔소 어디서 왔네 낮선 지명을 대고 뒤밀리는 병자와 환자들을 보며 그 고통에 안쓰러워하는 아내에게로 다시 일렀다.
"병자를 보기 시작하면 병자들은 더욱 몰릴게요.
그러나 유의태 그 분은 내가 싸울 상대가 아니오. 세상 사람들은 자식에게도 버림받고 유의태 그분이 악이 받치고 분해 떨고 있다 속삭이며 우리 두 사람 죽기살기로 맞붙기를 바랄 터이지만 난 세상 그 잔인한 구경꾼들의 호기심이나 채워주는 인간은 되고 싶지 않소.
내 관심은 다시 올 내의원 취재에 대비하는 일이지 그 무엇에도 한눈팔고 싶지 않은즉."
"하오나 아니 계시다 하여도 날로 찾아드는 사람들에게 언제까지나 아니 계시다는 한마디로 되올지."
"이 산음에 유의태란 분이 의원을 열고 있는 한 난 결코 한 사람의 병자도 받지 않을 것이오."
그날 이후 상화가 찾아와도 허준의 아내는 허준이 오랜 여정을 잡아 길을 떠났다고 그의 방문을 거절했다.
세상 소문이 가라앉고 허준의 집으로 몰려온 병자들이 다시 유의태의 의원으로 발길을 돌릴 즈음.
세상 그 변덕스러운 인심을 한귀로 흘리며 허준이 자기 집 글방에서 다시 내의원 취재 시험 준비에 몰두하던 어느 날 믿을 수 없는 소문 하나가 허준의 귀에 들어왔다.
유의태가 괴한의 습격을 받아 피투성이가 되어 자기 방안에 쓰러져 있었다는 놀라운 소문에 허준은 책과 씨름하던 자기 방문을 박차고 그 길로 유의원을 향해 달렸다.
허준이 저만치 유의원의 언덕배기로 오르는 외가닥 길에 들어섰을 때 그 언덕을 급히 내려오는 사내를 보니 상화였다.
허준이 걸음을 세워 상화를 기다렸다. 경황없이 달려오던 상화도 눈앞에 서 있는 것이 허준이자 반색을 하며 내달아왔다.
"부르러 가는 길인데 어찌 알고 미리 오십니까?"
"부르러 오다니?"
"그럼 모르고 그냥 오시는 길입니까."
"도시 믿을 수 없는 소문이 들리기로 달려왔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임오근이가 집을 떠났습니다. 들으셨습니까?"
"..."!
"떠나도 그냥 떠난 게 아니라 스승님께 패악을 부리다가 떠났습니다. 암튼 들어가시지요."
"나를 부르시는 일은 왠가?"
"가면서 말씀드리지요. 가십시다."
잡아끄는 상화에게 허준이 걸음을 세웠다.
"정녕 나를 지목하시어 오라 하시던가?"
"부자지간 의를 끊으신 후 우리 문도들 모두 조만간 이런 분부가 계시리라 짐작했던 바올시다. 어제 임오근의 난동도 스승님의 그 결심과 무관하지 않고요."
'유의태가 나를 부른다!'
상화의 그 말 한마디로 허준의 가슴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무언가 두방망이질치기 시작하는 두근거림을 억누르며 허준이 물었다.
"임오근의 패악은 어떤 것이며 그것이 나와 상관이 있다니 자초지종 얘기를 듣세."
상화가 비탈을 오르며 어제 있었던 사단을 빠른 말투로 말했다.
이미 십여 일 전부터 임오근의 행동이 불안정했다.
14년 동안 유의태의 문하에 있으면서 특히 창녕 성대감의 '서찰건'을 고자질하여 허준을 파문시킨 후로는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유의원의 수제자로 자처했고 아들 도지와 함께 내의원 취재의 기회가 허락된 것도 그런 임오근에 대한 유의태의 애정 어린 배려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들도 임오근도 유의태를 실망시켰다.
아니 그건 유의태에게 있어 실망이란 말로 달랠 수 없는 배신이요 절망이었는지 모른다.
울부짖는 병자를 외면하고 영달의 길로 달려간 아들과 수제자.
의에 대하여 특히 남다른 완벽을 추구하는 그 소망 때문에 유의태는 그래서 더더욱 아들과 제자들에게 환멸을 느꼈는지 모른다. 치병용약의 술이나 의료제민의 이상에 앞서 의원이 의원이고자 하는 그 심지와 품성을 더욱 중히 여기는 유의태였다.
모자라는 재주는 채우면 된다.
그건 세월 속에 성심만 곁들이면 누구나 달성할 수 있는 노력과 단련의 경지다.
그러나 의의 길에는 노력만으로 도달할 수 없는 마음의 영역이 있다. 병자를 연민을 담아 보는 눈이 업을 출세나 치부의 욕망과 바꿀 수 없다는 무심지의의 바탕.
그래서 의의 첫단계에서 부딪치는 심병의 술을 예로 누누이 유의태는 주장했었다.
신, 성, 공, 교라 이름하는 심병의 수단에, 신은 병을 짚는데 바라보기만 하여 아는 경지로서 그 바라본다 함은 병자의 오색 즉 코, 눈, 이마, 뺨, 피부색을 보아 절로 아는 것을 말하며, 성은 듣고 아는 경지로서 오음을 듣고 숨은 병을 분별하는 재주며, 공은 일일이 병자의 용태와 괴로운 것을 물어서 아는 경지요, 교는 맥을 짚고 미심쩍은 곳을 만져보아 병을 찾아내는 경지다.
그러나 이 지식은 연륜과 훈련으로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것이로되 설사 그것들을 차례로 거치고 이르렀다 할지라도 정작 병자의 아픈 데를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건 흔하디 흔한 의원일 뿐이라는 것이 유의태의 결론이었다.
영달의 길이 아닌 의.
치부의 길이 아닌 의.
병들어 아파하고 앓는 이들의 땀젖은 돈으로 제 일신의 편안함을 구하지 않는 의 ...
세상이 원하고 그 자신 절절히 소망했던 참된 의원의 자질을 유의태는 자기의 자식에게서 발견하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들 도지는 아버지의 그런 선도에 가까운 의원을 꿈꾸지 않았다.
상것으로 태어나 대궐 높은 곳에 뽑혀 올라가는 영광으로 족했고 팔도에서 인정해주는 내의원 의관이라는 명예로도 가슴이 벅찼다.
그 부자간의 이상의 차이는 부자지간 의절이라는 이별로 끝났다.
아들과도 의절한 유의태의 그 절망을 보며 임오근은 드디어 자신도 설곳을 잃은 것을 알았다.
일찍이 그가 말하던
"그 그릇이 아니면 물려주지 않는다."는 비인부전이라는 경구가 뼈아프게 가슴을 옥죄었다.
바라는 그릇이 아니다 하여 아들과도 의를 끊는 냉혹한 인간이 자신의 14년 적공쯤 눈여겨보지 않으리라는 것은 너무도 불을 보듯한 일이었다.
그리고 유의태가 바라는 그릇 허준이 다시 오고 자기가 그 수하에서 부림을 받는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미칠 듯한 질시가 치받쳤다.
이제는 떠나는 길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임오근은 이대로 호락호락 떠나기에는 너무도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도지는 그나마 첩지나 따냈으나 자기는 뭐냐.
지리산 채약꾼으로부터 시작한 14년 동안의 간난신고가 저 원수와 같은 허준에게 밀려 물거품이 되다니 ...
'죽여야지!'
임오근의 처음 결심은 그것이었다.
그러나 사람을 죽여놓고 자기는 무사히 살아남으리라 여기도록 어리석지는 않았다.
임오근은 마지막 기대를 품고 유의태의 방으로 찾아들었다.
내의원 등재의 큰 꿈은 버렸으나 고향 김해로 돌아가 소아들의 병이나 보아주며 한세월할 수 있도록 유가고약의 비방과 장차 의원으로서의 지침을 내려주기를 간원했다.
그러나 유의태의 반응은 의원의 자질이 없는 자에게 더 일러줄 것도 가르칠 것도 없다는 차가운 한마디뿐이었다.
"하오면 그간 문도로서의 정리를 가상히 여기시어 유가고약의 제조 비방을 나누어주소서."
"문도의 정리는 내가 끊은 게 아니고 네가 끊은 것이다. 네가 14년 동안 내 밑에 있는 것을 주장하나 그 14년 동만 난 결코 매달리는 병자들을 뿌리치란 말을 한 적이 없은즉 또 네 위인 됨을 속속들이 안 지금 어찌 전래의 제약법을 일러주어 윗대의 이름을 더럽힐까 보냐."
상화가 문 밖에서 들은 건 거기까지였다.
침묵 끝에 임오근이 용쓰는 소리가 나며 방안이 캄캄해졌다.
이어 그 어둠 속에서 유의태의 서탁이 걷어채인 소리가 났고 상화가 방문을 열어젖힌 순간 임오근의 손에 움켜잡힌 촛대가 그대로 유의태의 정수리에 내려박히려는 순간이었다.
"너도 사람이냐? 네가 사람이면 어찌 이토록 박대할 수 있느냐!"
임오근의 그 소리는 오히려 울음에 가까웠고 고함을 치며 상화가 임오근을 밀어뜨려 유의태를 가로막자 함께 귀기울이던 문도들이 뛰어들어와 성난 황소 같은 임오근을 잡아 드잡이를 했다.
그 소란 속에서도 유의태는 카악! 눈을 치뜨고 날뛰는 임오근을 쏘아 본 채 미동도 않았다.
"그래?"
"남은 문도들이 뛰어들어 치고받는 소동중에 결국 임오근이가 문갑 속 돈들을 쓸어쥐고 뛰쳐나갔소."
"유의원께선 무사하셨고?"
"오른 팔뚝이 촛대의 송곳에 찔려 피를 흘렸으나 병사 쪽 병자들까지 저놈 잡으라고 고함치며 뛰어들자 뒷문을 차고 사라졌소."
"상처는 어느 정도요?"
"당분간 그 손으로는 정교한 침을 못 놓을 거외다. 팔뚝이 근 반 뼘이나 찢기셨소."
유의태의 오른팔이 칭칭 동여진 채 상처의 부위에서 피가 배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허준의 인사를 침묵으로 받는 유의태의 안색 속에는 아들에게 버림받아 혼자 남은 고적이나 제자의 난행에 생명을 위협받은 기색따윈 떠 있지 않았다.
"네 요즘의 소일이 어떠한고?"
그것이 유의태의 첫마디였다.
"별로 하는 일이 없사옵니다."
"그렇거든 이 아이 데리고 병사에 나가 기다리고 있는 병자들을 회진하고 들어오너라."
"소인이 대신하여도 되는 일이온지."
"네가 미더워서가 아니다. 달리 사람이 없기로 시키는 것이다."
스승이라 부르기엔 그 눈이 여전히 차가웠다.
그러나 허준은 큰절을 올려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유의태의 방을 나오며 마음속에 뇌었다.
'천하에 외로운 사람!'
자식에게 그리고 아내에게 헤어짐을 당한 늙은 사내에게 느끼는 동정이 아니었다.
여전히 당당하고 여전히 오연한 그 모습 속에서도 허준의 눈에는 눈앞의 유의태가 그렇게 비치고 있었다.
그러나 동정의 염은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식도 아내도 제자도 떠나보내고도 가슴 아픈 빛은커녕 눈썹도 까닥 않는 그 태연함에 대하여 알지 못할 적의가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 스스로 불안했다.
계속 ~~
[著者: 放送作家 故 李恩成]
<小說 허준(許浚) 第64話>
- 이은성 지음 / 소설 동의보감
對決 第二
허준이 유의태의 영을 받아 그를 대신하여 병사에 새로 찾아온 병자들에게 초진을 마치고 통원하기도 하고 병사에서 기거하기도 하는 묵은 병자들을 회진할 때였다.
뒤따라 다니며 미리미리 병자의 병력을 귀띔해야 할 상화가 갑자기 다급한 소리를 쳤다.
"무언가?"
"이 방의 병부가 없어졌소!"
그 방에는 병부가 비치되어 있었다. 병자의 성별과 나이와 이름을 적은 후 병의 발생 시기, 조제하고 시술한 약의 내용과 사용한 침의 이름과 부위, 그리고 병세의 진행을 기록한 병부가 몽땅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죽일 놈! 이를 어쩌리까!"
하고 상화가 그 병부를 기록하고 간수하는 것은 임오근의 소임이었으매 그 혐의를 임오근에게 두고 발을 굴렀다.
"아무리 스승님에 대한 포한이 있기로서니 이건 병자들에 대한 살인 행위올시다!"
"병자들이 놀라니 잠자코 있게."
흥분해 날뛰려는 상화를 달래어 허준은 급히 유의태가 있는 사랑채로 건너갔고 뒤쫓아온 상화가 내다보는 유의태에게 소리쳤다.
"임오근 그자가 전서부터 술이 들어가면 자주 그런 얘길 뇌는 소릴 들었습니다. 14년 동안 보고 들은 건 웬만치 쌓았고 저 세세한 병부들만 들고 가면 스승님의 반 정도의 의원 행세는 할 수 있다, 그런 얘기를요."
"새로 만들어라."
유의태가 허준에게 명했다.
"일일이 새로 다오니까?"
"그러리라. 매매인에게 발병의 시기를 묻고 현재의 상태를 살펴 투여할 약재의 이름을 적고 시술의 의견을 적으면 되리."
"투여한 약재와 시술의 의견을 소인의 소견대로 적으오니까?"
"그러리라."
상화가 마른침을 꼴깍 넘기는 소리가 났다. 그건 신뢰인가 시험인가?
혀준이 유의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유의태는 더 입을 열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허준이,
"소인의 의견을 적을 순 있사오나 병사를 살펴본 즉 오래 된 병자가 한 둘이 아니오며 자신이 없습니다."
그 허준을 향해 유의태의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
"네가 본 바대로 병자들의 병세를 적어오라는 것이지 만병통치의 처방을 적어내라 한 적 없느니라."
"..."
"항차 네가 무엇이기에!"
그 차가운 대거리를 향해 허준은 말없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 큰사랑을 나왔다.
'항차 네가 무엇이기에!'
"... 네가" 라고 표현하고 있으나 그건 "네 따위가!" 하는 타매의 억양임도 허준은 알았다.
따라나온 상화가 허준의 팔을 잡으며 달래는 말을 했다.
"새삼 불러오라 하실 전 언제고 왜 그렇게 야멸차게 구시는지 모르겠소. 하다못해 말 한마디라도 말이오."
"어찌 생각하면 모두 제 발로 떠나긴 했으나 도지를 이 산음땅에서 내쫓은 건 유의태가 아니고 허준이란 그 소문도 맞습니다. 허의원이 아니라면 서로 갈라질 싸움도 있을 턱 없었고 또 부자지간이야 천륜인데 결과가 그리 된 이상 허의원께 마냥 좋은 감정만 있을리 없지 않소. 아무리 스승님이라도 말이오."
'정나미 떨어지는 인간 ...'
허준이 내심에서 내뱉었다.
허준은 큰사랑채 쪽 보이지 않는 유의태를 쏘아보았다. 헤어진 후, 아니 헤어진 것도 아니다. 창날 같은 손가락질을 받고 덜미를 잡힌 채 의원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던 그후의 자기의 숱한 마음고생,
그 절망의 바닥을 기며 독력으로 내의원에 도전하기까지의 처절한 마음고생에 대하여 단 한마디의 위로도 없는 사내. 온세상이 칭송해준 진천 버드네의 사건에 대해서도 입도 벙긋 아는 체도 위로도 없는 냉혈한.
먼저 달려온 건 자기이되 의원 밖에서 만난 상화는 분명 그 유의태가 먼저 자신을 부르러 보냈다지 않았던가.
그러함에도 왜 불렀다는 말 한마디 없이 "항차 네가 무엇이냐." 되물어온 그 비웃음이
자꾸만 허준의 가슴을 부글부글 적대감으로 끓게 했다.
... 찾아온 건 잘못인 것 같았다. 자신의 뜻에 아니 맞았다 하여 자식도 가족도 버린 사내. 14년 수족처럼 부리던 제자의 단 한번의 실수도 용서 않고 끊어버린 저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을 아직도 스승이었다는 지난날의 그 여린 감상으로 달려온 건 자기의 약한 몰골을 보인 것 외에 무엇이랴 싶은 것이다.
임오근의 폭력에 쓰러졌건 어찌 됐건 그것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러나 자칫 병사 뒤로 뛰쳐나가려던 자기를 불러온건 허준 자신이었다.
그래도 한가닥 미련인지도 몰랐다. 유의태란 인간에게 존경일랑은 아예 뺀 미련. 그가 자기보다 한두 수 위의 의원이라는 그 사실에 대한 미련 ... 그 허준을 상화가
또 위로했다.
"가지각색 병자가 스무남은 명인데 그걸 다시 일일히 진맥하고 처방내리고 왜 그런 헛수고를 끼치는지 당신이 매일 대하던 병자들이니 잠시 당신이 건너와 이렇다 저렇다 부르시면 그냥 받아 적으면 될 일을."
순간 허준의 뇌리 속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나를 시험하고 있어!'
그렇다. 병부를 가져간 것은 임오근이가 아니요 유의태 자신인지도 모른다. 허준은 갑자기 그런 확신이 왔다.
그러나 그가 자기에게 무엇을 시험하고 있는지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부질없는 추측이야 ...'
시험은 기대다. 그렇다면 저 오만한 유의태가 자기에게 무엇을 기대한단 말인가.
허준은 자신을 고소했다. 오히려 허준은 상처난 손으로 침을 놓을 수 없는 유의태의 부상을 생각했고 그 치료를 기다리는 병자들에 대한 연민으로 다시 병사로 향했다.
이미 헤어졌던 사람이다. 새삼 그의 인간성에 무엇을 기대하려는 자신이 웃음거리다 싶었다.
유의태 대신 나타나 새삼 진맥하고 심병하고 처방을 적는 젊은 의원이 허준임을 알자 유의태의 의원은 다시 장터처럼 붐비기 시작했다.
딴 아이들 다 내보내고 허준이 다시 그 문하에 들어왔다는 소문은 허준이 또 하나의 의원을 차려 유의태와 대결하기를 기대하던 구경꾼들을 실망시켰으나 '고장의 두 의'와 함께 살게 된 산음사람들은 두 사람의 화합이 오래도록 지속되기를 기대했다.
"그럼 다시 입문한 것은 아니고?"
"그 사람 입에서 한마디도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고 저 또한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왜 서방님부터 그분을 어찌 그 사람이라 매정하게 칭하시오니?"
병부를 다시 만들고 사흘 만에야 집에 돌아온 허준을 둘러싸고 어머니 손씨와 아내 김씨가 유의태의 부름을 받은 사실을 기뻐하면서도 풀어지지 않는 두 사람의 응어리만은 아쉬운 얼굴이었다.
허준은 더 이상 구구한 얘기를 가족들에게 하지 않았다.
허준이 이틀을 밤샘하다시피 새로 병부를 만들어 큰사랑에 들어갔을 때,
"게 놔두고 나가거라."
... 가거라가 아니고 나가거라 ...
그것이 유의태의 대답이었고 다음날 아침 허준이 문안차 방 밖에 다시 섰을 때 들어오란 말도 없이 문 밖에 허준을 세워둔 채 유의태는 허준이 궁금히 여기는 이틀 동안 자신이 투약한 조제와 시술에 대해서 일언반구의 의견이 없었다.
허준이 참다 못하여, "이틀 동안 소인의 조제와 시술에 혹 잘못이 없었는지를 알고자 합니다." 하고 물러나지 않을 기색으로 서 있자,
"병이 비록 독한 것이라도 세상 병든 이들이 다 죽지 아니하는 것은 목숨의 자생력과 자구력이 반인 때문이고 그 중에 또 어느만치는 간병하는 이의 정성으로 버티곤 하니 굳이 누구의 공인 양 자처할 것 없다."
그 한마디 끝에 방문이 닫히고 말았다.
그러나 허준은 드디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유의태의 말 속에 조롱과 멸씨가 섞여 있다 하더라도 유의태의 그 말들은 자기가 적어낸 병부의 처방을 그대로 병자들에게 투제할 것과 시술할 것을 반대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안 때문이다.
그 나흘째 되는 날 새벽 문득 길 떠날 모습으로 나타난 유의태는 내다보는 상화에게,
"여러 날 집을 비울 것이니 혹 경각에 달린 위급한 병자가 찾아오거나 한다면 안점산으로 찾아오면 되리라."
바라보는 허준에게는 일별도 없이 상화에게 그렇게 한마디 던지고 대문을 나섰다.
놀란 것은 허준이었다.
유의태가 말하는 여러 날이란 정작 며칠일지 알지 못하나 그건 자신의 부재중 의원을 허준에게 일임한다는 뜻일시 분명했다.
위급하지는 아니하여도 병사에는 조석으로 병의 진행을 감시해야 할 중한 병자가 십여 명이나 있는 터요 하루면 수십 명씩 연락부절로 찾아드는 병자들에게 대처할 사람은 자기뿐이지 않은가.
허준은 십여 걸음을 내달아 그 유의태를 향해 소리쳤다.
"의원엔 간병이나 도울 제자들뿐이온데 스승님께서 가시면 남아 있는 병자며 연일 찾아올 병자들은 어찌 대처하오니까?"
"남아 있는 자가 할 일이지 어찌 매번 내가 알아 있어야 한단 말이냐!"
귀찮은 듯이 그 말 한마디 던지더니 미처 잡지 못하는 허준을 뒤로 유의태는 그대로 멀어지고 말았다.
말 한마디로 의원을 허준에게 내맡기고 사라진 유의태는 열흘이 지나도록 기별이 없었다.
상화가 유의태의 그 종적을 유일한 벗들인 김민세와 안광익이 있는 함북쪽 30리 대풍창 병자들이 득시글거러는 안점산으로 짚었으나 허준은 대꾸하지 않았다.
유의태 없는 하루하루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유의태를 대신해 허준이 와 있데이!"
"유의태가 허준이를 양아들로 삼았다카두만."
"참말이가!"
"가보이까 묵어 있던 병자캉 새로 오는 병자캉 허준이 혼자 전부 응대하고 유의태는 내다보지도 않는데 마당쇠 그놈아들께 물어보이까 방에서 양반은 술이나 묵고 그래 지내는갑두만."
"거름이나 져날라놓고 나도 허준이 얼굴이나 한번 보러 가볼까..니도같이 갈라나?"
병사에 나타나지 않는 유의태의 변화를 일변 쑥덕거리면서도 그러나 사람들은 유의태의 행방에 대해서는 조금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권위는 유의태와 견줄 수 없으나 소문은 유의태를 능가하는 허준.
그 소문이 너무나 아름다웠음에서 사람들은 3대 70년엔 걸쳐 이어온 해묵은 유의원의 얼굴이 바뀐 것에 대하여 신기해할 뿐 가슴 아파하는 눈치는 없었다.
또 그 허준이는 이래라! '저래라!' 하는 유의태의 오연한 말투가 아니요 일일이 설명하고 하나하나 손잡아주는 성심 어린 언동이라서 의원의 분위기는 딴때없이 붐볐다.
"지 병을 허준이 그 사람이 손수 진맥했어예 손마디가 길쭉하이 그렇데요. 그러고 사람 눈매가 우예 그리 조용하이 그렇십니까. 물어보는 말 수도 적고 어찌 보이 색시 같애예."
부쩍 불어난 여자 환자 중에서 젊은 아낙이 차례를 기다리는 다른 병자와 그 가족들 앞에서 얼굴을 붉히며 허준이에게 진맥받은 걸 자랑스러워했다.
"대사께서 저기 오십니다." 하고
유의태에게 술을 쳐주고 있던 늙은 문등이가 일어서며 말했다.
유의태가 들었던 술잔을 조용히 비웠다. 찾아온 친구를 기다리며 열흘씩이나 기다린 사람 같지 않게 조용한 동작이었다.
상화의 짐작대로 안점산에 찾아온 유의태는 친구들을 만날 수 없었다.
김민세, 안광익이는 밀양 어간에서 유랑하는 병자 십여 명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데리러 가고 없었다.
그 하루하루 유의태는 궁녀 정씨에게 술과 요기거리를 청해 싸들고는 안점산 산등성이와 계곡을 소요하며 침묵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날은 석양이 뉘엿거리는 시각인데도 돌아오지 않는 유의태를 걱정하여 정씨가 산식구들을 시켜 찾아보니 안점산 제일 높은 봉우리 그 바위 비탈에 걸터앉아 꺼져가는 석양을 하염없이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 발견되기도 했다.
생각하면 유의태는 그 동안 산식구들의 의식의 뒷배를 책임져준 너무나 큰 은인이었기에 정씨도 산사람들도 항시 술을 담가놓고 그의 내방을 기다렸었다.
산성 가까이 이른 김민세들의 뒤로 십여 명 병자들이 나타났고 새 식구들을 맞이하는 산성 사람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산성 사람들과 헤어져 김민세와 안광익 그리고 앞장을 선 소년이 산 위로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멀리서 보아도 그건 길상일시 분명했다.
"여직도 저렇게 저 아이를 데리고 다니오?"
"그러합니다."
오늘따라 유의태의 술과 안주를 손수 들고 따라나섰던 궁녀 정씨가 대답했다.
물었던 유의태의 시선이 그 정씨의 눈길을 따라 향하는 곳에 양자 길상이를 앞세운 김민세와 안광익이 손을 잡기도 하고 끌기도 하며 오르고 있었다.
어느 모로 봐도 그 모습은 자기의 처자식을 죽인 원수의 아들과의 광경 같지가 않았다.
"처음엔 저도 많이 상심했습니다만 이젠 저 두 사람 뗄래야 뗄 수 없는 부자지간이옵니다. 조석 밥상도 함께 들고 잠도 한이불에 자며 짧은 여정이라 할지라도 산을 떠날 때는 항시 동행하는 ..."
유의태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삼적다운 보시지."
"..."
"3천 명 병자의 병을 고쳐주는 의술보다 마땅히 제 손아귀로 죽여야 할 원수의 목숨을 저렇게 살려주고 지켜주는 것이 진짜 의의 모습인지도 ..."
"형부를 아직도 의원으로 보시옵는지? 제가 형부에게 보는 것은 의가 아니라 부처님의 자비올시다."
"나는 부처를 모르는 사람이니 저 모습도 내 눈에는 의업으로 밖에 보이지 않으오."
늙은 양부의 손을 잡아끌고 온 길상이가 유의태의 앞에 이르자 뒤로 물러나 예의를 지켰다.
김민세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친구에 대한 반가움을 대신했다.
"어쩐 일이신가. 의원을 비워두고 한가하게 열흘씩이나 예서 묵었다니."
"담아놓은 과일주가 입에 달아 발병 핑계하고 앉아 있는걸세."
유의태가 웃지도 않고 말했다.그 유의태에게 안광익이가 물어왔다.
"허준이 그 아이가 집에 와 있다고?"
"있겠지."
"아예 떠넘기고 오는 길이신가?"
그건 김민세의 관심이었다.그러나 유의태의 대답은 엉뚱했다.
"한번 와봐야지 하면서 잊고 있었는데 산세나 한번 둘러보러 집을 나선 길일세."
"산세는 왜?"
"묏자리나 하나 찾을까 하고."
"죽을 사람이 누군데?"
"나로세."
안광익이 웃고 김민세도 웃었다.
"때로 얘길 하지. 인간은 삼생을 거쳐서 사라진다고. 전생 현세 그리고 내세. 그러나 사람에서 사람으로 꼭같이 태어나는 복은 많지 않다네. 소가 되는 사람, 말이 되는 사람, 물고기가 되는 사람, 두더지가 되는 사람, 심지어 벌레가 되는 사람, 그래서 다시 좋은 인연으로 태어나고자 사람들은 공덕을 쌓는 것이고."
"한데 모처럼 찾아오시어 왜 사위스런 얘기만 하시오니까."
궁녀 정씨가 끼여들자,
"사위스런 건 아니지. 사람에게 있어 생과 사는 가장 중대사인데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것뿐 ..."
"새 식구들이 왔으니 저는 내려가겠습니다."
궁녀 정씨가 인사를 했으나 김민세도 안광익도 유의태의 침묵을 지켜볼뿐이었다.
정씨와 길상이와 문둥이가 산을 내려갔다.
산상의 바람이 거세지기 시작했다.유의태의 옷고름이 술잔을 든 팔뚝에 휘감기며 날렸다.
"다녀온 지 얼마 아니 되는데 어찌 올라오시었나?"
"요즘 생각하는 게 있네."
"무엇에 대하여?"
하고 안광익이 다시 물었다.
"사람의 목숨에 대하여."
"사람의 목숨?"
"의를 업으로 하며 남의 목숨은 손이 닳도록 다루었으면서도 정작 내 목숨에 대해 들여다볼 여가도 없었거든."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여명을 지니고 있지. 나도 그대도. 부처와 친한 그대도. 그 남은 목숨이 다하는 날이 몇 년 몇 달 후 그리고 어느 날 어느 때냐 미리 알 바는 없되 그러나 사람은 너나없이 앞으로 무수히 닥치는 그 어느 해 몇월 몇날에 죽는다는 것은 사실이지."
"그거야 예외가 있겠나, 인간들의 숙명인걸."
"한데 왜 새삼?"
긴장하는 두 사람에게 유의태가 웃었다.
"고작 예닐곱 달 전이래야 태어날 날짜를 짐작할 뿐인 생, 그러나 죽는 날은 언제 죽노라 짚어볼 수 없는 생, 바람이나 불어 옷자락이라도 날리지 않으면 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잊고 사는 생.
어느날 그런 것을 깨닫고 나니 어차피 죽을 목숨들을 수시로 낫워주는 의업이란 것도 너무나 작은 행위로구나, 그런 허망한 생각이 났네. 기왕사 큰 의원이 되려면 몸의 부분 부분 낫게 하는 작은 의원이 아닌 한 목숨 다시 태어나게 하는 그러한 커다란 의원은 왜 되지 못하는가 하는 말일세."
"꿈이로군.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사람의 능력 밖의 꿈 ..."
유의태가 신음처럼 말했다.
"결국 죽는 목숨, 결국 피할 수 없는 죽음, 아무리 해야 할 일이 많은 사람도 그 일을 다하도록 기다려주지 않는 죽음 ... 인명 유한이라는 그 사실."
"...!"
"사람의 죽음이란 세상의 질서일세.
초승달이 태어나 보름달이 되고 다시 그믐달이 되어 없어지듯이 그리고 다시 비치다가 커지다가 사라지고 그렇게 끝없이 태어나고 끝없이 죽고 ... 그렇게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 때문에 무언가 남기려는 것이 아닌가?"
"죽으면 끝인데 무엇을 남긴단 말인가. 제사밥이나 찾아먹는 고작 그런 귀신이 되는 건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네!"
안광익이 표정을 수습하고 유의태를 똑바로 건너보았다.
"죽으면 그만인 목숨 왜 오늘따라 죽음에 대한 말이 그리도 많은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계속 ~~
[著者: 放送作家 故 李恩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