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3:1-5절) 그리스도의 십자가
우리는 교회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기억할 것입니다. 물론 초신자로 신앙생활 할 때와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의 차이는 있겠지만,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쁨이 충만한 것이고, 교회 생활이 너무나도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생활이 행복한 이유는 다니는 교회가 커서 그런 것도 아니고, 프로그램이 잘 되어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교회 안에 사랑이 있고, 말씀이 은혜가 되어서 행복한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 교인들은 두 가지 열등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작은 교회의 목회자나 교인들이 큰 교회 목회자에 대하여 가지는 열등감입니다.
예를 들어서 자신이 다니는 교회는 상가에 있는 작은 교회이고, 예배당 내부나 찬양대나 시설이 너무나도 열악한 데 비하여, 옆에 있는 다른 교회는 예배당 건물이 으리으리하고. 교인들도 수천수만 명이 모이고, 다 성공한 사람들인 것 같고, 교회 이름도 브랜드 있는 유명한 교회라면, 열등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한번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즉 규모가 큰 교회가 믿는 예수님은 훌륭하고, 자랑스럽고, 작은 교회나 개척 교회 교인들이 믿는 예수님은 보잘 것 없는 예수님인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외모가 크고, 유명하다고 해서 좋은 교회가 아니고, 반대로 교회가 작고 초라하다고 해서 부족하고, 창피한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교회에는 성령의 역사가 중요합니다. 교회에 성령이 살아서 역사할 때에는 규모가 작아도 하나도 부끄럽지 않고, 오히려 너무 자랑스럽고, 그 교인들은 자기 교회가 그렇게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작지만, 은혜로운 교회를 지향하는 것이 바른 길입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 교회는 무엇인가 마술에 걸린 것 같이 모두 외형이 크고, 멋이 있어야 하고, 잘 사는 사람들이 많아야 좋은 교회라는 착각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열등감은 교인들이 세상의 성공한 사람들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열등감입니다.
세상에 성공한 사람들은 지식이 있고, 돈이 있고, 좋은 차를 타고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이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 비하면, 성공 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돈이 없을 수도 있고, 유식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안에 성령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의 돈 많은 사람에 대하여 심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른 신앙을 찾기까지 오랜 세월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드디어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갔다가 성령을 받고 온 사람들이나 사도 바울에게서 훈련을 받은 사람들의 복음을 듣고, 성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다녔던 교회라고 해 봐야 어떤 사람의 방이거나 헛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모임에는 성령이 충만 했고, 정말 모임에 기쁨이 있었고, 행복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 유대교 지도자나, 신자들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벌써 외모자체가 자기들같이 유치하지 않았습니다. 즉 입는 옷 자처가 엄숙했고, 아는 것도 달랐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할례를 엄청나게 중요하게 생각했고, 할례 받지 않은 자는 사람으로 취급하지도 않았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유대교 신자나, 유대교 지도자들 앞에서 자기들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대교회 앞에 있는 개척교회 교인 수준도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교인들은 자기가 믿는 예수를 부끄러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것이 유서깊고, 전통 있는 유대교의 세계에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이때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라고 하면서 그들이 신앙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을 버리고 있는지 아느냐?고 심하게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외형이나, 어떤 활동이나, 사상이나, 성공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입니다.
Ⅰ.그리스도가 밝히 보임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렇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3:1절)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눈앞에 밝히 보이는데, 왜 너희들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할례를 받은 사람들에 대하여 열등감을 느끼고 뒤로 숨으려고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밝히 보인다는 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형상을 가정이나 교회에 걸어두고, 매일 보고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피가 흐르는 형상을 교회에 세워두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그런 것을 세워놓은 것입니다.
그러면 갈라디아 교인들은 모두 예수님이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거기에 가 본 사람들이었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 거의 대부분은 예루살렘에 가 보지도 않았고, 예수님이 십자가 못 박히신 것을 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사도 바울 자신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거기에 가보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실제로 본 것은 그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잡으려고, 다메섹으로 갈 때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나, 갈라디아 교인이나, 아무도 직접 눈으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본 적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갈라디아 교인 모두가 환상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피 흘리는 모습을 보고, 예수를 믿었다는 뜻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 종교적인 본성이 있어서 때가 되면,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신앙에는 관심이 없고, 죽으라고 공부만 하고, 돈만 버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들에게는 이런 공부나, 돈이 우상이요, 신(神)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종교에 관심을 가지고 교인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개 그런 경우에도 신(神)에 대한 관심이라든지, 분위기가 좋아서 찾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도 똑같이 종교적인 상태에 있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종교의식을 지키고, 성경을 읽고, 죄를 짓지 않고 살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고, 많은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우리 안에 영혼의 갈증은 그대로 남아 있고, 하나님은 항상 멀리 계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머리로는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노력으로 죄짓지 않고, 완전하게 살려고 엄청나게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를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생각 속에는 항상 음란이나, 미움이나, 거짓이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어느 날부터 심한 영적인 갈등을 겪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 같이 나는 완전하게 살고 싶은데,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즉 나는 죄를 짓고 싶지 않고,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오히려 선은 행하지 않고,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갈등은 점점 더 심해지게 됩니다. 나중에는 도저히 살 수 없을 정도까지 가게 됩니다.
이때 사도 바울처럼 롬7:24절)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심한 영적인 갈등에 빠져 있을 때,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듣든지, 생각이 나면서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셨다는 것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느껴지게 됩니다.
이때 마치 예수님이 육성으로 *형제여, 너는 지금 죄 때문에 고민하고 있고. 괴로워하고 있다. 내가 네 죄를 위해서 이 손에 못이 박혔고. 이 옆구리에 창이 찔렸다*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예수님 앞에 처음으로 무릎을 꿇고 *내 의(義)로 살려고 하는 모든 고집과 의지를 버리겠습니다. 저는 주님 앞에 항복을 합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영접(迎接)하게 되고, 성령을 마시게 됩니다.
성 어거스틴 같은 경우에는 이런 방황이 심했고, 시간도 오래 걸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예수님 앞에 굴복했고, 예수님을 영접(迎接)했습니다.
존 웨슬리 같은 경우에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을 받으려고, 금식도 하고, 구제와 선교도 했지만, 모두 다 실패하고, 결국 마르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접했을 때,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존 뉴턴 같은 경우에는 노예 상선 선장을 하면서 악독하게 주님에게 반항했지만 결국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영접(迎接)하게 됩니다.
존 번연도 많이 방황하고, 반항도 했지만, 결국 하나님의 사랑에 굴복하고, 예수를 영접하여 믿게 됩니다. 이런 체험이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보기 때문에 그런 형상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최근 기독교에서는 십자가를 보지 못하니까 목사를 지나치게 신격화해서 쳐다보는 것 같습니다. 이것도 우상을 만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보는 것은 순전한 성령의 역사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한 번이라도 마음속에 비친 사람에게는 때가 되면, 성령께서 죄의 갈등을 일으키십니다.
즉 자기 안에 있는 죄를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때 혼자 마음속으로 고민하거나, 갈등하는 사람도 있고, 선행이나, 경건생활로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오히려 반발심으로 더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짓만 골라서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택한 백성들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 앞에 두 손 두 발을 다 들게 되는데, 이것이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밝히 보는 것입니다.
Ⅱ.참된 신앙의 본질
우리가 잔칫집에 가면, 먹을 것이 너무나 많아서 무엇을 먹어야 할지, 모를 때가 간혹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나이든 사람들의 특징은 어디서 무엇을 먹든지, 끝에 가서는 꼭 *밥* 을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잔칫집에 갔는데, 고기도 실컷 주고, 떡도 주는데, 마지막에 밥을 주지 않으니까 나오면서 *이 집은 밥도 안 주더라*고 불평을 하더랍니다. 한국 사람들은 꼭 밥을 먹어야 식사를 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 세계 안에는 너무나도 좋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안에는 신학이라는 학문도 있고, 음악이나, 미술과 조각이나, 건축도 있고, 문학이나, 신비체험도 있고, 선교]와 구제와 교육도 있고, 선한 사업도 있습니다.
특히 이 안에 명성과 돈 그리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감투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해서 목회자가 되려고 신학교에 들어간 학생 중에는 길을 잃는 사건이 너무나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학문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정의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일찍부터 정치나, 학생운동에 빠지기도 합니다.
또 교회 음악에 빠지기도 하고, 유명한 사람을 따라 다니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종교를 보면, 어떤 극단적인 체험을 하여 도(道)가 통했다고 해서 유명한 사람도 보고, 그 종교에서 높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유명한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아주 청빈하다고 해서 존경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3:2절)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학문도 아니고, 음악도 아니고, 대교회를 이루는 목회의 성공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누가 너희를 꾀더냐?* 질책하면서 이것 하나만 물어보자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즉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성령 받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여기서 성령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내 마음에 밝히 보이고, 내가 하나님의 사랑에 인격적으로 항복하는 것입니다.
그때 누구든지 다 성령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번만 성령을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성령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임하신 성령은 점점 그 양(量)이나 강도(剛度)가 커지게 됩니다.
어떤 때, 우리 안에 성령이 꽉 차게 될 때, 우리는 기쁨에 충만해지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강한 결단의 의지가 생기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많이 듣고, 믿음의 용량이 커짐에 따라서 우리의 지혜나 능력이 엄청나게 커지기도 합니다.
모세나 엘리야나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지혜나 능력을 거의 자유자재로 사용할 정도로 믿음이 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겸손한 사람들 안에서 가장 강하고 풍성하게 역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곧 기독교의 매력이요, 능력입니다. 즉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보다 열 배나 백 배 정도 강한 능력으로 말씀이 임하고, 깊이도 훨씬 깊이 있고, 성도들이 교제를 나눌 때도 엄청난 기쁨과 자유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물어보고 있습니다. 즉 *너희가 큰 교회를 다닌다고 해 서 그런 기쁨이 임하더냐. 아니면 공부를 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학적으로 토론한다고 해서 그런 기쁨이 임하더냐? 아니면 누가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서 그런 기쁨이 임하더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온전히 복음때문이었습니다.
모인 사람들이 모두 복음에 갈급해 있었고, 누군가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가지고 이야기할 때, 거기에는 잘난 인간도, 못난 인간도, 없이 그렇게 행복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큰 교회나, 작은 교회나, 아무런 차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교회 안에 성령의 역사 대신에 누군가가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크고 유명한 교회와 그렇지 못한 교회 사이에 그들이 믿는 예수가 엄청나게 다르게 된 것입니다.
물론 교회 안에 신학도 있고, 정치, 음악, 체험도 있고, 구제나 봉사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을 듣고, 믿는 것입니다. 그때 성령이 주시는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이것이 곧 참 교회의 본질이고, 살아 있는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교회 안에 너무나도 많은 걸림돌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공의 우상입니다.
우리는 가장 기뻐해야 하고, 가장 부러움을 사야 할 성령이 있는 사람들인데, 이것을 누군가가 꾀어서 다 빼앗기고 있는 것입니다.
Ⅲ.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침
우리가 사람을 볼 때, 외모나 덩치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이나, 사람 됨됨이 전체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요즘은 특히 방송 매체나 인터넷이 발달해서 사람들의 외모만 중요하게 볼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성들을 볼 때도 얼마나 늘씬하고, 말랐느냐? 하는 것으로 보고, 남자들을 볼 때도 남자가 얼마나 여자같이 생겼느냐? 하는 것을 보고, 감탄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사람을 잘 못 보는 것입니다. 사람을 외모로만 보고, 판단하는 것은 사람을 고깃덩어리로 보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은 속에든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이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한 말을 내고, 마음에 쌓은 악에서 악한 말을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그 사람의 코기 높으냐, 낮으냐? 키가 크냐, 작으냐? 하는 것보다는 그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을 하느냐, 아니면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하는 것이 더 그 사람의 됨됨이를 잘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기독교 신앙의 치명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처음 갈라디아 교회는 모두 작은 모임이었고, 그중에는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들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전도자들이 전해준 복음을 듣고,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생활은 성령의 삶이었고, 그들의 모임은 성령의 모임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말씀을 듣는 것이 좋았고, 그러고 나서 서로 먹을 것이 있으면,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를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모든 형제, 자매가 성령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은 좋은데, 그 안에는 빈부의 차이와 건물의 차이와 직분의 차이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결국 교회가 너무나도 커지게 되면, 사람들은 작고, 초라한 건물로는 만족하지 못하게 됩니다.그래서 헌금을 많이 내서 아주 큰 건물을 다시 짓게 되고, 그렇게 되면, 목사나 장로도 아주 높은 직책이 되어 버리고, 나중에는 의식적인 예배만으로 만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사업이 많아지게 되고, 무슨 대외적인 활동이 많아지게 됩니다. 그것은 결국 육체적인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사람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고깃덩어리로 마치는 것처럼, 교회도 처음에는 성령의 모임이었는데, 나중에는 고깃덩어리들이 모여서 싸우고, 다투고, 잘난 체하는 곳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른 신앙을 찾는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고, 모두 많은 방황을 했습니다.
3:4절)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른 신앙을 찾는데, 많은 시간이 걸려야 했습니다. 그들은 여러 종교 사이에 떠돌아다니기도 했고, 전쟁이나, 지진을 겪기도 했으며, 물질적인 가난이나, 질병이나, 많은 고통 중에서 전도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를 믿고 난 후에도 상당한 기간 가난으로 고생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들이 끝까지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니까 예배 때마다 성령이 임하고, 큰 기쁨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심령 부흥이 일어나면서 더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교회도 안정이 되고, 물질적으로도 안정이 되고, 사회적으로도 어느 정도 높아지니까 그들의 마음이 교만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옛날같이 유치하게 믿는 것을 부끄러워하게 되었고, 무엇인가 외형이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할 것이 있는 신앙을 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늦게 열심히 율법의 행위를 지키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한 두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갈라디아 전체에 펴져 유행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갈라디아의 부흥의 불은 꺼지고, 성령의 역사는 소멸되고 말았습니다.
한국 교회도 *좋은 것이 좋다*는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즉 작은 교회보다는 큰 교회가 낫고, 가난한 교회보다는 부자 교회가 좋고, 감투가 없는 것보다는 감투를 쓰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보다는 인정받는 것이 휠씬 낫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사람으로 시작했다가 고깃덩어리로 마치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쳐야 합니다. 고깃덩어리들이 들어와서 설치는 것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더 인정받으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최고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가족같은 교회 교회같은 셀cell 가족에서 성령으로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찬송가 226장 *성령으로 세례 받아*
모 집
◁가족같은 교회. 교회같은 가족▷
▣ 癸卯年 *신실하고 충성된 일꾼세워 성장하는 해*
균형잡힌 신앙. 심리학적 방법(필수과목 교재제공)
막7:37절)...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하는. 사고(思考)를 끌어내어 고백함으로 독립하는 교육. 소통이 아니면 불가능, 동탄에 연구원이 설립 할 때까지
방법 : 1:1 카톡 영상화면,일시 : 8월 10일-11월 30일수시, 회비 : 1과 1만x26과=26만원 ▣셀(leader)☞ 제1단계 *필수과목* 자격증을 취득해야 공동체가 안전하고, 직분도 반드시 *필수과목*을 필하고 *세례를 받아야*(전 천주교인 포함). 교갱원 소속이 될 수 있습니다.
딤후3:13-14절)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정 의 영 목사 ☎ 010-8772-0191
진리의 복음
다음카페 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카톡선교회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