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차穀茶
차茶는 차나무 잎을 우려 마시는 음료다. 세계적으로 널리 음용되고 있는 녹차와 홍차, 우롱차 등은 모두 이 찻잎을 가공하여 만든다. 하동 차는 덖음차로, 보성 차는 티백차로, 김해 차는 발효차로 많이 공급된다. 같은 잎에서 어찌 그리 여러 맛과 향이 우러나는지 생각할수록 신기하다. 생강차, 유자차, 인삼차, 율무차, 계피차 등 차가 아닌 다른 식물의 뿌리, 줄기, 잎, 꽃, 열매 등을 차라고 부르기도 한다. 생강 우린 물, 유자 달인 물, 인삼탕, 율무 볶음, 계핏가루로 불러야 할 음료들이 차로 불리고 있다. 차로서는 영역침해를 받는 셈이다.
곡차는 유독 절간의 스님들만 애음한다. 조선 시대 불교 탄압이 심해지면서 막걸리를 곡차라 부르게 되었다. 이 또한 차로서는 영역을 침해당한 이질감을 감수해야 할 대목이다. 쌀이 누룩과 며칠간 이불 밑에서 동침하여 탄생한 음료가 술이다. 쌀 차 라거나 누룩차라 해도 큰 탈은 없겠다. 막걸리에게 물으니 찻잎 한 장 얹으면 차가 되지 않겠느냐 대꾸한다. 스님들은 그렇게 막걸리에 찻잎을 띄워 곡차라 칭하며 음주를 즐겼다. 고려 시대 술 한 잔은 시나 법어를 청하는 인사로 장려되었다. 이성계 회군 후 승려계급은 하루아침에 쇠락하여 배척대상이 되었다.
승려들에게는 육식과 음주가 엄격히 금지되었다. 탁발托鉢마저 제한되었다. 불교 말살 내지 승려 박살 작태가 공공연히 자행되었다. 사찰은 무너져 내렸고 의지할 절이 없어 떠도는 승려는 낭인이 되었다. 조선 말기에 등장한 낭인으로 김병연金炳淵이 있다. 김립金笠 이라고도 하지만 김 삿갓 이라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가 지은 시는 항상 풍자를 일삼았다. 그리고 글 틈틈이 막걸리가 배어있어서 꼬옥 쥐어짜면 술 방울이 뚝뚝 떨어지곤 하였다.
곡식으로 담근 술이니 곡주라 해야 마땅하련만 왜 애꿎게 곡차라 했을까. 술을 술이라 하고 즐겨도 좋았을 것을. 술을 술입네 하고 마시는 것이 남세스러웠을까. 고려 시대 스님들에게 술은 말머리를 끄집어내는 벼리였지만, 조선 시대는 울분을 삭여내는 자기 위로였다. 술은 엄연히 장점보다 단점이 많음에도 변함없이 애음 되었다.
스님들은 하안거夏安居라 하여 음력 4월 보름부터 7월 보름까지 수도修道하는 기간이 있다. 일정한 곳에 모여 합숙을 한다. 단식을 비롯한 승려로서 감내해야 하는 수련 과정을 거친다. 마치면 위로 겸 기념 겸 신도들이 약간의 영양식을 마련한다. 그 영양식에 곡차가 끼어들기 일쑤다. 끝나면 만행萬行 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곳을 두루 돌아다니며 세상 구경을 한다. 중생이 겪는 고통을 알아보는 과정이다.
7월 말이면 논농사도 한숨 돌리는 기간이다. 골짜기는 골짜기대로 들판은 들판대로 발 닿는 곳마다 술 익는 향기가 가득하다. 밥술이나 뜨는 집이라면 으레 안방 구들에는 술이 익기 마련이다. 평상에 둘러앉아 “스님, 술 한잔하시지요.” 하니 스님이 손사래를 친다. 넙죽 받아 마시기가 스님으로서도 멋쩍다. “쌀로 빚은 차인데 어떻습니까” “그렇담 한 잔 마셔볼까요” 중생이 마시면 술이요 스님이 마시면 곡차가 된다. 중생은 취해 망나니가 되더라도 스님은 취기를 드러내면 안 된다. 차를 마시고 취하다니.
스님에게 술을 권함이 욕보이는 일이 아닐뿐더러 스님 역시 겸연쩍어할 일도 아니다. 그런데도 “술 한잔하시지요.”라고는 하지 않는다. 요즘 사람 중에는 “곡주 한잔하시지요.”라며 권잔 하는 사람이 있다. 막걸리 한 주발을 곡차라 하면 어떻고 곡주라 하면 어떤가. 그러나 차茶와 주酒는 어감 차이가 작지 않다. 곡주는 곡식을 발효시켜 만든 술을 통틀어 이름이다. 차는 술보다 한 수 위. 차 대접을 받는 고귀함이 있다. 다도茶道니 주도酒道니 하여 도道는 있으나 다례茶禮에 해당하는 주례酒禮라는 말은 없다. 술을 마시면 예禮가 사라진다는 말이다. “스님 곡주 한 잔 하시지요.”는 곡차를 왜곡하여 일컫거나 소주를 곡차와 혼동한 와전이다.
곡차에는 은유가 있으나 곡주에는 그림자도 차양遮陽도 없다. 곡주는 너도나도 마시는 술이지만 곡차는 스님이 마시는 술이다. 자고로 도력이 높은 스님들은 말술이었다. 스님들이 한 손으로 술을 홀짝거림은 격에 어긋난다. 정성스레 두 손으로 정중히 받들어 예로써 곡차를 맞이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엄밀히 위스키, 브랜디, 소주 따위는 곡차가 아니다.
사단장이 전방 시찰을 마치고 나를 호출하던 날 「시바스 리갈」을 대작하게 되었다. 사뭇 떨리는 마음에 두 손으로 잔을 받았다. 황공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는 지금 술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네와 인격을 나누고 있어.” 사단장의 한 마디가 평생을 걸쳐 내 주도酒道를 형성하는 근간이 되었다.
술을 취할 목적으로 마시는 사람이 있다. 한 편으로 술을 육체와 정신을 합일시키는 윤할제로 마시는 사람도 있다. 도를 넘으면 안 되는 일이 어디 술뿐이던가. 과유불급이라 하였다. 좋은 일도 지나치면 그르치는 법. 음주와 음다를 구별할 수 있다면 못 마시라 할 것 까지야 없지만 주야장천 권장할 일은 아니다. 술에 관한한 확실히 그렇다.
스님들이 만행을 나오면 위로 삼아 내놓던 곡차는 술이라기보다 잘 익은 정성이었다. 스님은 술을 곡차로 마실 만 한 일을 하였는지, 중생은 술이 아닌 차를 권하는 마음으로 한 잔 곡차를 권하는지 생각해 가며 마주할 일이다. 술이 품은 장기長技 중 하나가 몽롱함이다. 이런 몽롱함은 상상력을 촉진한다. 그래서 대화 분위기를 돕기도 한다.
시상을 한 줄 메모로 보관하는 아름다움도 곡차가 제공하는 형이상학이다. 주태백이 술을 마시면 주정이 되고 스님이 곡차를 마시면 법문으로 재생된다. 시인이 한 잔 곡차에 시상을 떠 올렸다면 문차文茶를 마셨다 함이 어울린다. 세상을 두루 넓게 보기를 원한다면 취기와 더불어 벗할 필요가 있다. 하여 나는 한 줄 시구를 곡차에서 구하고자 함을 나무라지 않는다. 인류가 최초로 발효식품을 만들어 성공한 것이 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