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시(전 남제주군) 대정읍 상하모리는 군사작전상 중요한 지리적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그곳은 제주도에서 보기 드물게 평지가 넓게 전개되어 군사진지 설치가 용이했고 중장비가 없이 인력만으로 비행장 건설이 가능했다. 그리고 동쪽에 솟은 산방산과 서쪽 모슬봉, 남쪽 해안에 송악산이 있어 해안에서 이동하는 적정관측이 용이했고 동남쪽 산방산 앞에는 수송선 접안이 가능한 수심 깊은 화순항이 있었다. 또한 남쪽인 모슬포 해안과 일과리 해안에서 솟아나는 양질의 용천수가 풍부하여 식수공급이 가능했다. 이런 이유로 1937년7월7일에 발발한 중일전쟁 때부터 일본군은 중국에 도양폭격을 위해 군용비행장 건설을 시작했다. 이 때 만든 비행장이 20여만 평이었는데, 1945년 종전 시는 80만평으로 크게 확장하였다. 그곳에는 전투기 25기를 격납고 속에 계류시켜 놓았다. 더불어 나가사키현 사세보 해군항공대에서 2천5백 명이나 되는 오무라 부대가 이동했다. 따라서 그들이 숙식한 건물을 대정읍 상모리 모슬봉 동쪽(절왓)에 건설하였는데 그곳은 오무라 병사라고 했다. 그 구조는 깬 돌로 직사각형으로 벽을 쌓고 그 사이에 시멘트로 땜질을 했다. 지붕은 제주에서는 보기 드문 기와로 덮었다. 이렇게 길쭉길쭉한 병사가 8동이나 즐비하게 세워져 당시 큰 기지임을 나타냈다.
1945년4월에는 일본대본영세서는 제주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7만5천여 명의 제58군을 제주도에 창설했다. 그 산하로 이와사키 도미오 중장이 지휘하는 제111사단이 만주에서 모슬포로 이동해왔다. 이렇게 대병력이 전 지역을 요새화하다가 광복을 맞았고, 이 오무라 병사는 한때 대정공립초급중학교로 이용되었다. 1946년11월16일 조선경비대 제9연대가 창설되었다. 그 후 2년여 동안 주둔했던 제9연대는 1948년12월29일 대전으로 그 다음 1949년12월28일에 해병 모슬포부대가 진주했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해병 제3대대가 이곳에서 창설되었고 이 부대는 9월1일 전선에 투입되었다. 이렇게 여러 군부대가 거쳐 간 상모리 일원에는 군시설이 잔존해 있고 한반도 내에서 밀고 밀리는 전쟁을 하고 있을 때라 적의 침공을 받을 우려가 없는 안전한 후방에 정예 군인을 양성할 훈련소를 설치해야 했다. 한국전 개전 초에는 너무 급박한 상황이라 제1훈련소를 대구에, 제2훈련소는 부산에, 제5훈련소는 제주(건입동)에 설치하여 병력을 보충하다가 효과적인 강병양성을 휘해 제1훈련소로 통합된 듯하다.
□ 육군 제1훈련소(통상명칭 제201부대) 연표
○ 1950.7.11 – 경북 대구시 제25교육연대 창설.
○ 1950.7.17 – 경북 편성관구 사령부 제7교육연대로 개칭.
○ 1950.8.1 – 육군중앙훈련소로 개칭.
○ 1950.8.14 – 국본일반명령(육)제46호에 의거 육군본부직할로
경북 대구시 육군 제1훈련소 설치
국본일반명령(육)제46호에 의거 육군중앙훈련소를 육군 제1훈련소에 편입
○ 1950.8.21 – 국본일반명령(육)제51호에 의거 육군 제1훈련소를
육군본부 직할로부터 육군중앙훈련본부에 예속
○ 1950.10.25 – 육군중앙훈련본부를 해체함에 따라 육군 제1훈련소는
육본 직할로 예속
○ 1951. 1.22 – 제1훈련소를 제주도 남제주군 모슬포로 이동
○ 1952. 5.15 – 국본일반명(육)제39호에 의거 운전병학교 및 제11군악대 창설
○ 1954. 9.18 – 국본일반명(육)제381호에 의거 제1훈련소를 육본직할로부터
교육총본부에 예속
○ 1955. 9.30 – 국본일반명(육)제205호에 의거 제11군악대를 제2군사령부에 예속
○ 1956. 1.1 – 국본일반명(육)제223호에 의거 육군 제1훈련소를
제주도 남제주군 모슬포에서 해체
제1훈련소는 창설이래 1955년4월30일까지 신병배출 총수는 약50만 명이며 그 중 하사관 교육을 수료한 자가 38,745명, 자동차 운전교육을 수료한 자가 7,355명이었다. 1956.1.1. 육군 제1훈련소가 해체됨과 동시에 육군은 훈련소 자리에 제주도 경비사령부를 창설하였다. 초대사령관 김안일 준장을 임명하고 제주도 위수사령관을 겸임했다.
□ 국방의 산실인 육군 제1훈련소
육군 제1훈련소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1951년1월22일 대구에서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일대로 이전했다. 그 때 한국전쟁 양상은 1.4후퇴로 재반격을 개시하였고 2월11일 38선을 돌파하여 서로가 오르락내리락 소모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래서 후방 기지인 제주에서 육군을 양성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서귀포시 일원에 훈련소 산하 9개연대, 4개 숙영지, 하사관 교육연대와 2개의 숙영지, 자동차운전병학교를 비롯한 부속기관들을 설치하게 되었다. 그리고 육지부에서 징모한 장정들은 LST(1척, 약1,200여명 승선)편으로 매일 화순항으로 들어왔고, 그들은 일단 수용대(사계리 산방산 서남쪽에서 중공군 포로 송환 후 상모리 산이 수동으로 옮김)에 대기하다가 각 연대로 배출되었다. 그 신병들은 기초훈련이 끝나면 제1숙영지(동광), 제2숙영지(상예), 제3숙영지(하원), 제5숙영지(상효)를 순회하며 전투훈련을 받았다.
이 황량한 들판에서 훈련병들은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면서 ‘제주도 넓은 벌에 바람소리 굳세이니’라는 훈련소가를 우렁차게 불렀다. 그 발자국마다 땀방울을 쏟아내며 약 4주 전후의 고된 훈련을 감내한 후 다시 수용대로 돌아왔다. 이 훈련을 마친 병사들은 다시 입영장정을 실고 온 LST에 승선하여 육지부 보충대를 거쳐 각 전선으로 투입되었다. 이렇게 양성한 50만 대군은 강병대에서 배운 전술교리와 진충보국하려는 애국심으로 부장하여 몸 바쳐 싸웠다. 그리하여 지금의 한강하류에서 동해안의 고성군 현내면 송현리까지 전선을 확보한 주역들이었다.
□ 하사관 교육연대
하사관 교육연대는 1961년6월20일 창설되었고 그 제1숙영지는 1951년10월4일 서귀포시 안덕면 서광리에 제2숙영지는 대정읍 모슬포에 창설되었다. 제1숙영지는 안덕면 서광리 983번지 일대 마을주민들을 동원하여 돌로 벽을 쌓고 생나무를 벌채하여 석가래를 걸치고 지붕을 띠로 덮은 허름한 건물을 축조하였다. 이런 불비한 환경속에서 하사관 교육 6주를 수료하면 이등중사로 임용되었다. 이렇게 육군 제1훈련소 하사관 교육을 수료한 총38,745명이 전장에서 첨병으로 맹활약했다.
<발췌> 정수현, [한라의 젊은 영웅들], 제주특별자치도재향군인회,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