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0 6월 24일에 대사헌 이원익(李元翼), 집의 김륵(金玏), - 외방에 나가 있었다. 어떤 곳에는 ‘재외(在外)’라는 글자가 없기도 하다. - 장령 조인득(趙仁得)ㆍ윤담무(尹覃茂), 지평 이상의(李尙毅)ㆍ정광적(鄭光績), 대사간 홍여순(洪汝諄), 사간 권문해(權文海), 헌납 김민선(金敏善), 정언 이정신(李廷臣)ㆍ윤엽(尹曄) 등이 합계(合啓)하여 아뢰기를,
“정철의 흉패하고 부도한 정상에 대해 신들이 상세하게 진달드리지 않은 것이 아니고, 상께서 환하게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단지 일찍이 대신의 반열에 있었다는 이유로 곧바로 삭직(削職)하여 내쫓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신들은 답답한 심정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정철은 본디 강퍅한 성품을 가지고 항상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국가가 불행한때를 틈타 차지해서는 안 될 정승의 자리에 슬그머니 올라, 나라의 정권을 제멋대로 차지하였습니다. 그러고는 널리 사당(私黨)을 심어 날마다 부박한 무리들을 모아 음험하게 체결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정청(政廳)에 있는 낭관을 공공연히 불러 가서 전하로 하여금 정사(政事)를 할 수 없게 만들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니 그가 권한을 제멋대로 한 것이 너무도 극심하였습니다.
그리고 같은 반열에 있는 대신들을 원수와 같이 보아 겉으로는 친한 척하면서 안으로는 실로 질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전하의 앞에서 입시하고 있을 때에는 이산해와 더불어 마치 잘 협력하면서 함께 일을 해 나가는 것처럼 하면서 방자하게 성상을 속였습니다. 이에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놀라 경악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유성룡의 이름을 부르면서 드러내 놓고 모욕을 가하였습니다.
황신(黃愼)이 장차 북도 평사(北道評事)로 부임하게 되자, 이자를 진출시키는 데 급급하여 명망이 얕다는 핑계로 체차하고는 곧바로 청반(淸班)에 통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김해(金澥)ㆍ민정명(閔定命)ㆍ최수(崔洙)가 수령이 되자마자, 하찮은 실수를 가지고 죄를 얽어 탄핵하여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그가 성상을 속이고 사사로움을 행한 것이 이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습니다.
고경명(高敬命)은 흉특하고 간사하며 음험한 자로서 여러 해 동안 폐기되어 있었는데, 점을 잘 치는 재주가 있어 서로 더불어 친밀하게 지냈습니다. 그리하여 그를 발탁하여 고관의 반열에 놓아두었습니다. 그리고 홍인걸(洪仁傑)은 고을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별다른 치적이 없는데도 혼사를 맺은 인척이라는 이유로 사실을 지나치게 과장하여 표창하고 당상(堂上)으로 끌어올렸습니다.
송한필(宋翰弼)의 형제는 실로 주인을 배반하고 도망친 종으로서 서울의 집에 숨어 있으면서 심지어는 아내와 첩이 함께 거처하기도 하였는데, 모든 흉측한 모의와 비밀스러운 계책을 그와 더불어 모의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이미 판결이 나 계하(啓下)를 받은 그의 옥송(獄訟)에 대해서도 해당 관원을 몰아쳐서 판결을 고치게 하였습니다.
정암수(丁巖壽) 등이 상소에서 진달한 것은 실로 여러 선비들이 한 짓이 아니라, 정철의 두세 문객(門客)들이 정철의 사주를 받고서 그 계책을 이루어, 미치광이와 같은 사람 몇 명을 모아 상소에다가 이름을 써넣은 것으로, 이자들은 실로 그 상소의 뜻이 어떠한 것인지조차도 알지 못합니다.
다행히도 성명께서 그의 간특한 정상을 통촉하시어 정승의 직에서 체차하라고 명하여 조금 포폄하는 뜻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니 정철로서는 마땅히 두문불출한 채 허물을 반성하기에 겨를이 없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날마다 사당(私黨)을 끌어모아서는 밤낮없이 모의를 하면서 술과 안주를 마련해 놓고 기생들과 악공들을 불러다 놓고 오가면서 강호(江湖)에서 잔치판을 벌였습니다. 이것이 과연 임금에게 죄를 받고서 물러나 엎드려 있으면서 반성을 하면서 조심하는 뜻이란 말입니까.
탄핵을 받아 그 직이 파면되고, 그 죄를 방시(榜示)한 이후에도 오히려 경계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리하여 여염을 횡행하고 여러 곳에 출몰하면서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들을 허물하며 못 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또한 훈적(勳籍)에서 깎아 내겠다고 공신(功臣)들을 속이기도 하였습니다. 그 나머지 극도로 흉패스러운 일은 귀로는 차마 들을 수가 없고 입으로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설로, 서로 간에 맞장구를 치면서 장차 나라에 무궁한 화를 끼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그 망극한 죄를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당초에 정철을 죄주기를 청할 적에 옥당(玉堂)에서는 공론이 어떠한지는 돌아보지 않고 머뭇거리며 관망하면서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있었습니다. 정원(政院)은 왕명의 출납을 마땅하게 하는 것이 직임인데도 방시(榜示)하라는 명을 여러 날 동안 폐기하고서 즉시 거행하지 않았습니다. 정철의 쌓인 위엄이 사람들로 하여금 의구심이 들게 한 것이 여기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습니다. 예로부터 어찌 신하가 되어서 이와 같은 죄를 짓고서도 관작을 보존한 채 뻔뻔스럽게 집안에 편안하게 있는 자가 있었겠습니까.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머뭇거리지 마시고 속히 관직을 삭탈하고서 멀리 유배 보내라는 명을 내리소서. 그리하여 당파를 심고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르며, 임금을 협박하고 국정을 제멋대로 한 자들의 경계가 되게 하소서.
백유함(白惟咸)ㆍ유공진(柳拱辰)ㆍ이춘영(李春英) 등은 서로 간에 당파를 맺어 조정을 어지럽혔으니, 바라건대 이들도 아울러 멀리 유배 보내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도재수필(陶齋隨筆)》
○ 금부(禁府)에서 정철은 강계(江界)로, 백유함은 경흥(慶興)으로, 이춘영은 삼수(三水)로, 유공진은 경원(慶源)으로 유배 보내라고 아뢰었다. 처음에 정철은 명천(明川)으로 유배되었는데, 상이 정철은 대신(大臣)을 지냈다는 이유로 유배지를 옮기라고 명하여 진주(晉州)로 고쳤다. 그러자 양사에서 양계(兩界)의 먼 변경 지역으로 유배지를 고치라고 계청하자, 이에 강계로 유배 보낸 것이다.
○ 송강(松江)은 병신년(1536, 중종31)에 태어났다. 어려서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또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에게 종학(從學)하였다. 장성해서는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더불어 아주 친하게 지냈다.
신유년(1561, 명종16)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고, 임술년(1562, 명종17)에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후 대각(臺閣)에 있을 때에는 퇴계(退溪)가 ‘정철은 옛날 간신(諫臣)의 풍모가 있다.’고 칭찬하였다. 이후 옥당(玉堂)과 이조 좌랑의 자리에 있으면서 청의(淸議)를 넓혔고, 사류(士類)를 등용하였다.
병자년(1576, 선조9)에 직제학(直提學)으로 있는 동안에 동인(東人)들로부터 크게 미움을 받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갔다. 대사간(大司諫)에 제수되었다가 기묘년(1579, 선조12)에 율곡과 아울러 탄핵을 받았다. 이로부터 스스로 집에서만 보내면서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경진년(1580, 선조13)에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나갔다가 이후 대사성(大司成), 전라도 관찰사, 함경도 관찰사, 예조 판서, 대사헌, 찬성(贊成)을 역임하였다. 그 뒤에 공은 을유년(1585, 선조18)부터 남쪽 지방으로 물러가 거처하였다.
기축년(1589, 선조22)에 아들의 상을 당하여 장사를 치르기 위해 선산이 있는 고양(高陽)에 와 있던 중 정여립(鄭汝立)의 역변(逆變)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마침내 조정으로 나왔다. 이해 겨울에 우상(右相)에 제수되었으며, 위관(委官)이 되었다.
경인년(1590, 선조23)에 광국 공신(光國功臣)과 평난 공신(平難功臣) 두 공신에 책훈(策勳)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상이 공의 죄상(罪狀)을 적어서 중외(中外)에 방시(榜示)하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홍여순(洪汝諄) 등이 ‘정철은 죄는 중한데 벌을 가볍다.’고 논핵하였으며, 양사(兩司)에서 다시 ‘정철은 흉악하고 패악하여 부도한 짓을 저질렀다.’고 논핵하였다. 이에 처음에는 명천(明川)으로 유배 보냈다가 강계(江界)로 유배 보내는 것으로 고쳤으며, 유배지 주위에 가시울타리를 치는 형벌을 더하였다.
임진년(1592, 선조25)에 상이 송도(松都)에 이르러서 하교를 내려 공을 소환하면서 급히 행재소(行在所)로 오라고 하였다. 이에 공은 밤낮없이 길을 가 평양(平壤)에서 상을 알현하였으며,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여 의주(義州)에 도착하였다. 그 뒤에 남쪽 지방을 체찰(體察)하라는 명을 받고 직임을 수행하던 중 계사년(1593, 선조26)에 졸하였다. 그 뒤 갑오년(1594, 선조27)에 최영경(崔永慶)을 마음대로 죽인 죄로 관작이 삭탈되었다.
계해년(1623, 인조1)에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난 뒤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이 경연에서 공의 원통한 상황에 대해서 진달하자,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치천(稚川) 윤방(尹昉), 상촌(象村) 신흠(申欽) 등이 모두 억울함을 풀어 주기를 청하였으므로, 드디어 관직이 회복되었다.
공은 성품이 강직하고 꿋꿋하여 악한 자를 몹시 미워하였으므로 시배(時輩)들로부터 미움을 많이 받았다. 천성이 시원스럽고 깨끗하였으며, 흉금이 아주 맑았다. 속에 품은 생각이 있으면 이를 반드시 말로 드러내었는데,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면 아무리 친한 벗이나 권세가 있는 자일지라도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다. 이러한 강직하고 올바른 기운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강해졌다.
공을 좋아한 사람은 퇴계 이황, 우계 성혼, 율곡 이이,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사암(思庵) 박순(朴淳),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중봉(重峯) 조헌(趙憲) 등 여러 현인(賢人)이었으며, 공을 미워한 자는 이산해(李山海)ㆍ이홍로(李弘老)ㆍ정인홍(鄭仁弘)ㆍ정여립(鄭汝立)ㆍ기자헌(奇自獻)ㆍ이이첨(李爾瞻) 등이었다.
○ 김시양(金時讓)의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에 이르기를,
“호성 공신(扈聖功臣)의 공훈을 사정할 때에 반드시 서울에서 의주까지 수가(隨駕)한 자만을 녹훈하기로 하였다. 선조가 서도(潟)로 피난하다가 평산(平山)에 이르러, 새로 황해 병사(黃海兵使)를 설치하고, 감사 조인득(趙仁得)을 병사로 삼는 한편 유영경(柳永慶)을 감사로 삼았다. 이에 유영경은 대가(大駕)를 따라 서쪽으로 가지 못하였다. 그런데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과 유영경이 모두 녹훈(錄勳)에 들어 있었다. 허성(許筬)이 대사간이 되어, 대신 중에 녹훈될 수 없는 자가 기록되어 있으니, 개정하기를 청한다고 논핵하였다. 허성이 청한 것은 유영경 때문에 말한 것인데, 한음이 여러 번 차자를 올려 마침내 그 훈호를 사양하였다. 그러자 상이 그 의견에 따랐다. 유영경은 그때 정승 자리에 있으면서 단 한 마디의 말도 없었다. 그가 이익을 좋아하여 염치가 없음이 이와 같았다. 광해군 때에 이이첨(李爾瞻) 등이 주청하여 그의 훈호(勳號)를 삭제하였는데, 계해년(1623, 인조1)에 도로 그 훈명(勳名)을 회복시켰다.”
하였다.
○ 기축년(1589, 선조22) 겨울에 헌납(獻納) 백유함(白惟咸)이 홍여순(洪汝淳)의 음험하고 잔혹한 실상에 대해서 논핵하였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홍여순이 이에 대해 유감을 품고 있다가 반대로 공격한 것이다.
○ 좌의정 정철(鄭澈)을 강계(江界)로 귀양 보내어 위리안치(圍籬安置)하고, 그의 죄를 써서 조정에 걸어 놓았다.
정철의 자는 계함(季涵)이다. 어릴 때에 기대승(奇大升)에게 수업하였다. 현달하고 나서도 여전히 제자로서의 예를 지켰다. 그러나 기대승은 일찍이 말하기를, “계함이 득세하면 반드시 나라를 그르칠 것이다.” 하였다. 사람됨이 강하고 편협하며, 남의 허물을 말하기 좋아하고 은혜와 원수를 분명히 하여 자기 마음에 언짢은 사람이 있으면 끝내 잊지 못하였기 때문에 패하였다.
처음에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이 서로 미워하여 당파로 나뉘었는데, 이이(李珥)가 의론을 주장하기를 자못 공평히 하였다. 정철은 깊이 김효원을 배척하려고 하여 의론이 맞지 않자, 정철이 시를 짓기를,
그대 뜻은 산과 같아 단단해 안 움직이고 / 君意如山堅不動
내 마음은 물과 같아 가서는 못 돌아오네 / 我心如水去難回
물과 같고 산과 같음 그 모두가 운명이라 / 如水似山俱是命
서풍 향해 고개 돌린 채 홀로 배회하노라 / 西風回首獨徘徊
하였다. 그러고는 드디어 벼슬을 버리고 호남으로 돌아가서 경박하고 언론(言論)을 좋아하는 놀고먹는 선비들을 많이 모아 밤낮으로 술을 마시며 시사(時事)를 조롱하였는데, 그것이 원근에 전파되어 더욱 화단(禍端)이 되었다.
계미년(1583, 선조16)에 이이가 조정에 있고 정철이 대사헌이 되어 논의를 주고받을 적에 동서(東西)의 설이 성행하여 그칠 수 없었다. 허봉(許篈)ㆍ박근원(朴謹元)ㆍ송응개(宋應漑) 등은 모두 이이를 공격한 죄로 귀양 갔는데, 그렇게 된 데에는 정철의 힘이 있었다. 김우옹(金宇顒)이 소를 올려 정철을 공격하였는데, 말이 매우 격렬하였다. 이이가 죽자 성혼(成渾)은 산으로 돌아가고, 정철은 세력을 잃어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서 음성(陰城)ㆍ죽산(竹山)ㆍ여주(驪州)ㆍ고양(高陽) 사이를 일정한 처소도 없이 출몰하면서 불만이 더욱 심하여 주색에 빠져 지낼 뿐이었다.
기축년(1589, 선조22)에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정철이 지방에서 올라와 승정원에 나아가 소를 올리니, 듣는 자가 크게 두려워하였다. 이산해는 젊을 때에는 정철과 교분이 좋았는데 뒤에 정철이 사람들에게 공격을 받자, 정철을 배반하고 이발(李潑) 등과 함께 정철을 공격하였다.
이때에 와서 이발 등이 패하고 정철이 다시 들어오니, 이산해가 매우 두려워하여 다시 그와 결탁하여 화를 면하고자 하였다. 그때 정언신(鄭彦信)이 정승에서 파면되었는데 이산해가 정철을 추천하여 정언신 대신으로 정승이 되게 하고, 정철과 함께 옥사를 다스리게 되었다. 그런데 정철을 섬기기를 매우 삼가 그의 아들 이경전(李慶全)을 보내어 밤낮으로 정철의 집에 있게 하기를 노예와 같이 하였다. 또 말하기를,
“전날 그대를 공격한 것은 모두 김응남(金應南)과 유모(柳某 《운암잡록》의 저자인 유성룡(柳成龍)) 등의 소행이지, 내가 한 것이 아니오.”
라고 하여, 화를 타인에게 전가시켜 자신은 모면하려 하였다. 그러나 정철은 이산해와 묵은 원한이 이미 깊었으며, 또 이산해가 배신함이 심한 것을 알기 때문에 끝내 감정을 풀지 않았다.
그때에 정철의 당파가 대각(臺閣)에 가득 차 있어서 날마다 남을 얽어 넣는 것을 일삼아 평소에 좋아하지 않던 모든 사람을 역도(逆徒)로 몰아넣으니, 상도 자못 싫어하였다. 이산해가 궁인(宮人)들과 결탁하여 성상의 뜻을 탐지하고, 또 홍여순(洪汝諄) 등과 함께 정철을 넘어뜨릴 것을 비밀히 꾀하였다. 먼저 이경전(李慶全)을 시켜서 놀고먹는 선비인 홍봉선(洪奉先)ㆍ이성경(李晟慶) 등 6인과 결탁하여 대궐에 나아가 청대(請對)하게 하니, 상이 즉시 인견(引見)하고 물었다. 그러자 홍봉선이 정철이 권력을 제멋대로 휘둘러 정치를 문란하게 한다고 말하니, 상이 그의 충성에 대해 칭찬하였다.
이산해가 즉시 대간으로 하여금 정철을 논핵하게 하였는데, 대간이 처음에는 그 일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의심하고 두려워서 하루 이틀을 머뭇거렸다. 이산해가 잇달아 사람을 시켜 속히 발론하기를 재촉하고, 또 말하기를,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조금 늦은 것이 한스럽다.”
하였으니, 이는 상의 성냄이 한창 대단함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정철을 탄핵하는 계본(啓本)이 들어가자 상이 즉시 윤허하였다. 그때 홍여순이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윤두수(尹斗壽)ㆍ윤근수(尹根壽)ㆍ이해수(李海壽) 등 6, 7인도 아울러 논핵하여, 북도(北道)에 나누어 귀양 보냈다. 이들은 모두 정철의 당파였다.
이성중(李誠中)과 우성전(禹性傳)은 정철의 당파가 아니었으나, 이산해가 이들을 미워하였으므로 홍여순 등을 시켜서 같이 논핵하여 파면시켰다. 상이 정철의 죄를 써서 조정에 게시하고 또 위리안치(圍籬安置)시키라고 명하였는데도 이산해는 여전히 정철과 서로 문안을 주고받기를 끊지 않았으며, 또 약(藥)도 부쳐 보냈다고 한다. 《운암잡록(雲巖雜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