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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여행(방콕, 치앙마이)을 마치고
[1995. 2. 24〜2. 28]
1995년 2월 24일부터 28일까지 학년말 휴가를 이용하여 3박 4일의 짧은 첫 해외 나들이를 하였다. 공주(公州)에서 같이 근무하였던 동료들 열 명이 부부 동반으로 나선 여행길이다. 태국하면 붐비는 관광지도 많은데 우리는 약간은 한가하나 생각이 깃든 곳을 택해서 가기로 하였다. 젊은 시절의 정이 서로 만나 회포를 푸는 모임이 되고 그것이 모태가 되어 해외여행을 가게 된 것이다.
2월 24일 김포 공항에 모인 우리는 여러 수속을 마친 다음 타이항공 TG635기에 몸을 싣고 태국의 수도 방콕(Bangkok)을 향해 17시 30분 하늘로 날아올랐다. 방콕 수완나품 국제공항(BKK)까지 5시간 가까이 날아갔는데 현지 시간은 밤 9시쯤밖에 안 되었다. 우리나라보다 그 곳 시간은 두 시간 빨라서이다. 시간으로만 보면 두 시간 우리는 젊어진 것이다. 몇 년 전에 군산에서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를 가본 적 있었는데 그 때 비행기는 꼭 시내버스를 닮았고 이착륙을 할 때 마구 몸체가 떨려 속이 거북하였는데, 타이항공 보잉707로 된 이 항공기는 슬그머니 날아오르고 슬며시 내려앉았다. 우리가 방콕에 내리자 미모의 태국 아가씨들이 우리 목에 뽀얀 속살을 아름답게 오려낸 듯한 남국의 짙은 향기 스민 생화 재스민[jasmine] 꽃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아마 이 꽃의 꽃말이 “사랑스러움”이라니 우리를 사랑한다는 뜻인가? 어쨌든 아름다운 향기가 우리의 기분을 새롭게 하였다. 우리가 먼저 관광할 곳이 치앙마이이기에 공항에서 한 시간 좀 넘게 기다려 태국 국내선을 탔다. 국내선은 경비행기였다. 그래서 그런지 네 줄로 앉는 비행기로 몹시 몸체가 흔들렸다. 하늘을 오르내리며 약 한시간만에 치앙라이 공항에 도착하였다. 밤 11시이다. 낯선 풍경에 대한 호기심을 품고 우리 일행은 곧바로 짐을 챙겨 숙박을 할 홀리데이 가든 호텔[Holiday Garden Hotel]로 행하였다. 치앙마이가 자랑하는 1급 호텔이란다. 오늘은 눈을 붙여야 내일부터의 본격적인 관광이 잘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가이드는 말한다. 사실 비행기를 탄 것은 오후 늦게이지만 우리가 여기 오려고 서둔 것은 아침부터였으니 하루 종일 부대껴 여기에 온 셈이다. 간단한 샤워를 마친 우리는 내일을 위해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
25일 수도 방콕에서 북서쪽으로 750km 정도 떨어진 태국 제2의 도시 치앙마이의 아침이 밝았다. 바삐 호텔 조식을 하러 갔다. 그런데 음식에서 웬 재스민 향기가 진동하는지 속이 매슥거려 먹기가 거북하였다. 미리 준비해 간 고추장 볶음으로 겨우 속을 달래며 빵을 먹고 나왔다. 우리나라에서는 꽃샘추위를 하는 계절인데 태국은 아열대 기후지역이라서 그런지 더웠다. 그러나 이곳 치앙마이는 태국의 타지에 비하여 북쪽이라서 그런지 상대적으로 아침엔 제법 선선하여 긴 옷을 입어야 했다. 이곳은 버마(미얀마), 라오스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관광도시로 11월부터 다음 해 3월까지는 건기라 관광의 적기라고 한다. 치앙마이는 란나 왕국의 수도답게 예로부터 북방의 장미라는 애칭을 얻고 있다고 한다. 그래 그런지 자연환경이 빼어나고 미인이 많아 미스 태국 아가씨의 80%는 이곳 출신이라 한다.
태국은 인구의 93%가 불교도이고 사원만도 2만 4천개나 된다고 하니 사원공화국이라고 해도 될 만하다. 이 곳 치앙마이에는 노선버스, 지하철 등 대중교통 수단이 전혀 없어 뚝뚝이(오토바이를 개조해 만든 택시)나 썽태우(1톤 트럭을 개조해 화물칸에 천막을 올리고 사람이 앉도록 긴 의자 두 개를 올린 승합 택시)로 이동해야 한다. 그래서 썽태우에 몸을 맡기고 첫 관광지 도이수텝 사원(Wat Prathat Doi Suthep)에 갔다. 히말라야 산맥 동쪽 끝 수텝산 정상, 한눈에 치앙마이 시내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마련되어 있는 사원이다. 이곳을 보지 않았다면 치앙마이를 못 본 것이라고 할 정도로 몹시 유명한 곳이란다. 도이라는 말은 태국어로 산을 의미하고 스텝은 당시 이곳에서 도를 닦던 한 은자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1386년 란나 왕국의 게오나왕이 수코타이 왕국으로부터 부처의 사리를 얻었는데, 이 사리를 가장 신성한 곳에 안치하기 위해 흰 코끼리 등에 사리를 모시고 코끼리 뜻대로 가게하고 왕과 대신들이 뒤따라갔는데 산을 오르던 흰 코끼리가 현재 이 사원의 탑이 서 있는 장소에 이르자 더 이상 가지 않고 세 바퀴 맴을 돌고 우뚝 멈춰 버렸다고. 그래서 왕은 이 지점이 치앙마이에서 가장 신성한 곳이라 판단하고 부처님의 사리상자를 안치한 후 사원을 지었다고 전한다. 그 후 1438년 몽콜 스님이 산이 가팔라 신도들이 참배하기 힘들다고 산 입구로부터 290개의 현 계단을 만들었다고 한다. 계단을 올라가니 황금빛 찬연한 뾰쪽 지붕의 사원이 천년은 되었을 성싶은 이름 모를 큰 고목과 함께 우리를 맞았다. 고목을 옆으로 하고 또 오르니 사원 한 가운데 황금 탑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었다. 그 탑 둘레엔 종이 일렬로 매달려 있었는데 이를 모두 타종하면 행복해진다고 전해져 내려온다고 하여 우리 모두는 차례로 지나가며 행복해지한 손을 뻗쳐 라고 도레미를 연주 하듯 타종했다. 우리들 중엔 기독교도도 있었는데 그들도 이 종을 열심히 쳤다. 행복 기원은 종교를 초월하나 보다. 여기저기로 눈길을 쏘면서 사원을 돌아나가니 본당이 나타났다. 그곳 문밖에 많은 사람들이 신발을 벗고 줄을 서서 기다렸다. 우리 부부도 한몫 끼어 기다렸다. 기다려 들어가 우리나라 돈으로 한 천원쯤 되는 법전을 놓고 부처님께 4배를 드리고 앉으니 스님이 솔잎 같은 침엽수 가지 솔에 정안수를 묻혀 머리에 뿌려 주었다. 부처를 대신하여 속세의 때를 벗겨주는 의식이란다.
황금빛 뾰족 사원
천년 고목 단장 삼아
붓다 사리 끌어안고
하늘을 꿰뚫었네.
딩동댕 타종소리로
속세를 쓰다듬고.
-도이수텝 사원-
우리는 다시 자리를 옮겨 치앙만 사원으로 갔다. 이 사원은 1297년에 지어진 치앙마이에서도 가장 오래된 사원인데, 본래는 멩라이왕[King Me -ngrai]의 왕궁이었다고 한다. 본당에는 하나는 수정, 또 하나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두 개의 불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악령을 제거하고 비(雨)와 복(福)을 준다고 한다. 그리고 본당의 뒤에는 15마리의 코끼리가 떠받친 형태의 탑이 있었다. 또 얼마를 가다가 다시 사원을 관람했다. 프라씽 사원[Wat Phra Singh]이다. 지붕 처마 끝이 X자형으로 촘촘하게 만들어지고 건축 내부는 화려한 불상과 조각이 새겨진 전통 란나 왕국 시절의 양식을 보여주는 사원으로 1345년 맹라이 왕조의 파유왕에 의하여 건립되었다고 한다. 반가부좌에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는 약간 통통한 모습의 사자불상이 특징적이었는데, 이 불상은 복제품이며, 진품은 치앙마이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뱃속에서 뭐라고 하기에 시계를 보니 어느새 점심때가 휙 지나고 있었다. 금강산(金剛山)도 식후경(食後景)아라 했던가. 관광도 급하지만 먹어야 정승(政丞)이 될 것 같은 우리는 치앙마이 대표적 전통 요리라는 ‘카우 나우’라는 찹쌀밥으로 점심을 때웠다. 점심 후 좀 짬이 있어 창클란 거리를 따라 늘어선 야시장인 ‘나이트 바자(Night Bazar)’를 둘러보았다. 쇼핑센터와 소규모 상점들이 길가로 노점상들이 빽빽하게 늘어서서 의류, 장신구, 수공예품, 향신료 등을 팔고 있었는데, 화려한 전통복장을 한 고산족들이 직접 수공예품을 들고 나와 파는 모습도 눈에 띄어 쏠쏠한 보는 재미도 있었다. 나도 아내와 아이들에게 줄 코끼리 열쇠고리와 태국 전통 모자를 사들고 나왔다. 또 하루가 고달픈 발품을 뒤로 하고 저물었다. 호텔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잠이 들었다. 2월 26일. 고산족 마을 일명 원시마을이라는 곳을 가는 날이다. 8시에 출발이란다. 태국의 원시마을이란 태국 북부 산악지대에 있는 소수민족들로 티베트, 미얀마 등지에서 난을 피하여 또는 삶의 터전을 찾아 200여 년 전에 이주해와 문명과는 등지고 사는 고산족 부족마을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들은 부족별로 독특한 언어, 의상, 풍습을 고수하고 있는데, 그 소수 민족 중 우리가 만난 부족은 카렌족, 아카족, 미엔족(야오족), 리수족, 라후족 등 6부족이다. 이들은 서로 몇 백미터를 사이에 두고 각각 모여 살고 있었다.
아득한 옛 조상 예 와서 보는 듯
웃음으로 손짓으로
서로 뜻 주고받고
검붉은 색색 치장 속에
똬리 튼 저 정령(精靈)들
-원시 마을-
이 소수 민족들의 특징과 모습을 보면 미묘한 차이를 각각 보이고 있었는데, 먼저 태국 내 소수 부족 중 가장 인구가 많다고 알려진 카렌족[Karen-]을 보면, 이들은 정령(精靈)신앙(信仰)(귀신을 섬김)을 믿고 있어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서까래 같이 나무를 걸쳐 만든 우리나라의 서낭당 비슷한 것에 소망과 일상사를 빈다고 한다. 집은 대나무 구조물로 되었고, 주로 화전 농업을 하고 마약을 재배하고 가축을 사육하며 살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마약 재배는 태국 정부의 단속으로 못한다고 한다. 대신 관광 수공업 작품을 만들어 팔며 산다고 한다. 다음은 아카족(Aka-)인데 옥수수와 벼, 토마토를 재배하여 먹고 사는데 대부분 그들은 입술이 시커멓기에 그 이유를 물으니 씹는담배를 피워 그렇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풍속 가운데 특이한 것은 마을에서 쌍둥이를 낳으면 이들은 신이 준 자식이 아니라고 죽이고 낳은 부모는 1년간 쫓겨나 누구하고도 말도 못하고 격리되어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 또 이들은 일부다처제(一夫多妻制)인데 보통 때는 두 세 부인이 함께 같은 방에 자고 남편은 다른 방을 사용한다고 한다. 미엔(야오)족(the Myen-)은 검은 옷에 붉은 목도리, 검은 두건을 쓰고 윗도리 깃엔 붉은 술을 달고 있었다. 모든 옷은 다른 부족과 같이 간이 베틀 같은 것에 천을 짜고 엮어 만드는 수공업 형태로 자급자족한다고 한다. 다음은 리수족과 라후족이다. 리수족(Lisu-)족은 원래 농경 유목민족으로 언어는 이(yi)족 계통인 리수어를 사용하며, 의상은 밝은 색상을 좋아하고 마을마다엔 촌장과 무당이 있어 마을을 관장하는데 모두 여성이라고 한다. 가장 큰 수입원은 얼마 전까지 중국 계통의 몽족처럼 양귀비 재배였지만 아편을 자신들은 피우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주업은 화전 농업이고, 농기구는 긴 칼과 괭이 등 아주 간단한 몇 가지만 이용하며 아직 비료를 사용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다음은 라후족(Lahu-)인데 이들은 당나라 때 끌려간 고구려민 후예로 밝혀져 우리의 관심이 집중된 고산족(高山族)이다. 그래 그런지 유사한 면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들은 음식으로 우리나라와 비슷한 된장과 김치(고추 가루 없는 백배추임)가 있었으며, 언어도 유사하다 못해 같다고 해야 할 판이었다. “나 매홍손 가이메이”라는 라후족 말이 있었는데 이는 ‘나 매홍손에 간다.’는 뜻이라 하며, 우리말로 ‘나는 너를 좋아해요’는 라후어로 ‘나래 너타 됴조베요.’라 하고, ‘너의 형은 김 씨예요.’는 ‘너웨 어뷔 어니 김 메웨요.’라고 한다고 한다. 그리고 풍습 중에 라후족도 우리와 같이 아기를 낳으면 문밖에 인줄을 쳐 외부인 출입을 막고 있으며 인줄도 지푸라기를 이용 왼새끼를 꼰 후 그 새끼줄 사이에 창호지, 숯, 빨간 고추(사내) 푸성귀(여자)를 꽂아 놓는다고 한다. 이런 것을 보며 얼굴 윤곽을 보니 유사점이 더 있는 것 같아 우리와 같은 핏줄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어떻든 태국의 산악지대 원시림 속에 무리지어 사는 이들 원시부족들은 21세기를 모르는 토속적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중 여성은 모두 목에 링을 끼기를 좋아하는데 이는 링이 미의 상징으로 통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젊은 여성들은 목에 링을 하도 주렁주렁 끼고 있어 목 길이가 좀 거짓말 보태어 기린 목 같았다. 이들이 사는 땅은 태국이지만 태국의 주민증은 없다고 한다. 태국에서 태국 국민으로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거기다가 이주의 자유조차 제한 당하고 있어 지금 살고 있는 거주지 밖으로는 한 발도 벗어날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도 태국 정부에서는 이들이 사는 곳을 관광 상품화하여 관광 패키지로 넣고 있다는 사실이다. 말로는 이들도 관광객을 상대로 벌어서 더 좋은 생활을 할 수 있게 배려한 것이라고 강변하지만 과연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는 덕분에 원시 부족들은 세금 없는 사회에 사는 혜택(?)을 누리고 있고 외국 관람객의 관심을 끌고 있으니 다행이랄까? 이들의 주택은 거의 같은 모습이었다. 나무나 대나무로 엮어 만들어 지었는데 꼭 참외 막처럼 1층은 텅 비고, 2층이 살림공간이며 주거공간이었다. 그 이유는 정글지대이기에 뱀 등 파충류가 집에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고 했다. 그리고 문명지대 사람들이 부계 사회인데 반하여 여기는 모계 사회라는 점이다. 각 부족에는 추장이 있는데 예외 없이 다 여자임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었다. 특히 우리 눈길을 끄는 것은 이 원시마을에 들어가니 손에 은으로 만든 수공예품을 들고 다니며 파는데 모두 여자들이고 남자들은 양지쪽에 쭈그리고 앉아 구경만하고 있었다. 얼마냐고 물어보니 10밧[Thai baht]이라고 손짓으로 말하였다. 두 개를 들고 20밧 주면 되느냐 하니 아니란다. 10밧 두 개라고 손가락을 뻗쳐 말했다. 아직 숫자 개념이 불분명한 것 같다. 몸에 화려한 치장을 하고 주렁주렁 오색의 실을 늘어뜨린 모자를 쓴 추장 여성이 뭐라고 하니 남자들이 전부 자리에서 일어나 집안으로 몸을 피해 눈에 띄지 않았다. 귀여운 네댓 살쯤 되는 아이들이 대여섯 명 모여 놀기에 우리는 가지고 간 알 설탕을 나눠주었다. 그런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금세 한 삼십 명은 모여들었다. 젊은 여자는 몇 안 되는데 어쩐 일인가 했더니 거기에서는 여자 열다섯만 넘으면 출산을 한다고 귀띔한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18살 먹은 여자가 애가 둘이라고 한다. 연년생이라고 한다. 갑자기 고대소설 흥부전의 흥부네 식구 생각이 들어 여기에도 흥부네 서너 집은 살고 있나 보다 하며 웃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고산족은 리수 족이다. 그들은 우리를 위해 전통 악기를 들고 전통 춤을 보여 주었다. 그들 가운데 서양 여인 같은 여자가 있어 물어보니 백인과의 혼혈이라고 한다. 그들 가운데 가장 예쁜 여인이었다. 누가 여기 와서 씨를 뿌리고 거두지는 않고 그냥 모른 척 돌아섰나? 이곳엔 이들 외에는 일반인이 아무도 살지 않았다. 여기는 여러 모로 특수한 환경을 이루어 삶이 펼쳐지는 곳이었다. 이제 이곳도 관광객이 줄을 이으며 문명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그 하나가 코끼리를 동원한 코끼리 트레킹이다.
엉성한 엮음 대(竹)로
눈비 막는 집을 짓고
개미처럼 숨어사는
고만고만한 사람들
나름의 민속 춤사위로
제 멋을 뽐내 뵈네.
-리스족의 전통춤 -
어느새 해가 하늘의 중간을 넘어 서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우리는 마땅히 밥을 사 먹을 데가 없는 곳이기에 미리 호텔 앞에서 주문하여 싸온 간이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웠다. 그리고 고산족 마을 마당에 모여 코끼리를 타고 밀림 지대를 지나가기로 하였다. 우리들이 타러나가니 어느새 고산족 마을 앞마당에 코끼리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옆에는 고산족 남자들이 서 있었다. 좀 전에 추장이 뭐라고 하여 눈에 띄지 않더니 이걸 준비하라고 명을 내렸던 모양이다. 코끼리 등에는 사람이 탈 수 있도록 나무로 짠 2인용 코끼리 안장(鞍裝)이 얹혀 있었다. 우리는 부부끼리 한 조가 되어 코끼리가 엎드리면 차례로 타고 산속 길로 향하였다. 코끼리를 탈 때 필수품은 바나나였다. 이것을 코끼리가 가다가 코를 뒤로 넘기면 하나씩 주어야 한다고 현지인은 말했다. 딱딱한 길, 습한 길을 뒤뚱거리며 가는 통에 우리는 시주승 빈 바랑 흔들리듯 몸을 흔들며 궁둥이를 안장 밑 널빤지에 찧으며 갔다. 그런데 이 놈 코끼리가 수시로 바나나를 달라고 코를 뒤로 하며 침을 뿜어내는 바람에 때 아닌 소나기(?)를 맞았다. 가다가 바나나가 떨어져 이놈이 코를 뒤로 했는데 안 주었더니 이번엔 아주 노골적으로 한 사발쯤은 족히 될 물을 냅다 뒤로 뿜었다. 우리는 간이목욕을 한 셈이었다. 하도 정신없이 코끼리에게 매달려 가다보니 주변을 훑어볼 수는 없었고, 그저 언덕 주변에 늘어진 나무나 골짜기의 물을 보는 정도였다. 숲은 못 보고 나무만 본 꼴이었다. 40분쯤 타는 코스이건만 얼른 산골짝을 내려가 저 아래 평지가 나타나기를 빌었다. 트레킹 마지막 지점에 와서 내리니 온몸이 뻐근하고 얼굴이 끈적끈적했다. 서로 얼굴에 틘 코끼리 침을 보며 웃고는 대충 휴지로 닦고 다음 일정을 위해 강가로 걸어 내려가 메사 폭포에서 발원(發源)한 냇물 같은 강에 가서 대나무 뗏목을 탔다. 처음 우리는 강이라고 하여 잔뜩 기대했는데 대나무를 삿대 삼아 현지인이 젓고 우리는 두 패로 나누어 타고 내려오는데 물이 낮아 바닥에 걸리기 일쑤였다. 어린 아이처럼 서로 돌 집어 던져 물을 튕겨 장난치며 한참을 내려오니 4시쯤 된 것 같았다. 다시 썽태우에 몸을 싣고 북부 태국이 자랑하는 온천-산캄팽 온천(San kampaeng Hot sping)을 향하여 갔다. 이 온천은 리조트 형식으로 개발된 것인데 건물로 칸만 지어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우리나라 온천과는 달리 수건은 제공하되 다른 목욕 용품은 사서 사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살 것이 마땅히 비누밖에 없었다. 다른 향료도 있었지만 이것들도 모두 재스민 향기만 진동하는 진한 유황 냄새가 코를 찔렀다.
것이어서 태국에서 질릴 향기이기에 사양하였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목욕시설을 보니 욕조만 한 개 달랑 있었다. 1인용 개인탕(Bath Tub)이다. 목욕 요금은 30밧[Thai baht]이었다. 욕조에 물을 틀며 자세히 보니 수도꼭지와 욕조에 누런 유황(硫黃)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지심 뚫는 유황냄새
하늘 높이 치솟고
재스민 향기는 온 마을을 떠도는데
묵은 짐 내려놓은 듯
홀가분한 마음들.
-산캄팽 온천-
물의 온도가 80도가 넘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한없이 찬물을 틀며 아까의 자세히 코끼리 침을 닦아냈다. 이 온천물에 달걀을 직접 익혀 먹기도 한다고 한다. 참말인가 우리도 익혀보았더니 익었다. 목욕을 마치고 밖에 나오니 정원식 공원 한 복판에서는 야외 온천수가 7~8m로 솟구쳐 올라 하늘을 뚫고 있었다. 근처에 가니 후끈후끈하였다. 시내로 들어와 호텔 근처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기가 무섭게 짐을 싸들고, 치앙라이 공항으로 달려가 경비행기[TG115?]로 다시 방콕을 행하였다. 저물어 가는 저녁 방콕 공항에 내리니 초가을 날씨였던 치앙마이 기온이 같은 태국인데도 한여름 날씨로 바뀌었다. 방콕 수콤빗 로드 쏘이22 골목에 위치한 숙소 임페리얼 퀸스 파크 호텔에 여장을 풀고 호텔 주변에 있는 마사지 거리로 갔다. 마사지는 보통 한 시간에 100밧(약3000원) 정도였다. 한 시간 동안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마사지를 해 주는데 정말 시원했다. 내일의 활력소가 되는 듯 했다. 남녀 구분 없이 각자 편히 여러 개의 매트리스 위에 누워 마사지를 받는 시스템인데 정말 시원했다. 2월 27일이 방콕의 아침을 열었다. 볶음 고추장에 빵을 찍어 먹는 것으로 아침을 대신하고 방콕 시내 관광에 나섰다. 방콕은 1782년 라마1세 국왕 때 짜오 프라야 강기슭에 세워진 도시로 왕가와 함께 오래 된 사원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도시이다. 또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을 이루는 행정의 중심도시로 태국 인구의 1/10이 여기에 산다고 하며 옛날에는 천사의 도시, 동양의 베니스란 칭송도 듣던 도시라 한다. 그런데 지금은 소음의 도시, 매춘의 도시라는 오명도 쓰고 있는 도시이다. 자동차, 버스의 경적(警笛)소리에, 완행 삼륜차의 택택 소리가 뒤엉켜 그 불협화음이 귀청을 시끄럽게 하고 있었다. 걸어가는 동안 길거리를 보니 거리 곳곳에 메뚜기, 번데기 등 이름 모를 벌레를 튀겨 파는 길거리 뷔페가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우리가 첫 번째 간 곳은 에메랄드 사원(Wat(=영어temple) Phra Kaew)과 거기 붙어 있는 왕궁(Grand Palace)이다. 에메랄드사원 ‘왓 프라 깨우’는 가장 성스러운 불상을 모신 곳으로 태국 최고의 성지로 알려져 있다. 에메랄드 부처는 높이가 66(75?)cm밖에 안 되지만 태국의 가장 중요한 불상으로 태국 국보 1호의 신비로운 불상으로 종교적 의미가 크다고 한다. 이 사원은 1782년 라마 1세가 방콕으로 수도를 옮길 때 광활한 땅에 지었던 왕궁과 접해 있었다. 라마 1세 이후 라마 5세가 두씻(dusit)으로 왕실을 옮길 때까지 왕들과 그 가족들이 이 궁에 살았다고 한다. 지금의 이 태국 왕궁은 주로 대관식 같은 예식이 있을 때만 사용된다고 한다.
이 사원과 궁은 태국 국민들이 생각하는 가장 신성한 곳이므로 아무리 더워도 복장을 단정하고 바르게 갖추어야 하고, 사원의 본당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어야 관람을 허락한다고 한다. 반바지, 미니스커트, 타이즈, 속 보이는 치마나 블라우스, 민소매 셔츠, 조끼, 슬리퍼 등은 안 된다고 한다. 이런 것은 현재의 국왕 푸미폴왕(라마9세)이 살고 있는 위만멕 궁전[Vimanmek Palace]에서도 마찬가지라 한다. 위만멕 궁전엔 ‘두씻 가든’이란 왕실 정원이 있는데 이는 1897년 라마5세가 사비로 파둥 크롱 카셈 운하와 쌈센 운하 사이의 과수원과 논을 개간하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일정상 이곳은 가보지 못하고 듣는 것으로 대신한 다음 방콕 시내를 흐르는 강위에서 티크 원목으로 만든 배를 탔다. 타고 가면서 주변을 보니 강을 오르내리며 손님을 싣고 관광을 해주는 강 택시(River Taxe)가 호객을 하며 부지런을 떨고 있었고, 수상(水上) 가옥들이 참빗 살처럼 강가에 닥지닥지 붙어 있었다. 우리나라 1960년대 청계천변 판자촌이나 도시 빈민촌 판잣집을 연상시켰다. 빈민의 격차를 보여주는 징표 같았다. 거기서 나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화장실은 있을까. 그냥 떨어뜨리는 자연 자동 수세식일까. 괜한(?) 생각을 하며 흙탕물 같은 강물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하였다.
배를 타고 간 곳은 새벽 사원이라고 알려진 톤부리 제방 위에 펼쳐지는 19세기 초에 지어졌다는 탑형의 왓 아룬(Wat Arun) 사원이다. 가파른 계단을 따라 이곳을 땀을 훔치며 올라가면 방콕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이 탑은 크메르와 태국 양식을 접목한 독특한 디자인으로 되었다 하는데, 아유타야 왕조가 버마 침공으로 쇠약해지자 라마 4세인 몽꿋 왕(율부린너가 열연한‘왕과 나’의 원 주인공)이 방콕으로 수도를 옮겨 라타나꼬신 왕조를 세우고 국가재건을 하였는데 이 때 세운 것으로 태국을 대표하는 사원이라고 한다. 즉, 파리의 에펠탑, 한국의 남산타워처럼 태국의 랜드 마크 역할을 한다고 한다. 회벽(灰壁)에는 중국사기(中國砂器)와 조개껍질을 박아 장식하여 꼭 자개장롱을 보는 느낌이었고, 힌두교 3대 신 가운데 파괴의 신인 시바신을 상징했다는 높이 79m에 둘레 234m의 거대한 불탑은 우주를 품은 듯하였다. 다음은 16세기에 만들어져 200년의 역사를 가진 사원으로 방콕에서 규모가 가장 큰 왕궁 남쪽에 있는 왓 포(Wat Pho)가 우리의 눈길을 끌었는데 여기엔 금동좌상 부처가 394개나 소장되어 있고, 그곳의 한 불당에는 길이 46m, 높이 15m에 달하는 거대한 와불상(臥佛像)이 모셔져 있었다. 이 와불상(臥佛像)은 붓다가 열반(涅槃)에 들어갈 때 모습을 형상화(形象化)하였다고 하는데 회반죽으로 제조(製造)하여 내부에는 벽돌로 심(心)을 박고 표면은 금박(金箔)하였으며 손과 발은 108개의 락사나(相 laksaha : 부처 특징)로 꾸며졌다고 하였다. 이 근처는 태국 전통 마사지 센터가 자리 잡고 있어 마사지족의 천국이 되고 있었다. 우리도 저녁을 해결하고 태국에서의 마지막 마사지를 받고 숙소로 향했다.
마지막 날인 28일 아침 8시쯤 식사를 하고 코끼리 쇼를 본 다음 태국 왕의 전의(典醫)라고 자칭하는 한의(韓醫) 가게에 갔다. 그 한의는 한국에서 한의학을 배우고 태국에 가서 왕실 전의로 근무했다고 자랑이 늘어졌다. 우리가 간 홀 안에는 그의 입을 통하여 나오는 만병통치약이 여기저기 진열되어 있었다. 각종 파충류에서 추출한 진액으로 가공했다는 명약(名藥)들이 즐비했다. 세상에나! 중국 진시황제가 불로불사약(不老不死藥)을 구하려고 삼천의 선남선녀(善男善女)를 동쪽에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에 보냈다는데 그들은 그 약을 구하지 못하여 고국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떠돌았으며, 결국은 진시황제도 세상을 떴다는데, 좀 늦게 요즘에 태어나 살았더라면 저 약들을 먹고 천 년은 살았을 것을 아깝다. 과연 그 약을 파는 저 왕실 전의는 무병장수할까. 그네들 홀림에 곧이듣고 우리 일행 중에는 몇 십만 원어치 약을 사들고 온 이도 있었다. 10시 30분 방콕의 수완나품 국제공항에서 타이항공 TG628기에 몸을 맡기고 서울을 향하여 창공을 날아 김포 공항에 17시경에 도착하였다. 한꺼번에 피로가 밀려왔다. 대전으로 오는 버스에선 모두가 깊은 잠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