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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사회 질서를 개건하라
제1장 이윤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경제 질서
40.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사악한 영향력
교황 레오 13세 시대 이래로 자유방임적 자본주의 체제에 있어서나 사회주의에 있어서 중대한 변화들이 일어났다. 먼저, 전체 경제 영역이 크게 변화되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명하다. 존경하는 형제들과 친애하는 신자 여러분, 여러분은 내가 기쁘게 추억하는 나의 선임 교황이 생산에 필요한 자본과 노동을 각각 다른 사람들이 협력하여 제공하는 공동체적인 경제 체제를 주로 마음에 두고 있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한 상생적(相生的) 경제 체제를 그는 “노동 없는 자본이 있을 수 없고, 자본 없는 노동도 있을 수 없다.”(새로운 사태, 28항)는 명문구로 표현하였다.
교황 레오 13세의 모든 노력은 자유방임적인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하느님의 창조 섭리에 따르는 올바른 질서의 규범에 맞추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경제 체제가 그 자체로서 단죄되는 않았다. 확실히 자유방임적 자본주의 경제 체제는 그 본질상 사악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본가가 노동자의 인간 존엄성을 무시하고, 경제 생활의 사회적 성격을 외면하며, 사회 정의와 공동선을 조금도 돌보지 않고, 기업과 경제 활동을 전적으로 자기 마음대로 이득이 되는 쪽으로 돌려서 오로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서만 노동자나 봉급 생활자 계급을 고용할 때는 올바른 질서가 침해된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경제 체제만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다수의 유력한 대중을 포함하고 있는 다른 경제 체제들이 존속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인류의 과반수가 속해 있는 농업 분야에서, 농민들은 생활 수단을 정직하게 그리고 훌륭히 자급자족하고 있다. 레오 교황도 ‘새로운 사태’ 회칙에서 여러 번 지적하였고 나도 이 회칙에서 여러 번 언급하였듯이 이러한 체제도 또한 문제와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특별히 교황 레오 13세가 ‘새로운 사태’ 회칙을 반포한 이후, 전 세계적인 산업화와 더불어 도처에 침투한 체제는 ‘자본주의적’ 체제이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는 그 체제의 경계 밖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경제적 사회적 영역까지 파고 들어 자본주의의 장점, 불편 및 결함으로써 영향을 미치거나 침범하였다. 따라서 나는 교황 레오 13세 이래 이 자본주의 경제 질서가 겪어온 변화에 주의를 기울일 때, ‘자본’과 산업이 발달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뿐 아니라 전 인류의 복지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다.
41. 자유경쟁은 독점으로 대치되었다
오늘날 무엇보다도 명백한 것은 소수의 사람들이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을 뿐 아니라 거기에 더하여 거대한 권력까지 움켜쥠으로써 경제를 독재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힘이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들 소수는 투자된 자본금의 소유자가 아니라 대개 보관자나 관리인으로서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그 자본을 움직이고 있다. 이 권력이 특히 저항을 받지 않는 이유는 자본을 소유하고 통제하여 신용 대부를 지배하고 그 할당을 결정할 수 있는 바로 그 사람들이 그 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하자면 전 경제 체제에 혈액을 공급하고, 자신들의 수중에 경제의 생명줄을 쥐고 있는 까닭에, 누구도 감히 그들의 뜻을 거스르려 하지 않는 것이다.
현대 경제 질서의 특징인 이 ‘경제력과 정치 권력의 집중 현상’은 최강자의 생존만을 허용하는 무제한적인 자유 경재의 필연적 귀결이다. 이 강자란 흔히 무자비하게 싸우는 자, 양심의 명령을 가차없이 무시하는 자를 의미한다. 이 현상은 지배권을 쟁취하기 위한 삼중 투쟁을 유발하였다.
첫째는 경제 영역 자체의 독점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요, 둘째는 국가의 자원과 권력을 악용할 수 있도록 국가에 대한 지배권을 쟁취하기 위한 격렬한 투쟁이다. 마지막은 국가들 간의 투쟁이다. 이 마지막 투쟁은 다음 두 가지 원인 때문에 야기된다. 즉, 각국의 상황이야 어떠하든, 자국민의 경제적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국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거나, 또는 그 반대로 경제력과 경제적 지배가 민족 사이의 정치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사용되기 때문이다.
42. 유감스러운 결과
존경하는 형제들과 친애하는 신자 여러분, 여러분은 경제 분야에서 개인주의 정신의 최종 결과를 보았으며 슬퍼하고 있다. 자유 경쟁은 자멸적인 행위를 저질렀으며, 경제적인 독점이 자유 경쟁을 대치하였다. 이윤을 추구하려는 욕망은 고삐 풀린 지배의 야망으로 이어졌고, 전체 경제 생활은 무서울 정도로 다루기 힘들고 무정하고 가혹해졌다.
더구나 국가와 경제의 본분과 의무가 분명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수치스럽게도 혼동되어 심각한 해악이 초래되었으며, 그 중 최악의 사태는 국가의 권위가 추락된 것이었다. 모든 당파적 논쟁을 초월하여 여왕과 같이 다스리고 정의와 공동선에만 전념하는 최고의 중재자가 되어야 할 국가는 사람들의 욕망과 탐욕에 사로잡혀서 노예가 되고 말았다. 국가 간의 관계에 있어서는 이 동일한 샘에서 두 개의 물결이 흘러 나왔는데, 그 하나는 경제적 ‘민족주의’ 또는 더 나아가면 경제적 ‘제국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더 유해하거나 더 혐오스러운 ‘국제적 금융 제국주의’로서 후자는 이익이 있는 곳에 조국이 있다고 주장한다.
43.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해악에 대한 해결책
나는 이 회칙의 제2부에서 인간을 도외시한 채 오로지 이윤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커다란 해악을 지적하고 그 해결책의 교리적 측면을 분명히 다루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이를 간략히 회상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경제 체제는 주로 자본과 노동에 토대를 두고 있으므로, 자본과 노동 그리고 그 상호 협력에 대한 올바른 이성과 그리스도교 사회 철학의 원리가 결국 이론적으로 받아 들여져야 하고 실천으로 옮겨져야 한다.
먼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자본과 노동의 이중적인 성격 즉 인격성과 사회성에 대한 합당한 배려가 선행되어야 한다. 둘째, 자본가와 노동자의 상호 관계는 그리스도교 애덕을 바탕으로 하여 그 보조를 받으면서 교환 정의라고 불리는 엄격한 정의의 법칙에 따라 규제되어야 한다. 셋째, 자유 경쟁과 특히 경제적 독점은 일정하고 적절한 한계 안에 묶여 있어야 하며 정부의 권한에 속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자본가들의 행위가 공권력의 효과적인 통제 아래 놓여 있어야 한다. 넷째, 국가의 공공 기관은 모든 인간 사회가 공동선의 요청, 즉 사회 정의의 규범에 합치되도록 해야 한다. 만일 이렇게 될 수만 있다면 사회 생활의 매우 중요한 분야인 경제 체제도 인간을 도외시한 채로 이윤만을 추구하던 그릇된 형태에서 벗어나서 반드시 건전하고 올바른 질서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
제2장 이념만을 추구하는 사회주의 운동의 변화
44. 사회주의 진영의 분열
교황 레오 13세가 사회주의와 싸워 온 이래, 사회주의 진영 안에서 일어난 변화도 경제 일반의 변화에 못지 않다. 레오 교황 당시에 생겨난 처음의 사회주의는 일정하고 일관된 교설을 옹호하는 하나의 사상 체계였다. 그런데 오늘날의 사회주의는 대체로 서로 반대하고 적의를 가진 두 진영, 즉 과격파 공산주의와 온건한 사회주의로 나뉘어졌다. 그러나 그 중 어느 진영도 인간화를 추구하는 그리스도 신앙과 부합될 수 없는, 사회주의의 근본 이념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45. 과격파 공산주의
사회주의의 일파는 자본주의 경제가 겪은 변화에 필적하는 길을 밟아 ‘공산주의’로 타락하였다. 공산주의는 무자비한 계급 투쟁과 사유재산 제도의 완전 철폐라는 두 가지 목표를 가르치고 추구한다. 이것이 공산주의가 추구하는 이념이다. 공산주의는 그 목표를 비밀히 숨어서가 아니라, 공공연하게 광포한 폭력까지 포함하는 모든 수단을 써 가며 달성하려 한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공산주의는 못할 짓이 없고 무서워하는 하는 것이 없으며, 일단 권력을 잡으면 믿기 어렵고 가공할 방식으로 잔인하고 비인간적임을 보여 준다. 이에 대한 증거는 공산주의가 동부 유럽과 아시아의 광대한 지역을 휩쓸며 자행한 소름끼치는 파괴로 드러난다. 더구나 공산주의가 가톨릭 교회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 대해서까지 적대적인 만행을 저지르고 공공연하게 적의를 드러낸 태도는 통탄스럽게도 모든 사람에게 알려진 사실에 의하여 여실히 증명된다. 나는 신앙에 어긋나고 사악한 공산주의의 실체에 대하여 곧고 성실한 신자들에게 경고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이 절박한 위험을 경시하고 폭력과 살육으로 전 인류 사회를 파괴하려는 그 교설이 전파되는 현실을 무관심으로 방관하는 자들의 부주의한 태도를 나는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가난한 민중의 마음을 격분시키는 사태를 제거하거나 변경시키려 하지 않음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사회 질서를 파괴하거나 전복시키는 길을 열어 주는 자본주의자들의 무모함은 한층 더 호되게 비난받아야 한다.
46. 온건한 사회주의
다른 한 파는 ‘사회주의’라는 명칭은 보유해 왔지만 그 견해는 훨씬 덜 급진적이다. 그 사회주의는 물리적 힘을 사용하기를 배척할 뿐만 아니라 계급 투쟁과 사유재산의 폐지도 어느 정도 완화하거나 절제하고자 한다. 그렇다고 이를 전적으로 거부하지도 않는다. 마치 사회주의는 자신의 원리와 그로부터 공산주의자들이 이끌어 낸 결론을 두려워하는 듯 하며, 그리하여 그리스도교 전통이 항상 존중해 온 진리로 기울어지는 듯 하다. 왜냐하면 종종 사회주의의 프로그램이 그리스도교 사회 개혁자들의 정당한 요구에 놀랍게도 접근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적대감과 상호 증오를 삼가한다면, 계급 투쟁은 정의에 대한 관심을 토대로 하여 서로 간의 차이를 성실히 토론하는 쪽으로 점차 변하게 된다. 이것이 결코 우리 모두가 갈망하는 축복받은 사회 평화는 아니더라도, 그것은 ‘집단’ 간의 상호 협력을 향한 접근일 수는 있다. 사유재산 제도에 대한 선전포고도 점점 더 누그러졌다. 오늘날 공격받는 것은 실제로 생산 수단의 사유가 아니라 모든 정의에 어긋나게 유산자들이 탈취하고 악용한 사회적 지배력의 유형이다.
사실 이 지배력은 유산자 개인들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속하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변화가 지속된다면, 점차 온건한 사회주의의 교설은 그리스도교 원리를 따라 사회를 개혁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의 프로그램과 더 이상 차이가 나지 않게 될 지도 모른다. 그들은 어떤 종류의 재화는 국가에 유보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 재화가 지배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너무 커서 개인 수중에 남아 있으면 공동체에 해를 끼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정당하게 주장한다. 이와 같은 정당한 요구와 희망은 그리스도교 진리에 어긋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로도 사회주의에 고유한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것 이외에 다른 것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은 사회주의자가 될 이유가 없다.
47. 중간 노선의 가능성은 있는가?
그러나 공산주의가 아닌 사회주의의 모든 분파가 사실상으로나 이론상으로 이 합리적 입장으로 일제히 전향하였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대개의 경우 그들은 계급 투쟁과 사유재산 철폐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관점을 단지 좀 더 완화한 것뿐이다. 이렇게 된 이상 야기되는 문제 또는 일부에서 정당하게 제기되는 문제는 그리스도교 진리의 원리와 만날 수 있는 중간 노선의 가능성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라도 해서 사회주의자들을 우리의 노선으로 끌어 들이기를 희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희망은 헛되다. 사회주의자들 가운데에서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려는 자는 그리스도교 진리를 완전 무결하고 공명 정대하게 선포해야 하며 어떤 오류도 묵과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들이 복음의 선포자가 되기를 진실로 원한다면, 그들은 사회주의자들을 설득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들의 요구가 정당한 것이라면 그 요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원리에 의하여 훨씬 더 강하게 보호될 것이며 그리스도교 사랑의 힘에 의하여 훨씬 더 효율적으로 추진되리라는 것을 납득시켜야 한다.
48. 사회주의 교설과 그리스도교 진리는 다르다
그러나 만일 계급 투쟁과 사유재산 문제에 있어서 그렇게 사회주의가 완화되고 수정되었다면, 더 이상 비난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인가? 바로 그 사실로써 사회주의가 그리스도교에 대한 적대적 성격을 버렸다고 할 수 있을까? 이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주저하게 만드는 문제이다. 그리스도교 원리는 추호도 희생되거나 약화될 수 없다는 것을 명백히 인식하고 있는 신자들이 많고 그들은 성좌(聖座)로 눈을 돌려서, 이러한 유형의 사회주의는 그릇된 교설을 철회하였으니 이제는 신자들이 그리스도교 원리를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고도 그것을 받아 들일 수 있는지 교황이 결정해 주기를 간청하고 있다. 나는 이 요청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사회주의가 교설이나 역사적 사실 또는 ‘사회 운동’ 중 무엇으로 간주되든지 간에, 만일 그것이 엄연한 사회주의로 남아 있다면, 내가 언급해 온 관점에서 진리와 정의에 양보하였더라도 가톨릭 교회의 교리와 합치될 수 없다. 그 까닭은 사회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인간 사회는 그리스도교 진리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진리에 의하면, 사회적 본성을 타고난 인간은 하느님께서 세우신 권위(로마 13,1 참조) 하에 사회에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창조주의 영광과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능력을 충분히 계발하고 진보시키며, 자신의 위치에 따른 임무를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현세적 행복과 영원한 행복을 얻기 위하여 이 지상에 살고 있다.
이에 반하여 사회주의는 개인과 사회의 이 숭고한 목적을 전적으로 무시하거나 관심을 갖지 않고,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것은 단지 사회가 인간에게 가져다 주는 이득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상품 생산은 개인들의 분산된 노력으로보다 여럿이서 적절한 분업으로 노동할 때 더욱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사회주의자들은 경제 생산의 물질적 측면만 고려하여, 인간 노동은 반드시 집합적으로 수행되어야 하며, 이 필연성 때문에 재화를 생산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사회에 전적으로 종속되어야 한다고 본다. 사회주의자들은 이 세상 재물을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소유하는 것을 너무나 중시하기 때문에, 자유를 포함한 인간의 고상한 가치도 효율적인 생산의 요구에 종속되거나 희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사회화’된 생산 방식이 설사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케 한다 하더라도, 그 대신에 공동으로 생산되어 개인들에게 돌아가게 될 재화 덕분에 편의와 문화 생활을 위하여 임의로 사용될 수 있는 풍부한 재화로 인하여 얼마든지 보상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자들이 상상하고 있는 사회의 출현은 한편으로는 극히 과도한 강제력을 행사하지 않고는 불가능하고 따라서 생각해 볼 수도 없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이득에 토대를 둔 이러한 설계 안에서는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최종 목적인 하느님에게서 오는 진정한 사회적 권위가 자리잡을 수 없으므로 사회주의는 그릇된 자유를 조장하고 있다.(레오 13세, 회칙 Diuturnum Illud, 1881, 6,2)
49. 가톨릭 신앙과 사회주의의 상반성
모든 오류가 그러하듯이 사회주의가 진리의 어떤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리고 이 사실을 부인한 교황은 없다) 사회주의는 진정한 가톨릭 신앙에는 상반되는 고유한 인간관과 사회관에 기초하고 있다. 그들이 즐겨 쓰는, ‘종교적 사회주의’, ‘그리스도교 사회주의’라는 표현은 그 자체에 모순을 안고 있다. 아무도 진정한 가톨릭 신자이면서 동시에 진정한 사회주의자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50. 문화 사회주의
이밖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새로운 사회주의적 현상이 있다. 지금까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오늘날 여러 분파의 사회주의에 공통적으로 해당된다. 그것은 ‘문화 사회주의’ 또는 ‘사회주의의 문화현상’이라고 부를 만한 것으로서 그 주요 목적은 정신과 태도의 교육에 있다. 그 활동은 모든 사람들에게 확대되지만 특히 어린이들을 또래 집단의 가면 아래 유인하여, 그들을 거기에 집착하게 하고 신념있는 사회주의자로 만들어 그들을 통하여 사회주의적 원리에 따라 설계된 사회를 건설하고자 한다. 나는 이미 회칙 ‘그리스도교적 교육’(Divini Illius Magister, 1929.12.31)에서 그리스도교 교육이 그 바탕으로 삼고 있는 진정한 원리와 추구하는 목표를 길게 해설한 바 있다. 그리스도교 교육과 문화 사회주의는 그 활동과 목적 사이에 모순이 너무나 명백하여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상황이 이토록 엄중하므로 이에 걸맞게 강력하고 열정적으로 저항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하고 무시되거나 과소 평가되는 데에 이러한 유형의 사회주의가 가져오는 무서운 위험이 있다. 그 중대한 위험에 더하여 그 사회주의자들에게 경고하는 것은 내가 맡은 사목직의 의무이다. 우리는 이 문화 사회주의의 조상은 자유주의였으며, 그 후손은 ‘볼셰비즘’일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51. 사회주의자로 전향한 가톨릭 이탈자
그러므로 나는 특히 일부 국가에서 적지 않은 신자들이 참 신앙과 선의를 보전하고 있으면서도, 교회의 품을 떠나 사회주의 대열로 옮겨간 것을 대단히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들 중 일부는 공공연하게 사회주의자임을 자랑하고 사회주의 교설을 고백한다. 또한 일부는 무관심해서거나 거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론적으로나 사실에 있어서 사회주의적인 단체에 가입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그렇게까지 길을 잃게 된 까닭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려고 애를 써서 깊이 생각하였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핑계로 내세우는 것을 듣고 있다. 교회와 교회에 대한 애착을 증언하는 사람들이 부자들을 편들고 노동자들을 경시하며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사회주의적 대열에 가담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존경하는 형제들과 친애하는 신자 여러분, 과거나 지금이나 가톨릭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각 사람에게 정의롭게 그의 몫을 줄 뿐만 아니라 우리 형제들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돌보라(야고 2장 참조)고 명하는 정의와 사랑의 그 숭고한 법을 거의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더구나 이득에 눈이 멀어 노동자들을 억압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슬픈 일인가? 사실 노동자들의 지극히 정당한 요구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신의 부당한 착취를 종교의 이름 아래 가리면서, 종교 자체를 악용하는 자들도 있다. 나는 계속해서 그러한 행위를 엄중히 금지할 것이다. 그러한 자들 때문에 교회는 억울하게 부자들을 편들고 가난한 이들의 궁핍과 고통에는 거의 무관심하다는 인상을 주고 비난받는다. 이와 같은 인상과 비난은 부당하고 불공정하다는 것이 교회의 전 역사가 보여 주고 있다. 우리가 반포 40주년을 기념하고 있는 바로 그 회칙 ‘새로운 사태’가 이 비방과 모욕이 매우 부당하게 교회와 그 가르침에 향하고 있다는 가장 명백한 증거들을 제시한다.
그러나 나는 결코 이 불의로 격노하고 목자로서 겪는 슬픔으로 낙망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불행히도 기만당하고 있고 진리와 구원의 길에서 멀리 떨어져 방황하고 있는 신자들을 몰아내거나 배척하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정성을 다하여 어머니이신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그들에게 권한다. 제발 그들이 내 목소리를 경청하여 주기를 바란다. 제발 그들이 떠나왔던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와주기를 바란다. 나는 떨어져 나간 이들이 비록 교회로부터는 떨어져 나갔지만, 가난한 노동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닌 그 신자들이 이제는 교회로 돌아와 주기를 바란다. 노동자들을 사랑하고자 하는 바로 그 진정한 실천이 있는 곳으로,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사랑할 수 있는 진정한 자리로 돌아와서, 교황 레오 13세가 선포하였고 내가 엄숙히 재확인한 그 지침 – 가난한 노동자들에 대한 사랑 – 을 충실히 따르면서, 사회 정의와 사회적 애덕의 확고한 기초 위에서 교회의 정신을 따라 사회를 개혁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의 대열 안에 그들이 머물기를 바란다.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그리스도의 곁이 아니고서는 세상의 어느 곳에서도 더 큰 행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확실히 깨달아야 한다. 그분의 가난을 통해서 우리는 부유하게 되었으며(2코린 8,9), 그분은 어려서부터 가난하여 지치도록 일하셨는가 하면(시편 88,15 참조) 그분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모두 다 당신에게 초대하여 그분의 사람의 품 안에서 충분히 쉬게 하셨으며(마태 11,28 참조) 끝으로 그분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많이 받은 사람에게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루카 12,48 참조) “각자에게 그 행한 대로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16,27)
결론 : 사회 질서를 재건할 평신도 사도를 양성하라
52. 복음 정신에로 돌아가자
그러나 만일 사태를 성의있고 철저하게 검토한다면, 이렇듯 모두에게 바람직한 사회 개혁은 복음 정신으로 깊이있게 쇄신하는 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런데 불행히도 경제 활동에 종사하는 그 많은 사람들이 복음 정신으로부터 이탈하였다. 복음 정신으로 쇄신하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노력은 허사가 될 것이며, 우리의 사회 조직은 반석 위가 아니라 움직이는 모래 위에 세워질 것이다.(마태 7,24-27 참조)
존경하는 형제들과 친애하는 신자 여러분, 나는 지금까지 현대 경제계의 상황을 검토해 보면서 극심한 해악으로 침식당하고 있음을 알았다. 나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다시 검토하고 나서 온건한 사회주의마저 복음의 가르침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음을 알았다. 선임자의 말을 인용하자면, “그러므로 이제 병든 인간 사회를 고치려면 그리스도교적 생활과 제도로 돌어가는 방법 밖에 다른 길이 없다.”(새로운 사태, 41항) 왜냐하면 그리스도교 정신만이 모든 악의 근원인 덧없는 사물에 대한 과도한 애착심을 효과적으로 치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세상사에 현혹되어 있고 완전히 빠져 있을 때는 그리스도교 신앙만이 사람들의 주의를 하늘로 돌리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사회가 이 치유책을 절박하게 필요로 하고 있음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53. 현세의 주된 혼란 : 영혼의 황폐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현세적 혼란, 재해, 파멸에만 마음이 쏠리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눈으로 사물을 본다면, 영혼의 갈망에 비교해서 그 모든 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오늘날 사회 경제적 삶의 상황이 너무나 나빠서, 많은 사람들이 한 가지 필요한 것 즉 영원한 구원에 관심을 갖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당신의 피로 양 떼를 구속하신 목자들의 으뜸께서 미 무수한 양 떼의 목자요 수호자로 임명해 주신 나는 그들에게 닥쳐오는 위험을 생각할 때 눈물을 금할 길 없다. 더구나 나의 사목적 직분은 나로 하여금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수단을 언제나 찾고 정의와 사랑으로 이 운동에 부름받은 사람들의 지칠 줄 모르는 열성에 호소하도록 재촉한다. 그들이 재물을 더욱 현명하게 분배하고 사용함으로써 온 세상을 얻는다 할지라도, 만일 그 때문에 자신의 영혼을 상실한다면 무엇이 사람에게 유익하겠는가? 만일 그들이 이기심과 난폭하고 더러운 탐욕에 휩싸여서,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도 모든 일을 그 반대로 한다.”(판관 2,17 참조)면 그들에게 건전한 경제 원칙을 가르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54. 영혼 상실의 원인
사회 경제적 문제가 그리스도교적인 법칙에서 이탈하고 그 결과로 많은 노동자들이 가톨릭 신앙을 잃어버리고 배교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모든 악의 원천이며 원죄의 슬픈 결과인 영혼의 무질서한 감정이다. 원죄 때문에 인간 능력의 신비한 조화는 너무나 교란되어, 이제 사람들은 야비한 욕망에 쉽사리 미혹되고 하늘의 영원한 보화보다 이 세상의 일시적인 재화를 선호하도록 강하게 유혹받고 있다. 여기서 현세적 재산과 부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갈망이 흘러 나오고, 그 갈망은 언제나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법을 어기게 하고, 이웃의 권리를 짓밟게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경제계의 상황은 사람들의 약점에 대하여 이전보다 더 많은 함정을 마련하고 있다. 경제 생활의 불확실성 특히 현재 상황의 불확실성은 경제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가장 예민하고도 끊임없는 노력과 긴장을 요구한다. 그 결과로 어떤 이들은 양심의 자극에 아주 무각각해져서, 이득의 증대를 가능하게 하고 – 행운의 변화에 대비해서 – 끊임없는 수고로 축적한 재산을 보호할 수 있게 하는 합당한 수단이면 무엇이든지 동원한다.
시장은 누구나 손쉽게 이득을 얻을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최소의 노력으로 틀림없이 이윤을 얻을 목적 하나로 교역에 종사하도록 한다. 그들의 광란한 투기로 말미암아 물가는 이윤을 위한 단순한 탐욕에서 오르내리어, 생산자들의 모든 신중한 계산을 무효화시킨다. 분할 책임(devided responsibility)와 유한 책임(limited responsibility)을 규정한 법인에 대한 법규는 극악하게도 남용되고 마는 기회를 제공해 왔다. 책임을 추궁하는 제도의 힘도 극도로 약화되어 책임을 이행하지 못한 당사자의 양심에 거의 부담을 주지 못한다. 가장 사악한 불의와 사기 행위는 주식회사라는 공동 명의의 모호성을 이용하여 발생한다. 회사 이사진은 그들이 관리하고 있는 저축의 주인에 대해서도 부당한 수법으로 그들의 신탁금을 침해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진정한 욕구는 충족시키려 하지 않고 저속한 격정을 선동하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비양심적이고 치밀하게 계산된 투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격정을 자극하는 목적은 그 같은 격정을 만족시킴으로써 이득을 올리는 데 있다.
55. 경제 생활의 불의한 해악들
공권력이 도덕법을 엄격하게 강조하고 강력하게 집행했더라면 이토록 큰 해악을 몰아내거나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러한 노력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왜냐하면 새로운 사회 질서가 시작되고 있었던 그때에 합리주의의 교설은 이미 많은 사람들을 지배하였고 뒤이어 진정한 도덕 법칙과는 조화되지 않는 경제 학설이 부상하였으며, 거기서부터 사람들의 탐욕은 고삐가 풀리게 되었다. 그 결과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산을 불리는 데에만 관심을 가지고 만사를 젖혀두고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였다. 그들은 타인에게 중대한 불의를 범하고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다. 이 멸망으로 향하는 큰 길에 들어선 자들은(마태 7,13 참조) 경제적으로 명백한 성공을 거두고 엄청난 부를 과시할 수 있게 되었으며, 양심의 가책 따위에 대해서는 조소하는 태도를 가지고 소심한 경쟁자들을 분쇄함으로써 그 불의의 길에 있어서도 쉽게 많은 추종자들을 얻을 수 있었다.
경제계의 지도자들이 참된 길을 외면하면서, 각국의 노동자 대중도 같은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은 놀라울 것이 없다. 게다가 많은 지도자들이 노동자들을 단지 도구로 취급했으며, 그들의 영혼의 안녕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좀 더 고상한 관심에 대해서도 거의 생각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그 경향은 더욱 악화되었다. 만일 우리가 노동자 특히 청소년의 도덕과 소녀와 부녀자들의 정절이 현대적 공장에서 접하게 되는 무서운 위험을 고려하고 현재의 경제적 상황과 그 중에서도 특히 수치스러운 주택 여건이 가족 간의 유대와 가정 생활에 얼마나 장애가 되고 있는지를 상기한다면, 또한 우리가 주일을 합당하게 지키는 것을 방해하는 극복할 수 없는 장애를 생각한다면, 우리 마음은 전율을 금할 수 없다. 일찍이 교양 없고 무식한 사람들에게까지 그렇듯 고상한 정서를 유발하던 참된 그리스도교 정신은 얼마나 널리 손상되었는가! 그 대신에 사람들이 갖게 된 유일한 관심은 이렇게 해서라도 매일의 양식을 획득하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원죄 후에도 인간의 몸과 마음의 유익을 위하여 하느님의 섭리로 정해진 육체 노동이 도처에서 이상하게 전도된 노구로 전락했다. 생명 없는 물질은 공장에서 고상하게 변형되어 나오지만, 거기에서 사람은 부패되고 퇴화되고 있다.
56. 경제 생활에 관한 그리스도교 규범
경제 생활은 그리스도교 원리로부터 영감을 받아야 한다. 이 가련한 영혼들의 파멸 사태는, 만일 그대로 지속된다면 사회 개혁을 위한 모든 노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할 것이므로, 복음의 가르침대로 솔직히 그리고 성실하게 되돌아가는 것 이외에 다른 해결책이 있을 수 없다. 인간은 하늘과 땅이 변하더라도 결코 변함이 없을(마태 24,35 참조) 영원한 생명의 말씀(요한 6,68 참조)을 홀로 가지고 계신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사회 문제에 정통한 모든 이들은 건전하고 진실한 진서를 재건해 줄 경제 생활의 합리화를 요구한다!
나 자신도 경제 질서를 재건하는 데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이 질서에서는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들의 활동이 하느님 계획의 오묘한 일치를 본받고 그에 도달하기 위하여 조화롭게 결속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필연적으로 결점투성이이며 불완전할 것이다. 이것은 간절한 열망을 가지고 교회가 선포하는 완전한 질서이고 인간의 바른 이성도 요구하는 질서이다. 그 질서는 하느님을 모든 인간 활동의 첫째이며 최종적인 목적으로 삼는 것이고, 모든 피조물을 하느님께 속하는 단순한 도구라고만 여기며 최종 목적에 도달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경우에만 사용될 것으로 여긴다.
그렇다고 해서 보수를 받는 직업이 인간의 존엄성에 덜 부합한다거나 하찮은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 반대로 우리는 인간을 땅 위에 두시어 이를 가꾸게 하셨고,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땅을 사용하게 하신 창조주 하느님의 뜻을 직업 안에서 인정하고 존경하라고 배웠다. 생산에 종사하는 이들이 합법적이고 정당한 수단으로 재산을 불리는 것은 금지된 것이 아니다. 실은 그가 항상 하느님의 법과 이웃의 권리를 존중하고 그의 재산을 신앙과 바른 이성에 따라 사용한다면, 사회에 봉사하고 사회의 부를 증대시키는 사람은 증대시킨 재물에서 적당한 몫을 받아야 한다.
만일 이 원칙을 모든 이들이 도처에서 항상 준수한다면, 단지 생산과 재화의 획득뿐만 아니라 너무나 종종 통제되지 않는 재물의 사용까지도 짧은 시간 안에 공평하고 정의로운 분배의 기준으로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다. 현대 사회의 수치이며 대죄인 야비한 이기심은 그리스도교적 절제의 어질고도 힘있는 법칙으로만 진정으로 저지될 것이고, 그 법칙은 인간에게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 정의를 추구하도록 명하며, 현세적인 재물도 필요하다면 덤으로 주실 것이라는 하느님의 인자하심과 굳은 약속을 믿으라고 명령한다.(마태 6,33 참조)
57. 사랑의 역할
이와 같은 개혁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모든 것을 묶어 완전하게 해 주는 사랑”(콜로 3,14)이 선도적인 역할을 맡아야 한다. 사랑의 도움을 교만하게 경멸하고 오로지 교환 정의에만 열중하는 경솔한 개혁가들은 얼마나 철저하게 기만당하고 있는 것인가.
정의가 부당하게 침해된 경우 사랑이 이를 대신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지만, 비록 모든 사람이 마침내 자기의 몫을 받은 상태를 그려 보더라도 사랑이 자리잡을 여백은 넓게 남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 정의는 아무리 충실히 지켜지더라도 그 자체로서 사회적 부정의 원인을 제거할 수는 있어도 결코 마음과 마음의 결합을 가져올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이 결합은 사회 평화를 수립하고 상호 협력을 증진시키고자 하는 모든 제도 안에서 그 제도가 겉보기에는 완전하다 할지라도 안전성을 주는 중심 원리이다. 되풀이되는 경험이 입증하듯이, 그 결합이 없으면 아무리 현명한 규정이라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사회의 모든 계층이 자신들은 하나의 가족을 이루는 성원이며 같은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들이고 더 나아가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각각 서로 서로의 지체 구실을 하기 때문에”(로마 12,5),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아파한다:”(1코린 12,26)는 깊은 신념을 가질 경우에만 비로소 공동선을 위한 조화된 노력으로 모든 이들을 결속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때에는 부자들과 권력자들도 가난한 형제들에 대한 이전의 무관심을 열성적이고 효과적인 배려로 바꿀 것이며, 가난한 이들의 정당한 불평을 호의적으로 들을 것이고, 혹시 그들이 과실과 잘못을 저질러도 쉽게 용서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노동자들도 사회 투쟁의 선동자들이 교활하게 야기시키는 증오와 질투의 모든 감정을 버릴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섭리로 인간 사회에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지위에 대한 불평을 그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의무를 이행함으로써 공동선에 유용하고 명예롭게 기여하는 것이며, 또한 하느님이시면서도 사람들 가운데에서 목수가 되시고 목수의 아들로 알려지기를 선택하신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는 길이라는 것을 잘 알게 되면 그 지위를 자랑스럽게 여기게 될 것이다.
58. 어려운 임무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적 절제와 박애의 정신인 복음이 전 세계로 전파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인간 사회의 완전하고 한결 바람직한 혁신과 아울러 내가 교황 재위 초기부터 나의 모든 관심과 사목적 배려를 바치기로 단단히 결심해 온 “그리스도 왕국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평화”를 확신을 가지고 기대한다. (비오 11세, 회칙 Ubi Arcano, 1922.12.33) 성령의 명령으로 나와 함께 하느님의 교회를 다스리는 존경하는 형제 여러분은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비신자들 가운데에서 선교 활동을 벌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이 동일한 목적을 향해서 감탄할 만한 열의로 분투 노력하고 있다. 여러분과 매일 이 큰 사업에 참여하며 값진 도움을 제공하는 성직자와 평신도들은 당연히 치하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설립하신 교회가 관심을 두어야 할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는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특별한 열성으로 나를 돕고 있는 사랑하는 사제들과 신자들은 가톨릭 활동 단체에 헌신하였다.
나는 그 모든 이들이 하느님 안에서 노고를 아끼지 않고 어떠한 어려움에도 굴복하지 않으며 날마다 더욱 용기를 내어 나아가기를 권고한다.(신명 31,7-8 참조) 내가 그들에게 떠맡긴 임무는 정말 어렵다. 사회의 상류 계급이든 하층 계급이든 모든 측면에는 극복해야 할 많은 장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용기를 잃어버리거나, 어떻게든 그들의 목적에서 어떤 잔꾀로 인하여 이탈해서는 안 된다. 격전에 몸을 던지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본분이며, 노고를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충성스러운 군사로서(2티모 2,3 참조) 그분의 발자취를 가까이 따라가는 이들의 운명이다.
59. 희망의 징표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바라시는”(1티모 2,4) 하느님의 도우심만을 믿고, 하느님을 떠나간 불쌍한 영혼들을 돕는 데에 전력을 경주하자. 그들이 지나치게 몰입해 있는 현세적 관심에서 그들을 건져내고, 그들이 영원한 것을 열망하도록 자신있게 가르치자. 이 일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만일 가장 타락한 자의 마음 속 깊은 곳에도 잿속에 묻힌 불씨와 같이 “본성적으로 그리스도교적인 영혼”의 분명한 증거인 예기치 못한 강한 영적 힘이 숨겨져 있다면, 대체로 무지와 바람직하지 못한 환경 탓으로 과오에 빠지게 된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훨씬 더 큰 힘이 틀임없이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노동자들의 단체가 사회 재건의 밝은 전조를 보여 주고 있다. 대단히 마음 기쁘게도, 나는 그들 중에 하느님 은총의 부르심을 기꺼이 듣고 그리스도께로 동료들을 이끌기 위하여 대단한 열성으로 노력하는 젊은 노동자들이 매우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노동자 조직의 지도자들도 같은 칭찬을 마땅히 받아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희생하면서 동료의 이득만을 염려하여 그들이 정당한 요구를 제기할 때에 전체 직업 집단의 번영과 조화를 이루도록 현명하게 노력할 뿐만 아니라, 어떠한 장애나 불안으로 인하여 이 고상한 임무를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하고 있다. 더 나아가 그들의 재능이나 재산 덕분에 머지 않아 사회의 최상부에 오를 것이 틀림없는 많은 젊은이들이 대단한 열심을 가지고 사회 문제를 연구하고 있다. 이 젊은이들은 사회 개혁에 전적으로 헌신할 것이라는 기쁜 기대를 갖게 한다.
60. 가야 할 길 : 사회 질서를 재건할 평신도 사도를 양성하라
그러므로 존경하는 형제들과 친애하는 신자 여러분, 현재의 사태는 가야 할 길을 명백히 지시하고 있다. 교회사에서도 누차 그러하였듯이, 오늘날 우리는 대부분 거의 이교 사상에 물든 세계와 맞서고 있다. 그리스도를 부인한 모든 계급의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데려오기 위해서 우리는 바로 그 계급 안에서 교회의 보조 군사들을 모으고 훈련시켜야 한다. 그들은 그 계급 사람들의 심성과 열망을 알고 형제적 사랑으로 그들의 마음을 설득시킬 수 있을 것이다. 틀림없이 노동자들을 위한 1차적이고 직접적인 사도는 노동자 자신이어야 하며 동시에 상공업자의 사도는 상공업자 자신이어야 한다.
존경하는 형제 여러분, 노동자와 사용자 가운데에서 이들 평신도 사도를 애써 찾고 현명하게 선택하여 적절하게 훈련시키는 일은 여러분과 사제들의 주된 임무이다. 사제들에게 부과된 임무는 쉬운 것이 아니므로 사제직을 지원하는 모든 이들은 사회 문제에 관한 연구를 열심히 하여 그 실무에 대처할 적절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이 일에 헌신하도록 여러분이 특별히 선택하는 이들은 예민한 정의감을 지니고 정말 남자다운 지조로써 부당한 요구나 행위에 대항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또한 그들은 더할 나위 없는 사려와 분별로써 모든 극단을 피해야 하고, 특히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철저하게 물들어 있어야 할 것이니, 그 사랑만이 인간의 마음과 뜻을 공평과 정의의 법으로 확고하고 온화하게 이끌어 갈 힘이 있다. 과거에도 이미 성공을 거둔 이 길을 지금 우리는 주저 없이 따라걸어야 한다.
나아가 나는 이 임무를 위하여 선택된 친애하는 사제들이 자신들에게 맡겨진 사람들의 훈육을 위하여 성심성의껏 헌신하라고 주님 안에서 간청한다. 가장 사제적이고 사도적인 이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그들은 청년들을 가르치고 그리스도교 단체를 설립하고 그리스도교 노선에 관한 연구 단체를 조직함으로써 그리스도교적 교육의 강력한 지원을 이용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은 내가 회칙 ‘피정과 영성 훈련’에서 말한 것처럼, 개인과 사회 개혁 사이의 매우 귀중한 수단인 영성 훈련을 높이 존중하고 오늘날의 제자들을 양성하는 데에 열심히 사용해야 한다. 나는 이 훈련이 일반 평신도들을 위해서 그리고 특히 노동자들을 위해서 매우 유용하다는 것을 명백히 밝혔으며 그것을 권장하였다.(회칙 Mens Nostra, 1929.12.20) 왜냐하면 그 피정을 통하여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양성될 뿐 아니라 모든 생활 영역의 진정한 사도가 양성되고 그리스도의 불꽃으로 불붙게 되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나온 사도들처럼, 그들은 강한 신앙, 시험에서 굴하지 않는 확고함, 불타는 열정, 그리스도 왕국을 도처에서 확장하려는 열의를 가지고 피정에서 나올 것이다.
61. 최선을 다하자
사실 오늘의 세계는 무서운 파멸에서 인간 가족을 보호하기 위하여 정력을 다하는 그리스도의 용감한 군사를 절실히 요청하고 있다. 그러한 파멸은 복음의 가르침이 멸시되고 자연법은 물론 하느님의 법도 배척하는 사회 질서가 득세하는 경우에 닥쳐올 것이다. 단단한 반석 위에 세워진 그리스도의 교회는 지옥문이 교회를 대항하여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두려울 것이 전혀 없다. 그리고 여러 세기에 걸친 경험은 가장 난폭한 폭풍우도 지나가고 교회는 더욱 강해지고 의기양양하게 승리를 거두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자모이신 성 교회의 마음은 세상의 폭풍우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일으키는 무수한 해악을 생각하고 특히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된 수많은 영혼들의 영원한 파멸을 수반하는 거대한 영적 손실을 생각할 때 도저히 격동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중대한 불행을 인간 사회에서 막아내기 위해서는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시도해 보아야 한다. 이 한 가지 목적을 향하여 우리는 하느님께 드리는 한결같고 열렬한 기도로 지원을 받으며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인간 가족의 운명은 하느님 은총의 도우심과 더불어 우리 수중에 있기 때문이다.
존경하는 형제들과 친애하는 신자 여러분, 우리는 세속의 자녀들이 하느님 은총으로 빛의 자녀가 된 우리보다 세상 사람들에게 더 현명하게 보이게끔(루카 16,8 참조) 방관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 사람들이 철저한 추종자들을 교묘히 선택하고 훈련시키며, 그 추종자들이 그릇된 사상을 모든 나라와 모든 지위의 사람들 사이에서 매일 널리 퍼뜨리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그리스도 교회를 더욱 맹렬하게 공격하는 경우에는 그들이 내부 투쟁을 밀쳐두고 사이좋게 단일 전선을 형성하여 공동 목표를 향하여 단결된 힘으로 투쟁하는 것을 보고 있다.
62. 선의의 모든 사람들의 일치와 협력을 권고함
사실, 가톨릭 신자들이 끊임없는 열성으로 교육과 종교 분야, 그리고 사회와 경제 분야에서 애써 이룩해 온 빛나는 업적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 놀랍고 현실적인 활동이 너무나 여러 방향으로 분산됨으로써 그 효과가 감소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교회 목자의 인도 아래 이 선하고 평화적인 그리스도의 싸움에 참가하려는 모든 선의의 사람들은 재능과 힘과 지위가 허락하는 한, 교황 레오 13세가 ‘새로운 사태’ 회칙에서 시작한 그리스도교적인 인간 사회의 개혁에서 자신의 몫을 다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자신의 몫만을 추구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필리 2,21 참조) 자신의 견해만을 고집하지 말고 더 큰 공동선이 요구할 경우에는 기꺼이 양보해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 위에서 다스리시고, “찬양과 영예와 영광과 권능을 영원 무궁토록 받으시도록”(묵시 5,13) 해야 한다. 이 복된 결과가 성취되기를 바라며, 존경하는 형제들과 친애하는 신자 여러분, 나는 가톨릭 가족 여러분 모두에게 내 마음의 특별한 사랑을 지니고 육체 노동에 종사하는 장인들과 노동자들에게 또한 그리스도인 사용자와 경영자들에게도 사도적 축복을 내린다.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재위 제10년
1931년 5월 15일
교황 비오 1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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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칙 ‘사십 주년’ 결론 본문 해설
1. 경제 질서의 변화
비오 교황은 레오 교황이 회칙 ‘새로운 사태’를 반포한 이후 변화된 경제 질서를 다시 한번 요약한 후, 그 변화의 의미를 복음적 관점에서 판단하였다. 레오 교황은 “노동 없는 자본은 있을 수 없고, 자본 없는 노동도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한 바 있는데, 이 판단에 따라서 자본과 노동의 협력을 촉구했지만 그 이후 40년 동안 그렇지 못했던 경제 현실에 대해 비오 교황은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본주의 진영은 전 세계에서 대공황을 초래했고, 이는 경제 불황과 대규모 실업 사태를 불러왔기 때문이다.
가. 자본주의의 변화
비오 교황은 자본주의 진영의 변화된 모습에 대하여 신랄한 어조로 비판하였다.(41항 참조) 레오 교황이 사회악 현상으로 지적했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사라지기는 커녕 오히려 악화되었다. 공동선에 반대되는 이 사회악 현상이 공권력의 개입으로 개선되기를 원했던 레오 교황의 희망과는 반대로, 부유한 자들은 그들이 손에 쥔 경제적 권력의 힘으로 정치적 권력까지 거머쥐고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정경유착 현상은 빈익빈 부익부 현상에 못지 않은 사회악 현상이었다. 여기서 촉발된 무제한적인 지배권 쟁탈 현상으로 공동선은 사라지고 자유경쟁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 사회는 개인주의에 물들고 말았다.
본시 부유한 자들이 가지고 있는 잉여 소득은 공동선에 대한 사회적 의무를 가지고 있어서 전적으로 자신에 재량에 맡겨져 있는 것이 아니다.”(22항) 복음에 의하면, 일용할 양식을 조달하고도 남는 잉여 소득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쓰여져야 하는 나눔의 윤리를 요청하고 있다. 이는 두 가지로 가능한데, 하나는 자선이요 다른 하나는 투자와 고용이다. 부자들은 잉여 소득을 투자함으로써 가난한 이들을 노동자로 고용할 수 있고 고용된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을 통하여 생활에 필요한 재화를 생산하여 더 많은 국민들에게 복리적인 가치를 나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서로가 나눔으로써 사회의 공동선을 증진시키는 것, 이것이 사랑의 질서가 아닌가!
그런데 투자와 고용이 나눔으로 이루어지는 질서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경영이라는 또 다른 노동을 필요로 한다. 누군가에게 고용되어 임금을 받는 노동과 달리, 경영이라는 노동은 이미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이 확보되어 있으므로 더 많은 부를 쌓기 위한 소득 증가를 목표로 할 필요가 없다. 그보다는 더 많은 가난한 이들을 노동자로 고용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데 이것이 경영의 윤리이다. 자본주의가 변질된 이유는 이러한 투자와 경영의 윤리를 저버렸기 때문이다. 투자와 경영의 윤리를 저버리는 한, 사회악 현상은 제거될 수 없고 또 다른 사회악을 불러 일으킬 따름이라는 것이 비오 교황의 판단이다. 경영 노동은 생계 유지와 가족 부양이 아니라 일하는 기쁨과 나누는 기쁨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자본가와 경영자들이 개인주의적 해악에 빠져 더 가지려는 탐욕에 물들어서 정치적 권력까지 차지하려고 드는 현상은 빈익빈 부익부 현상에 못지 않은 사회악 현상을 불러 온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비오 교황은 43항에서 이에 대한 해결 원칙을 제시하였다.
먼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자본과 노동의 이중적인 성격 즉 인격성과 사회성에 대한 합당한 배려가 선행되어야 한다. 둘째, 자본가와 노동자의 상호 관계는 그리스도교 애덕을 바탕으로 하여 그 보조를 받으면서 교환 정의라고 불리는 엄격한 정의의 법칙에 따라 규제되어야 한다. 셋째, 자유 경쟁과 특히 경제적 독점은 일정하고 적절한 한계 안에 묶여 있어야 하며 정부의 권한에 속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자본가들의 행위가 공권력의 효과적인 통제 아래 놓여 있어야 한다. 넷째, 국가의 공공 기관은 모든 인간 사회가 공동선의 요청, 즉 사회 정의의 규범에 합치되도록 해야 한다. 만일 이렇게 될 수만 있다면 사회 생활의 매우 중요한 분야인 경제 체제도 인간을 도외시한 채로 이윤만을 추구하던 그릇된 형태에서 벗어나서 반드시 건전하고 올바른 질서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
나. 사회주의의 변화
과격파 공산주의: 비오 교황이 판단하기에는, 공산주의의 변화도 자본주의 못지 않게 크다. 즉, 자본주의가 더 타락해가는데 대항하기라도 하듯이, 공산주의도 더욱 타락해가고 있다. 무자비한 계급 투쟁과 사유재산 제도 철폐를 목표로 하는 공산주의는 이 두 가지 목표를 관철하기 위해서 폭력까지 포함하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이들은 자본주의자들이 자유를 남용하는 동안, 그 자유를 일거에 제거하려는 급진주의자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과격한 폭력 수단도 서슴지 않고 동원한다. 이들의 과격한 폭력에 대해서는 판단할 필요저차 없을 만큼 그 죄악성이 분명하다. 이러한 사태를 직면하고 있으면서도 “가난한 민중의 마음을 격분시키는 사태를 제거하거나 개선하려 하지 않음으로써 사회 질서를 파괴하거나 전복시키는 길을 열어 주는 자들의 무모함은 한층 더 호되게 비난받아야 한다.”(45항) 그 자들은 누구인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자본주의자들과 이들을 옹호하는 권력자들이다. 즉 비오 교황은 과격한 공산주의자들의 폭력성을 단죄하면서, 이러한 폭력에도 불구하고 빈익빈 부익부의 사회악 현상을 개선하기는 커녕 정경 유착 현상으로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는 자본주의자들과 이들과 유착된 권력자들의 죄를 더욱 크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온건파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과격한 폭력의 위험성 때문에 이보다는 온건한 수단을 선탟하는 세력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사회를 폭력적으로 전복시키려고 하기 보다는 평화적으로 개혁하고자 하며 그리스도교적인 사회 개혁의 원리들을 수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그리스도교와 공산주의가 중간 노선을 마련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것은 헛된 희망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교 신자이면서 또한 동시에 사회주의자일 수는 없다고 비오 교황은 판단한다. 그 근본 이유는 사회주의가 추구하는 목표가 그리스도교와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사회적 본성을 타고난 인간은 하느님께서 세우신 권위 하에 사회에서 그의 삶을 영위하고, 창조주의 영광과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능력을 충분히 계발하고 진보시키며, 자신의 위치에 따른 임무를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현세적 행복과 영원한 행복을 얻기 위하여 이 지상에 살고 있다.”(48항) 이것이 그리스도교가 보는 인생의 목적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에 있어서는 “개인과 사회 사이의 이와 같은 숭고한 목적을 전적으로 모르거나 아니면 적어도 무관심하며,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것은 단지 사회가 개인들에게 주는 이득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48항)
이와 같은 인생관과 사회관에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의 사회 운영 방식에 대하여 비판하는 비오 교황은 사회주의자로 전향한 신자들에게 교회로 돌아오기를 권고한다. 그는 교회를 떠나 사회주의 정신을 살아가고 있는 신자들이, “사회 정의와 사회적 애덕의 확고한 기초 위에서 교회의 정신을 따라 사회를 개혁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의 대열 안에 그들이 머물기 바란다.”고 권고하면서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그분의 곁이 아니고서는 지상의 어느 곳에서도 더 큰 행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아야 한다.”(51항)고 호소하고 있다.
2. 도덕의 혁신 : 올바른 규범으로 돌아가라
가. 경제 생활에 관한 신앙 규범
새로운 사회 질서를 재건하기 위하여 비오 교황은 실천적인 과제를 교회에 제시한다. 본시 교황이 반포하는 사회 회칙의 수신자는 가톨릭 교회의 구성원 모두이다. 그리하여 ‘사십 주년’ 회칙의 첫 머리에서 비오 교황은 이 점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새로운 사태’ 회칙 반포 40년에 즈음하여 복음의 정신에 일치하는 사회 질서 재건에 관하여 가톨릭 세계의 모든 주교들과 신자들에게” 실천적인 권고 사항을 담은 이 사회 회칙을 보낸다는 것이다.
또한 비오 교황은 “경제 활동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복음 정신에서 이탈하였다. 그러므로 사회 재건은 그리스도교 정신과 복음의 원칙으로 돌아감으로써 가능하다.”(52항)고 가르치면서, “사회의 경제 생활은 그리스도교 원리로부터 영감을 받아야 한다.”(56항)과 강조하였다. 그러자면 “사회를 복음적으로 재건하기 위하여 사제와 평신도들이 헌신해야 한다”(58항)는 것이다. 여기에 있어서는 역할 분담이 필요한데, “복음의 사회 재건에 헌신할 평신도들에게는 영성 훈련으로 피정을 시켜야 한다.”(60항)고 가르친다. 이렇게 준비된, 평신도들과 사제들을 포함한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교적인 인간 사회의 개혁에서 자신의 몫을 다하되 선의의 모든 사람들과도 일치하여 노력해야 한다.”(62항)고 강조하고 있다.
나. 사회 질서의 혼 : 사회 정의와 사회적 애덕
비오 교황이 이미 37항에서 판단하고 있는 바와 같이 새로운 사회 질서의 혼은 사회 정의와 사회적 애덕인데 이것이 종교의 참 모습이다. 52항에서도 다시 확인하고 있듯이, 병든 사회가 치유되기 위해서는 종교의 참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길 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이다. 레오 교황과 비오 교황의 확신대로, 사회 정의와 사회적 애덕이 살아있는 건전한 종교는 사회의 영혼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상기해야 할 바는 이것이다. 예수님과 초대교회 시절에는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삶이 살아있었는데, 그 후 천8백여 년이 흐르면서 이 정신이 퇴색하였다가 레오 교황에 의해 이 명제가 교회의 최고 권위로 회복되었다. 이것이 비오 교황에 의해 계승되면서 비로소 가톨릭 사회 교리가 성립될 수 있었다. 사회 교리가 뒤늦게나마 성립된 이 일의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면 이러하다.
초대교회 시절 예수님의 부활을 확고하게 믿게 된 사도들이 여러 가지 이적과 표징을 일으키며 거룩한 변화를 보이자, 이로 말미암아 신자들도 창조적 부활 신앙에 근거하여 그 거룩한 변화의 기운을 공유하게 되었다. 그래서 신자들은 함께 지내면서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고 필요한 이들에게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으니, 이것이 '새 하늘'로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창조하시는 '새 땅'의 사회적 실체였다. 세상의 죄가 초래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회악 현상이 빈곤임을 감안하면 궁핍한 이들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는 초대교회의 거룩한 변화야말로 부활이라는 하느님 자비의 사회적인 실체였던 것이고, 하느님께서 세상의 역사를 당신 나라로 이끄시는 창조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초대교회 시절 사도들이 일으켰던 이적과 표징들 그리고 신자들이 이룩할 수 있었던 공동 생활과 사도들의 변화로 인해 우리가 알 수 있었던 진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 일이야말로 메시아의 진정한 신원을 드러내는 일이었고(루카 7,22), 제자들이 사도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명심하고 깨달아야 하며 또 증거해야 하는 일이었으며,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1)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뿌리였으며 목표이다.
그런데 박해받던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공인을 받고(밀라노 칙령, 313년)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된 후에는(380년), 교회는 권력을 누리는 제국 교회로 변신하였다. 훗날 역사가들은 이 사태를 두고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비평으로 풍자하였다. 폴란드의 사제 코페르니쿠스(1473~1543)는 천문 관측을 통하여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여겨온 천동설을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는 지동설을 주장하여 인류의 세계관을 전환시킨 인물인데, 역사가들은 복음을 기준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던 교회가 제국 교회가 되어 정신적으로 유럽을 지배하게 된 역사적 전환을 풍자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새로운 사태’와 ‘사십 주년’ 회칙에서 가르치는 바가 빈익빈 부익부 현상의 극복, 자본과 노동의 협력, 직능 공동체 건설 등의 세부 명제로 국한되어서는 사회 교리를 통한 복음 선포의 진면목을 제대로 볼 수 없다. 그 진면목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 선포,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를 중심에 놓아야만 비로소 밝혀질 수 있다. 이를테면,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를 기준으로 하는 올바른 의미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가톨릭 사회 교리에 담겨 있는 셈이다. 이를 위한 원리가 사회 정의와 사회적 애덕이다. 사회 정의란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각자 자기 몫을 차지함으로써 공동선에 장애되는 사회악 현상이 극복된 상태를 의미한다. 또한 사회적 애덕이란 사회 생활에서 실천되는 사랑을 의미한다. 이것이 사랑의 사회적 실천이요 이웃 사랑이다. 이는 사회 안에 공동선을 실현하여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다. 요컨대 사회 정의는 사회적 애덕의 필요 조건이요 사회적 애덕은 사회 정의의 충분 조건이다.
3. 사회 질서를 재건할 사도직과 평신도 사도 양성
경제 생활에 관한 신앙 규범과, 사회 질서의 혼인 사회 정의와 사회적 애덕에 따라 사회 질서를 재건하기 위해서 교회가 가야 할 길은 명백하다. 그 길은, 사회 질서를 재건하는 사도직에 헌신할 평신도 사도를 양성하는 길이다. 노동자들 가운데에서도, 사용자들 가운데에서도 사도를 찾아내어 적절하게 훈련시켜야 한다.(60항 참조) 비오 교황은 39항에서도 “직업적인 전문 활동을 통하여 올바른 사회 질서를 재건하기 위한 사도직 실천하는 신자들의 공동체는 이미 그 자체로서도 하느님께서 맡기신 직책을 다하고 있는 교회”라고 가르친 바 있다. 새로운 사회 질서를 건설하기 위하여 새로운 사도직이 필요하다.
4 회칙 ‘사십 주년’의 사회적 영향
1) 직능 공동체의 역사적 배경
비오 교황이 회칙 ‘사십 주년’에서 사회 정의와 사회적 애덕을 실천할 평신도 사도직의 핵심으로 직능 공동체를 가르치기까지, 유럽에서는 협동조합 운동이라는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경제적 약자인 가난한 이들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려는 목표가 이 운동을 시작한 선각자들의 공통 목표였다.
영국에서는 19세기 초에 산업가이자 사회개혁가인 로버트 오웬(Robert Owen, 1771~1858)은 노동자의 교육과 생활 개선 그리고 공동체적 생산과 소비를 강조했다. 그는 이런 사상을 스코틀랜드 뉴라나크에서 비교적 인간적인 공장 운영을 시도했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협동 공동체를 구상하고 제안하였다. 비록 그의 실험이 제도적으로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지만, 후대 협동조합 운동에 매우 인상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에 따라 영국 각지에서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생필품 공동구매 조직을 만들었다. 하지만 대부분 오래 가지 못하고 실패한 반면에, 1844년에 영국 로치데일 노동자들이 조직한 공정선구자 조합은 실패 사례를 검토한 끝에 드디어 역사적 첫 성공 사례를 만들 수 있었다. 이것이 협동조합 운동의 출발점이었다. 실패 사례들에서 배운 교훈에 따라 로치데일 노동자들은 다음과 같은 원칙에 합의할 수 있었다. 개방적 가입, 민주적 운영, 출자에 대한 제한적 배당, 이용실적에 따른 잉여 배분, 현금 거래 원칙, 양질의 상품 공급, 조합원 교육 중시, 정치·종교 중립. 이 원칙은 후대 협동조합들의 표준이 되었고, 지금도 국제협동조합운동의 기본 정신으로 계승되고 있다.
이후 협동조합 운동은 19세기 동안 유럽 각지로 퍼졌는데, 각국의 경제 형편과 사회적 상황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게 발전하였다. 영국에서는 로치데일의 선례를 본받는 소비협동조합 운동이 중심이었고, 프랑스에서는 혁명 전통과 노동 운동의 영향으로 노동자들이 자주적으로 관리하는 생산협동조합이 강한 색채를 띤 반면에, 독일에서는 고리대금에 시달리는 도시와 농촌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신용협동조합이 발전하였다.
2) 회칙 ‘사십 주년’에 따른 사도직 출현
회칙 ‘새로운 사태’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움직임이 벨기에에서 시작된 가톨릭 노동 청년회였다면, 회칙 ‘사십 주년’의 영향으로 생겨난 사도직 움직임은 스페인의 몬드라곤 운동이었다. 호세 마리아 아리스멘디아리에타(1915~1976) 신부는 신학생 시절에 레오 13세와 비오 11세가 반포한 두 회칙에 매료되었고, 1941년에 바스크 지방의 몬드라곤에 부임한 이래 교육과 노동, 금융을 결합시킨 지역 공동체 재건에 힘썼고 오늘날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몬드라곤 협동조합 복합체로 발전시켰다. 그는 이 과정에서 어떠한 책임이나 직책도 맡지 않았지만, 보좌신부 시절에 만난 소년들과 축구팀을 만들어 인격적 친교를 나누면서 이들이 청년으로 성장하자 기술학교를 세워 1956년에 첫 생산협동조합인 ‘울고르’(ULGOR)가 출범하도록 정신적으로 뒷받침했습니다.
호세 마리아 신부는 가톨릭 사회교리가 가르치는 기본 원리 즉 인간의 존엄성, 사회적 공동선, 노동의 가치 그리고 연대성 등을 경제 구조 안에 구현하려 했고, 자본보다 사람과 공동체를 앞세우는 경제 질서를 추구하였다. 그래서 그는 가톨릭 사회운동의 실천가이자 현대 협동조합 운동의 거목으로 평가되고 있다.
오늘날 몬드라곤 협동조합 복합체는 금융, 산업, 유통, 지식 부문을 아우르는 세계적 협동조합이 되었고 2024년 현재 약 7만 명이 넘는 고용 규모로 성장하였다. 지식과 자본과 노동을 결합시켜 가난한 이들의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지위를 향상시켰을 뿐만 아니라 투자와 경영의 윤리를 구현하는 공동체적인 사회 구조를 통해 사회 질서를 재건한 그의 삶은 가톨릭 교회 안에서도 높이 평가되어2015년에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가경자’(Venerable)로 선포되었고, 시복 시성 운동이 진행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