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철 중앙동역 12번 출구로 나와서 제1부두 쪽으로 걷는다.
언제나처럼 친구를 만나러 가는 참이다.
바로 앞에 종아리가 예쁜 여학생이 갈래머리를 나풀거리며 간다.
우리 딸아이도 저런 때가 있었지........갑자기 딸이 보고 싶어진다.
본부세관 앞을 지나 충장로로 접어들자 주차장 녹색 펜스가 보인다.
그 여학생은 여전히 가벼운 걸음으로 사뿐사뿐 앞서 걸어간다.
그 아이가 사람만 출입할 수 있는 쪽문을 통해 주차장으로 들어간다.
나도 그 아이를 따라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친구는 펜스 너머 인도 쪽 화단에 물을 주고 있다.
그 여학생이 친구에게 인사를 하고 친구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그 아이에게 건네주고 지갑에서 돈도 얼마 꺼내준다.
그것을 받다든 그 여자아이가 절을 하고 다시 내 쪽으로 걸어온다.
예쁘장한 얼굴의 소녀가 밝은 표정으로 내 곁을 스친다.
“어이, 어서 온나......”
“누구냐.......저 아인?”
“응, 우리 조카, 막내 동생네......”
“그으래? 얼마 전에 이혼했다는 그 동생 말이야?”
“음........동생에게 전해 줄 급한 서류가 있어서......”
“근데 화단에 뭘 심었어?........물을 주게.”
“수세미 씨를 뿌렸더니 이제 싹이 올라온다.......저기 보이지?”
친구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한 뼘 정도 새순이 돋아나 있었다.
“수세미는 뭐 하려고?......요즘도 수세미 쓰는 사람이 있나.”
“설거지 하는 수세미만 생각하면 용도가 별로 없지.”
“그럼 다른 용도가 있다는 거야?”
“암, 수세미 수액이 고급화장수 원료란다. 아토피 같은 데도 좋고.
그리고 매실처럼 설탕 넣고 즙을 내면 알레르기성 비염에도 좋데.”
“그래? 그럼 나중에 나도 좀 주라.”
“그러려고 많이 심었다. 싹 올라온 것만 근 서른 개니 충분할 거야.”
아내가 알레르기성 비염 때문에 고생하는 걸 친구도 알고 있다.
“동의보감에 수세미의 효능이 나와 있다는데 천식에도 좋고.......
여기저기 닿는 데가 많다더라.”
생전 처음 씨앗이란 걸 뿌려보았다는 친구는 벌써 얼굴이 좀 그을렸다.
모자라도 좀 쓰면 좋으련만 그러면 나중에 머리카락이 눌려서 싫단다.
“일단 들어가자. 퇴근시간이니 차들 좀 빠져 나가면 밥 먹자.”
“그래, 일 봐라. 난 인터넷 서핑이나 좀 할 테니.”
조명등이 켜지고 사위가 어둑해질 때까지 입구에 서서
친구는 나가는 차들에 웃으며 가볍게 허리 숙여 인사를 한다.
저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텐데.......성격상 뭐든 열심이다.
그런 면이 내가 이 친구에게 배울 점이다.
중국집 철가방이 내려준 음식을 나눠먹는 건 8시가 훨씬 지나서였다.
“그래 제수씬 학교 잘 다니고.......?”
“음, 덕택에.......”
“이것도 좀 먹어봐, 좀 비싼 집이지만 맛은 그런대로 괜찮거든........”
“그러네.......화교가 하는 데야?”
“응, 어제 니 글 다시 보니 좀 자주 올려달라는 분이 있던데?”
“어 그랬어? 통 들여다보질 않으니........몰랐네.”
“왜 한 달에 한편만 글을 올리는데?”
“게을러 서지 뭐.......게다가 특별히 쓸 거리도 잘 안 떠오르고........”
“공치는 이야기를 쓰기엔 골프실력도 딸리지만, 필드도 자주 못가고?”
“음, 나 아니라도 근 십년 동안 계속 심도 있는 골프 이야길 할 수 있는
기라성 같은 분들도 그 사이트엔 즐비하니.......”
“어이, 우리 이젠 스크린 골프라도 자주 하자.
전 직장 동료였던 부장이 연산동에 스크린 골프 오픈했단다.”
“허어.......그래? 돈이........수월찮게 들었을 텐데.......”
“시설비만 석장 들었다네.”
“흠, 나도 그걸 하나 해볼까 싶었는데........돈이 좀 달려서........”
“나 비번 때 일주일에 한번은 우리 거기서 모이면 어때?”
“그래, 필드엔 한 달에 한번 만 나가고......”
“가만있자 그럼.......내가 니 글 소재나 하나 줄까?”
“어, 그럼 좋지........어디 보따릴 함 풀어봐 봐.”
아까 니가 본 우리 조카 말이야........그렇게 친구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막내 동생 내외는 5년의 연애 끝에 집안 반대를 물리치고 결혼에 골인했다.
집에서 두 사람의 교제사실을 알고도 결혼 허락을 해주지 않은 이유가 있었지.
며느리 감의 몸이 너무 약해 보였기 때문이었어.
늘 잔병에 시달려 왔던 어머니께서 튼실한 며느리를 원하신 건 당연하지.
집에서는 아가씨가 지쳐 저절로 떨어지길 바라고 모른 척 방임했지만
대개의 청춘남녀가 그러하듯이.......이미 눈에 콩깍지가 씌워진 상태.
반대를 위한 반대는 가일층 불붙어 떨어져 나가기는커녕,
둘 다 좋아서 죽고 못 사니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허락하셨어.
두 사람은 누가 봐도 영락없는 잉꼬부부로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벌여놓은 사업도 번창하여 생활도 윤택했고 제수는 첫 아들을 낳았다.
그 후 제수의 심장 판막증이 밝혀져 심장수술도 하였고 더 이상의 임신은
산모가 위험하다는 의사 진단으로 동생이 정관수술까지 했다.
얼마 후 제수가 딸을 하나 더 원했다.
집안에서는 그 문제로 여러 말들이 많았지만 마침내 허락했어.
이미 직접 수태는 불가능하니 사설입양기관에 입양을 의뢰했지.
그래서 갓 태어난 예쁜 딸도 얻고 아무 문제없이 행복하게 살았어.
여유롭고 평화롭게 잘 살던 동생네는 위기가 찾아온 거야.
동생이 갑자기 몸이 아파서 입원을 했어.
뇌수막염.
보통 유아가 잘 걸리는 병이라는데 성인인 내 동생이 걸리다니.......
어릴 때 중이염을 앓았는데........그런 사람은 성인이 되어도
뇌수막염의 잠재적 예비환자라고 하더군.
어느 날 고열에 구토를 해서 입원을 했는데……그 병이란 거야.
어찌어찌 겨우 나았나 싶었는데 후유증이 좀 있었어.
사람이 좀 어리해진 거 있지.
가장이 그러니 하던 장사를 정리할 수밖에.
자연히 살림이 기울기 시작했어.
어느 날부터 제수가 돈벌이 한다며 남성수입의류가게를 차렸다더군.
동생은 제수가 가게로 나가면 집에서 아이 둘을 돌보다 제수가 가게로
호출하면 달려가서 심부름도 해 주는 등, 제수가게 보조로 지냈어.
그렇게 세월이 한 두어해 흐른 어느 날........
동생이 풀 죽은 얼굴로 우리 집엘 찾아 왔었어.
제수가 대구 친정 다녀오겠다며 가더니 한 달 째 오질 않는다는 거야.
가게도 처분하고 보증금도 빼가고.......그리고 이혼을 요구한다고.
아무튼 구구절절 사연을 뒤로하고 동생이 아이들을 맡고
얼마 남지 않은 재산을 쪼개서 나눠 갖고 헤어진 거야.
불같은 연애 5년.......긴 세월 시댁의 반대까지 이겨내고 한 결혼인데
심장판막증으로 목숨 걸고 낳은 아들마저 포기하고
쉽게 등 돌리는 제수가 난 도대체 이해를 할 수 없어.
나중에 동생에게 들으니.........마지막으로 설득하려 대구 처가에 갔더니
의류가게 단골손님과 이미 깊은 사이로 지내는 사실을 실토하더라고.
그래서 마음을 접고 헤어지기로 결심 했다고 하데.
결혼생활을 지탱해주는 요인을 단순하게 정리해 보면,
배우자에 대한 신뢰, 성의 조화, 경제 능력 등 크게 세 가지들 수 있을까.
세가지중 어느 하나라도 뻐걱 이면 파경의 씨앗이 되겠지.
물론 그런 거 생각 없이 의무감으로, 타성으로 사는 부부도 많겠지만.
이혼은 살림 위축이 원인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다른 원인이 있었어.
심하게 앓고 난 후 동생에게 임포텐스가 찾아온 모양이야.
결혼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이 그것임에는 틀림없는 사실,
몇 년 간씩이나 각방 쓰는 섹스리스 부부들도 많다고 하지만.
조카가 세 살 무렵 제수가 딸 하나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종종 하더니 어느 날 사설입양기관에 찾아가서 입양상담을 한 거야.
입양이라면 고아원 같은데 찾아가서 버려진 아이들 중 한명 데려오는
거라는 단순한 생각만 했는데 동생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좀 생소했어.
철없는 이성교제로 원치 않는 임신을 한 미혼모.
그런 처지의 미혼모로부터 상담전화가 걸려오면 입양기관에서는
비공개 위탁시설에서 아이를 낳을 때까지 돌봐준다더군.
아이를 낳으면 미리 정해진 양부모에게 출산 후 바로 아이를 인계하고
미혼모는 2주쯤 몸 추스르는 요양을 시킨 후 집으로 보낸다고.
제수는 사설입양기관 몇 곳에 아기를 주문예약(?)해 두었다고 하더군.
희망 주문사항이란 산모의 나이는 25세 미만에 술집 색시는 아닐 것,
평범한 직업이나 무직의 처녀에 외모는 키가 컸으면 좋겠고
성격도 온화한 여성이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을 접수해 두었데........
접수 후 반년쯤 경과해서 어느 입양기관에서 주문에 맞는 미혼모가
들어왔다는 통보를 받았어.
미혼모는 22세의 무직여성인데 애인과의 결별로 아이문제를
해결 할 길이 없어 입양기관에 상담의뢰를 해온 경우였다.
미혼모와는 직접 대면은 못했지만 담당자가 큰 키에 피부색이 하얀
나무랄 데 없는 처녀라는 말만 들려주더라고 했어.
그리고 제수는 미혼모의 출산일에 맞추어 사전준비를 철저히 하였어.
미혼모의 출산일이 가까워오자 배에 플라스틱 바가질 넣고 배를 부풀려
동네 사람들이나 자신의 아들에게도 임신 중임을 위장하였고.
그것도 일정기간을 두고 바가지 크기를 바꾸기 까지 하면서.
출산통보가 오자 병원에서 바로 아이를 받아 산후조리를 한다며 친정으로 갔지.
한 달 후 아이를 안고 오던 날 우리도 입양 딸 OO이와 첫 대면을 했지.
OO이는 손가락 발가락이 길쭉길쭉하고 귀티가 나는 아기였다.
OO이를 데려올 때 입양기관에서 얼마를 요구하더냐고 넌지시 물어 보았어.
제수는 100만원을 주었다고 했어, 처음 예약 접수비는 30만원은 별도였고.
OO이가 지금 중학생이니 그 당시 환산으로 130만원은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저렇게 예쁜 아이를 배도 아프지 않고 데려오는 대가로는 약소한 금액이야.
입양 딸 OO이는 동생네 부부를 친부모로 알고 무럭무럭 잘 자랐어.
물론 OO이 오빠도 자기 친여동생인줄 알고 있고.
OO이는 커갈수록 모습이 오빠와도 많이 닮아서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지.
내가 봐도 신기할 정도로 동생네 식구를 닮아 있었으니.
그런 모든 걸 내 몰라라하고 다른 남자와 놀아나다니.........................
“그렇구나........불같은 사랑도 식고 나면 그렇게 볼품없이 되는구나.”
“상황이 바뀌니 모두가 흘러간, 의미조차 없는 과거가 되는 거지.”
“그 아인 그래도 티 없이 밝은 표정이던데........아까 보니.”
“걘 몰라, 입양 관련 이야길........원래는 엄마와 살기로 되어있었는데
자기 엄마가 나쁘다며 아빠와 살겠다고 고집한 아이니까.”
“흠, 황혼이 모두 아름다운 건 아니구나. 더구나 그 사랑의 황혼은
바람 불고 비오는 날의 어스름처럼 축축하고 볼 것이라곤 없네.........”
“당사자가 아니니 딱히 뭐라 할 수 없지만 피붙이 일이다 보니
여러 가지로 착잡하기만 해.”
“왜 안 그렇겠냐.........세상은 그래도 여전히 잘 돌아가고........”
문득 며칠 전에 어느 통신회사의 홈페이지에서 본 영화가 생각났다.
사랑의 유형지.........‘실낙원’의 와타나베 준이치로 원작의 성애영화이다.
작가인 이혼남과 그 작가의 팬인 유부녀와의 불륜이 소재이다.
정사 중에 ‘목 졸라 달라’는 여자를 교살하는 장면.
그 치열한 사랑의 뒤안길에 남겨진 세 아이.........그리고 남편.
친구의 제수는 가까운 가게인 안경점에 콘택트렌즈를 맞추러 갔다가
그 남자와 눈이 맞았다고 한다.
‘사랑의 유형지’의 여주인공 후유카처럼 원래 피가 뜨거운 여자라서
물불 안 가리고 사랑에 탐닉했을까
남자의 바람은 몸 만인 게 대부분이지만, 여자는 마음까지 간다더니.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기도 하다.
*****************************
역시 몇년전에 골프스카이에 올렸던 글입니다.
첫댓글 늘 똑 같은 얘기를 하게 하는...
역시 작가는 뭐가 달라도 다릅니다.
아우님! 건강은 여전 하지요?
예 형님 저는 잘 지냅니다
근무가 연말로 연장되어 그냥저냥 왔다갔다 지냅니다
찾아뵙질 못해서 죄송합니다
여성도 성에 집착을 하면
가족이라도 버릴수 있다는 것
또 한번 생각 해봅니다.
우리 딸도 아이를 둘 낳고 뇌수막염을 앓았어요.
그게 나이를 안 가리나 봐요.
늘 재미있는 얘기입니다. 자주 올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