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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계의 청소부 1
뫼비우스의 띠
“기영 씨! 몬스터 사체는 종류별로 분리해서 이 박스에 담아주시고요, 쓰레기도 치우고 피도 좀 닦아주세요. 여기, 여기, 여기 다 튀었잖아요. 좀 빨리빨리 움직여주세요. 이러다가 해지겠어요.”
“아! 예, 예.”
다른 청소원들에게는 관대하지만, 나에게만은 눈을 무섭게 부라리며 갈구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나는 굽신거리듯 대답했지만 정작 이 사람으로 말할 것 같으면 세상이 바뀌기 전에는 내 밑으로 배정되었던 신입 청소부였다. 그러던 것이 꼴랑 e등급 각성자가 되면서 상전 노릇을 한다. 헌터가 되기에는 모자라고 일반인이라 하기에는 넘치는 좀 그런 능력을 지닌 그가, 자신이 가진 모든 정력을 나에게 쏟는 듯, 그는 청소업체의 관리자가 된 조상진이라는 사람이었다.
내가 윗길에 있을 때 잘해준다고 여겼지만, 그가 받아들이기에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시간과 규칙을 좀 엄하게 적용하긴 했지마는 말이다.
헌터들이 몬스터들을 사냥하고 상진과 같은 하급능력자들이 사체를 던전 입구로 가져오면 나는 버려질 쓰레기들과 너저분하고 비위생적인 사체의 부산물, 쓸데없는 혈액 등을 처리, 소각하기 위해 바쁘게 몸을 움직여야 했다. 물론 상진의 눈을 피해가며 한숨을 돌리기도 했지마는 말이다.
이렇게 일을 해 봐야 하루에 고작 10만 원 남짓, 대변혁의 시기가 되면서 물가는 오르고 집세를 내기에도 빠듯한 그러고 나면 항상 잔고는 제자리였다.
일이 끝나고 던전 앞에 세워진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던 나에게 작업반장인 호범이 한마디 하였다.
“기영 씨, 참 대단하네잉. 난 처음에 상진 씨에게 대들고 쫓겨날 줄 알았다니깐.”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저도 죽을 맛이에요.”
“언감생심, 대들 수나 있겠나. 맞아 죽지 않을 바에야.”
털이 많고 우락부락하게 생긴 고참 정화가 대꾸한다.
“누가 그럴 줄 알았는가. 그에 각성자가 될 줄은.”
호범의 단짝 성수가 말을 더한다.
던전 청소는 위험한 작업이라 2인 1조로 팀을 이루어 일하는 게 관례였다.
“처음부터 지독하지 않았는가. 눈에 불을 켜고, 눈먼 마석이라도 있는지 없는지 버려진 부산물까징 낱낱이 살펴보고.”
호범이 다시 말하자 상진에 관한 이야기가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맞지, 맞아. 눈먼 마석이라도 능력자들 눈에 잘못 걸리게 되면 손목이라도 남아나질 않았을 텐데, 그런데도 용케 하나 꿍쳤으니. 거기다 각성까지 하지 않았는가.”
정화가 이야기하자, 호범이 한마디 더 한다.
“차라리 다행인 것이여, 우리 속사정이라도 안께. 딴 곳의 관리자들은 더한다고들 하드만. 살기 더러워진 세상이여.”
인간을 인간답게 여기던 낭만의 세월은 지나갔다. 능력자들이 처음에는 그래도 우리를 사람으로서 대우하였지만, 이제는 다른 종으로 여기듯 일반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벌레 보듯 냉랭하게 변한 시점이었다.
심사가 복잡한 나는 대뜸 철호에게 전화를 걸어 술자리로 불러내었다. 영업사원인 철호가 가장 만만했던 것이다. 속내를 털어놓고 이야기하기에 경제 사정이 비슷한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죽마고우가 되었다. 세상이 바뀌어도 사회의 시선은 여전하였고 사회계층에 대한 열등감도 비슷하여 술자리에서 울분을 토로할 때면 줄곧 장단이 맞곤 하였다.
전쟁과 테러가 불황을 야기하고 그럴듯한 직장을 얻기가 어려워진 때에 나는 청소부 일을 택하게 되었다. 거리를 청소할 때면 뿌듯함도 느껴졌고 만족감도 들었지만 젊은 혈기에 부끄럽기도 하였다. 버려진 쓰레기들이 자신만 같아서 자꾸만 움츠러들게 되고 재빨리 손을 놀리지 않으면 쓰레기들이 자신의 세계에 가득 들어찰 것만 같아서 꿈에서라도 쓰레기를 치울 때면 섬짓섬짓 무서운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일을 하다가 무심결에 버리는 쓰레기의 주인을 바라볼 때면 나는 자꾸만 세상을 원망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것이 세상이 바뀌면서 일당이 더 나은 던전 청소부로 자리를 옮긴 것인데···.
“철우야. 세상 엿 같다. 누가 우리 하류 인생을 알아주겄냐.”
입맛이 똑 떨어진 나는 젓가락으로 술안주만 뒤적거렸다.
“너만 그런 거 아니다. 나 오늘 상사한테 불려가서 얼마나 깨진 줄 아냐, 거래 못 텄다고 얼마나 밟혔는데. 이젠 헌터들만 좋은 세상이 되었어.”
“그래, 그래.”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는 사회변화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 못난이들이다. 처음 던전이 생겨났을 때, 겁내지 말고 마나의 세계에 먼저 뛰어들어 노출되었다면, 그것도 아니라면 신규직업들이 생겨났을 때 헌터 관련 직업으로 빠르게 갈아탔더라면···. 헌터들이 돈을 긁어모은다면 반대로 비관련 직업인들은 더욱 가난해지는 게 당연한 세상 이치였다. 능력도 없고 빽도 없는 그럴 바에야 얍삽하고 눈치 있게 세상을 살았어야 했는데 세상을 헛살아온 것만 같아 너무나 허탈했다.
“나도 씨바 상진이 너처럼 한다.”
"갠 또 누군데."
"......"
"자냐, 자냐구."
"안 잔다, 안 자. 내 억울해서 잠도 잘 안 온다. 내 시다로 들어온 녀석인데 나를 앞질러 버렸다. 괴로워 죽겠다."
"너 걔 괴롭혔냐?"
"내가 그럴 인간으로 보이냐. 딴짓하며 농땡이 부리길래 솔선수범, 몸소 보여줬다. 왜 내가 부린 것도 아니고 내가 다 했는데 걔가 왜 내 눈치를 보느냐고. 난 억울하다고."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함부로 막 대하냐. 누가 하루아침에 각성할는지 아냐 모르냐. 빚쟁이로 지낸 황보수관 걔도 이제 살판났다더라. 물건들 새로 장만해서 들여놓고 은행장이 모셔가서 대출도 해준다더라. 근데 우리는 이게 뭐냐. 너 일하는 데가 던전이라며, 눈먼 마석이라도 하나 주울 것 없냐. 각성이라도 좀 하자. 각성 좀."
결국, 우리의 대화는 능력자로 시작했다가 각성으로 끝나게 되었다. 한때 각성자 행세로 많은 이들이 사기를 당했다. 그 이후로는 능력자 증명제가 실시되어 각성자라고 사기 치는 일은 드물어졌다. 대신 주민등록증에 각성자란 표시가 안 보이면 무시하거나 차별을 당하게 되었다. 신인류라나. 차라리 사기당하는 게 나았다. 눈 부릅뜨고 있으면 코 베어 갈 수 없는 노릇이고 자신이 신경 쓰면 되는 일이다. 그러나 차별대우는 달랐다. 인간으로서 자존심에 막대한 타격이 왔다. 새로운 종이 헌 종을 밀어내는 느낌이랄까. 우리의 인생사는 이제 막 시작이었으나 다 한 느낌이었다. 제기랄, 나도 꼭 너처럼 한다.
***
아침에 일어나자 머리가 빠개질 듯 아파왔다. 대접으로 물 한잔 따라 먹고 TV를 틀었다. 이맘때쯤이면 절로 눈이 떠지는 게 매번 신기할 뿐이다.
뉴스에서는 여러 능력자가 나와서 각종 던전과 이능들에 대해 소개하였고 사회는 뒤질세라 새로운 사회이현상들에 대해 연구하고 체계가 잡혀진 이론들을 솜뭉치처럼 빨아들여 현실에 적용하기에 이르렀다.
오늘은 사천왕 길드의 왕상보가 나와 ‘코끼리 힘이여 솟아나라’처럼 왕성한 체력과 힘을 보여주었다. 아침의 시작이 TV에서는 씩씩함과 활력으로 충만하였으나 이제 겨우 졸음에서 벗어난 나에게는 해장술과 밥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다 집어치우고, 혼자 사는 나에게 화려한 음식과 따듯한 밥 한 공기가 어디 있겠는가.
나는 아침을 빵 한 조각과 우유로 간단히 때우고 일터로 향하였다. 던전 입구에는 삼삼오오 어제의 일꾼들이 다시 모여 있었다. 각 조의 작업반장들이 인솔하여 건강체조를 한 뒤 각자의 작업장으로 이동하였다.
나는 어제 술 마시며 다짐하였던 바를 상기하며 처음부터 상진처럼 하기에는 몹시도 부담스러웠으므로 하루하루 조금씩 늘려가기로 마음먹었다. 동료들도 내 하는 낌새를 봐서 조금씩 양보하였고 일감을 대신 처리해 주기도 했다.
내가 그렇게 한눈을 팔고 작업이 조금 늦쳐졌을 때, 상진이 용케 내가 하려는 바를 알아차렸다.
“그렇게 해서야 되겠어.”
상진이 발로 몬스터의 사체를 툭툭 건드리며 말한다. 상진이 발로 건드린 이 몬스터는 캉커라는 짐승이었다. 직립보행이 가능한 데다 드문 경우이지만 가끔 특수 공격도 발휘한단다.
이곳 던전은 막 활성화된 신규던전이었다. 그래서 안전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뭔가 일이라도 터지면 관리자가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석이 발견된다 해도 네 몫으로 돌아갈 일은 없을 거야. 일이나 똑바로 하라고. 퉤!”
내가 청소하고 있는 자리 앞에 상진이 가래침을 툭 하고 내뱉더니 작업지시를 위해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기영이 형! 참아.”
새로 짝꿍이 된 용성이 나를 껴안으며 말렸다. 용성은 싹수가 있는 녀석인데 얼마 안 되었어도 상진보다 잘 통하였고, 착하고 순한 아이였다.
“제기랄, 저 새끼가!”
나는 속에서 천불이 이는 것을 참아야 했다. 호범과 다른 이들은 숫제 모른 척하기로 했나 보다. 이내 관심을 돌리더니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새로운 헌터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한 번씩은 다 상진처럼 꿈을 가지고 따라 하였지만, 제풀에 꺾이곤 하였던 터였다. 나도 얼마 못 가서 때려치우겠거니 하였던 것이다.
“정화 씨, 누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강할 것 같아.”
성수가 말하자
“글쎄요, 날범 김건우가 아닐까요. 무예도 가장 출중하고 돈도 많이 벌잖아요.”
“그건 아니지. 아니야.”
작업반장 호범이 이야기한다.
“날범은 길드도 없잖아. 그는 외로운 늑대일 뿐이야.”
“그럼 천마 길드의 이필성 씨는요.”
용성이 말하자
“그는 길드와 가정에 매인 몸이잖아. 그럼, 생각보다 약점이 많을 것 같은데.”
성수가 날카로운 시선을 담아 호범을 바라다본다.
우리는 결론을 내리지 못할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이렇게 하루를 보내었다.
글쎄, 과연 우리나라에서 가장 센 사람은 누구일까. 우리나라 4대 길드라면 천마 길드, 맹호 길드. 4천왕 길드. 단군 길드 등이 있고 그 뒤로도 많은 길드가 있지만 정작 누가 가장 강한지는 역시 패를 까봐야 아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4대 길드 중 전국구인 단군 길드를 제외하면 인구가 가장 많은 수도권, 경기지역에 그 발을 드리우고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나머지 3길드 모두 서울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중 가장 강한 길드가 앞으로 서울을 독차지하게 될 것이었다. 그렇다면 곧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세계의 모든 헌터들이 이 최강자라는 싸움에 끼어든다면 여기에 누가 이름이나 올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나는 다시 작업을 진행하였다.
다음 날에도 난 다짐하였던 바를 아직 고수하며 여러 가지 쓰레기들을 헤쳐보며 치우고 있었다.
"에잇, 하나 없네."
그리 쉽게 발견될 리 없지마는 조급한 마음에 벌써 몇 년은 똑같은 작업만을 한 것 같은 얼굴로 몬스터의 사체를 내려다보았다. 용성도 안타깝다는 듯 내가 일하는 모습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야, 이 새끼야, 우리를 봤으면 냉큼 인사라도 해야지. 누구 덕에 밥 벌어 먹고사는 줄 아는 거야. 여기 작업반장이 누구야!”
갑자기 던전 입구, 그러니까 우리가 작업하고 있는 장소로 다가와 용성을 발로 걷어차며 한 헌터가 말했다. 팔 한쪽에 커다란 검상이 있는 그는 최근 사냥터에서 호되게 당했을 터였다. 아니면 아마 상관에게라도 혼쭐이 난 모양이었다. 이렇게 일반인에게 화를 전가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다.
어디서 소란을 들었는지 상진이 빠르게 달려와 헌터 앞에 굽신거렸다.
“어느 새끼가 감히 헌터님 앞에서 고개를 쳐들고 있어.”
조아리고 선 청소부들의 얼굴에 상진의 커다란 손이 날아들었다.
"퍽, 퍽, 퍽"
“제가 책임지고 잘 관리하겠습니다. 한 번만 참아주십시오.”
“잘하라고”
헌터가 상진의 어깨를 툭 치며 사라진다.
“제기랄!”
내가 분을 참지 못하고 한마디 내뱉었다. 욕도 아니었고 답답한 마음에 한 말인데, 그날 나는 상진에게 사경을 헤매도록 얻어맞아야 했다. 그러게 그런 일도 참지 못하면서 어떻게 그처럼 하겠다는 건지···. 분수를 알아야 하지 않냐는 말들이 내 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인간의 굴레
나는 며칠간 병원에 자리를 보전하고 누워있었다. 물론 산재나 손해배상도 받을 수 없었다. 세상은 힘의 논리를 따르기 시작했고 이를 따르지 않으면 도태되거나 사라질 뿐이었다. 여기 병원도 던전에서 다친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헌터 전용전문병원이었다. 그렇기에 비 능력자는 별로 없었고 헌터들이 대부분을 차지하여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던전 근처였으므로 이런 병원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게 되었다. 이런 곳에서 다른 말이라도 나온다면 나에 대한 말들이 헌터들 귀에도 전해지리라.
"박기영 씨, 귀가 도중 다치셨다고요. 이곳, 이곳, 이곳이 부러졌네요, 다른 외상은 없고요."
아침마다 도는 담당의가 내 상처에 관해 설명해 주었지만 열 받는 건 일하다가도 아닌 귀가 중 다쳤다는 말이었다. 이거 참 설명할 길도 없고, 잘못 이야기했다간 몸도 추스르지 못할 것 같고. 그래서 난 억울하지만 참아야 했다.
내가 그렇게 된 이후로 동료들이 문병을 왔지만, 딱히 도움이 되는 것은 하나 없었다.
“그만해서 다행이여.”
호범이 안쓰러운 듯 내 손을 붙잡고 말했지만 나는 안다. 그것도 다 남의 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놈이 그럴 줄은 어찌 알았겠나?”
정화가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상진과 계속 일을 해야 하는 그들로서도 갑갑한 일인 것이다.
“성수형이 안 보이는 데 뭔 일이라도 있데요?”
나는 더는 상진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아 말을 돌렸다.
“딸이 많이 아픈가 봐요. 여태 말 한번 하지 않았는데.”
용성이 걱정스럽다는 듯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리 친한 동료라도 내재한 아픔은 서로 꺼내지도, 내색하지도 않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백혈병이라던데 돈이 많이 든다네요.”
용성이 걱정스럽다는 듯 이야기를 꺼냈다.
그렇다. 대변혁의 시기가 되었어도 인간에게 있었던 병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이계의 동식물들로 치료제며 건강보조식품들이 빠르게 만들어지고 있지만, 일반인이 이를 이용하기에는 엄두도 못 낼 정도의 큰돈이 들었다.
“그래, 형은 돈 좀 모아둔 것도 없었데.”
“너두 알잖혀, 우리 사는 것도 빠듯한 거.”
호범이 혀를 차듯 말한다.
내 병문안을 왔다가 다들 성수형 걱정을 하게 되었다. 나도 속이 타는 것 같아 답답했다. 그들은 그렇게 걱정만을 안겨두고 병실을 떠났다.
사실 말을 안 해 그렇지 돈 때문에 작업장의 여인들이 능력자에게 몸을 파는 일도 허다했고, 팔자를 고치기 위해 젊은 여인들이 추파를 던지기도 하였다. 눈꼴 사나운 일이었는데 대상만 바뀌었을 뿐, 이는 세상이 바뀌지 않았어도 응당 있을 수 있는 일이었기에 못 본 체하였다. 뒷말은 하도 많았지만 그러려니 하였다. 세상이 다 그런 걸 어찌하겠나.
나는 이틀을 더 쉰 후에 망가진 몸을 추슬러 다시 작업장으로 돌아갔다. 다시 상진을 보았지만 그래도 약간의 양심은 남아 있던지 나를 보고는 얼굴을 돌렀다. 아니면 다른 일 때문이었는지 본척만척하였다. 그럭저럭 일을 끝마치고, 옷을 갈아입기 전 야외화장실에 볼일을 보러 들렀을 때(탈의실 화장실은 사람들로 복작거려서), 어디선가 상진의 목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다. 나는 무언가 훔쳐먹다 걸린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가 빠르게 용변 칸에 뛰어 들어가 몸을 숨겼다.
“그래, 결정은 했나.”
“장기를 팔아도 사는 데는 문제가 없능가.”
성수형의 목소리다. 장기를 판다니.
능력자들도 던전 사냥에서 다치기도 하고, 독성의 물질에 노출되어 장기가 상할 수도 있었다. 고위능력자들은 재생능력도 뛰어난 데다 고급 포션, 그레이트 힐 등 치료 가능한 방법도 많았지만, 중하급의 능력자들만 해도 장기를 이식하는 것이 비용이 싸게 들었던 것이다.
나는 안된다고 외치고 싶었지만, 상진이 두려워 나설 수 없었다.
“며칠간 시간을 더 주지.”
그렇게 그들은 떠나갔다.
나는 그 일에 대해서 함구하기로 했지만, 다음날 성수형은 던전의 입구에서 장기가 사라진 채 시체로 발견되었다. 아마도 형이 거절한 모양이다. 며칠간 시간을 주었는데 시체로 발견되었으니.
누가 성수형을 그렇게 만든 걸까. 당연히 상진은 관련되어 있을 거고, 장기를 적출할 만한 인물은 누구일까. 물론 능력자의 소행일 수도 있다. 하는 일이 몬스터의 몸을 헤집는 것이니.
하지만 병원이 연관돼 있을 수도 있다. 헌터들과 결탁한 어두운 음모가 여기 숨겨져 있을 수도 있다. 병원은 헌터들의 힘으로 커져 왔다. 그 룰을 깨고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병원이 여기에 얼마나 될까. 그들 역시 이 일에 가담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상진을 용서할 수 없었고, 세상을 용서할 수도 없었다. 사건은 몬스터의 공격을 받아 죽은 것으로 처리되었다. 나는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서, 다른 이가 눈치를 챌까 두려워 바로 직장을 관두진 못하였다. 나는 이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무슨 일을 할까 생각하다 컴퓨터를 다시 배우기로 했다. 대변혁의 시기에 앞서 세상을 지배하였던 힘. 게임 속 세상처럼 세상은 변했지만 그러기에 아직도 세상에 유용하리란 걸.
그러나 컴퓨터 관련 업계는 사양길이었고, 주로 여성들이 활약하는 무대였다. 큰 힘도 들지 않았고 정확하고 세심하니 여성이 우대받는 업종이었다. 그래서 이전 시대에서도 남자들에게 선호되는 직업군은 아니었다. 남들이 하니 자연히 따라 배울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그 사건이 있은 뒤로 상진은 당분간 몸을 사리는 것만 같았다. 물론 그는 아무도 그 사건을 목격했을 거라 예상치 않았으리라.
성수형 대신 다른 사람이 들어왔지만, 나를 제외한 동료들은 성수형의 죽음을 예사로 생각하지 않았다. 벌써 사건 조사 결과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나설 형편은 아니었다.
아마도 상진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더 큰 내막이 존재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모든 능력자가 이를 묵인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상진은 이 일이 있고 난 뒤로 다른 사람이 된 듯이 동료들에게 살갑게 대하곤 했다. 아마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닌듯 싶었다. 상진이 큰 동요를 보이지 않은 것을 보니, 또다시 허술한 사람들을 꼬여내려 할지도 모를 일이다.
두려웠다. 내가 알고 있음에 그들이 나를 주시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한번 나서봐봐’, ‘너도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수가 있어.’라며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학원수업을 빌미로 점차 일을 줄여나갔다. 그러나 학원에서도 난 열의를 보일 수 없었다. 누군가 날 노려보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스스로 일을 관두는 것과 타인에 의해 쫓겨나듯 일을 관두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아직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이직에 대해서 충분히 숙고하지 않았던 터라 막상 닥치고 보니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야간 수업 도중 한 선생님이 말하던 것이 생각난다. 막힌 차원과 열린 차원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사람의 입과 항문으로 이어지는 공간은 과연 닫힌 공간인지 열린 공간인지(몸속인지 외부인지)에 관한 이야기였다. 입과 항문에 차 있는 덩어리들은 흡수되어야 내 몸에 들어온 것이지 밖에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몸속으로 생각하였던 곳이 사실은 몸 밖이었다는 사실은 안과 밖이라는 관념에 큰 혁명을 가져왔다. 한 남자가 고정관념을 깨우치라고 한 말이었지만, 말대로 생각하기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확실히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큰 그림을 놓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나를 의심하지 않는데 혼자서만 애태우고 두려워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암튼 나는 다시 청소부 일을 유지하기로 하였다. 아무도 모르는 그들만의 비밀을 혼자 간직한 채, 내부에서 그들의 비리를 까발릴 요량으로 남아있었다. 덕분에 나에게 좋은 일도 찾아왔다. 조그마한 마석을 얻어 각성까지 하였는데, 그것까진 좋았는데. f등급, 아무도 안쳐주는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f등급의 능력을 얻었다.
일정 공간을 진공상태로 만들어 빨아들이는, 말하자면 진공청소기 되시겠다. 이런 f등급의 초능력이 생성되었다. 좀 더 좋은 능력을 바랐지만, 이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는 형편이다. 성수형의 음모를 캐려는 판이니.
나는 이 능력을 이용하여 순식간에 청소를 끝마치고 몰래 다른 일을 하기 시작했다. 상진처럼 다른 마석을 찾아낼 시간을 벌기도 했으며, 예전에는 돌아다닐 시간이 없어 던전 입구에만 머물던 활동반경을 조금씩 넓혀가며 능력자들의 행동을 살펴보게 되었다.
남들도 점차 나의 능력을 알아차리게 되었지만, 청소에나 도움이 될 법한 이 하찮은 능력에 대해 능력자들도 관심을 거두는 것 같았다.
능력치도 없고, 성장 가능성도 없었다. 다만 그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진···.
파리지옥
일이 끝나갈 무렵 작업반장인 호범이 우리를 불러모았다. 성수형이 그렇게 된 뒤로 회사가 하는 일이 다 께름칙했다. 상부의 지시라나 뭐라나. 암튼 각 부서에서 이렇게 따로 모인 사람들을 상진이 함께 인솔하여 던전의 적재창고로 몰아넣었다.
“이것이 뭔일이라냐.”
처리된 몬스터 추출물을 가공공장으로 옮기는 일을 맡고 있는 기호 씨가 적재창고를 둘러보며 말했다.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어수선했다. 밖으로 나가려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상진이 그들을 막아 세웠다.
창고 중앙에는 빈 의자 여럿이 놓여 있었고, 그 주위를 능력자 4명이 둘러서 있었다.
상진은 사람들이 모두 들어가자 문을 닫아걸고 자물쇠를 채웠다.
“무슨 일입니까.”
사무실 직원 효성이 의문을 갖고 따졌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분명 작업지시를 받았어야 할 직원인데도 아무런 언질도 받은 것이 없었다. 그는 의문 속에서 이모저모 따졌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사전 설명도 없이 이렇게 구석에 우리를 몰아넣었으니 안 좋은 일이 분명할 텐데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능력자 중 왼쪽 가운데에 있는 아마 내가 기억하기로는 붉은 늑대로 변신하는 스킬을 지닌 이였던 것 같다. 그가 이 무리의 우두머리인 듯 직원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투서가 있었다. 저번에 던전 입구에서 죽은 사람이 사실은 능력자에게 죽었다고 말이다. 모든 조사가 끝났고 몬스터들에 의해 죽은 거로 밝혀졌는데 누군가 의심병이 든 모양이다. 뭐 자신은 증거를 가지고 있다나 뭐라나, 어쨌든 회사와 길드에 커다란 피해를 주었다. 좋은 말로 할 때 순순히 자수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늑대인간 좌우에 있는 능력자들은 모두 둔기를 어깨에 두르고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사용할 생각인가보다. 그들은 모두 힘깨나 쓰는 능력자인 모양이었다. 아마 상진보다 더 강하리라.
그나저나 화장실, 그 자리에 나만 있었던 것이 아닌 모양이다. 너무 안일했다. 누구일까. 혹 나를 희생양으로 삼는 것은 아닌지. 정말 알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뭐여, 그렇담 성수는 살해된 것이여?"
호범이 이야기하자 모두 술렁인다.
"영감,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말아야지. 죽고 싶어."
상진이 출구에서 다가오더니 호범의 얼굴을 주먹으로 다져놓았다. 호범은 얼굴이 뭉개져서 무릎을 꿇은 채로 옆으로 무너져내렸다. 상진 이 녀석은 간부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헌터들의 뒤를 닦아주는 개가 되어있었다. 처음부터 녀석은 이럴 속셈으로 던전 청소부로 들어온 것은 아니었을까. '배알도 없는 새끼.'
이들이 우리를 다 죽일 생각인가보다. 아니라면 이렇게 순순히 의혹을 떠벌릴 필요는 없을 텐데. 어쩌면 몬스터웨이브로 집단사고가 난 것으로 처리할 수도 있었다. 일말의 의혹보단 입막음이 더 편할지도 모른다 이곳은 던전이니까.
입막음하는 데 자신이 있는 것일까. 몸에 소름이 돋았다.
모두 의자 주위로 무릎을 꿇게 하더니, 손을 뒤로 묶고서 한 사람씩 의자에 앉혀서 심문하려 한다. 손에 몽둥이, 철퇴를 들고서···.
성수형의 죽음에 대한 내막을 아는 이는 가해자와 나 그리고 또다른 목격자일 것이다.
나를 제외한 또 다른 목격자만이 나의 존재를 정확히 알고 있다. 그만이 이런 상황을 연출할 수 있는 연출자인 것이다.
그는 무엇을 노리고 있는 것일까? 상황을 이렇게 만들고도 살아남을 자신이 있는 것인가. 나를 제물로 삼아 이를 벗어날 타개책이라도 갖고있는 걸까. 아니면 그에게도 또 다른 배후가 있어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 아무 대책 없는 사람일 수도 있다. 이건 최악의 경우이다. 나는 우려되는 상황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는 좁은 공간을 진공으로 만드는 진공 청소능력만을 가졌을 뿐인데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한단 말인가.
나는 최대한 버틸 때까지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해결책은 또다른 목격자가 이 일을 해소하거나 내가 끝까지 버텨내는 것 뿐이었다. 다른 목격자가 지닌 패를 빨리 알아내야 하는데, 단서는 거의 없었다.
그 시간 화장실에 올 만한 사람은? 야외화장실을 자주 사용하는 사람은? 그러나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제삼자라면 그래서 미리 그곳에서 잠복하고 있었다면, 우리 직원일 거라는 추측은 의미 없는 것이다.
아! 어쩌면 너무 넘겨짚은 건지도 모르겠다. 화장실이 아니라 살해 순간을 목격했다면? 이야기는 처음부터 달라질 수 있었다.
내가 이 궁리 저 궁리 하는 동안 자재과의 정렬이 먼저 끌려 나왔다. 정렬은 팔린 송아지처럼 끌려나가길 거부하다가 머리채가 잡혀 의자에 앉혀졌다. 그는 의자에 앉으면 죽기라도 하는 양 버티다가 여기저기 얻어맞았다.
잠깐만 있어 보자. 그들이 심문하더라도 정확한 시간과 장소를 두고 질문할 수는 없다는 제약이 있었다. 우리가 한꺼번에 들고 일어선다면 그들로서도 처리하기 번거롭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범인이라고 자인하지 않는 한, 그들은 어떤 식으로 그를 심문할 것인가.
"너 이새끼, 능력자 중에 아는 사람 있어?"
정렬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하기를 주저한다.
"빨리 말 안 하지."
늑대인간 왼쪽의 텁석부리 장한이 몽둥이로 정렬의 다리를 후려쳤다. 타격감을 느끼려는 것인지 '탁, 탁' 손바닥에 몽둥이를 두들기면서.
"윽."
”빨랑빨랑 말한다. 너 이름이 뭐야.“
고통에 이를 악물어서 입술에 피가 맺힌 그가 자신의 이름을 떨리는 소리로 말한다.
"기이임저ㅇ리얼임니다."
텁석부리가 상진에게 얼굴을 돌리며 맞는지 확인한다. 확인은커녕. 공포감을 조성하기 위해 더욱 그러는 모양이다.
"네가 아는 지인 중에 능력자가 있는지 빨리 말한다."
정렬은 혹 먼 사촌 중에 능력자가 있는지를 떠올려 보는 것같았다. 그렇지만 그랬다면 그가 이런 일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또 있더라도 지인에게 누가 될까 말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터였다.
"이새끼 머리 돌아간다."
맨 오른쪽의 호리호리한 인상의 장한이 발뒤꿈치로 정렬의 허벅지를 찍었다.
"헉, 으으음, 업슨미다."
"일주일간 뭐 했는지 말해봐."
그들은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고문하였고, 오줌을 지리고 까무러친 사람도 여럿 되었다.
나도 한차례 고문을 당했지만, 사실을 말할 순 없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들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며 다른 목격자를 찾았다. 그러나 정체를 숨긴 그를 그리 쉬 발견할 순 없었다.
한차례의 심문은 끝났지만, 이들은 그칠 줄 몰랐다. 처음부터 다시 심문을 시작하려 하였다.
내 차례가 되어 의자에 앉혀졌다.
채광창으로 해가 기울었다. 보통 이맘때면 퇴근하느라 서로 바쁘게 움직일터였다. 갑자기 고통 속에서 철호가 생각났고 그때 마셨던 술이 생각났다.
곧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상진이 작업등을 켜고 늑대인간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 머리를 굴려봐야 아무 소용없어. 너희는 곧 죽을 운명이야. 야왕 이낙현이 허락했어. 괜히 용쓰지 말고 배후가 누구인지 부는 게 고통 없이 가는 길이야."
모두 죽는다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최근 이들과 다른 조직긴의 알력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목격자의 실력행사를 기다리기엔 상황이 너무도 안 좋았다.
나는 내 살길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사람의 입과 항문으로 통하는 길은 열린 공간일까 닫힌 공간일까. 갑작스럽게도 죽음의 순간 떠오르는 공부가 있었다. 우리가 너무 고정관념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조져."
다시 늑대인간의 말이 떨어지자 나에게 죽음의 공포가 드리웠을 때.
호연이라는 사내, 사무실 직원으로 항상 연약하게 보였던 인물이 갑작스럽게 일어나 능력인지 뭔지를 사용하여 몸을 가속하며 채광창으로 뛰어들었다. 한 손에는 짧은 칼을 들고.
"막아."
그와 동시 상진과 세 명의 장한이 그를 막아섰지만, 그들을 피해 높이 뛰어올라 작업등을 부수며 채광창을 뚫고 밖으로 달려나간다. 그러자 주위가 어두워졌고. 늑대인간은 변신을 마친 채 채광창 쪽으로 호연을 뒤쫓는다.
"너희는 남아서 이 새끼들 정리해."
그렇다. 내가 안일하게 생각한 것은 범인들을 모조리 죽일 어떤 계책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우릴 인질로 삼아 호연은 장기밀매조직과 윗선이 어디까지인지 알기 위해 고문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런데 윗선이 야왕으로 밝혀졌으니 그가 남아 있을 이유는 없었다. 그가 떠나고 남은 자들은 고문으로 모두 그로기상태였다. 몸도 몸이려거니와 정신적 공황이 몸을 장악한 것이다. 나는 최대한 몸을 추슬러야 했다. 죽음의 일 번 타자가 나일 것만 같아서.
어둠이 드리워지고 공포가 전신을 지배했을 때 나는 떠올려야 했다. 한정된 공간을 진공으로 만들 수 있다면 인간의 몸속에도 진공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머리나 심장 등에 한방씩.
생의 한가운데
나머지 세 명의 능력자들은 또 다른 도망자가 나오지 않도록 길을 막아섰고 상진이 앞으로 나섰다.
"능력자님들은 손쓸 필요도 없지 말입니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이미 자신 앞의 동료들을 피떡으로 만들어 놓은 상진은 피가 묻은 손을 핥으며 능력자들에게 허락을 구하였다. 일반인이라 상대하기에 아무런 여흥도 일지 않았던 그들은 고개만 끄덕이며 자리를 지키고 섰다.
"이 나쁜 놈아, 사람이 어떻게 이런 짓을 한단 말이여."
기호가 울부짖으며 말하자, 모두 손을 뒤로 묶인 채로 상진을 피해 사방으로 도망쳤다. 운 없게도 다른 능력자에게로 이동한 이들은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아 생을 달리했다. 제발 살려달라고 주저앉아 비는 인물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들이라고 봐주진 않을 것이다. 상대를 잘 못 보았다.
"너부터 맛을 봐야겠지. 참 궁금했어."
상진이 입가에 묻은 피를 혀로 핥으며 광기의 눈을 희번덕인다. 그 말을 듣고 있노라면 내가 그에게 뭔가 큰 잘못이라도 한 모양이다. 저렇게 나에게 살기를 날리다니.
그가 피 묻은 손을 들고 나에게로 온다.
나는 천천히 걸어오는 상진의 이동공간, 심장이 있을 공간을 염두에 두고 사냥꾼이 사냥감을 노리듯 최대한 작은 공간으로 압축하여 덫을 놓았고, 그가 그곳에 위치했을 때 진공의 힘으로 그의 심장을 터트려버렸다.
약간 빈혈이 일고 전신에 짜릿한 감각이 느껴졌을 때,
"어! 이게 뭐야."
상진이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나머지 능력자들이 그를 보고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왔지만 호리호리한 인상의 장한도 곧 머리를 붙잡고 쓰러진다.
나는 코피가 터졌다. 찝찔한 핏물이 내 입가에 흘러들어왔지만 어떤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만큼 정신을 집중한 터였고 공포에 사로 잡혀있었다.
염소수염의 작달막한 능력자가 뒤로 물러서며 허공에 철퇴를 휘두른다.
텁석부리 장한은 아직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모르고 다가와 두 사람, 이미 시체가 되어버린 능력자들을 뒤집는다.
"이게 뭐야, 아무런 상처도 없는데?"
그러다가 그도 바닥에 쓰러진다.
공포에 질린 염소수염은 철퇴를 휘두르다가,
"난 아니야, 난 아니라고 그 새낀, 저 얍삽이가 죽인 거라고. 난 단지 장기만 꺼냈을 뿐인데, 저리 가, 저리 가란 말이야."
공포에 잠식된 염소수염이 나에게서 멀어진다.
위기에서 벗어나자 나의 집중력도 흐트러졌고 죽이기에는 거리도 멀어졌다.
그러나 염소수염은 여전히 철퇴를 휘두르다가 옆에 있는 사람들을 철퇴로 쳐 죽였다.
기회가 있을 때 처리했어야 했는데, 매번 이렇게 후회만 남는다.
염소수염은 자신의 손에 죽은 이들을 바라보고 타격감을 느꼈는지 정신이 돌아왔다. 자신에게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자 용기를 얻은 듯, 사람들을 학살하기 위해 움직였고, 나에게까지 손을 쓰려고 다가왔다.
그러나 가만히 당해줄 내가 아니었다. 그도 곧 상진처럼 가슴을 부여잡아야했다.
아침이 다가왔다. 사람들은 손을 뒤로 묶인 채로 창고 구석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날을 새기를 기다렸다., 사실 기진하여 쓰러져 잠이 든 사람이 태반이다.
아침이 되자, 외부의 사람들이 창고 문을 부수고 들어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살피었고, 곧 119와 경찰 차량이 당도했다.
증언을 토대로 창고 안에서 벌어진 일들이 밝혀졌지만 범인들이 돌연사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아무도 혐의는 없었는데, 모두 손이 뒤로 묶인 상태였고 그들의 시체에서도 아무런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
TV마다 불을 켜고 이 일에 대해 집중 조명했는데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출연하여 이 일에 대해 증언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난 난처하였는데 다음번 심문 순서가 나였던 점도 그렇고, 그들 모두 내 근처에서 쓰러져 있었기에 난 유명세를 치르기도 했다. 이렇게 척하고 다가오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여자앵커의 대사가 귀에 익었다.
생존자들이 지금은 미디어 매체에서 이렇게 모셔가듯 하며 바쁘게 지내는 듯 보였지만 그 활동도 곧 시들해질 터, 어차피 우리들은 새 직장에 대해 알아봐야 할 처지였다.
매체에서는 TV 출연도 거부하고 여전히 직장에 남아 있는 나를 보며 이상한 괴물 취급을 하긴 했지만, 나이 먹어 딴 데 가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닐 터였다. 여러 형님이 취업 걱정으로 나에게 다시 전화하는 걸 보면 말이다.
그리고 늑대인간과 호연에 대한 조사도 이루어졌지만, 그들이 나타나 자백하기를 기대할 순 없었다. 아마 그들은 다른 이름으로 활동을 재개할 것이었다.
나는 경찰청 내 각성자 관리처의 제3팀장 포청수와 팀원 허풍선을 구봉산 던전에서 만나게 되었다.
아마 경찰청 내에서 가장 유능한 요원을 보냈을 터였다. 포청수는 전도유망한 사람이라 탁상공론하는 꽉 막힌 책상물림의 공무원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현장 일에만 몰두하여 세상 일에 무관심한 그런 인물도 아니었다. 더구나 정치적으로도 예민한 출세 지향적인 인물이었다.
4천왕 길드는 강원도의 제왕 길드와 다툼이 있었다. 수도권의 세력다툼에서 밀린 4천왕 길드는 강원도로 눈을 돌렸고, 강원도의 모든 던전을 차지하여 4대 길드로 발돋움하려던 제왕 길드와 부딪치게 되었다. 4천왕 길드는 눈엣가시인 제왕 길드의 약점을 찾기 위해 제왕 길드 내부에 조직원을 심어 장기밀매조직을 탐지해냈던 것이다. 그러나 비리를 폭로하여 이득을 얻으려다가 야왕이 관련되었다는 소식에 발을 뺀 모양이다. 야왕은 말 그대로 밤의 대통령이었다. 그는 여러 길드에 자신의 조직원을 심어두고 비열하고 더러운 일들을 하는 인물이었다. 아마도 나에게 죽임을 당한 이들은 제왕길드에 심어진 야왕의 첩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팀장님, 누군가 능력자들을 죽인 게 아닐까요, 한날한시에 이렇게 모두 죽다뇨. 기영 씨도 그날 본 것 다시 한번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허풍선이 나를 심문하다가 당시에 죽은 네 명의 사인을 보곤 이상하다는 듯 부검까지 해봐야 하는 것 아니냐며 팀장에게 묻는다.
"신경끄라고, 그래 봐야 정당방위야.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지 말고 강지호나 임호연에 대해 아는 것 없는지 잘 물어보게."
강지호는 늑대인간이었고 임호연은 4천왕길드의 끄나풀이었다.
포청수는 의자를 뒤로 젖혀 앉으며 그날의 사건을 떠올려 보았다.
***
제왕 길드는 장기밀매조직과 야왕 그리고 이 사건에는 자신들과 하등 관련이 없다며 언론을 통해 재빨리 발뺌하였고, 피해자들에게 약간의 위로금만을 전하였을 뿐이었다. 거기에 형사들마저도 거물들은 건드릴 여력이 없기에 아래의 능력자들만 조져댈 뿐이었다.
약자들만이 억울할 뿐이었다.
호범 형님은 그래도 살아남으셨다. 얼굴이 한참 망가지셨지만, 인간의 목숨은 끈질긴 데가 있다.
나머지 식구들은 모두 일을 관두었다. 그런 일을 당하고 남아 있는 게 정상은 아니었으니, 나? 나는 그래도 여기 남기로 했다. 성수형의 일이 모두 끝난 것은 아니니까.
나도 정상은 아닌 것 같다. 이 일을 끝까지 파헤치려고 일을 관두지 않았으니까. 대부분의 사람이 일을 관두면서 나는 상진의 일을 대신 떠맡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늑대인간은 야왕의 식구면서 야왕이 벌인 일이라 공공연히 떠벌렸으니 두 길드 간의 전쟁을 막은 것은 다행이겠지만 사실 그는 야왕의 편이 아닐 것이요, 제왕 길드의 앞잡이였으리라.
야왕과 제왕길드 이중의 첩자. 그것이 그의 정체일 것이다.
나는 아직 개장하지 않은 던전, 나에게 사건의 발단이 된 야외화장실과 던전의 입구를 돌아다니며 또 다른 증거들을 찾아다녔다.
"네가 녀석들을 모두 죽였나."
아무 인기척도 없었는데 누군가 불쑥 말을 걸어온다. 나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어두운 던전 속에서 빨간 눈동자만이 뚜렷이 밝혀져 나의 온몸을 얽어매고 있다. 나는 직감적으로 야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거리로 들어오면 나도 한번 목숨을 걸어볼 수도 있겠지만 나의 능력은 그들의 빠른 움직임을 따를 수 없었고, 고위능력자들의 능력과 재생력이 어떤 줄 모르는 나에게는 함부로 시도할 수 없는 일이었다.
"뭐 상관없네. 난 늑대 녀석을 잡으러 왔으니. 이곳에서 자취를 찾아야 하니깐."
나의 머리가 재빨리 상황을 받아들였다. 큰 위험은 없으리라고.
"그런 줄 알았는데, 방금 자네 눈빛이 예사롭지 않군. 그냥은 못 떠나겠어."
다시 내 머리가 위험하다고 경종을 울린다.
"저도 고문 장소인 적재창고에 있어서 알 뿐입니다."
"거봐, 그런 사람이 전혀 떨고 있지 않잖아. 허허, 대어를 낚았군."
말과 동시에 움직인다 생각했는데 나의 목 언저리에 죽음의 사신이 드리운다. 그때 야왕을 막아서는 또 다른 인물.
"나중에 나 좀 보게나."
누군가 잠복하고 있었는지 위험의 상황에 나타난 흑의의 기사.
"여기는 팀장님께 맡기고 저희는 이곳을 벗어나죠."
자신을 허풍선이라 일컫는 사내를 따라 나는 현장을 벗어났다.
던전 청소부
팀장 포청수는 팀원들과 협업하여 야왕을 몰아세웠다.
야왕의 능력은 어둠에 있다. 그림자 이동술과 어둠의 손아귀로 팀원들을 가두며 쥐락펴락했다.
포청수는 마석의 화탄(현대식 무기)을 이용하여 빛으로 어둠을 쫓으며 야왕을 던전의 어둠 속으로 몰아내었다. 현대식 무기인 마석의 화탄은 팀장급에게나 전해지는 물건이었다. 능력이 출중해서 주어졌다기보다 워낙 물건이 비싸서 팀장급에만 전해진 물건이었다. 엄청난 화력과 함께 능력자들의 재생능력도 비활성화시키는 헌터 대상 물품들이었다. 당연히 국가에서도 헌터 관련 문제가 끊이지 않았기에 그에 대비하여 이렇게 조금씩 준비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미 국가의 손에서 벗어난 공룡 길드들은 정부에 압력을 넣어 각성자 관리처는 실상 무용지물이 된 형편이었다. 이렇게 대놓고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그들을 몰아세우기엔 각성자 관리처는 한계가 있었다.
"인제 그만두시지."
"천만의 말씀, 어디 솜씨 좀 봐 볼까."
어둠의 손아귀에 포청수가 붙잡히기 직전 그의 손에서 마석의 화탄이 터지며 빛을 밝힌다.
'쾅'
십여미터 길이의 고랑이 파였다.
몽글몽글 연기가 앞을 가렸다.
"애송이였을때 보단 솜씨가 늘었군."
야왕이 옷에 묻은 먼지를 털고 포청수를 비웃으며 물러난다. 이미 화탄을 사용할 것이라 예상한 움직임이다.
”제길 밤이면 더욱 상대하기 어렵단 말야.“
"하하 다음에 또 보세."
포청수는 몇억대의 화탄을 벌써 두어번 사용했지만 야왕의 옷자락도 건들지 못했다. 투덜거리며 팀원들과 함께 경찰청으로 이동하였다. 그와 동료가 단지 야왕의 샌드백이 되어준 꼴이었다. 역시나 한가락 하는 이들의 실력은 남달랐다. 화탄의 사용처를 보고서에 적어야 하는 그는 입맛이 썼을 것이다.
조사실에서 포청수가 나의 능력에 관해 물어보았지만 난 진공청소기 능력으로 조사실을 청소해줬을 뿐, 야왕이 날 넘겨짚었음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건 그렇고, 난 당신의 능력에 대해 크게 기대하지 않아. 야왕이 이제 당신을 계속 노릴 거란 말이지. 그러니 우린 서로 협조해야 해. 순순히 털어놓는 게 서로에게 좋을거란 말이오. 박기영 씨 우리가 계속 지켜줄 수는 없어요."
"나 참 몇 번을 말해야 하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무슨 죄인인 양 이러는 모양인데 그럴 시간이면 야왕이라도 잡는 게 순서가 아닐까요."
"아 참 답답한 양반이네. 그날 서로 싸우다가 죽었다고 다시 언론에 흘릴 수도 없고. 그들의 죽음에 대한 단서조차 알 수 없다니. 언론에서 각성자관리처의 무능을 탓할 거란 말이오. 그렇게 되면 오히려 길드들에게 더 힘이 실릴거란 말이지."
포청수가 이야기하자 옆에서 청수를 거들던 허풍선이 말한다.
"그럼 일반인들에게 더 안좋은 상황이 벌어질텐데요."
"어쩔 수 없지. 그냥 이 사람 풀어주고 당분간 경호 대원을 붙여야겠어."
머리가 아프다는 듯 손으로 머리를 헝클이며.
"이봐요. 이것만은 거절하면 안 돼."
나는 졸지에 경호를 받게 됐다.
다음날 뉴스에는 청소능력뿐인 f등급의 일반인에 가까운 던전 나부랭이 청소부가 야왕의 공격을 받았다고 대서특필되었다. 사실 대서특필은 아니고 사회면에 조금 나왔을 뿐이다.
아무리 사회가 능력자 위주로 돌아간다고 해도 야왕이 선을 완전히 넘은 것 아니냐며 관리처의 인력들은 변죽만 울릴 게 아니라 거물들을 잡아야 한다며 크게 성토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나는 던전으로 돌아와 상진의 일을 다시 하게 되었다. 물론 청소일도 병행하면서.
처음으로 나는 능력자들을 따라 던전 내부로 들어가게 되었다. 언젠가 한 번은 야왕과 다시 만날 것이라 예감하면서.
***
한 파티의 짐꾼으로 들어간 나는 파티원들이 사냥해놓은 몬스터들을 나와 같은 일꾼들과 더불어 던전 입구로 옮기고 배분하여 일감을 나눠주는 일을 하게 되었다.
오고 가는 도중 몬스터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으니 위험수당이 더 붙었다.
능력자들은 병기나 방패, 마법 또는 변신 스킬, 테이밍 동물들을 이용하여 사냥하고 다치면 힐링 기술이 있는 사제들의 도움을 받아 사냥을 하였다. 그러나 힐은 생각보다 대단하지 않았고 그냥 겉의 상처만을 아물게 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니 장기밀매조직이 판을 치던 것 아니었겠나.
오늘부로 나는 신입의 파티원들과 함께하게 되었다. 나도 신입, 그들도 신입, 원래 한쪽이 신입이면 다른 쪽은 베테랑이 되어야 하는데, 서로 일을 편히 끝낼 수 있는 베테랑끼리 손을 잡는 것이 당연했다.
후임은 힘이 없으니 이렇게 뒤로 밀리는 것이고. 나도 차라리 인간 대접 안 해주는 베테랑보다 신참이 낫다고 생각했다.
“엥 왜 그리로 가는 건데요.”
“거긴 몬스터들이 많이 나오는 곳이라 무섭다고요.”
이들의 활동은 던전의 입구 근처에 머물러 있었다. 신입이니 잡몹만을 잡다가 이런 몬스터들은 처음이겠지. ‘아, 나 참.’
신입 파티원 베티는 다문화가정의 3세대다. 그녀와 지금의 동료들은 각성하자마자 훈련을 마치고 구봉산 던전에 투입되었다.
화염의 손길로 몬스터들의 공격을 막아 세우면 나머지 팀원들이 무기를 들고 해치우는 것이지만 잡몹만을 잡다 이곳의 대형 몬스터들을 상대하기에는 손발이 맞지 않았고 서툴렀다.
몬스터들을 처리하면 일당이 되어줄 마정석이 떨어지고 파티장이 마정석과 몬스터들이 가지고 있는 장비를 챙기고 나면 짐꾼들이 사체를 던전 입구로 옮기는 것이었다.
마석? 마석은 마정석이 부서지거나 떨어져 나간 잡돌일 뿐이다.
파티원인 진우와 성국이 캥거루 모양의 직립 몬스터에게 끊임없이 딜을 넣었지만, 그들이 가진 데미지만으로는 사냥하기에 한나절이 걸릴 것처럼 보였다. 힐러이자 버퍼인 화영이 지쳐서 말한다.
“아직도 멀었어? 난 이제 끝이야.”
“좀만 버텨. 쿨타임이 곧 돌아온단 말야.”
베티가 버프를 넣고 있는 화영에게 말했지만, 자신도 이 체력 만땅인 캉커를 잡을 수 있을지 만무하였다. 한쪽에서 내가 이를 보고 응원을 하였다.
“파이팅! 파이팅! 조금만 버텨라. 화영 씨 파이팅···.”
'휙'
그녀가 싸우다말고 나를 노려본다.
그녀가 보기에 내가 어딘가 열불나게 하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 같았다. 혹 열 받아 죽게 만드는 능력자이거나.
“조심해요, 베티양. 파이팅! 파이팅!”
캉커가 앞발을 휘둘렀다. 내가 위험을 알려준 덕분에 베티가 머리를 숙이며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애초 위기를 초래한 것은 나에게 있다고 여기는 듯.
“거 좀만 조용해 줄래요.”
‘아, 네.“
캉커가 갑자기 변칙의 플레이를 한다. 두 팔로 땅을 짚고 양발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손으로 하는 공격보다 충격이 더 큰 듯 진우와 성국이 이를 막아내다가 가드가 벌어졌고 화영은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모두 충격적인 상황에 얼어붙었지만, 내가 캉커의 공격 순간에 발을 뻗는 공간 뒤로 진공을 펼쳐 공격 속도를 늦춰주었다.
'쉭'
바람소리가 귓가를 할퀴며 지나간다.
화영이 몸을 뒤로 피하자 캉커의 발이 그녀의 얼굴 주위로 스쳐 지나간 것이다. 다행이 나머지 동료들이 다시 캉커를 뒤로 물리며 포지션을 잡았다.
"저 그런 능력이 있으면 저희 좀 도와주실래요."
'휴!'
한숨을 내쉬며 흐르는 땀을 닦아낸 베티가 공손하게 도움을 요청하자 나는 뜬금없이 그들과 함께 사냥하게 되었다.
'그러시죠.'
물론 원샷원킬의 능력을 선보일 순 없지만, 진공 청소능력으로 몬스터의 공격 속도를 늦추어줄 순 있을 것이다.
그러자 신생파티엔 그것마저 안정감을 주었는지 멀찍이 바라보던 내가 서투른 그들의 플레이를 조율하게 되자 손발이 맞아 들게 되었다.
***
던전 내에서는 어쩔 수 없겠지만 일이 끝나고 나면 포청수가 붙인 사람들이 내 주변을 둘러싸고 경호할 것이다. 나는 자유를 잃었지만 그만큼 안전하다고 느꼈다.
아마 신입 파티원들도 꼴사납겠지만 내가 도와줌으로인해서 그만큼 안정감을 느낄것이다.
나는 이들 신입과 손발을 맞추며 어느덧 서로를 인정해주는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고참 짐꾼이 나에게 눈치를 주었다. 너무 열심히 나서서 그들을 돕지 말라고, 능력자들이 나처럼 자신들을 돕지 않는다고 다른 짐꾼들을 꾸짖었고, 그중 하나가 그냥 내버려 두면 큰 사고로 번질 듯, 나에게 살짝 귀띔해준 것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다 보니 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베티에게 상황을 얘기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누가 이 사람에게 뭐라 하나요! 뒤에서 호박씨 까지말고 내 눈앞에서 직접 얘기하세요."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며 그녀가 이야기했고 그녀의 동료들도 나를 두둔하며 함께 나섰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쉽게 끝날 리 없었다.
일이 끝나고 나는 고참 짐꾼들의 부름을 받았고 나처럼 능력자들을 돕다 사고라도 난다면 책임을 질 수 있느냐며 한참 꾸중을 들었다. 말이 꾸중이지 집단 린치를 당했다.
난 잠시 도움을 준 것뿐이라고 변명아닌 변명을 하였지만 다른 능력자들이 도움을 주지 않는 그들을 곧이 보지 않았고 그만큼 일당을 제하겠다고 나섰단다.
나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며 다시는 돕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다음날 나의 도움이 없자 파티는 손발이 어지러워졌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도움을 준 것뿐인데, 일이 끝나자 일자리의 생태를 어지럽힌다고 헌터들도 찾아와 나를 둘러쌌다.
"이 새끼 말해도 소용없다며."
"여기가 니 안방인 줄 알아."
"참아주니, 안하무인이지."
그들은 사정도 봐주지 않고 나를 죽을 만큼 밟았다.
나는 고통을 참으며 이들을 이 자리에서 죽여버릴까 하는 충동에 휩싸였다. 힘을 얻었으니 꼭 사용하고 싶은 욕망에 휩싸였다.
참는다. 참는다. 참는다. 참는다고 여러 번 맘속으로 외쳤지만 더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을 때, 내 눈이 붉게 물들어갔을 때, 다행히 포청수가 붙여준 경호 대원들이 나타나 그들을 쫓아내었다.
아마도 내가 능력을 발휘할 때까지 지켜보다가 내가 별다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얻어맞기만 하자 곧 죽을 것 같으니 나서서 도와준 것이리라.
잘 참았지만 위험했다. 능력을 보이는 것도 위험했고, 조금만 늦었어도 난 생사의 경계를 헤메고 있었으리라.
나는 또다시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풋내기 파티원들이 문병을 왔고, 내 뒷배경을 물어보기도 했다. 내 뒤를 두려워한 능력자들이 다시는 나를 건드리지 않을 거을 거라고도 했다.
밤의 광시곡
퇴원 후에도 난 풋내기 파티원들과 함께 일했다. 다른 능력자들에게도 소문이 났는지 나와 일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입원하였을 때 파티원들끼리 사냥을 계속해왔는지 어느덧 서로 합이 맞아 더는 내가 필요치 않았다. 가끔 위험에 처했을 때나 도움을 주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돌아왔을 때 던전 분위기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4천왕 길드와 제왕 길드와의 다툼 때문이다.
낮에는 보통의 능력자들이 사냥을 해왔지만, 저녁이 되어선 길드에 가입된 능력자들이 통제하였고 그들끼리 뭉쳐 다니곤 하였다. 그들은 식당가나 술집 등에 모여 정보를 획득하기도 하고 낯선 자들은 감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길드원들이 몰려다니다 보니 사건들이 제법 많이 생겼고, 능력자들끼리 알력다툼도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일반인에게도 행패를 부리는 사건 사고가 많았다. 그런 이유로 제왕 길드는 민심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두 길드 간의 이러한 차이는 새로 유입되는 길드원의 수에서 차이를 보였다. 일반인들에게 인기가 높으면 자신을 상품화하여 몸값을 올리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어서 각성자들 사이에서는 이미지가 안 좋은 길드들은 꺼리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뒤집혀버렸다. 시민들의 외면 속에 제왕 길드는 점차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주민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이방인들에 대한 거취까지도 주민들은 철저히 입을 다물어버렸다.
결국, 구봉산 던전은 4천왕 길드에 넘어갔다. 하루에도 몇 번씩 던전 소유권이 바뀌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도움이 안 되는 일반인을 타박한 제왕길드는 시민들에게 철저히 무시당했고 그들에게 등을 돌려버렸다. 그래서 던전은 완전히 4천왕 길드의 소유가 되었다. 나는 이렇게 반문하였다. 시민들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사천왕 길드가 던전을 차지하였던가를.
4천왕 길드는 던전을 개장하기 전 관리자를 새로 뽑았다. 그리고 그 던전 관리자로 임호연이 임명되었다. 그 많은 사람을 인질로 사용했던 인물을 던전 관리자로 배치하다니 4천왕 길드, 미친 것이 아닌가.
물론 법적으로 그에게 죄를 물을 순 없겠지만 도의적인 책임이 있는 것 아닌가.
나는 그를 만나보려 하였지만 껄끄러운지 계속 나를 피하기만 하였다.
어느 날인가 내가 만나줄 것을 계속 종용했을 때, 그가 허락하여 나는 사무실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퇴근 시간이었는데 나를 둘러싸는 이가 있었다. 나는 또다시 더러운 일이 벌어질 줄 생각하였다.
"계속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주위의 어깨들이 나를 둘러쌌다. 임호연이 상황을 설명했다.
"길드와의 싸움도 싸움이지만 날범이 계속 던전을 휘젓고 다녀서 귀찮단 말입니다. 이런 시기에 괜히 깝치지 마세요, 다쳐도 원망할 곳도 없을 겁니다. 네?"
왜 날범 김건우가 던전을 휘젓는다는 말인가. 그나저나 나에게 압박을 가하려는 모양인데 어차피 내가 사무실에 들른 걸 모두 알고 있으니 막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싫다면 어쩔 겁니까. 아니 그쪽 땜에 죽은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 성수형의 죽음도 미리 막을 수 있지 않았습니까!"
내가 강력하게 나가자.
"그러는 댁은 왜 성수 씨를 말리지 않았나요. 두려워서요."
임호연이 그의 날렵한 몸으로 위협하며 비꼬듯 말하자 난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두렵고 나는 핫바지로 보입니까."
난 그래도 성수형을 위하느라 처절하게 말했다. 아무런 근거도 효력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래도 당신은 길드 소속이지 않습니까. 저는 아무 힘이 없는 청소부일 뿐입니다."
"그래서 뭘 원하는 겁니까."
"성수형의 몸값이라도 가족들에게 전해주세요, 딸이 많이 아프다는데."
"저희가 무슨 자선사업가라도 되는 줄 압니까."
"그래도 당신이라면 도움을 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나의 눈에서 눈물이 흘려내렸다.
"이 사람 내보내게."
임호연이 더이상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어깨들에게 말했다.
"제발, 한 번만이라도···."
나는 떼를 쓰듯 매달렸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호연은 자신의 집무실 문을 쾅 닫더니 쏙 들어가 버렸다.
나는 어깨들에게 들려 사무실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씨발, 내가 너희를 용서할 것 같아."
나는 사무실 밖에서 악을 쓰듯 소리쳤다. 어깨들이 다시는 올 생각 말라고 엄포를 놓으며 사라졌다.
"크흑, 너희는 사람도 아니야!"
"......"
나에게 새로운 목표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4천왕 길드의 행사에 데모의 기치를 들었다. 연이 닿는 힘있는 누군가가 내 말을 들어준다면 조금이나마 성수 형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덜어지리라.
***
나는 직원이므로 던전 출입증을 가지고 있다. f등급이지만 나도 능력자라면 능력자다. 자신의 능력을 고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석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 마정석을 한번 사용해 보았으면 하는 욕망이 들끓었다.
나는 몰래 던전에 들어와 원샷원킬의 사냥을 하였다. 사체가 좀 남겠지만 밤사이 몬스터들이 내가 죽인 괴물의 시체를 뜯어먹으리라 생각했다.
그동안 갈고닦은 솜씨가 제법이었다. 능력을 구현하는 속도도 늘었고 위치도 정밀해졌다.
정말이지 몬스터들이 왜 죽었는지에 관해 묻는다면 나 이외에 아무도 알 길이 없으리라.
그나저나 마정석은 왜 이리도 안 나오는 것인지. 낮이라면 제법 나올 법한 수량만큼의 사냥이 있었지만, 마정석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겁도 없이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갔다. 나는 체력과 힘, 마력 모두 일반인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 조금의 상처라도 입는다면 죽음을 벗어나긴 힘들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나의 가슴이 꿈틀대 겁도 없이 이렇게 던전 깊숙이 들어온 것이다.
가슴에 한방. 머리에 한방씩.
그러고나서야 기똥찬 마정석을 하나 얻었는데. 마정석을 흡수하려 손을 댔지만,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다.
나는 최하등급의 능력인 진공 청소능력을 지녔을 뿐이다. 능력치도 없고 더 이상의 성장 가능성도 없었다.
***
던전 안인데도 달빛이 훤하다.
저기 무언가 움직이고 있다.
휙휙 바람 소리를 내며 빛을 내뿜는다.
뭐라고! 검기? 정신이 번쩍 든다.
야트막한 언덕의 등성에, 달빛에 비친 인형들이 빛을 뿜으며 한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그 인형은 쫓기면서도 적의 목숨을 하나씩 제거하고 있지만, 워낙 적이 많아 그도 여차하면 비명횡사할 것 같았다.
천라지망이다. 무협지에서 많이 들어보았던 인의 장벽, 그가 나에게로 다가온다.
"피하시게."
"이쪽으로 오시면서요."
그는 지친 기색이 없었다.
"다른 길이 없다네."
"허, 참."
"저는 죽기 싫다고요"
"그런데 놀라지도 않는구먼."
"제 몸 좀 지켜주세요. 몇 놈 보낼게요."
"그래? 그럼 구경 좀 해야지."
"근데 누구신데요."
"나? 날범이라 부르던데."
"근데 왜 쫓기세요."
"글쎄, 그건 사연이 있다네."
"그럼 들려주시는 거로."
"숨 좀 돌릴 수 있다면 말해주지."
나는 덕분에 능력자들에게 내 실력을 선보일 볼 수 있었다. 얼마나 끔찍하고 잔인한 일이었는지. 여하간 나는 날범 김건우 씨에게서 기막힌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이렇게 많은 능력자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냥할 때조차 서로 거리를 두고 있었기에 이만한 사람들을 보는 것도 신기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을 쏟아부어 날범의 목숨을 거둘만한 일은 무엇인지 궁금했다.
나와 건우 씨는 그들에게 쫓기며 던전의 입구에서 멀어졌다.
산등성이로 우리를 몰고있는 것은 그들이었다. 수많은 죽음을 만들면서, 나는 이미 지쳐버렸다.
날범은 더 많은 전투를 치렀으니 더욱 지쳤을만도 하였다. 내가 그의 능력을 알 길이 없음에 그가 얼마나 피곤한지 알 길이 없었다.
날범은 길을 열고 나를 지키며 나아갔고 그러자니 발걸음도 늦춰졌다. 나는 모든 정력을 쥐어짜면서 한 방을 날려야 했다. 작지만 크고 뚜렷한 한방씩을.
그러나 우리의 체력은 영원하지 않았다. 날범은 이미 많은 상처를 입어야 했다. 그의 무술 실력이 아니었더라면 이미 저승 구경을 했을 것이다.
"이제 다 물리쳤나요?"
그들의 공격이 뜸해지자 산 중턱에서 난 날범에게 물었고 나의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긴 그에게 누군가의 공격이 날아들었다. 날범이 검을 휘둘렀지만, 공간을 가로질렀을 뿐.
"흐하하하. 드디어 날범을 잡는구나."
어딘가 숨어있다 나타난 야왕이 어둠의 손아귀를 이용하여 날범을 붙잡았던 것이다.
실체가 없으니 공격은 무위로 돌아가고 오히려 정신계에 작용하는 어둠의 손아귀에 걸려든 것이다.
역시 야왕은 야왕이었다. 밤의 제왕다운 행사였다.
"허허, 꼬맹이 너도 보는구나. 일거양득이야."
난 그의 가슴에 한 방을 날렸다.
"하하. 특이한 능력이군. 난 말이야 어둠에서는 어떤 것도 무섭지 않아. 네가 보낸 능력도 이 어둠이 있다면 금방 회복될 뿐이지. 괜히 두려워 상황을 살피기만 했네."
날범이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지만 붙잡히기 전에 손을 썼어야 했는데 너무 늦어버린 모양이다.
나는 다시 야왕의 심장에 진공의 힘을 펼쳤지만, 그는 금세 회복되어있었다.
그의 얼굴은 붉어졌다가 다시 얼굴빛을 되찾았다.
"네놈도 곧 저며주마, 기다려라."
그의 눈빛이 처음보다 매섭게 느껴졌다.
나는 공격 방향을 전환하며 혹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는 뇌를 건드렸다.
"억! 이것이 무에~야아."
"으아아악 으으"
잠시 야왕이 회복될 만큼의 시간이 지나고 그의 입에선 침이 줄줄 흐르고 있다.
"뭐. 뭐지. 왜, 왜 내가 여기에 있는 거지. 여긴 어디야. 나는 누구지. 나는 누구란 말인가?"
그렇다. 내가 머릿속에 진공을 일으켰고 뇌 손상을 입은 그는 어둠 속에서 회복되었지만 모든 기억을 잃고, 그가 익혀온 능력을 사용하는 법도 잊어버린 모양이다. 그가 좋아하는 어둠 속에서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그는 두려움에 뒷걸음질 치며 사라졌다. 물론 날범도 놓아주고 말이다.
"그만 쫓게나. 이젠 아이가 됐겠어. 자네의 능력 참 대단하구먼."
"저의 공격이 보이시나요."
"그냥 대강은 알 것도 같아. 마나의 이동처럼."
"그냥 놔둬도 될까요?"
"이미 다른 사람이 됐을 텐데, 쫓아 무엇하나."
그는 대범한 데가 있었다. 자신의 원수라면 삼대를 멸해도 시원찮을 판에 그는 손쓰기를 거두었다
"야왕 때문에 밤의 거리에 다시 피바람이 불겠어."
"왜요?"
"새로운 야왕이 탄생하게 되겠지."
그는 밤 세계의 변화를 그려보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제게 약속하신 이야기는요?"
"그래 무엇부터 이야기해야 하나."
그는 곰곰이 생각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수구초심
“우린 모두 1세대 능력자들이라네. 지금 길드의 장들 말이네. 다 내 동료였지.”
그는 한숨을 내쉬며 과거를 회상했다.
“그런데 서울의 한 던전에서였네.”
“예.”
“그곳에는 늙고 기력이 다한 마왕이 있었다네.”
“그런데요.”
“놀라지 않는구먼.”
나는 호기심에 그 다음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다.
“그 마왕은 어떻게 됐나요.”
“어떻게 된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가 중요하다네.”
우리는 던전을 빠져나오며 하던 이야기를 마저 나누었다.
“이계를 원상태로 돌려놓으려면, 다시 말해 지구를 원상태로 돌려놓으려면 마법의 돌이 있어야 한다고 말이네.”
“마법의 돌요.”
날범이 한숨을 내쉬며,
“그렇다네, 다만 또 다른 차원에 그 돌이 놓여 있다는 게 문제였지. 그 돌을 마왕의 제단에 올려두면 자신도 이 더러운 역사를 끝마칠 수 있다고 말했다네.”
“그럼 그 차원을 찾아 돌을 가져오면 되잖아요.”
“그렇지, 그게 문제였네, 그 차원을 찾는 것도 문제였고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도 문제였고, 돌아가기 싫은 사람들이 있잖은가.”
“아! 지금 부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
"거기에서 우리들은 사이가 벌어졌네. 각자 생각이 달랐던 거야."
"길드가 그렇게 탄생했겠군요."
“비슷하다고 해야겠지. 그리고 그들이 그 마왕을 제거했어, 더이상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지. 그리고 또 다른 차원도 마찬가지일세, 찾을 방도가 없었단 말이지. 내가 전 세계를 돌아다녔어도 말이네.”
“아! 그래서 신규 던전을 찾아 돌아다니시는 거군요.”
“그렇다네, 하지만 자네도 보아왔듯이 이젠 내 목에도 현상금이 걸린 모양이야.”
나는 크게 걱정을 하듯이,
“그래도 살아 계시잖아요.”
“그래, 그래서 살아있으니 살아있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을 또 해야되겠지. 자네도 조심하게. 자네의 약점은 훤히 들여다보이니 말일세. 믿을 만한 동료라도 만들던가.”
“예.”
나는 자신에 차 있다가 날범의 이야기에 풀이 죽었다.
“다시 봅세나.”
그는 그렇게 떠나갔다.
***
나는 뭔가 심사가 복잡해져서 철호를 집으로 불렀다.
"뭔데, 뭐가 울적해서 날 불렀냐."
나는 프라이팬에 올려놓은 삼겹살을 뒤집으며 진공청소 능력으로 연기를 빨아들였다. 그리고 철호의 잔에 술을 채우며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야, 이게 네가 말하던 능력이란 것이네."
"그래."
"그럼 능력도 얻었겠다, 딱 좋기만 할 텐데. 뭐땜에 인상을 쓰고 있다냐?"
"그러게 말이다. 능력을 얻었으니 한밑천 뽑아야겠고, 그러다보면 옛날로 돌아가기 싫어질 테고."
“그게 뭔 말인고, 솔직히 형한테 다 털어놔 봐라.”
“흥. 니가 언제부터 내 형이었다고,”
아마 당장은 능력이 없더라도 능력자가 될 기회가 주어진다면 모두 대박을 치기 위해 예전으로 돌아가길 거부할 것이다. 없는 사람도 그러할진대 가진 자라면 그것을 버리기 어디 쉽겠는가.
몬스터 웨이브야 잘 막아내면 그만이고, 모두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얼마나 많은 생명이 사라지고 또 얼마나 많은 차별이 이어질지.
처음부터 우리처럼 가난과 차별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렇기에 더 그 줄을 붙잡으려고 애쓸지도 모른다. 아니면 가난을 경험하고 다시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지도 모르고.
어쨌든 난 아니었다. 모든 것을 원상 복구시켜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야 내 친구도 그대로 나에게 남아 있겠지.
날범이 새삼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세상을 원래대로 돌려놓으려는 그야말로 만인이 우러러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나도 이렇게 고심하고 있는데도···. 최정상에 있는 사람이 그 지위를 다 털어버리다니. 그러나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극소수의 인물들뿐이다.
“내가 한턱낸다고 했잖냐.”
“에게, 능력자가 되고서 한턱 쏜다더니 고작 이거라고. 우리 기영이 다 죽었네.”
“야! 내가 또 산 적은 어딨다고, 나에게 죽음을 선고해,”
“차라리 내가 한턱 쏘는게 빠르겠다. 옷 입어, 밖에 나가서 한잔 더하게.”
“그럴까?”
나는 기쁨의 웃음을 지었다.
***
던전 내부의 일을 임호연이 모를 리 없었다. 여러 흔적들, 능력자들의 육신은 사라져도 그들이 사용하는 무기는 남아있다거나, 여기저기 다툼의 흔적들.
아마 나를 의심하지는 않겠지만 혹시라도 나를 감시할지도 모를 일이다. 던전 출입증의 카드기록이 남아 있다. 내가 일찍 퇴근하지 않은 그 날의 기록을.
***
나는 베티 일행과 함께하기로 마음먹었다. 진공으로 몬스터의 공격 흐름을 끊거나 방어를 위해 그 능력을 사용했지만 타 파티가 근처에 없을 때는 진정한 실력을 내보이기도 하였다.
베티 일행은 그런 나의 능력을 알게 되었지만 눈감아주었다. 내가 사람들을 잘 본 것이리라.
"왜 첨부터 그런 능력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베티가 입을 벌린 채로 내 능력을 칭송했다.
"다 이유가 있었겠지."
화영이 베티에게 눈치를 줬다.
난 날범이 떠나고 난 뒤 내 약점에 대해 헤아려보았다. 가진 능력은 출중한데 일반인과 다름없는 신체라. 난 돈이 모이면 방어구를 구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첫 번째 할일이요, 아니 두 번째다.
돈을 모아 성수형 가족에게 도움을 주어야지. 그래야 모든 일이 순리대로 돌아갈 것이다. 내가 이 능력을 얻은 것처럼.
“왜 아무런 말도 없어요. 사냥 끝나고 뭐할 건지 물었는데.”
“아, 네, 잠시 딴생각 좀 했나 봐요. 그런데 웬 회식이에요.”
“회식이 아니라 화영이 생일이라니까요.”
“아. 예.”
일을 마치고 근처의 주점에서 생일을 축하했고 그들에게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전해야 할지 말지를 망설였다.
‘아직은 아니겠지.’
다음날 나는 감각을 다듬는 연습부터 하기로 했다. 몇 번의 기습을 당했음에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으니 물가에 내놓은 목숨이었다.
“감각을 느끼려면 마나부터 느껴야 해요.”
베티가 오늘따라 의욕이 넘친다. 나를 가르치게 된지 며칠이 지난 뒤였다.
“마나를 느끼려면 호흡부터 바뀌어야 해요. 예 그렇게요.”
“흉부 호흡과 복식호흡, 피부호흡과 단전호흡 모두 사용대상에 따라 다르죠. 야수 스킬을 가지고 있다면 흉부 호흡. 마법사는 복식호흡, 파충류로 변신 가능한 이는 피부호흡, 그리고 나머지는 단전호흡이에요.”
“그렇군요”
호흡에도 이렇게 종류가 많을 줄이야.
“호흡을 통해서 이질적인 기운을 느껴봐요.”
“이렇게요.”
난 공기 중에 떠도는 이질적인 기운들, 몬스터가 내뿜는 무언의, 대상 없이 뿜어지는 거대한 적개심을 느낄 수 있었다. 포괄적이고도 광포한.
그러나 그중에서도 한줄기 다른 기운. 이것은 나를 대상으로 한, 정해진 살기였다.
나를 겨냥한.
“슈 욱”
거대한 화살이 나를 향하여 날아왔다. 먼 곳에서 저격하려 한 것이었다.
내가 기운을 읽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면 눈먼 화살에 당했을 터인데.
나는 진공의 힘을 화살이 쏘아진 방향에 터트려 빨아들였고 화살은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기영 씨 괜찮아요.”
“네, 덕분에 살았어요.”
다른 파티원들, 화영과 진우, 성국 등이 나를 둘러싸고 경계를 강화했다.
“무슨 일인가요.”
적은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난 덕분에 모든 사실을 밝혀야 할 시기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들도 나처럼 수없이 많은 고민을 할 것이지만,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나처럼 공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파티원들은 꽤 많은 시간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그들도 초보였고, 가진 이들이 아니라 각성을 했기에 남들 따라 하듯 따라온 경우였다.
그래도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이기에 고민에 고민을 더하였지만, 그러나 옳고 그름은 가릴줄 안다고 생각하였다.
예전과 별다를 것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사회는 목숨을 하찮게 여겼다. 자신의 목숨만 아니라면 힘의 논리에 따르는 모든 불합리한 것도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힘의 논리가 옳고 그름과는 별개의 것이지 않은가.
“의논을 해 봤는데 당신을 돕기로 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 잘 부탁드릴게요.”
“그럼, 뭐부터 할까요.”
방패맨 진우가 말하자,
“저희가 도움이 될까요.”
화영이 자신 없이 말한다. 그러자 이미 힘을 보태기로 했는데 왜 그리 용기가 없냐며 나무라는 것은 단창을 든 성국이었다.
“아직은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어요. 힘을 기를 때까진 사냥을 계속해야죠.”
베티가 다행이라며 웃으며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 구봉산 던전을 떠나지 못했다 아직 그럴만한 깜냥이 안 되었기 때문에 조금 더 이곳에서 사냥을 지속하기로 하였고 나는 팀원들이 마정석을 흡수하는 것을 도우며 실력이 조금이라도 늘기를 바라였다.
***
나는 성수형의 가족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금품을 전달하였고, 그러는 동안 시간은 흘러 이곳에도 변화가 일었다. 야왕인가 하는 밤의 식구들에게서였다.
제왕 길드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늑대인간 강지호가 야왕이 가졌던 어둠의 세계를 흡수하였고 그와 야합환 제왕길드가 4천왕 길드와의 2차전을 벌인 것이다.
임호연과 4천왕 길드의 임원들이 수시로 던전을 살피었고 호연은 이곳의 능력자들에게 좋은 조건으로 용병 일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우리에게도 차례가 왔지만 날 공격한 건 분명 호연일 거라 예상했기에 명백히 거절하였는데 그에 우리를 보는 눈은 더 매서워졌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싸움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곳을 벗어나는 게 어때요.”
화영이 순진하게 말하자.
“어디로 피해야 하죠.”
베티가 길드가 놓인 구역을 생각해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이 영역 싸움에 동참할 필요는 없었다.
“우리를 아는 사람을 빼면 우리가 누구 편인지 알 수 없을 겁니다. 서로의 무게를 맞춰주면 좋겠는데···.”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베티가 바로 내 말을 알아들었다. 우리는 이쪽저쪽 가리지 않고 박쥐가 되어 세력의 균형을 동일하게 맞추기로 하였다. 그래야 우리의 싸움도 편해지기 때문이었다. 아마 다른 곳을 가더라도 기왕에 찍힌 몸이라 건우씨처럼 주목받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이곳 던전만이 아니라 강원도 전역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마지막에 이르렀다. 이곳 구봉산 던전에서, 늑대인간 일행과 내 파티 그리고 임호연 일행 그렇게 악연으로 이어진 사람들로 말이다.
가는 날이 장날
이제 남은 것은,
원거리 능력자 둘에 가속 능력을 지닌 임호연.
늑대인간 강지호와 골렘을 다루는 부하 하나.
그리고 우리.
나에게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골렘은 골칫거리였다. 생명체가 아닌 것은 나의 능력과 상극이니 말이다. 운동능력만을 늦추었을 뿐 전혀 상처도 입지 않았다.
원거리 능력자들이 지원하고 가속 능력으로 우리의 체력을 깎는 임호연도 마찬가지, 나에게 들러붙어 공격을 하고 있는 임호연 때문에 고정된 공간을 점할 순 있어도 움직이는 물체를 빠르게 점하기에는 나에게 약점이 있었으므로 골렘을 떠맡은 동료들에게 난 크게 도움을 주질 못하였다. 원거리 능력자들이 날리는 파이어볼이나 아이스에로우등을 진공으로 돌려보낼 뿐, 난 완전히 임호연에게 붙잡혀 있었다.
날범이 내 약점이 훤히 보인다더니 이렇듯 외나무다리에서 둘 모두를 만나게 되었다. 내가 극복해야만 할 내 허점들이었다.
“별 볼 일 없군요,”
임호연이 치고 빠지며 나에게 상처를 남긴다. 체구가 왜소하고 단검을 들었기에 단번에 나에게 큰 상처를 주긴 어려웠지만 이렇게 가다간 모두 죽을 것이었다.
화영이 나에게 힐을 해주며 다른 동료에게도 버프를 날린다.
베티는 화염의 손길이 화염의 장벽으로 성장하여 불의 장벽으로 늑대인간을 견제하고 있었다. 나머지 인원들은 골렘과 맞상대였다.
죽을 맛이었다. 전혀 호연의 공격을 예측할 수 없기에 난 수비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재차 상진에게 덫을 놓았던 것처럼 그가 다가올 장소를 하나하나 점하였다. 그가 공격을 가해오자 나는 덫의 위치에 있는 진공을 하나하나 터트렸고 그가 피하여 움직이면 그렇게 또 덫을 놓아 나무가 많은 장소로 그를 조금씩 몰아갔다.
그는 내가 하는 짓을 보고 자신의 움직임을 제한하려고 한다며 코웃음 쳤지만 나는 전혀 미동도 하지 않고 작전대로 밀고 나갔다.
다시 그가 공격했을 때 나는 페이크를 섞어 진공을 일으켰다.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호연 앞으로 부러진 나뭇가지를 진공으로 끌어 당겨 그의 몸에 박히게 했다. 내가 계획한 것은 직접 진공으로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진공을 이용하여 나뭇가지와 돌등으로 그의 움직임을 묶고 부러진 나뭇가지를 이동시켜 화살처럼 사용한 것이었다. 나의 변칙 공격에 호연은 상처를 입기 시작했다. 다리에 박힌 나뭇가지로 피가 흘러나왔다. 점점 그는 느려졌고 한순간 내 공격이 그에게 적중하기에 이르렀다.
“하하, 이런 것이었군, 죽음이란 것이.”
호연의 얼굴에 미소가 빠져나간다. 그는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나는 빠르게 나머지 인원을 처리하고 파티원들에게 돌아왔다. 다행히 아직 아무도 죽지 않았다. 그동안 사냥터에서 놀고만 있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늑대인간의 뒤로 접근하여 죽음의 진공을 선보였고 파티원들과 함께 차근차근 골렘을 무너뜨렸다.
그후로 우리는 강원도에서 자취를 감췄다. 4천왕 길드와 제왕 길드 모두 우리의 적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쉴새 없이 서로 싸우고 있느라 우리를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우리의 위치는 대형 길드들이 자리하고 있는 수도권, 수도였다.
***
몬스터 웨이브가 벌어졌다. 우려해 마지않던 일이 벌어졌다.
대형 길드들이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고 떠벌렸던 언론들도 이제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남산, 용산, 일원동, 백련산과 신촌 일대의 던전들에서 무작위적으로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왔다. 수도권의 3대 거대길드인 천마 길드와 맹호 길드, 잠깐 발을 걸치고 있는 4천왕 길드까지(단군 길드는 전국구의 길드로 여기에서 제외했다), 모든 길드원들이 몬스터들을 막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그러나 몬스터들에게 밀려 도시는 폐허가 되었고 점차 방어진을 뒤로 물리고 있었다. 이렇게 된 데는 거대길드의 책임이 컸다. 맹호 길드가 국가의 위세를 등에 지고 수도권 던전을 좌지우지하려 들자, 안 그래도 두 길드(맹호 길드, 천마 길드)에 밀려 강원도로 눈길을 돌리던 4천왕 길드가 천마 길드와 손을 잡고 국가의 비호를 받던 맹호 길드에 대항, 소모전을 지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4천왕 길드는 그에 강원도로 밀려난 상태고 말이다.
이렇듯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상태에서 몬스터 웨이브가 벌어졌으니 가난하고 약한 일반 시민들은 또 어쩌란 말인가. 집도 잃고 가족도 잃고 모두 흩어져서 거리를 떠돌 텐데. 그래도 나는 부모님이 해외에 계신 까닭에 가족 걱정을 하지 않았지만, 동료들과 많은 사람이 친지의 안위를 몰라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아마 날범 김건우도 몬스터들과 대치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한팔 거들고자 빠르게 불암산 던전 쪽으로 이동하였지만 맹호 길드에 의해 4천왕 길드로 의심받아 억류되고 말았다.
“아 놔! 이걸 모두 처리할 수도 없고.”
내가 맹호 길드의 행사에 성질부리는 사이,
“혹 맹호 길드에 아는 사람 없나요.”
이건 마음씨 여린 화영 씨의 말.
“아, 씨. 왜 잡는 건데요. 우리도 몬스터와 싸우게 좀 놔줘요."
이건 정의감 넘치고 괄괄한 베티.
이참에 좀 쉬어가자는 성국도 있었고, 신중한 편인 방패맨 진우도 있었다.
우리는 기약 없이 잡혀있어야 했는데, 신원 조사하여 빨리 풀어주고 아니라면 음식이라도 넣어주길 바랬는데 일손이 달린 그들이 우리에게 신경 쓸 여력이나 있었겠는가.
우린 군인들과 맹호 길드원의 감시 속에 비밀지하 감옥에 붙잡혀 있어야 했다. 잡혀있는 동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물어보았지만, 대답은 없었다.
“저기요, 물이라도 한 잔 주시고요, 밖의 상황은 어찌 되는지 알 수 없나요?”
“물이라면 군인들이 가져다줄 거요. 그리고 밖의 상황은 알아 뭐하게요. 도망이라도 치고 싶어서?“
숫제 도망자 취급이다. 아 열이 뻗치게.
그러나 하루가 가도 이틀이 가도 우리를 풀어주지 않았다. 혹 이들이 다른 생각을 하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음식도 겨우 허기를 면할 정도로 주면서 우리가 기진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닌지. 혹 내 능력을 빼앗으려는 게 아닌지 의심도 들었다.
'능력자 중에는 남의 능력을 가로채는 재주도 있다고 들었는데···.'
”이상하지 않나요."
베티가 주변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입을 열었다.
"그러게요. 군인들 목소리도 들리질 않네요."
우리가 의문을 품고 있을 때, 한 군인이 우리가 있는 지하 감옥으로 내려와 씩 웃더니 총을 난사한다.
'제길, 이건 또 뭔데.'
나는 전면에 파티원들을 가리는 진공을 열었고 난사된 총알이 진공 속으로 사라졌다.
진우가 방패로 앞을 가렸는데 내가 진공을 열자 어색하게 웃었다.
"앞으론 미리 말씀해주세요."
그럴 시간이 없다는 건 알았지만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나저나 저 군인은 사람이 아닌 모양인데, 총의 반동에도 불구하고 큰 움직임도 없는 것 같고, 사람을 처단하면서도 소름 돋는 웃음까지.
"흐흐흐."
간혹 던전에서 보게 된다는 상위 몬스터, 트리니티.
괴물의 힘과 섭취한 동물로의 변신능력에 지능까지. 세 가지가 뛰어나기로 소문난 몬스터다. 아마 아까의 군인도 트리니티에게 잡아먹혔나 보다.
이젠 몬스터뿐만 아니라 인간마저도, 아니 아는 지인마저도 조심해야할 상황이 온 것인지 모른다. 트리니티가 인간 무리에 섞여든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트리니티는 그 수가 많다. 홀로 움직이지만, 수가 많은 종이었다. 반면 다른 상위의 몬스터들은 홀로 사냥하지만, 수는 많지 않았다.
많은 무리가 인간사회에 섞여든다면 그들을 가려내는 일은 매우 곤란한 일일 것이다. 무엇으로 그들과 맞서야 하는지 생각조차 아찔하기만 하다. 그렇다고 트리니티가 변신능력 외엔 아무 능력이 없냐면 그것도 아니다. 지금처럼,
"하하. 재밌다."
트리니티가 탄환이 남지 않은 총을 바닥에 버리더니 양손을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어 우리를 공격한다. 그리고 점차 군인의 몸에 익숙해 지더니 지능도 저 군인만큼 성장, 군인의 움직임에, 군인의 전투력까지. 유도와 합기도에 검도기술을 사용하는 트리니티를 성국과 진우가 막고 있었지만 점차 밀려나기 시작했다.
트리니티는 지능이 오르기 전에 끝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변신한 사람의 기술을 다룰 수 있게 된다. 나는 진공으로 녀석의 머리와 심장을 두들겼다.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능도 그 전보다 떨어지고 능력도 축소되었으나 다시 트리니티는 성장할 것이었다.
"크크 네가 공격했다. 돌려준다."
트리니티가 방어를 도외시하며 나만을 노리고 따라온다. 동료들이 방어의 진을 형성하며 나를 가려 주었다.
"끼기끽."
방패가 놈의 손가락에 긁히는 소리로 요란했다. 소름이 돋았다. 방패가 손칼에 의해 갈라진다. 그러나 팔뚝이 나의 공격을 받아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원래 일격필살을 목적으로 심장이나 머리를 노렸지만, 이 녀석은 전투력을 바닥으로 만들어서 불태워 죽여야 한다.
베티가 화염의 장벽 대신 화염의 손길을 펼쳐서 떨어져 나간 녀석의 팔을 불태워버렸다. 그러고도 장장 30분이나 더 싸움이 진행되었다.
나 혼자만이라면 녀석을 당해낼 수 있었을까? 그런데 이런 녀석이 인간의 무리에 합류했다면 어떻게 될까.
녀석은 불에 약하다. 인간보다 더 불을 무서워한다.
체온이 다른 걸까.
빨리 길드의 높으신 분을 만나 이런 사태를 야기한 책임에 대해 묻고 모든 인간의 체온을 검사해야 한다고 건의해야 겠다. 한시가 급하다.
그런데 맹호 길드도 날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은데···.
천마 이필성
우리는 지하 감옥에서 벗어나 던전으로 달렸으나 던전 웨이브는 이미 소강상태였고, 다수의 트리니티와 몬스터들은 이곳을 빠져나간 상태였다. 던전을 지키는 사람들도 어찌 되었는지 모두 사라진 상태였고 사실상 손발을 놓고 있는 실정이었다.
우리는 트리니티가 이동할만한 장소를 살피며 둘러보았는데 도심 속 지하도로 무언가 이동한 흔적이 있어 우리도 그쪽으로 움직였다.
상계역 1번 출구로 들어갔는데 그때 무언가 터지는 듯한 소리,
사람들이 지하도에 숨어있다가 출구로 마구 빠져나왔다. 우리는 사람들과 부딪히며 몸을 가누기 위해 애써야 했다. 곧 지하도에서 매캐한 연기가 나며 숨쉬기 어려워졌다. 무언가 폭발물이 터진 것이다. 다른 역들로 퍼지기 전에 원인을 판명해서 해결해야만 했다.
“우리도 나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방패맨 진우가 신중히 말한다. 그의 생각엔 안전이 최선이였다. 다음이 타인의 안위였고.
“좀만 살피다가 위험하다 싶으면 밖으로 나가죠.”
베티가 호기심이 이는지 나에게 의견을 묻는다. 나도 한번 확인하고 싶었던 터라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우리는 계단을 따라 걸어 내려갔다. 중형견만큼 되는 크기의 몬스터들이 지하도를 활보한다.
랫맨이다. 외양이 쥐와 비슷해서 지어진 이름이 아니었다. 습성 때문이었다. 그들은 음습한 곳을 좋아했다. 그곳에서 서식하며 번식을 했는데 그 수가 빨리 늘었다.
그들의 몸은 각 속성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화염과 전기등의 속성들을 지닌 랫맨들이 화재를 일으키며 사태를 키우고 있었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전에 제거합시다.”
성국이 단창을 움켜쥐고 뛰어들었다. 나도 따라 화염의 랫맨에게 진공을 먹여 주었으나 내가 할 일은 따로 있음을 알게 되었다. 진공의 힘을 조절하여 불을 끄고 연기를 빨아들이는데 초점을 두는 것이 더 큰 참사를 막을 수 있는 길이라는 걸 알게되었다.
더 내려가자 방독면을 쓴 사람 몇몇이 소화기를 들고 불을 끄고 있는 것이 보였고, 몇몇 능력자들은 빙결의 랫맨을 사냥하며 화재의 열기를 식히고 있었다.
“도대체 길드들은 뭘 하고 있는 거야.”
내가 불만에 차서 말하자. 불을 끄고 있던 한 사람이 말하길,
“모르고 있는 거야. 그들은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몸을 피한지 오랜데.”
싸움이 결국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평안할 때는 많은 수의 길드원을 바탕으로 사람들에게서 돈을 약탈하다시피 벌어들이더니 위험에 처하자 병력을 유지하기 위해 몸을 사리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맹호 길드만 그런 겁니까.”
“아니 왜 맹호 길드를 걸고넘어지나. 그들은 군경과 함께하니 오히려 도움이 되는 사람들이고 관할이 아닌 천마 길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 잡놈의 4천왕 길드는 모두 도망갔다네.”
난 4천왕 길드의 길드 장 얼굴을 구경하고 싶었다. 얼마나 잘난 놈이기에 이러한 사태를 방치하고 있는지.
우리는 화재를 진압하고 있는 이들을 도우며 바쁘게 움직였다. 그중 내가 가장 힘들었다고 생각한다. 소화 능력이 있었으므로,
아니, 대형 진공청소기를 119에 돌려야 하나라는 엉뚱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렇게 지하도를 따라 이동하면서 나는 좀 더 윗길의 능력자들을 만나기를 바랐다.
머릿속은 이미 도망친 트리니티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하였기 때문이다.
***
우리는 폐쇄된 지하철로를 따라 서울의 중심부로 이동하였다. 몬스터들을 처리하면서 이동하기에 속도는 나지 않았다. 이대로 가면 능력자 무리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를 생각하며 무작정 걸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저 멀리 도심에서 불꽃이 피어오른다.
수유역.
커다란 진동과 함께 강북센터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몸에 저승의 불꽃을 두른 데몬울프 몇 마리가 거리를 부수고 있고 그 주위를 작은 몬스터들이 따르고 있었다. 길드원들이 그 작은 몬스터들을 잡기 위해 파티를 이루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 작은 몬스터들은 우리에게도 달려들었는데 우리가 알기로 굴이라 부르는 생명체였다. 시체를 파먹고 사는.
우리도 곧 대형을 갖추었다.
그때 저 멀리 데몬울프 하나와 굴 여러 마리를 동시에 상대하는 사람이 보였다. 다중 캐스팅을 발휘하여 몬스터들을 몰아세웠다. 우리는 그에게로 난 길을 따라 몬스터들을 처리하며 다가갔다.
“저 사람 누구죠?”
난 길거리의 구경꾼들 중 아무나 붙잡고 그가 누구인지를 물어보았다. 구경꾼의 얼굴도 섬광이 터질 때마다 번쩍거렸다.
“저 사람이 누군지 모른단 말이오.”
“아, 예.”
조금 쑥스럽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우리 일행 중 그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베티가 그나마 누구일 거라 짐작하는 것 같았다.
“저 사람 이래 봬도 이필성이라카지요.”
아! 천마 이필성.
처음 던전이 열렸을 때 각성조차 하지 않은 몸으로 홀로 던전에 들어갔다는 간 큰 남자. 던전이 어떤 곳인지를 세상에 처음 알린 남자였다.
그가 몬스터들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고 있다. 그의 손에서는 각종 마법이 피었다가 사라지고, 1초에도 몇 번인가의 신기한 마법이 난사되었다.
마법 사용자답게 베티가 넋을 잃고 바라다본다.
“우와 동시에 몇 번의 캐스팅을 한 거야.”
우린 영문을 몰랐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화려했다. 그러나 데몬울프는 맞으면 맞는 대로 괴성을 질렀지만 좀처럼 타격을 입지는 않은 것 같았다. 다행히도 굴들은 맞자마자 유명을 달리하고있었지만.
우리도 곧 실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데몬울프를 잡고 싶었지만, 굴들 때문에 다가설 수 없어서 굴들에게 내 능력을 펼치기 시작했다. 아쉬웠다. 이필성, 그 옆에서 내 능력을 발휘한다면 아마 빠르게 데몬울프를 사냥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생각과 실제는 다른 일이다. 아마 데몬울프는 빠른 재생능력을 갖추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수없이 많은 마법에 적중당했음에도 무사한 걸 보면 말이다.
우린 빠르게 굴들을 정리하고는, 이필성 근처로 다가가 난 데몬울프 뒤쪽의 건물을 진공으로 끌어당겨 무너뜨렸다. 데몬울프가 그 건물잔해에 깔렸다. 이필성이 날 바라보자 난 '씩' 하고 웃어주었다. 물론 이 정도론 데몬울프가 죽지는 않았을 테지만 나를 어필하기에는 이 정도로 충분했다.
“그래, 나를 부른 이유는.”
이필성은 나를 만나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그 이유를 물었다.
“불암산 던전에서 트리니티들이 유출된 것을 알고 있나요.”
“거긴 4천왕 길드와 맹호 길드가 맡고 있을 텐데.”
“예. 그렇죠, 그런데 둘이 서로 싸우는 통에 모두 허사가 되었죠.”
“그렇군, 어쩔 텐가.”
“예? 뭐가요.”
“뭔가 대책을 세우고자 나를 찾아온 것 아닌가.”
“그런데요.”
“책임자를 만나러 가는 길인데 같이 가지 않겠나.”
“제가요.”
“싫은가.”
“아뇨 함께 가시죠.”
나는 졸지에 책임자라는 사람을 만나러 가게 생겼다. 난 팀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천마를 따라나섰다. 이필성은 차량에 몸을 싣자 눈을 감았다. 나는 그를 따라 차에 올랐지만, 책임자라는 말에 이필성 씨보다 더 높은 사람이 있나 좀처럼 두근거려 잠이 오질 않았다. 이곳까지 오는 도중 수많은 싸움을 하였던 터라 지쳐 잠시 쉬기를 바랐지만 말이다.
얼마나 달렸던가. 이필성과 나는 한식 요정에 다다랐다. 경호 요원들이 우리의 신분을 확인했다.
“이리로 오시죠.”
우리는 병사의 안내를 받으며 천마와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방밖에 장성이 지키고 있었는데, 거기에서 함께 서 있던 포청수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다시 포청수의 안내를 받아 방 안으로 들어갔다. 포청수가 방안의 인물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이필성이 당도했음을 알렸다.
“애쓰셨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럼, 이야기 나누십시오.”
포청수가 인사하고 옆에 대기하고 서 있었다. 알고 보니 이 사람은 국방부 장관인 안국현 씨였다.
천마 이필성이 마주 앉자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상황은 어떠한지.”
“대부분의 몬스터는 처리된 모양이나 트리니티가 빠져나왔다 합니다."
안국현이 포청수를 바라보자, 포청수가 트리니티에 대해 설명했다.
"그럼, 정말 큰 일인데요. 사형수는 뭐 하고 있나요."
"맹호 길드 말씀이시지요. 그는 아직 동북방면에 출연한 제호라는 몬스터들을 처리 중일 겁니다."
제호는 아마 가고일과 비슷한 유형의 몬스터로 나는 알고 있었다.
"천마님,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을는지요."
"우선 수도권 일대를 봉쇄시키고 한 명씩 조사해야 합니다."
"저. 체온을 재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이분은 누군가요."
"예, 제게 트리니티가 유출되었다고 처음 알려준 분입니다."
나는 불암산 던전에서의 일을 비교적 소상히 알리었다. 맹호 길드와 4천왕 길드의 다툼까지도. 그러자 포청수마저 나를 소개하더니 틀림없으리라 보장한다.
"그럼 한번 믿어봅시다."
고뇌하는 날범
맹호 길드의 길드장인 사형수는 정적이 많은 사람이다. 군부와의 결탁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유에서라도 적이 많은 인물이다.
그가 오늘 국방부 장관을 만나러 오는 길에 요정에서 나오는 나와 부딪쳤다. 나는 뒤로 자빠질 뻔했는데 천마가 나를 붙잡는다.
"조심해야지,"
"아, 예. 고맙습니다."
사형수와 이필성의 눈동자가 잠시 허공중에 부딪혔다. 그렇게 느끼는 참이었다.
"도둑질은 나쁜 것이여."
이필성이 말하자.
"쳇, 영감쟁이."
사형수가 말한다.
난 영문도 모르고 있었는데 이제는 알 것 같다. 그는 나를 가두고 트라니티를 풀어주어 내 능력을 엿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와 부딪친 날 그는 내 능력을 훔쳐 갔다. 난 그 사실을 금방 알아채게 되었는데, 내 능력이 사라졌던 것이다. 그리고 이필성도 도둑놈이라 칭한 것을 보면 놈이 분명하다.
나는 이제 다 산 것 같은 느낌이었으나 사실 난 능력자가 없는 세상을 꿈꾸었던 사람이다. 그냥 홀가분해졌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파티원들이 난리가 났는데 이필성 씨를 만나야겠다고 아우성이었다. 난 이제 이들과의 결별도 생각 중이다. 난 이제 아무런 능력이 없었으니까. 정말 남의 능력을 강탈하는 능력자도 있구나 라고 생각할 수밖에.
동료들을 뿌리치고 거리를 걷고 있었는데 내가 말한 대로 능력자들이 사람들의 체온을 재고 있었다. 나는 미소지으며 자리를 떠나려 했다.
"야! 이봐 체온은 재고 가야지."
"아, 예 죄송합니다."
"이 새끼가 눈 안 깔아."
"죄송합니다."
능력은 사라졌고, 예전과 다른 느낌이다. 왜 이렇게 허전한지.
"이 새끼가 사람 두 번일 시키고 있어. 입 다물어. 바빠죽겠는데."
나는 주먹으로 한 대 처맞아야 했다. ‘그래 이게 일반인에게 일어나는 일의 다반사야.’ 난 억울함을 참으며 체온을 재기 위해 열화상 카메라에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눈물이 흘렀다. 내가 제안한 일들이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데 하나 즐겁거나 뿌듯하지 않았다. 허탈했다. 체온을 잃은 트리니티라도 된 것마냥 절망했다. 내 것이었는데 내 것이 되지 못했던 떠나간 많은 욕망들에 대하여 참회하며 나는 다시 이런 세상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것이 다음날 나의 능력이 돌아왔다.
뉴스를 보니 사형수가 암살을 당했다고 한다. 정적이 많은 사람이 신체 능력이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나의 스킬을 훔쳐 갔으니. 더구나 적응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평시와 다름없이 행동했으니 그의 죽음은 당연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맹호 길드의 이인자이자 사형수의 동생인 사형철이 길드의 장으로 올랐다. 그는 형의 사인으로 4천왕 길드의 암살자 요한을 지목했고, 그 후 두 길드 간의 대립은 절정에 이르렀다.
나 또한 억울함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그리 녹록지 못했다.
두 길드 간의 대립으로 몬스터 토벌에 공백이 생겼고 그 공백을 천마 길드가 겨우 막아내고 있었지만, 트리니티 사냥은 지지부진하기만 했다. 그리고 발견하더라도 능력자들을 물리치고 다시 인간의 숲으로 사라지곤 하였다.
정치인이란 배후를 손에 넣었는지 시민들에 대한 무분별한 검사에 대해 정계에서 반발이 있었고, 트리니티는 오히려 일반인과 능력자의 사이를 이간질하며 폭동을 야기시켰다.
오히려 성인만큼 성장한 지능으로 능력자들을 노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에게 반각성자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접촉한 이가 있었다. 날범이라는 이야기에 난 그들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지만 함정이었다.
날범은 언제나 홀로 움직이기에.
우리는 그들이 불러낸 장소(폐허가 된 공장터였다)로 나갔다.
내 생각으론 정치인으로 보이는 트리니티가 일반인과 몇몇 능력자들, 세 명의 트리니티를 거느리고 우리를 환영나온 것이었다.
“우리를 도와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어떤가.”
우두머리 트리니티가 말한다.
“그럼 이런 자릴 만들지 말았어야지.”
“우린 서로 가는 길이 같지 않나.”
“물론 다르지. 난 폭동과 폭력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진 않아. 비폭력으로 바꿀 수 있는데도 힘써보지 않는다면 후회가 남겠지.”
“고지식한 날범의 이야기를 따라 하는군.”
“날범을 어떻게 했나.”
“우리라고 그를 어찌할 수 있겠나. 다만 그만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란 말이지.”
“그렇담 그의 얘기가 사실이로군.”
“그렇다 해도 실행할 수 없는 일이야. 지능 있는 다른 몬스터 사이에서도 나온 얘기지만 또 다른 세계란 없어.”
“그럼 날범이 혼자 꿈을 꾸고 있단 말인가? 믿을 수 없어.”
“말이 안 통하는 인물이로군.”
우두머리의 신호가 떨어지자 나머지 무리가 우리를 둘러쌌고, 우두머리는 수행원과 차를 타고 사라졌다.
트리니티 셋과 능력자 둘이 우리를 잡기 위해 이곳에 남겨졌다. 난 빠른 정리를 위해 능력자들에게 내 실력을 선보였으나 마력장인가 뭔가에 의해 진공이 튕겨져 나왔다. 능력자 둘은 마력장을 쓰는 사람들로 보였다. 그 둘이 트리니티를 지원하고 있었다.
성국과 진수의 몸은 이미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화영이 매번 힐을 해줘서 목숨만은 붙어있었고, 그나마 쿨타임에서 돌아온 베티의 화염의 장벽 덕택에 시간을 벌고 있었다. 불을 무서워하는 트리니티의 본능 때문이었다.
난 어차피 이렇게 된 것 능력자들부터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직접 공격이 안 되면 간접공격으로.
“베티님 좀만 버텨주세요.”
“예, 그렇지만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해요.”
난 진공을 주변의 환경으로 돌리었다. 장비들도 있었고 나무 박스와 못, 대형 선반들을 무너뜨리며 능력자들에게 그 힘을 내보였다.
상황이 이렇게 변할 줄 몰랐던 것일까. 능력자들이 마력장을 펼쳤지만, 물리적인 힘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 그들의 몸은 나뭇조각, 못 등으로 고슴도치가 되어 선반에 깔려 쓰러졌다.
'이제야 트리니티와 제대로 붙어보겠군.'
“이것 한번 받아봐라.”
트리니티의 손발이 잘려나갔다.
"이제야 제대로 먹히는군."
난 어깨를 돌리며 진득한 미소를 지었다.
이젠 수도는 천마 길드 차지가 되었다.
폭동을 일으키려던 우두머리 트리니티도 결국 천마 길드의 이필성이 국회로 쳐들어가면서 일단락되었다. 능력자들의 신임을 얻은 천마 길드가 맹호 길드와 4천왕 길드를 누르고 수도를 차지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구심점을 잃은 일반인들도 더는 차별을 참지 못하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는데 그 진압이 쉽지 않았다. 유혈 충돌이 벌어지고 사상자들은 늘어갔다.
능력자와 일반인 사이의 갈등이 눈에 띄게 격화되자 이를 중재하기 위해 날범이 나섰다. 날범은 능력자임에도 일반인들을 감싸주었는데, 그는 모진 욕을 다 들어가며 둘 사이를 중재했다.
왜 그가 험한 욕을 들어가며 중재에 나섰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고 누군가는 그 악에 받친 목소리를 들어줘야 했으며 누군가는 일반인이 보기에 높으신 분 중 한 명이 희생양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날범은 그 모두를 이해하며 서로의 손 잡기를 바랐기에 희생을 받아들이려 했는지 모르겠다.
다수에 대한 살인과 폭력에 대한 수뇌의 혐의로
다시 말해 그의 목숨으로 대신하고자 하였다.
본보기이자 능력자들의 무분별한 행동의 희생양이 될 그의 마지막 날의 전날 밤 나는 그와 술자리를 가졌다. 거기에서 난 내 능력을 그에게 선보였고. 그는 크게 웃으며 많이 성장했다고 기뻐했다.
f등급.
아무도 안쳐주는 일반인이나 다름없던 f등급.
사람의 입과 항문으로 통하는 길은 열린 공간일까 닫힌 공간일까를 생각하며 이 순간에 떠오르는 공부가 있었다. 나에게 모든 것을 가져다준, 우리가 너무 고정관념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날범에 말했다. 그가 내일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내가 그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해주겠다고.
“그게 뭔 소린가?”
그가 놀라서 소리쳤다.
“말씀 그대로 신세계요”
그는 앞으로의 일을 떠올리며 괴로워했다. 그가 만약 죽음을 물리치고 나를 따라 사라진다면 그를 비난하고 욕하는 사람들도 많아질 것이다. 약속조차 저버린 비열한 인간이라고. 태어나 한 번도 그런 소리를 들어보지 않았을 텐데, 그냥 죽음을 택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날범이었다.
“그렇담 날 데려가 주게.”
“내일은 어떻게 하려고요.”
“그냥 나를 욕하라 그러지 뭐.”
“크큭, 그게 단가요.”
“욕먹을 사람도 필요한 것일세. 오히려 날 두고 욕을 하면서 기뻐하겠지. 인간의 본성 어쩌고 하면서 말일세.”
“그럴까요?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뵙지요.”
“그러게나.”
나는 준비를 위해 떠났고, 그는 그곳에 남아 술잔을 입으로 기울이고 있었다.
신세계
다음 날 아침 난 이필성에게 도와달라며 요청을 했고, 동료에게도 나와 함께 할 것인지를 다시 물었다. 모두 동의하여 날범 김건우와 천마 이필성 그리고 동료들이 함께 모였는데, 그러나 우리를 둘러싼 또 다른 헌터 무리들, 그 뒤를 잇는 이필성의 말 한마디.
“자네는 사람을 너무 잘 믿는 게 흠이로군.”
왜 이런 말을 하는가.
그렇다. 난 왜 이렇게 세상 물정 모르고 단순하게 사는지 모르겠다.
맹호 길드의 사형수가 암살을 당한 것, 4천왕 길드의 요셉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그 후로 득을 본 것은 천마 길드의 이필성이다. 그렇다면 사형수의 죽음은 요셉이 아니라 이필성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득을 노린 사람에게 그가 가진 모든 걸 무효로 만들 방법이 있다고 말한 것과 다름없으니 그가 나의 뜻을 순순히 따라줄 것인가. 참 못난 생각을 했다. 동료와 날범에게 위험을 초래했다.
“그 암살, 당신이 사주했군.”
“당연한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자네의 능력이 강탈당할 일도 없었을 것 아니겠나.”
“제기랄.”
우리는 싸움의 방정식을 잘 모른다. 익숙한 이필성이야말로 승리의 해법을 잘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날범 김건우가 있다.
“자네, 아직 욕심을 버리지 못했나 보군.”
“형님은 여전히 정의를 부르짖고 계시는군요. 신은 없는데도 말입니다.”
“신에게 잘 보일 생각이란 없네. 나에게 떳떳해지고 싶어서지.”
“잠시 자신을 용서하면 이 모든 영화가 널려 있는데도요. 그리고 신도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서로를 용서하라고.”
“그건 타인을 칭하는 말일세.”
“그럼 자신도 용서할 수 없단 말씀입니까.”
이필성이 잔혹한 미소를 지으며 묻는다.
“그건 자네의 착각일세.”
“당신의 그 고집 하나로 이들이 죽어도 그렇단 말씀이겠지요.”
“그게 이들과 무슨 상관이 있나.”
“역시, 벌주를 드시는군요. 예나 지금이나.”
“자네도 이기심만 더 늘었군그래.”
“잠시, 잠깐만요. 그런데 말입니다. 신세계로 가는 문은 어디 있나요?”
내가 오히려 반문하자 그들은 의구심에 나를 바라다본다.
“내가 그 문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따로 움직인 적도 없는데 말입니다. 왜 아무도 그 길을 모르나요? 난 단지 날범을 살리고자 헛소리를 지껄인 것뿐입니다. 그리고 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몰라 알아보려 했단 말입니다. 일반인과 능력자들 간의 싸움에 날범을 빼달라고 당신에게 부탁하려던 건데 모두 헛된 일이 되고 말았네요.”
“자네, 그 무슨 소린가.”
날범이 오히려 나를 보고 놀란 표정이다. 자신은 죽음을 감수했는데 그냥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흐흐”
날범이 속으로 흐느껴 운다. 그의 모든 생애가 거짓으로 귀결되는 셈이니까.
“우리가 잘못 찾아왔군.”
이필성이 우리를 둘러보고는 동료들과 함께 사라졌다.
“자네 왜 날 속였나?”
난 주위를 둘러보고는.
“아니요. 속이다니요. 이제야 처음으로 말씀드리려는 건데요.”
그의 표정이 바뀌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에서 세상 풍파 속에서 구름을 움직이던 거룡이 되어 다시 꿈틀거리는 것이었다.
난 기괴스럽던 그 날의 일을 떠올린다. 인간의 몸속에 진공을 만들던 때를. 그때 그 인간의 피와 살은 어디로 갔을까.
“제가 진공으로 빨아들인 것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날범이 침묵한다.
“만약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듯 진공이 진공이 아니라면, 다른 차원이 연결되어있고 대기압이 다른 세계가 이어진 것이라면.”
“그렇군, 그럴 수도 있겠어.”
날범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어차피 무언가가 빠져나가려면 어떤 공간이 필요할 터인데. 저도 계속 의심을 해왔죠."
“엄청난 압력이 될 겁니다. 다른 차원의 압력이 한 점으로 집약된 것이니까요. 태풍 저리 가라겠죠.”
“그렇다면 들어갈 수 없는 것 아니겠나.”
“아니죠. 크기를 좀 더 키우고 그리고 제가 압력을 좀 조절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내가 이제껏 찾아다닌 것은 허사였구먼, 자네를 처음 봤을 때 눈이 있어도 알아보지 못했어. 자네의 말이 맞는 것 같네. 그곳이야말로 내가 찾던 다른 세계지.”
“그렇지만 들어간다고 해서 다시 나올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어요.”
“그렇다면 실험을 해보면 어떻겠나.”
“그래서 어젯밤에 나무를 실로 묶어 진공 속에 넣었다가 빼내 보았죠.”
“어떻던가.”
그날 생나무는 가지 하나 잎사귀 하나 시들지 않고 생생했다.
“물론 아무 이상 없었죠.”
“살아있는 것도 넣어봤나.”
“시간이 없어 아직 그러지 못했어요.”
“선배님, 그럼 실험용 쥐를 넣어보시죠.”
베티가 간단하다는 듯이 말한다. 화영은 몬스터도 잡아낸 주제에 그 조그만 쥐가 가여워 눈을 질끔 감았다. 나 또한 괜한 목숨 빼앗는다느 느낌이 들었다.
“생명을 빼앗는 것 같아 좀 꺼려지는데요.”
“그럼 몬스터라도 잡아넣어야지.”
“그래요 그렇게 하기로 해요. 하지만 하나 더 걸림돌이 있어요,”
“뭔가.”
“제가 그 세계에 발을 딛고서 다시 이곳으로 차원의 문을 열 수 있는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죠. 아마 그렇다면 우리는 그곳에서 평생 살아야 할 겁니다. 저와 같은 능력 있는 사람을 다시 찾아보거나요.”
“음.”
“만약 그렇다면 돌아올 수 없게 돼요. 그래서 망설여져요.”
“난 평생을 꿈꾸었네, 난 들어가 보고 싶으이.”
“그래요. 선배님 말씀을 따르죠. 저도 제 목숨 중요하지만, 선배님의 큰 뜻 받들어 모셔야죠.”
“아부가 늘었구먼.”
“하하”
“저희도 같이 들어갈래요.”
베티와 그 일행도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우리는 독도마뱀의 하나인 힐러몬스터를 잡아 와 줄에 묶었다. 실제 지구상에 있는 종이지만 변형된 괴물이었다. 놈은 온몸에 독이 있었는데 독을 제외하면 잡기 쉬운 종이었다. 두꺼운 장화와 고무장갑을 끼고 놈을 잡아 끈으로 허리에 묶고 매듭을 지었다.
“좀 더 구멍의 크기를 키워보게.”
“집 날아갈 것 같은데요. 저희 다른 곳에서 실험하시죠.”
우리는 장소를 옮겨야 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차라리 던전 안에서 실험하는 것이 낫다고 여겨 힐러몬스터의 서식지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힐러몬스터 군락지에는 다수의 헌터들이 있었고 날범을 보고 수군거렸다. 우리는 사람 없는 곳을 찾아 자리를 이동했다. 그러나 역시 사람 없는 곳은 찾기 힘들었다. 세계가 뒤바뀌지 않았어도 인간의 무리가 못 들어가는 곳은 없었다. 어딘가 보면 인간들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꽁초가 어느 벽틈에 꽂혀있고 들어가지 말라는 푯말에도 쓰레기는 넘쳐났다. 무인도에도 인간의 쓰레기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곳이 던전이라고 해도 다르겠는가. 지금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내가 던전 청소부를 하였을 때도 헌터들이 버려놓은 쓰레기들을 처리하느라 시간이 더 촉박하게 돌아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우린 던전에 남아 밤까지 기다려야 했다.
“여기면 괜찮겠는데요. 실험체도 다수 있고요.”
베티가 이야기하자 모두 한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이제껏 무기로만 사용하였던 나의 능력을 개방하였다. 진공의 크기를 최대한도로 키우고 진공의 세기도 한없이 줄였지만 그래도 바람이 거세게 불어와 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지금일세 한번 넣어보시게.”
난 나무막대를 집어넣듯이 구멍 속으로 힐러몬스터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잠시의 시간이 지난 뒤, 내가 계속 차원의 구멍을 유지할 수 없어서. 금방 확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거 살아있는데요.”
“참말이지, 드론을 날릴 수도 없고.”
“아! 왜 녹화를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다시금 힐러몬스터에게 카메라를 장착한 뒤에 다시 보내어 영상을 확인했는데 새로운 세상이 그곳에 펼쳐져있었다. 녹음이 우거지고 옛 시골의 풍경이 생각나는 광경이었다.
“어휴, 만약 내가 몬스터를을 통째로 다른 세계로 보내버렸다면 그곳에 사는 사람에게 민폐였겠어.”
“우리도 준비하고 들어가 보세나.”
“예.”
이것저것 챙겨야 할 것이 많았다. 음식도 그러했고, 혹시 몰라 촬영 장비까지 챙겨야 했기에 시간은 더 걸렸다.
“이계의 시간이 우리와 같아야 할텐데.”
만약 들어갔다가 다른 시간대에 나오게 된다면, 큰일이다. 날범과 우리가 지구를 다시 돌려놓으려는 이유는 만인이 평등한, 차별 없는, 능력에 따른 예전의 세상으로 돌리기 위함이다. 그런데 엉뚱하게 백 년, 이백 년이 지난 시점으로 돌아오게 된다면 그땐 완전히 다른 세상에 익숙해져 있을 텐데, 다시 세계를 원위치시킨다는 것이 지금과 같이 바람직할지.
나는 차원의 문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우리 모두를 삼킬 것 같은 거대한 크기의 그것으로.
“출발!”
“이것은 우리에게 작은 한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평화를 위한 위대한 서막이었다.”
“한번 이렇게 말해보고 싶었어요.”
얼굴을 붉히며 베티가 힘차게 말했다. 그렇다. 세계의 원상 복구를 위한 새로운 도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