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봉선생 문집(梧峯先生文集) 중 일부
오봉집은 경상도 의성義城 하천리下川里에 거처를 두고 선조, 광해군, 인조 초에 활동한 신지제申之悌(1562∼1624)의 문집이다.
○ 신지제의 삶
신지제는 신몽득申夢得과 월성박씨月城朴氏(박민수朴敏樹의 딸)와의 사이에 태어난 3남1녀 가운데 제2남이다. 모친 박씨는 8세 되던 1569년에 여의었다. 아내는 함안 조씨咸安趙氏로, 조지趙址의 딸이고, 어계漁溪 조려趙旅의 후손이다. 아들은 신홍망申弘望이다. 신지제의 형은 지효之孝, 아우는 지신之信이며, 누이는 김희맹金希孟의 부인이다. 이복동생으로 고창 오씨高敞吳氏(오사익吳士翼의 딸)가 낳은 지의之義·지행之行·지경之敬·지훈之訓이 있는데, 지행은 숙부 신몽필申夢弼의 후사로 나갔고, 지훈은 요절했다.
신지제의 가계와 행적에 대해서는 사위 이민환이 지은 행장과 현손 신진귀가 작성한 「연보」에 자세하다.
(1) 출생에서 임진왜란 직전까지
신지제는 1562년 7월 19일, 의성현 하천下川 신례동新禮洞 집에서 태어났다. 9대조 안렴공은 상주尙州 단밀현丹密縣 관동리館洞里에 살았는데, 5대조 상장공 때 안동安東 풍산현豐山縣 정사동鼎寺洞으로 옮겼다가, 증조 판결사공 신한申翰이 다시 신례동으로 이주했다.
조부는 증 공조 참판 응규應奎이고, 부친은 증 좌승지 몽득夢得이다. 모친은 월성박씨月城朴氏로 민수敏樹의 딸이다. 8세 되던 1569년 12월, 모친 박씨의 상을 당했다.
13세 되던 1574년 안동 가야곡佳野谷의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에게 가서 수학했다. 권태일權泰一·박의장朴毅長과 함께 공부했다. 17세 되던 1578년 가야곡에서 의성으로 돌아와 의성 천방산天榜山 지보사持寶寺에서 글을 읽었다. 1581년에는 백씨와 함께 의성 빙산사氷山寺에서 공부했다. 23세 되던 1584년 2월, 함안 조씨와 혼인했다. 1588년 4월, 스승 김언기를 곡했다.
28세 때인 1589년 증광增廣 대소향시大小鄕試에 응시하고, 4월에 문과 갑과甲科 3인으로 합격했다. 이때 이단異端에 대한 대책對策이 1등으로 뽑혔다. 시관이던 류성룡柳成龍이 신지제의 인품을 두고 ‘제일 인물第一人物’로 높이 평가했다. 5월에 무공랑務功郞 사섬시 직장司贍寺直長이 되었다. 휴가를 청하여 성친省親했다가, 11월에 조정으로 돌아와 선무랑宣務郞에 승품되고, 곧 이어 선교랑宣敎郞에 올랐다. 만력萬曆 17년즉 1589년의 11월에 이조가 선무랑 사섬시 직장 신지제를 선교랑 사섬시 직장으로 임명하는 교지를 발급한 것이 현전한다. 1590년 4월에 승훈랑, 5월에 승의랑에 올랐다.
1591년 2월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가 사헌부 감찰로 옮겼다. 6월에 예안 현감禮安縣監이 되어 7월에 부임했다. 11월에 봉직랑奉直郞으로 승품했다. 예안에 부임한 이후 도산陶山으로 가서 이황李滉의 사당을 배알했다. 매달 서원으로 가서, 이황의 제자 월천月川 조목趙穆(1524∼1606), 설월당雪月堂 김부륜金富倫(1531∼1598),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1541∼1596), 성성재惺惺齋 금난수琴蘭秀(1530∼1604) 등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2)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기의 구국 활동
1592년 4월에 고향에서 수연壽宴을 열었는데, 왜구가 침입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예안으로 돌아갔다. 5월에 백씨 신지효申之孝(1561∼1592)가 어머니 오씨를 모시고 응동鷹洞(또는 천동泉洞, 현 의성군 봉양면 길천리) 암혈에 피신했다가 왜병에게 발각되어 왼쪽 어깨를 칼로 베였다. 신지효는 칡을 입으로 씹어 붓을 만들어, 아우 신지제에게 직수職守를 생각하여 임난수명臨亂授命하라는 내용의 혈서를 쓰고 죽음을 맞았다.
신지제의 6대손 신체인은 1817년 목판 간행한 응암실적鷹巖實蹟에 수록된 「혈서습록血書拾錄」에서 신지효의 ‘혈서’ 작성 경위를 밝혀 두었다.
이 무렵 안집사安集使가 안동을 지키지 않고 도망했으므로, 5월에 신지제는 안동부사를 겸하게 되었다. 신지제는 두 고을의 군사와 백성을 거느리고 용궁龍宮으로 가서 적의 길을 차단했고, 적이 안동으로부터 예안현을 범하자 군사를 일으켜 적을 물리쳤다. 1593년 봄, 기축(1589년) 과거에 동방 급제한 김해金垓(1555∼1593)가 의병장이 되었다. 김륵金玏(1540∼1616)의 백암집栢巖集에, 김륵이 예안 현감 신지제에게 안동 부사를 겸하도록 하고, 김해를 안동 의병장으로 임명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김해는 영남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안동·군위에서 분전했고, 경주에서 이광휘李光輝와 합세하여 싸우다가 진중에서 병사했다. 신지제는 그를 위해 뇌시誄詩를 지었다. 겨울에는 관찰사에게 주책籌策 4조를 올렸다. 오봉집 별집에 실린 그 글은 ①상전賞典을 분명히 할 것, ②군율軍律을 제대로 시행할 것, ③비장裨將을 많이 두지 말 것, ④무비武備를 늦추지 말 것 등을 권계했다. 12월에 김성일의 장사葬事에 참여했다.
1594년 정월 통선랑에 오르고 예조 정랑 겸 예안 현감에 임명되어 부임했다. 9월에 청량산에 올라갔는데, 지세를 파악하여 청량산성을 수축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1595년 4월, 춘추관 기사관을 겸대했다. 1596년 2월 조봉대부에 올랐다. 5월에임기가 차서 공조 정랑이 되었으나, 체찰사 이원익의 계청으로 예안 현감에 잉임仍任되었다. 7월에 조산대부로 춘추관 기주관을 겸대했다.
36세 되던 1597년 2월,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가 체직되어 시강원 문학이 되었다. 3월에 사임하고 용양위 부사직에 제수되었으나, 고향으로 돌아가 성친했다. 4월에 문학으로서 순찰사 종사관이 되어 방백方伯과 함께 팔공산성八公山城에 들어가 그곳을 지켰다. 벽견산성에 병으로 누워 있을 때 권전權詮(1549∼1598)을 만나 오언율시 1수와 칠언절구 1수를 주었다. 이듬해 왜구가 쳐들어오자, 방백은 근왕勤王을 이유로 성을 버리고 갔다. 신지제는 이용순李用淳을 방백으로 삼아 먼저 산성에 들여보내 여러 수령을 독려하여 전투에 대비하게 했다. 그리고 화왕산성火旺山城에 가서 곽재우郭再祐(1552∼1617)와 함께 창의했다. 김시형金始炯(1681∼1750)이 갑인년(1734) 늦봄에 지은 용사응모록龍蛇應募錄(창의록倡義錄)에 부기된 화왕입성동고록火旺入城同苦錄에 따르면 당시 성을 지키던 종사관은 부용당芙蓉堂 성안의成安義(1561∼1629),조방장助防將은 밀양 부사 이영李英, 조전장助戰將은 창녕 현감 장응기張應奇 외 6명이었으며, 함께 성을 지킨 사람은 모두 678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