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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종심(從心)에 이르렀으니
해담 조남승
해마다 연말이 되면 항상 하는 말이 다사다난(多事多難)한 한해였다고 말들을 한다. 그런데 지난 경자년(庚子年)은 다사다난이란 말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다. 정말 한(恨)많은 한해가 아니었나 싶다. 일 년 내내 신종코로나19 바이러스감염의 확산으로 소상공인들의 경제활동이 위축을 넘어 정지 상태에 이르렀는가 하면, 국민들의 모든 생활이 자유롭지 못하여 정서적으로 삶의 질이 떨어질 대로 떨어져 황폐해지고 말았다. 또 한창 공부를 해야 할 학생들 역시 등교를 하지 못하고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를 하다 보니,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질 않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사회 각 분야에 걸쳐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보통사람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짐으로 인하여, 이곳저곳에서 부딪치고 깨지는 소리가 시끄럽기만 하였다. 이렇게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세태에도 해와 달은 여전히 뜨고 짐을 멈추지 않으니 계절이 바뀌고,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김없이 한해의 마지막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보신각에서 제야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지 않았어도 신축년(辛丑年)의 새아침은 밝아왔다. 올해는 코로나로 인하여 67년 만에 보신각에서 제야의종 타종행사를 하지 못했다. 코로나사태가 언제나 종지부를 찍게 될 수 있을지 암담하기만 하다.
이토록 지긋지긋한 코로나로 인하여, 새해에 대한 벅찬 희망과 감격보다는 걱정스러움의 그림자를 한 아름 안은 채, 경자년의 묵은해에 떠밀리듯 다가온 신축년을 맞이한 지 벌써 열흘째 되는 둘째 일요일 날이다. 오늘은 아내와 내가 결혼을 한지 벌써 43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무심하기 짝이 없는 나는 그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금요일 날 딸네 집에서 손주들을 돌보고 집에 돌아올 때, 딸이 아내에게 내일모레 결혼기념일 날 맛있는 거나 사먹으라며 봉투하나를 쥐어주는 바람에 알게 되었다.
아침을 먹고 나니 아내가 딸이 준 봉투를 열어보면서 돈을 너무 많이 넣었다고 걱정을 한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과한 것 같았다. 우린 십 만원씩만 나누어 갖고 나머지는 월요일 날 돌려주기로 하였다. 아내가 ‘저녁때 매운탕이나 사다 먹지 뭐...’라고 하면서 십 만원의 용돈을 건네주었다. 그동안은 결혼기념일이 연초이고해서 대부분 복요리 집에 가서 복 매운탕을 사먹었다. 연초엔 복요리를 먹어야 복(福)이 들어온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그러나 코로나 때문에 외식을 할 수도 없으니, 올해엔 동네에 있는 메기매운탕 집에 가서 포장을 해가지고 집에 와서 끓여 먹기로 하였다. 나는 아내에게서 받은 돈을 들고 나만의 공간인 서재에 들어와 지갑에 돈을 고이 집어넣고는 오래 묵은 앨범을 꺼내 보았다.
결혼식 때의 사진을 보니 아내와 나의 얼굴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젊은 건 당연하고 예쁘고 멋있어 보이기까지 하였다. 앨범을 몇 장 넘기면서 사진을 보다말고 책상 옆의 좌식거울에 나의 얼굴을 비춰보았다.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보니 더부룩하게 자란 머리는 허옇게 희고, 이마엔 곡절(曲折)많은 삶의 흔적들이 가득 그려져 있어 정말 볼품이 없었다. 그동안 결혼식 주례봉사와 구청에서 운영하는 공직자 윤리위원 및 인권위원회 위원장직을 맡고 있는 터라, 아무리 늦어도 한 달에 한두 번씩은 꼭 이발을 하였었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회의가 서면으로 대체되었고, 그동안 해오던 주례봉사 역시 1,420쌍을 끝으로 정리해버렸을 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친목모임들도 손주 돌보는 것을 핑계 삼아 회비만 내고 참석하지 않은지 벌써 오래되었다. 따라서 특별히 출입할일도 없고 코로나도 무서워 머리가 제털 남바위가 될 정도로 이발을 미루고 미루어온 것이다. 그렇다보니 염색한 지가 너무나 오래되어 머리는 끝부분만 검은 꼬리를 매달고 있을 뿐 온통 하얗게 서리가 내려있었다. 거울 속에 비친 나와 앨범에 있는 결혼식사진의 나를 번갈아 쳐다보니 사람은 같은 사람이나 같아 보이질 않았다.
거울속의 내 모습을 보자니 문득 옛 당나라의 시선(詩仙) 이백(李白)이 떠올랐다. 이백은 만년에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안휘성에 있는 추포(秋浦)에 돌아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오언절구(五言絶句)의 ‘추포가(秋浦歌)’란 시를 지었다. 그는 시에서 “백발의 길이가 무려 삼천장일세(白髮三千丈/백발삼천장), 깊은 시름으로 저같이 길어졌겠지(緣愁似箇長/연수사개장), 알아보지 못하겠구나, 거울속의 사람을(不知明鏡裏/부지명경리), 어디에서 흰서리를 맞았는지(何處得秋霜/하처득추상)...”라며 인생의 허무함과 쓸쓸함을 한탄하였다.
달 밝은 밤 술잔에 명월(明月)을 담아 마시며 술에 취하고 달빛에 도취되어 시를 읊던 시선(詩仙)이 귀양살이의 시름 끝에 초췌하게 늙어진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쓸쓸해보였으면 이런 시를 읊었을까? 시인은 늦가을에 내린 서리 같이 하얀 머리가 길게 자란 것은 깊은 시름 때문이었다고 한숨을 토해냈다. 누군들 인생에 있어 시름이 없을 수 있겠는가? 나 역시 지나온 세월의 시름이 적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37년이나 되는 그 긴 세월을 한시도 마음 편히 지낼 수 없이 조마조마함 속에 긴장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소방공무원이었으니 말이다. 특히 서울시 전체의 각종 대형사고현장에 투입되는 119특수구조대의 대장으로 3년9개월이나 근무하지 않았는가? 특수구조대는 일선소방서의 구조대를 능가하는 첨단구조장비와 정예화 된 대원들로 조직된 강력한 특수부대이다. 그러니 특수대장을 하는 동안 대형사고현장에서의 서울시민에 대한 안전은 내가 다 책임진다는 자부심으로 단 한순간도 긴장을 풀고 여유로운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정신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건, 특수대장이나 일선 소방서의 서장을 할 때나, 만약 사고현장에서 작전의 실패로 요구자를 구조해내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 죄책감을 안고 평생 어떻게 살아갈까라는 심리적 압박감과 대원들의 안전이었다.
위험천만한 사고현장에서 생명이 위급한 요구조자를 구조해내기 위하여 긴박한 구조작전을 펼치다보면, 대원이 불의지변(不意之變)을 당하여 순직하는 경우가 생기게 되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게 제일 걱정이었다. 바둑이나 장기 그리고 일반전술에선 아생타살(我生他殺)이 원칙이겠지만, 소방대원들은 현장에 투입되면 자신도 모르게 그와 반대로 행동하게 되기 마련이다. 343명이나 되는 엄청난 소방대원이 순직한 미국의 9.11세계무역센터테러사고 때 많은 사람들이 살고자 긴급히 탈출하고 있는데 반하여, 소방대원들은 한사람이라도 더 구조해내기 위해 동료대원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무전교신을 들으면서도, 조금도 두려움 없이 망설이지 않고 화염에 휩싸인 채 무너져 내리는 건물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모습이 잘 말해주고 있다. 그게 바로 소방관의 숭고하고 투철한 사명감인 것이다.
우리나라 역시 전국의 119소방대원들은 끊임없이 발생되고 있는 다양한 사고현장에서 성공적인 소방작전수행을 위해 헌신적으로 분투(奮鬪)하고 있다. 특히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시 소방관의 현장 활동은 대단하였다. 오죽하면 당시 조순 시장님께서 ‘소방관이야말로 이시대의 영웅’이라고까지 하였겠는가! 아마도 그러한 소방관의 애환과 시름으로 인하여 나의 머리도 이백(李白)처럼 모두 백발이 되어버린 게 아닌가싶다.
잠시 직장생활 할 때를 회고해보면, 소방공무원들은 보편적으로 그 어느 조직의 구성원들보다도 매사에 성실하고 책임정신과 연대의식이 강한 사람들이었다고 기억된다. 함께 근무했던 동료 분들이 모두 다 훌륭한 사람들이어서 그분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떠나왔다. 어느새 퇴직이란 이름으로 소방을 떠나 온지 십년이 다되어가지만, 지금도 종종 안부를 주고받으며 옛정을 나누는 동료와 선후배들이 있다. 내가 현직에 있을 때 항상 가슴에 담고 있었던 신념이 ‘청렴, 성실, 책임, 역사의식’이었는데,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말처럼 나와 비슷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분들과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중에 매일같이 종로의 서예학원에 나가 묵향(墨香)에 젖어 사는 이시대의 선비라 할 수 있는 한분이, 나에게 신년 인사를 해오면서 “조지버나드쇼의 묘 앞에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란 글이 있는데, 코로나 때문에 어영부영하다보니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게 되었다.”고 하였다. 영국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조지버나드쇼는 “실수하며 보낸 인생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낸 무의미한 인생보다 훨씬 존경스러울 뿐만 아니라 훨씬 더 보람 있고 유용하다.”란 말을 하면서 자신이 해보고 싶은 일엔 주저 없이 도전하였다. 따라서 폭넓은 사회활동을 하면서 스스로 깨닫고 느낀 점이 많았기에 다양한 명언들을 남겼다. 그럼에도 세상에 건네는 마지막 인사인 묘비명엔 정작 그런 글귀를 남겼다고 생각하니 그의 욕망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를 짐작하게 된다.
조지버나드쇼의 묘비명을 생각하다보니, 또 다른 두 사람의 묘비명(墓碑銘)이 떠올랐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2인자라고 불릴 정도로 권좌(權座)에 있었으나 끝내 가슴깊이 품은 청운(靑雲)의 큰 꿈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정치는 허업(虛業)이라고 말하였던 운정(雲庭) 김종필(金鍾泌) 전 국무총리의 묘비명이 먼저 생각났다. 정치풍운아(政治風雲兒)라 불리는 그는 생전에 본인이 미리 써놓은 묘비명을 통해 자신의 삶을 정리하였다. 그 내용이 그리 길지 않으면서도 함축하고 있는 의미가 아주 깊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묘비명에서 “思無邪(사무사)를 인생의 도리로 삼고 한평생 어기지 않았으며, 無恒産而無恒心(무항산이무항심)을 治國(치국)의 근본으로 삼아 國利民福(국리민복)과 國泰民安(국태민안)을 구현하기 위하여 獻身盡力(헌신진력)하였거늘, 晩年(만년)에 이르러 年九十而知 八十九非(연구십이지 팔십구비)라고 嘆(탄)하며, 數多(수다)한 물음에는 笑而不答(소이부답)하던 자.”라고 자신의 삶을 후세들에게 말하고 있다. 그가 세상의 물음에 소이부답(笑而不答)한다고 하였으니, 현대정치사의 고비 고비마다 그의 정치적 결단과 행동에 대한 공과(功過)는 더 먼 훗날 논할 일이다. 다만 동양의 고전(古典)에 대한 깊은 학식과 그로인한 마음의 넉넉함과 여유로움이 있는 원로정치인의 글다운 멋진 묘비명이 아닌가 싶다.
난 이 묘비명을 보면서 정계(政界)에 몸담고 있거나, 국정을 이끌며 나랏일을 돌보는 고위공직자들에게 ‘당신들은 과연 공자가 말한 사무사(思無邪)의 뜻을 가슴에 품고 나랏일을 하고 있는가? 또 국정(國政)을 논함에 있어 무항산이무항심(無恒産而無恒心)이라는 맹자의 말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가?’라고 묻고 싶다. 그리고 한해를 보내고 또 새로운 한해를 맞이한 송구영신(送舊迎新)의 계절에 모든 사람들이 ‘아흔이 되어서야 지난 여든아홉의 삶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는 구절을 깊이 음미해보았으면 한다.
사실 이 구절은 중국의 춘추시대 위나라의 대부(大夫)였던 거백옥(遽伯玉)이란 사람의 말을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회남자(淮南子)에 거백옥은 “나이 오십이 되어서야 지난 사십 구년간의 잘못을 깨달았다(年五十而知 四十九年非/연오십이지 사십구년비)“는 구절이 있다. 또 장자(莊子)의 잡편(雜篇) 측양(則陽)의 끝부분에도 ”거백옥(遽伯玉)은 나이 예순이 되기까지 육십년 동안이나 지난날을 성찰하면서 인생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 변화하였다. 언제나 그 해의 처음에는 옳다고 여겼던 것이, 마침내 그 해가 끝나고 보면 잘못되었다고 생각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아직도 모르겠다. 60세가 된 지금 옳다고 생각되는 것도 지난 59세 때엔 잘못이라고 여겼던 것처럼, 또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라는 말이 있다. 한마디로 거백옥은 평생 동안 나이를 더할 때마다 한해 한해를 되돌아보고 자신의 삶을 성찰하면서 자아실현을 위해 정진하였던 사람이다. 거백옥의 인품이 이러하였으니, 논어(論語) 위령공편(衛靈公篇)에서 공자(孔子)도 “군자로다. 거백옥이여! 나라에 도가 있으면 벼슬하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거두어 감출 수 있었으니...”라고 그의 덕망을 칭송하였다.
인간에게 완벽함이란 기대하기 힘든 것이다. 어딘가 모르게 부족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실수와 잘못 또한 있을 수밖에 없다. 더욱이 차세대 미래학자로 주목받고 있는 ‘다니엘핑크’란 사람이 젊은이들에게 ‘미래를 위한 계획을 세우지 말라’고 역설할 정도로 빛의 속도로 변화하고 발전해가는 현대사회에서의 미래에 대한 계획은 음과 양으로 빗나가게 되는 경우가 생기기 마련이다. 다만 거백옥이란 사람처럼 실수와 잘못을 스스로 깨우치고 뉘우칠 줄 알아야 하며, 상대와 세상을 향해 사과하고 속죄하는 자세와 함께, 실수와 잘못이 거듭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사람이 바로 인격자요, 양심 있는 훌륭한 사람인 것이다.
동양의 현철(賢哲) 공자(孔子)는 “잘못을 저지르고도 고칠 줄 모르는 것이 진정한 잘못이다(過而不改 是謂過矣/과이불개 시위과의)”라고 하면서 “허물이 있으면 곧 고치기를 꺼리 지 말라(過則勿憚改/과즉물탄개)”고 강조하였다. 또 공자의 후학(後學)으로 대학(大學)을 서술했다는 증자(曾子)역시 매일같이 자신의 하루를 돌아보며 혹 잘못한 점이 없었는지를 살피는 지혜롭고 현명한 삶을 살았다. 이렇게 습관적으로 매일매일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생활을 통하여 예(禮)를 실천하고 도(道)를 지킴으로서 학문의 심화와 완성을 이루고자 하였던 것이다. 특히 “남을 위한 일을 하면서 진실 되게 정성을 다하였는가? 벗과 사귀면서 신실(信實)되지 아니하였는가? 전수받은 것을 익히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는가?”라는 충.신.습(忠信習)에 대한 성찰에 중점을 두었으니 이를 두고 증자(曾子)의 일일삼성(一日三省)이라한다.
이처럼 옛 선현(先賢)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省察)과 각성(覺醒)을 통하여 올바른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뉘우치며 부끄러워하기보다는, 손바닥도 아닌 손가락으로 해를 가리듯이 구차한 변명으로 잘못을 합리화시키고자하면서, 정의와 불의를 어지럽게 뒤범벅 시켜 세상을 혼탁하게 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오히려 큰소리로 잘못이 없다면서 항변과 궤변을 늘어놓는 염치(廉恥)없는 사람들까지 있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권력을 손에 쥐고 있거나, 국가 사회적으로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주류를 이룬다. 그들은 한비자(韓非子)가 말한 ‘이치에 맞지 않는 거짓(非/비)은 이치를 이길 수 없고, 이치는 법을 이길 수 없으며, 법은 권력을 이길 수 없고, 권력은 하늘을 이길 수 없다는 비리법권천(非理法權天)’이란 말에서 하늘 천(天)자는 가위로 싹둑 잘라버렸는지, 민심이나 자연의 섭리를 뜻하는 하늘(天)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아 입맛이 씁쓸해진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보다도 그들이 잘못하는 것을 실로 모르는 건지, 알고도 그러는 것인지... 무조건 그들을 두둔하고 대변하고 편드는 진영논리에 매몰된 사람들의 몰지각(沒知覺)한 행동들을 볼 때면, 바로 이게 더 큰 문제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는 자라나는 청소년들에 대한 나쁜 본보기로서 국가의 미래가 염려되지 않을 수 없다.
대체 하늘이란 무엇일까? 난 하늘을 두려운 존재로 생각한다. 하늘을 우러러 보는 것은 앙천(仰天)이요, 하늘을 공경하는 것은 경천(敬天)이며, 하늘에 순종하고 순응하는 것은 순천(順天)이요 응천(應天)이다. 또 하늘을 받드는 것은 봉천(奉天)이며, 하늘을 감동시키는 것은 감천(感天)이다. 그리고 하늘이 내리는 복을 천복(天福)이라 하며, 하늘의 도움을 천우(天佑)라 하고, 하늘이 베푸는 은혜를 천은(天恩)이라고 한다. 또한 하늘이 주는 수명은 천수(天壽)이고, 하늘이 내리는 행운은 천행(天幸)이요, 하늘이 가르치는 도리는 바로 천리(天理)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하늘의 순리와 천리(天理)를 어길 땐 하늘은 단호히 벌을 내리고 만다. 이게 바로 천벌(天罰)인 것이다.
천벌은 잘못을 하였을 때 그 즉시에 내리는 것만은 아니다. 스스로 개과천선(改過遷善)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얼마간의 시차를 두는가 하면, 대를 건너 자손에게까지 내리는 경우도 있으니 참으로 두렵지 않을 수 없는 게 하늘인 것이다. 그래서 ‘순천자(順天者)는 존(存)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亡)한다.’고 하였으며, ‘조상의 음덕이 있어야 자손이 잘된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아무리 큰 힘이 있는 자라 하여도 법망(法網)을 뚫고나가 죄를 피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천망(天網)은 끝내 피할 수 없음을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묘비명(墓碑銘)을 말할 때면, 빼놓을 수 없는 참으로 소중한 내용의 글이 담긴 또 하나의 묘비명이 있다. 바로 인도의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던 마하트마 간디의 묘비명에 있는 글이다. 그의 묘비엔 국가가 멸망할 때 나타나는 일곱 가지의 사회악에 대한 귀한 글이 있다. 이 일곱 가지의 사회악(社會惡)에 대한 내용은 마하트마 간디가 암살되기 전, 손자(Arun Manilal Gandhi)와 마지막으로 있었던 날에 남겨주었던 글 중의 일부라는 것이다. 간디의 손자는 나중에 이 일곱 가지의 리스트에 '책임 없는 권리(權利/Rights without Responsibilities)‘를 추가하였다고 한다.
누구나 다 알고 있겠지만, 간디의 묘비에 새겨져있는 일곱 가지의 사회악인 망국론(亡國論)의 내용은 “원칙 없는 정치/노동 없는 부(富)/양심 없는 쾌락/인격 없는 교육/도덕 없는 상업/인간성 없는 과학/희생 없는 신앙.”인 것이다. 여기에 손자가 추가시킨 ’책임 없는 권리‘까지 포함시켜, 이 여덟 가지의 내용과 오늘날 우리나라의 현 세태를 대입시켜 보았을 때, 과연 어떠한가를 온 국민이 가슴깊이 성찰해봐야 할 것 같다. 특히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나 국정을 이끌어가는 고위공직자들은 물론, 사회 각 분야의 리더(leader)들이라면 이 여덟 가지의 내용을 늘 가슴에 새기면서 국가에 해가되지 않도록 생활해야만 한다. 그래서 정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된다면, 대오각성(大悟覺醒)하여 하루빨리 바르게 고쳐나가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여 잘못되어가는 점을 자각하였다면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고, 오직 국가의 장래만을 생각하면서 온 힘을 다하여 개선시켜나가는데 한 치의 주저함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와 나의 가족과 내가 소속된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사회의 이목(耳目)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신앙, 양심, 인간성, 도덕, 원칙을 모두 다 뒤로한 채 별의별 편법(便法)을 다 동원하여, 오직 자기목적만을 달성하려는 염치없는 짓들은 하지 말아야 한다. 권력의 남용이나 당리당략(黨利黨略)과 사리사욕(私利私慾)은 절대금물이기 때문이다.
공자는 “의(義)로운 일을 보고도 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見義不爲 無勇也/견의불위 무용야).”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우리의 옛 선비들은 추상열일(秋霜烈日)같은 대의명분(大義名分)과 도의심(道義心)으로 불의(不義)와 맞서 싸우는데 자신의 목숨을 초개(草芥)와 같이 버릴 줄 아는 기개(氣槪)를 보여주었다. 임진왜란 때 선비들과 스님들의 의병활동이 그러했고 일제 강점기 때의 독립투사들이 그러하였다. 우리나라의 선각자(先覺者)들은 나라에 위난이 닥쳐 어려워졌을 때마다, 오직 우국충정(憂國衷情) 하나만으로 국민의 안위를 지키고 국가의 장래를 위해 있는 힘을 다하여 싸웠다. 국민들 또한 그러한 선지자(先知者)들을 도와 국난의 어려움을 이겨내고자, 그들과 뜻을 같이하여 분연히 떨쳐 일어나 함께 투쟁하였다. 이러한 불굴의 역사를 교훈삼아 정치인은 말할 것도 없고, 국가사회의 각 분야에서 지도층에 있는 분들이라면 국가의 모든 정책들이 올바르고 밝은 미래를 향해 가도록 하는데 앞장서야만 한다.
중국의 사마천(司馬遷)이 쓴 사기(史記)에 “천인지낙낙(千人之諾諾) 불여 일사지악악(不如 一士之諤諤)”이란 말이 있다. 내용인즉 오직 윗사람의 비위나 맞추면서 무엇이든 그저 예예 하는 예스맨(yes man)의 측근들이 천명에 이르면 무엇 하랴! 윗사람의 그릇된 처사에 대하여 그것은 가당치 않다며, 노(No)라고 말할 줄 아는 뜻 있는 선비 한 사람의 올곧은 충언만 같지 못하리라는 뜻이다. 어느 조직이든 참모들을 거느리고 있는 최고의 의사결정권자나, 윗사람을 보좌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역사의 기록을 두렵게 생각하면서 꼭 가슴에 담고 생활해야 할 좋은 글귀가 아닌가 싶다. 그 누구든 시비곡직(是非曲直)을 제대로 판단하여 검은 것은 검다고 말하고, 흰 것은 희다고 말할 수 있는 양심과 용기를 가져야한다. 간간히 윗사람에게 악악(諤諤)할 줄 아는 선비다운 정치인이나 관료들의 소식을 접하게 되면 눈이 번해지고 속이 다 시원해진다. 어느 조직이든 조직의 지도자가 간언(諫言)을 하는 사람을 가까이 두고 자주 의견을 듣는 등 중용(重用)을 하여야 함에도, 오히려 소인배들처럼 생트집을 잡아 멀리 내치기나 하는 옹졸한 사람이라면, 그 조직의 미래는 밝지 못할 것이다. 나라의 큰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올바른 사관(史觀)을 가지고, 대를 이어온 역사의 거울 앞에 자기가 처해있는 그 시대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비추어보면서, 미래를 위하여 실수 없는 정책이 펼쳐지도록 자신의 몫을 하는데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바로전시대인 조선조가 어떻게 끝나고 말았는지 망국(亡國)의 역사를 보라! 북방의 오랑캐와 남방의 왜구들이 수시로 침입을 해옴으로서 이에 대한 대책으로 율곡(栗谷)은 시무육조(時務六條)의 상소문에서 국방의 유비무환(有備無患)을 위한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선조는 이에 대한 대책을 소홀히 할뿐이었다. 또한 그 당시 일본을 천하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중국의 명나라를 침공하기 위해 조선을 쳐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조정에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드디어 선조는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을 일본에 통신사로 보내, 일본의 정세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심을 알아오게 하였다. 그들은 귀국하여 선조에게 보고하면서 황윤길은 일본이 침략해 올 것이라고 했지만, 김성일은 침략해 오지 않을 것이니 전쟁 또한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선조는 김성일의 말에 따라 안일한 생각으로 전쟁에 대비치 않아 결국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당하여 낭패를 보고 말았다. 게다가 이순신 같은 훌륭한 장수를 한순간 내치는 우를 범하기까지 하였다. 또한 무방비상태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급한 나머지 의주까지 피신을 하는 데에 급급하였으니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는 군주라 할 것이다.
또 인조는 어떠하였는가? 중국의 명나라는 점점쇠퇴해가는 반면, 후금은 날로 세력이 강성해지는 명청 교체기에, 대외의 정세를 올바로 간파한 광해군은 명나라를 돕는 한편, 후금과도 다투지 않는 실리적 중립외교정책을 아주 잘 펼쳤다. 그러나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일방적으로 명나라를 받들고 후금(청)을 멀리하여 결국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당하였다. 그로인하여 병자호란 당시 삼전도에서의 치욕스러운 수모와 굴욕을 당하였으니 참으로 통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실정(失政)이 이어지면서 결국 고종은 나라를 일본에 빼앗겨 안타깝게도 조선이란 나라는 망하게 되고 말았다. 고종은 나라가 일본과 합방될 당시에 소위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신에게 책임을 맡기고 자신은 뒤에 빠져있었으니,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자신이 근무하는 책상위의 명패에 “내가 모든 책임을 지고 결정한다(The Buck Stops Here).”라는 좌우명을 새겨놓고 국정 전반을 챙긴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지 않는가?
조선은 세종대왕을 비롯한 훌륭한 인군들의 지도력으로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하지만 말기에 접어들면서부터 나라가 망하기까지 비참한 역사의 주역이었던 군주와 조정대신들의 위정자들이 대내외의 정세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하고 저지른, 당시의 그릇된 판단과 잘못된 정책들에 의해 온 국민이 도탄에 빠지게 되고 결국엔 나라가 망하고만, 후회스럽고 수치스러운 역사를 우리는 절대로 잊지 말고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만 한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대외정세역시 아주 복잡하게 얽히어있다. 따라서 우리는 객관적이고 냉정한 자세로 정신을 바짝 차려 대외정세를 명확히 간파하고, 최우선하여 튼튼한 국가안보의 구축으로 국민의 안위를 보장하여야 한다. 또 자유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발전과,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이 글로벌시장에서의 석권이라는 욕망을 가지고, 보다 자유로운 다국적 경영활동과 국가경제발전을 위해 전력매진 할 수 있도록, 아낌없는 지원과 환경을 조성해주어야 한다. 조선조가 망하게 된 패망의역사가 또다시 판박이로 되풀이되게 해서는 절대로 안 될 일이 아니겠는가?
논어(論語) 태백편(泰伯篇)에 보면 “부재기위(不在其位)면 불모기정(不謨其政)이라”는 공자의 말이 있다.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 그 자리의 정사를 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나같이 쓰레기 재활용을 위한 분리수거나 철저히 하면서 손주들이나 돌보며 가사를 돕는 일이, 오직 국가에 충성하는 길이라 여기며 살아가는 정말 필부(匹夫)에 불과한 사람이, 감히 나랏일에 대하여 걱정스러움을 말하는 것은 크게 외람된 것으로서, 소의 해에 소가 웃을 일이니 가히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 할 것이다. 또 옛 선현(先賢)은 “노각인생 만사비(老覺人生 萬事非)요, 우환여산 일소공(憂患如山 一笑空)“이라하였다. 늙어서 생각하니 만사가 아무것도 아니며, 걱정이 태산 같으나 한번 소리쳐 웃으면 그만이라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괜한 신경 쓰지 말고, 그 옛날 신라시대 원정(圓淨)선사의 제자였던 부설거사가 팔죽시(八竹詩)에서 “이런대로 저런대로 되어가는 대로/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죽이면 죽 밥이면 밥 이런대로 살고/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런대로 보고/손님 접대는 집안 형편대로/시정 물건 사고파는 것은 세월대로/세상만사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도/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대로 보낸다.”고 노래한 것처럼 세상이 어찌 돌아가던 그저 그런대로 살다 가면 되는 것이라고 속편하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 자신만 살고 끝나는 세상이 아니라, 자손대대로 계계승승(繼繼承承) 후손들이 살아갈 조국(祖國)이기에 나같이 허수아비 같은 사람까지 나라의 걱정스러움을 하소연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축성여석(築城餘石)과 같이 아무 쓸모없는 미거(未擧)하기 짝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이 주제넘게 나라를 걱정하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이, 바로 정치하는 분들의 몫이요 의무이며 책임일 것이다.
아무튼 새해를 맞아 내 나이 종심(從心)에 이르렀으니 세상사를 말하기 전에 먼저 나 자신에 대한 지나온 세월부터 되돌아 봐야만 할 것 같다. 나 또한 앞에서 말한 거백옥이란 사람이나, 옛 정객(政客)이었던 정치풍운아 운정(雲庭)의 심사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나도 ‘내 나이 칠십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지난 육십 구년의 삶이 올바르지 못했었다(年七十而知 六十九年非/년칠십이지 육십구년비)는 것을...’ 그렇고 보니 지난한해도 반성할일들뿐이었다고 생각된다.
아! 무려 육십 구년이라고 하는 그 많은 시간들을 왜 그리 어영부영이란 네 글자로 허비하였을까? 왜 그때 그 사람에겐 그런 말을 했을까? 그때 그 일을 하면서는 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이었을까? 그땐 그게 옳다고 여기며 최선이라고 판단했겠지... 하지만,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그때를 되돌아보면, 그땐 어찌하여 생각이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데에 그치고 말았었을까? 라는 뒤늦은 후회를 하게 된다. 그때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라고... 하지만 그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시간이요, 흘러간 세월들이다. 이러한 과거의 잘못에 대한 미련(未練)의 상념(想念)에 매달려 미래를 바라볼 시간을 빼앗긴다면, 이는 실패한 삶을 거듭하게 되고 말 것이다.
여생(餘生)이 긴 세월이 되던 짧은 시간이 되고 말든, 앞으로라도 지나온 과거에 대한 아쉬움과 후회스러움이 없는 삶을 살다가 보람과 감격의 행복감으로 인생을 마무리 할 수 있다면 더 할 나위 없이 좋지 않겠는가. 그러려면 한시도 나 자신이 추구하는 내면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말고, 항상 깨어있는 마음으로 먼 훗날 과거가 될 오늘 이 순간의 시간을 게으름 없이 정법(正法)으로 알차게 채워나가야 할 것이다. 따라서 오늘이 바로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삶의 완성을 위해 도(道)닦는 마음으로 성실한 삶을 살아야만 한다.
백세시대라면서 인생은 칠십부터라고는 하나 이젠 삶의 종착역을 향해가고 있고, 그곳이 지금 것 걸어온 것보다 훨씬 가깝게 다고오고 있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후회 없이 이세상과 이별을 고할 수 있을 것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에 보면, 공자가 말하기를 “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吾十有五而志于學/오십유오이지우학), 서른 살에 학문을 확립하였으며(三十而立/삼십이립), 마흔 살에 현혹됨이 없었고(四十而不惑/사십이불혹), 쉰 살에 천명(天命)을 알게 되었으며(五十而知天命/오십이지천명), 예순 살에 귀가 순해졌으니 듣는 말에 거슬러하지 아니하였고(六十而耳順/육십이이순), 일흔 살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칠십이종심소욕 불유구).”고 하였다.
나이 칠십에 이르면 무엇이든 마음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게 되어 종심(從心)이라고 말한다니, 과연 나도 그럴 수 있을까란 생각에 걱정과 두려운 마음이 앞선다. 그러한 칠십대의 삶을 살 수 있으려면, 십대의 어린나이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세대별로 그때그때에 맞는 양심(養心)의 공부를 철저히 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질 못했다. 그렇다면 칠십에 이르기 전, 육십 대의 십년동안만이라도 남의 말에 격한 반응을 일으키지 말고 순한 마음으로 경청하면서, 속으로 상대의 말을 새길 줄 아는 이순(耳順)의 마음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았어야했다. 그러나 지난 십년동안 귀가 순해지는 공부를 제대로 했느냐고 자문해볼 때, 그렇질 못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현직에 있을 때의 생각으론 퇴직을 하고나선 공적인 사회봉사활동을 한번 왕성하게 해보고 싶었다. 만약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이 한 몸 허락할 산촌을 찾아 솔향기 그윽한 청송우거진 골에 움막하나를 지어놓고, 고전(古典)을 통하여 선인(先人)들과 문답(問答)을하며 묵향(墨香)에 젖어들다가, 문틈으로 솔향기 밀려오면 밖으로 나가 산새들이 부르는 노래에 목탁을 울려 화답해주고,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에 속된 마음을 씻으며 하루해를 보내다가, 곱게 물든 저녁노을이 산자락에 내려앉으면 서천(西天)을 바라보고 좌정하여 염주 알을 돌리며 명상에 잠기는 세심수도(洗心修道)의 삶을 살고자 하였다. 달 밝은 밤이면 봄에는 두견주요, 가을엔 국화주의 향기에 취해 음풍농월(吟風弄月)하는 호사를 누려보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들은 나 자신에겐 너무나 과한 욕심이요, 허망한 꿈이었을 뿐, 현실은 허락해주질 않았다. 결국 밤낮으로 하루 종일 아내와 함께 생활을 해야 하는 가사도우미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보니 자연히 사소한 일로 아내와 부딪치는 일이 잦아지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일상의 가사도우미에 친해지고 익숙해져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갖게 되었고, 지청구나 핀잔 따위도 귀에 젖은 염불소리로 들려오게 되었다. 하지만 공자가 말한 종심(從心)에 완전히 들어서려면 더 많은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천성이 급하고 강직한데다 목소리까지 큰 탓으로 종심(從心)의 기초가 충실치 못하였으니, 당분간 이순(耳順)과 종심(從心)을 함께 공부해나가야 되지 않을까싶다. 무엇보다도 귀가 순해지고 마음의 온화함과 여유로움을 길들이는데 필요한 보약과 같은 양서(良書)들을 늘 가까이 해야만 될 것 같다. 중국 명나라 말기의 문인이며 화가이고 서예가인 동기창의 화안(畵眼)이란 글에 보면 ‘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의 여행을 해야 가슴에 쌓인 먼지와 탁기를 빼낼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우선 명심보감(明心寶鑑)의 계성편(戒性篇)에 있는 귀한 글들을 가슴에 담고 살아갈 것을 다짐해본다. “한 때의 분함을 참으면 백날의 근심을 면할 수 있다(忍一時之忿 免百日之憂/인일시지분 면백일지우)”는 말과, “참을 수 있으면 또 참고, 경계할 수 있으면 또 경계하라. 참지 못하고 경계하지 않으면 작은 일도 크게 되어버린다(得忍且忍 得戒且戒 不忍不戒 小事成大/득인차인 득계차계 불인불계 소사성대)”는 구절을 항상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해야겠다. 그리고 “대꾸하지 않는 사람은 마음이 깨끗하고 한가롭게 된다(不對心淸閑/부대심청한)”는 말처럼, 복잡한 세상사의 크고 작은 얘기들은 귓가를 스쳐가는 바람으로 여기면서, 오직 부족한 나를 만나 지금껏 쉽지 않은 삶을 용케도 잘 꾸려왔고, 중년이 되면서부터 당뇨와 함께 힘들게 생활하는 나의 반려자요 보호자인 아내의 마음이 편안하도록 하는데 정성과 노력을 다하여야겠다. 그리고 외동딸 내외가 마음 놓고 직장생활을 할 수 있도록 두 손녀를 오랫동안 돌봐주려면 건강관리에도 게으름을 피우지 말아야겠다. 언제나 그랬지만, 설을 앞두고 오늘따라 더 적막감에 젖어 애처로워 보이는 책상위의 살구나무목탁에게, 올봄엔 살구꽃이 화사하게 핀 청정(淸淨)한 산촌을 찾아, 달콤한 봄 향기에 취한 무명(無明)을 깨우듯 ‘똑. 똑. 똑, 또 도록 똑. 똑.’ 맑게 울리는 너의 울림을 마음껏 들어주마고 약속하면서 주름진 얼굴에 미소를 지어 보인다. 내 나이 종심(從心)에 이르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