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본 <반야심경>의 구조와 의미
소본의 경우에 그 범본과 한역이 같은 문맥 안에서의 의미 차이를 갖고 있긴 하지만, 대본과 소본의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구조의 차이를 갖고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그래서 소본의 범본과 한역 비교는 다음에 살피기로 하고, 우선 대본과 소본의 비교부터 하고자 합니다.
이미 불자들은 소본 <반야심경>을 많이 외우고 있을 것이므로, 여기서 다시 그것을 제시하지 않고 바로 비교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는 이러한 비교를 표를 만들어서 해보려 합니다. 먼저 표부터 보시지요.
발화자/發話者 | 내 용 | 대 조 | 三分의 소속 |
경전편찬자 | ①귀경문 | 有 | 서분/序分 |
| ②6성취(六成就) | 無 | |
| ③세존의 입정(入定) | 無 | |
| ④반야심경의 대강(大綱) | 有 | 정종분/正宗分 |
| ⑤사리불의 청문(請問) | 無 | |
사리불 | ⑥청문의 내용 | 無 | |
경전편찬자 | ⑦관자재보살의 응답 | 無 | |
관자재보살 | ⑧응답의 내용 | 有 | |
경전편찬자 | ⑨응답의 맺음말 | 無 | |
| ⑩세존의 출정(出定) | 無 | |
세존 | ⑪세존의 찬탄/증명/인가 | 無 | 유통분/流通分 |
경전편찬자 | ⑫대중들의 기쁨 | 無 | |
| ⑬경전의 제목 | 無 | |
이 도표에서 '내용'에 번호를 붙인 것은 제 나름으로 대본 <반야심경>을 분류한 것입니다. 이들은 각기 서분과 정종분 그리고 유통분으로 나누어져서 포섭됩니다. 우리가 항상 독송하는 소본 <반야심경>은 이 대본 안에서 정종분 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내용의 13단락 중에서는 다만 '⑧응답의 내용'을 이룰 뿐입니다. 그러니까 소본 <반야심경>은 대본의 정종분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내용인 관자재보살의 응답만을 따로이 취하여 별행본(別行本)으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좋겠지요.
<반야심경>의 '심(心)'의 의미를 범본에서 확인할 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할 때의 마음이 아니라 핵심, 심장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 같은 점을 생각할 때, 그 핵심 중의 핵심만을 가려내서 소본을 만든 경전편찬의 태도에 수긍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핵심만 가려뽑다가 보니까 이해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점이며, 오해의 소지마저 내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과연 우리가 외우고 있는 소본 <반야심경>이 어떤 맥락 속에서 말해지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는 대본에서 확인해야 하겠지요. 여기에는 발화자와 내용의 분류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대본 <반야심경>에서 발화자, 즉 말하는 사람은 넷입니다. 경전편찬자, 사리불, 관자재보살, 그리고 세존입니다.
이 중에 경전편찬자는 나머지 세 목소리들 사이사이에 들어가서 전후 맥락을 이어주는 해설자로서 역할을 할 뿐이고, 세존 역시 직접 설법을 하는 설주(說主)로서 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③에서 '매우 깊고 원만한 깨달음이라 이름하는 삼매(甚深光明善說三摩地)'에 들어간 뒤, 사리불과 관자재보살이 문답을 교환할 때에는 삼매에 머무시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⑩에서 출정(出定)하신 뒤에는 관자재보살의 설법 내용에 대해서 증명해주시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니까, 대본 <반야심경>의 진정한 주인공은 사리불과 관자재보살입니다. 이들 두 분은 소본에서도 마찬가지로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소본에서는 그 관계가 불분명합니다. 그 까닭은 경전[→臺本] 자체에 주인공들의 행동을 지정해주는 지문(指文), 즉 해설 부분을 모두 생략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연극 대본에 비유해서 말하면, 대사 이전에 위치하는 괄호 속 부분에 해당하지요.
소본에 없는 부분, 즉 연극 대본의 지문에 해당하는 부분이 대본에서는 온전히 남아있습니다. 먼저 사리불이 관자재보살에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⑥깊은 반야바라밀다의 경지에서 행을 행하고자 원하는 선남자, 그는 어떻게 배워야만 합니까?
저는 이러한 질문에서 <금강경>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 제2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거기에서는 수보리가 세존에게 다음과 같이 여쭙게 되거든요.
선남자 선여인이 위없이 높고 바른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발하고서는
어떻게 머물러야 하며, 마땅히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리이까?
대본 <반야심경>은 '어떻게 배울 것인가?' 묻고 있으며 <금강경>은 '어떻게 머물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할 것인가?' 묻고 있으나, 그 의미상 이들 질문들은 동일합니다. 두 경전에서 제기되는 질문의 동일함이 <반야심경>과 <금강경>의 (대답의) 하나됨을 시사하기도 합니다. 둘 다 발심 이후, 우리는 어떻게 행위해야 하는가 하는 실천윤리적 입장의 문제제기입니다.
이러한 청문에 대하여 관자재보살의 응답 내용이 곧 소본 <반야심경>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본 <반야심경>에서 '사리자'라는 호격(呼格)은 두 번에 걸쳐서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 말은 누구의 말일까요? 대본에 의지하면, 이 내용은 바로 위의 물음(⑥)에 대한 관자재보살의 응답 내용(⑧)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사리자여'라고 부르는 주체/발화자는 바로 관자재보살입니다. 그렇게 정리하고 나면 첫 번째 '사리자' 바로 앞에 나오는 한 문장과 그 이하에 나오는 응답 내용과는 서로 다른 맥락에 놓여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발화자도 다fms 것이 더 자연스럽지요. 소본의 한역에서 첫 번째 문장,
즉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 5온이 모두 공함을 비춰보시고 모든 고액을 건너셨다.'라는 것까지 관자재보살이 한 말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관자재보살 스스로가 자기 이야기를 한 것으로 보기에는 좀 어색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첫째 문장의 발화자(發話者)는 관자재보살이 아닙니다.
대본에 따르면 그것은 경전편찬자의 해설 부분으로서, 그 부분을 도표에서 찾아보면 '④반야심경의 대강'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를 우리는 분별하지 못하여 그 의미상 혼동을 적지 않게 초래하였습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 소본의 한역 첫 문장과 둘째 문장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는 것이 좋으리라 봅니다.
(경전편찬자가 다음과 같이 해설하였다.)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 5온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 보고서 모든 괴로움을 건널 수 있었느니라.
(사리불의 질문에 대하여 관자재보살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사리자여! 형상있는 것은 공과 다르지 않으며 공은 형상있는 것과 다르지 않아서 형상있는 것이 곧 공이며 공이 곧 형상 있는 것이니 -----.
위의 인용 중에서 경전편찬자의 해설은 사실은 반야바라밀의 내용일 뿐만 아니라 <반야심경>전체의 대강(大綱)인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 이는 대본의 ④를 번역한 것으로 보이며, ⑧의 첫 문장에 대한 번역인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실제 ④의 경우에 5온이 공함을 관찰하는 행위의 주체는 관세음보살로 말해지고 있으나, ⑧의 첫 문장에서는 그 같은 행위의 주체가 '선남자 선여인'으로 나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앞의 도표에서는 비록 소본 <반야심경>이 대본의 ④와 ⑧에 해당된다고 하더라도, 사실 소본에서는 ⑧의 첫 문장의 번역을 생략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반야심경 강의/ 김호성 동국대 인도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