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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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돌담길이 추가 개방되었다는 소식을 어제 저녁에 접했다.
그간 수차례 덕수궁 돌담을 걸으며
영문도 모른채 짜증스레 발길을 돌려
멀리 덕수초등학교, 조선일보사로 우회하던 기억이 새롭다.
덕수궁은 본래 궁궐이 아니었다.
큰아들인 의경세자가 요절하자
과부가 되어 궁궐을 떠나는 며느리,
세자빈(인수대비)을 위해 세조가 마련해준 사저였다.
임진왜란으로 피난갔던 선조가 돌아와
이곳을 행궁으로 삼으면서 궁궐로 쓰이게된다.
선조는 정궁으로 돌아가지 못한채 숨을 거두고
왕위를 이어받은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돌아가면서
인목대비를 유폐시킨 비운의 장소이기도하다.
19세기 말, 러시아, 프랑스, 미국, 영국 등
서구 열강에게 경운궁터의 일부를
공사관 용지로 제공하며 면적이 크게 줄어든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황제는
거처를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게된다.
고종황제의 아관파천이다.
고종황제를 등에 업은 러시아의 세력이 커지자
이를 견제하는 목소리가 비등하게 된다.
일 년 후인 1897년, 고종황제는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 지금의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긴다.
순종에게 양위한 후 정궁을 경복궁으로 옮기고
고종은 여전히 경운궁에 남는다.
순종 즉위 후 태황제인 고종의 호를 '덕수'라 하였고
호를 따라 덕수궁으로 부르게된다
덕수궁 돌담길은
이런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정작 후손인 우리는
덕수궁 돌담길을 온전히 돌아볼수 없는 것이다.
전체 1.1㎞ 중 약 170m는
영국대사관 부지로 통제되고 있었다.
1959년,
서울시로부터 무상점유 허가를 받아 철문을 세웠던
약 100미터가 시민에게 개방됐다.
영국대사관이 소유권을 가진
약 70미터구간은 개방에서 제외됐다.
점심식사를 했던곳에서 출발하니
광화문, 조선일보사를 지나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을 오른쪽으로 끼고 왼쪽에 돌담을 두고 들어간다.
주한 영국대사관 정문이 여전히 버티고있다.
보초근무중인 의경에게 확인해보니
이번에 개방된 곳은 후문쪽 일부구간이란다.
정보의 일부만 확인하고
잔뜩 차올랐던 기대가 무너진다.
내 자신이 싫어진다.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을 지나
덕수궁길을 따라 꺽어지는데
노란 비치파라솔이 물결을 이루고있다.
서울시에서 지원하는
'사회적 경제를 거닐다.'라는 부제의
덕수궁페어샵 장터가 서있다.
4월부터 10월까지
매주 금, 토, 일요일 장터가 열린다.
귀고리, 반지, 스카프 등
각종 소품과 생활용품이 주로 판매되고있다.
참기름 등 유기농제품도 한 둘 눈에 띄고
고구마스낵 등 간단한 간식거리를 파는곳도
한 곳 눈에 띄인다.
원형분수대가 물을 뿜어 올리고있다.
'광화문 연가'를 작곡한
이영훈의 노래비가 분수뒷쪽에 있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길이
덕수궁 후문쪽 돌담길이다.
오른쪽 더 높아보이는 돌담쪽이
주한미국대사관저인 하비브하우스다.
기존에도 통행할수 있었던 구간이지만
이번 추가 개방을 위해 새롭게 단장했다.
콩전문 한정식집 앞에서 돌렸던 발길을
이번에는 앞으로 더 내딛을수 있다.
추가개방을 기념하며
뉴스전문채널인 YTN에서
일기예보 프로그램 방송을 진행하고있다.
어쩌면 내 옆 얼굴이라도
방송에 출연했을지 모를 일이다.
'덕수궁 돌담길,
60년만에 시민품으로 돌려드리며...'
라는 그 동안의 경과에 대한 안내문이다.
다시 무거운 발길을 돌려야한다.
여전히 철통같이 단절된
주한영국대사관 철문이 매정하다.
반가운 소식에 사람들이 찾아든다.
그 끝에서의 반응은 똑같다.
아쉬움, 허탈함.
"저는 이번에 60년 만에 개방된
덕수궁 돌담길에 나와 있는데요..."
아나운서의 멘트가 귀에 울린다.
영욕을 끌어안고
영원히 침묵할것 같던 역사가 꿈틀거리고 있다.
이번 태동이 외침이 되고 아우성이 되어
우리의 자존심의 일부가
빠른 시일내에 바로 서길 기원한다.
첫댓글 연인이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진다는 전해오는 말은 왜 생겼는지 모르겠어요.^^
걷기 좋은 길인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