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3) 신앙체험 등반자(登攀者)
산과 계곡을 그리는 서양화가
모리 시게루 씨
올해 가을에 개최 예정인 개인전(도큐 키치죠지점 10월19일~25일)은 113회째. “그리기 시작하면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아침의 빛’을 찾아
부도, 중병을 극복하고 ‘일본미술전람회(일미전)’에서 수작에
새벽의 오이라세(奥入瀬, 지명) 계류(渓流, 계곡의 시냇물). 새가 지저귀고 시냇물소리가 울려 퍼진다.
태양이 빛을 비추자 아침 안개는 사라지고 주위는 순간 햇빛으로 물든다.
모리 시게루(森谷繁, 71세, 사이타마현<埼玉県> 도다시<戸田市>, 비죠기지부, 부권장, 예술부원) 씨는 “이 ‘아침의 빛’을 유화로 표현하고 싶다.”라며 그동안 수십 차례 발걸음을 옮기며 창작에 도전해왔다.
자연 본연의 색채가 빛나는 것은 화창한 날씨보다 비가 그친 뒤, 구름 사이로 빛이 쏟아지는 순간이라고 한다. 이른바 ‘음영(陰影)’이라는 주인공에 의해 표현되는 대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이다.
모리 씨의 인생 또한 예상치 못한 비바람을 겪으며 강한 생명력으로 캔버스를 화려하게 장식해왔다.
소재는 일본 각지의 산과 계곡. 사실적인 붓놀림으로 녹색을 기조(基調)로 한 색채가 포근한 화풍을 만들어 낸다.
철저한 연구 끝에 이룩한 기법은 46살이 되면서 익힌 것. 역경 속에서 내린 결단이었다.
1992년 거품 경제 붕괴 이후, 큰 불황으로 모리 씨가 경영하던 디자인 사무소는 부도가 났다.
두 아이는 고등학교 3학년과 중학교 1학년의 성장기. 거액의 부채를 끌어안은 체 벼랑 끝에 몰렸다. 이때 “화가가 되자.”라는 일대 결심을 한다.
주위는 맹렬히 반대. 그림을 본격적으로 배운 적 없는 사람이 성공할 리가 없다고. 그런 것은 모리 씨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일자리를 찾아봐도 나이의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하지만 광고디자이너였던 자신의 그림실력에는 약간의 자부심이 있었다.
“기원하고 기원할수록 좋아하는 그림으로 승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커져 갔습니다.”
주위를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명확한 결과를 보여주는 수밖에 없었다.
“반년 후에 있는 현의 전람회에 입선하지 못하면 단호히 화가의 길은 포기할게요. 그때까지 시간을 줘요.” 아내 미에코(69세, 부인부 본부장) 씨에게 고개를 숙였다.
현대 작가의 작품집을 감상하고 긴자의 화랑과 수도권의 미술관을 돌아다녔다. 집 근처의 공원이나 아라카와의 둑에서 스케치한 것들을 개인전을 열고 있는 화가에게 직접 지도를 청했다.
“자네가 그리는 하늘은 마치 벽 같지 않은가.” 저명한 화가의 엄한 의견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매일 본존님께 마음껏 기원하며 창작에 몰두한 지 반년.
나가노현의 카야브키(짚이나 새 따위의 풀로 엮은 이엉) 지붕의 민가를 그린 50호(116㎝×80㎝)의 역작을 완성했다.
섬세한 필치가 평가를 받아 ‘사이타마현 미술전람회’에서 입선을 한다.
또한 같은 시기, 그리고 모아 둔 작품 수십 점을 새로 개업한지 얼마 안 된 대형 상업시설에서 전시할 기회도 얻었다.
이것들은 3일 만에 매진. 평판을 들은 어느 대형 백화점에서 개인전을 의뢰받을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1994년에는 ‘도쿄 도민 미술전’에서 장려상을, 1996년에는 ‘백일회전’에서 입선하는 등 서양화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가슴에 새긴 풍경을 떠올리면서 부드럽게 붓을 쥐고 색을 더해간다.
목표했던 바의 색을 만들어 가면서 깊이 있는 작품으로 완성되는 유화의 백미.
“신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의 때마다 한 겹 또 한 겹 깊어질 수 있었습니다.”
2000년 지병인 요통이 악화되자 중증의 추간판헤르니아(허리디스크, 추간판탈출증)가 습격했다.
매년 개인전을 개최하는 화가로서 많은 작품을 그리는 등 장시간의 제작이 몸에 악영향을 미쳤다. 풍경화의 소재를 찾으러 가기는커녕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온몸에 심한 통증과 저림이 일어날 정도의 상태로 점점 초조함이 몰려들었다.
신심의 선배가 따뜻하게 격려해주었다.
“이러한 고난에 직면하여 신심으로 극복했을 때 더욱 확신이 깊어지게 됩니다.”
모리 씨는 매일, 진지하게 제목을 불렀다. 되살아난 것은 청년시절에 새긴 스승과의 원점.
1973년 9월 ‘제1회 사이타마현 간부총회’, 이때 이케다 선생님은 사이타마의 동지에게 ‘철통 단결’이라는 지침을 보냈다.
회장 앞에 설치된 거대한 패널에 그 지침을 디자인한 사람이 모리 씨였다.
“생애, 스승과 함께 싸운다!” 제목을 부르는 목소리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외과수술을 받겠다고 결단했다.
1개월 후 요추 2개를 8시간에 걸쳐 수술 받는다. 일주일이 지나 미에코 씨의 부축으로 조심조심 침대에서 내려오자 지금까지의 통증이 거짓말처럼, 순조롭게 일어설 수 있었다.
또다시 시련은 계속됐다. 2014년 6월에는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경을 헤맸다. 다행히 적확한 처치가 주효하여 10일 만에 퇴원했다. 많은 동지가 모리 씨의 회복을 기원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더욱 제목을 부르며 좋은 작품을 만든다. 그것이 모든 분께 보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이라세 계류를 비롯해 가미코치, 시카고원 등 취재지로 향할 때는 가능한 한 미에코 씨가 동행하여 운전을 담당했다.
“창작이 막혔을 때 아내에게 조언을 구하자 ‘여기를 더 밝게 하면’이라며 의외로 예리한 곳을 찔러 옵니다.”(웃음)
중병을 극복하고 창작에 면려하는 기쁨이 온몸에 넘쳐흐른다.
그리고 젊은 청년 같은 생명력으로 대자연과 마주한다. 신선하고 아름다운 숨결로 가득 찬 한 붓 한 붓으로 작품에 생명을 불어 넣어 간다.
그리고 그린 ‘봄을 기다리는 시라카와 마을’이 ‘제1회 일미전(일본미술전람회)’ 회화 부문에서 수작(秀作)에 빛났다. 이달 19일까지 롯폰기의 국립 신미술관에서 전시된다.
“그림은 사람의 평가를 받지만 인생이란 작품만은 스스로 도전하고 승리를 쌓아 완성해가는 것 이외에는 없습니다.”
모리 씨가 생명을 걸고 부여잡은 확신이 전진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