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
(배울 -학)
깨칠-학, 학문-학, 공부할-학
고지새-할
16획 子 (아들-자)
절구(⾅)같은 교실에서 친구도 사귀며(爻)부모 품 안(冖)에 있던 아들(子)이 글을 배우니 배울-학
◆ 뜻풀이
1. 배우다 2. 공부하다(工夫--) 3. 흉내내다 4. 모방하다(模倣ㆍ摸倣ㆍ摹倣--)
5. 가르침 6. 학교(學校) 7. 학문(學問) 8. 학자 9. 학통(學統) 10. 학파(學派)
a. 가르치다 (교) b. 고지새(되샛과의 새) (할)
①철학(哲學) 또는 전문적(專門的)인 여러 과학(科學)을 포함(包含)하는 지식(知識)의 조직체(組織體). 곧 현실(現實)의 전체(全體) 또는 그 특수(特殊)한 영역(領域) 및 측면(側面)에 관(關)하여 체계화(體系化)된 지식(知識)의 계통적(系統的) 인식(認識)
②학문(學問)
◆ 회의문자
◇ ⾅(양손잡을 국)에 爻(본받을 효), 冖 (덮을 멱)과 子(아들 자)의 어울림.
사리에 어두운(冖) 아이들(子)이 양손에 책을 잡고(⾅) 스승의 가르침을 본받으며(爻)
‘배운다’는 뜻으로 된 자
◇ ⾅은 두 손으로 마주 잡는 모양. 冖은 본디 宀(집-면)으로서, 공부하는 ‘집’을 뜻함.
◇ 아이들이 양손에 책을 들고 가르침을 본받아 깨우치니 '배우다'를 뜻함
◆ 같은 뜻을 가진 한자(유의자) : 修 닦을 수 練 익힐 련(연) 習 익힐 습
◆ 반대 뜻을 가진 한자(상대자) : 敎 가르칠 교 訓 가르칠 훈, 길 순 誨 가르칠 회
초창기 글꼴은 매우 간단했다. X자형 아래에 육(六)이 있었다.
X자는 훗날 겹쳐서 효(爻)로 썼는데, 점을 칠 때 사용했다는 시초(蓍草)를 포개어 놓은 모습이다. 숫자를 계산하는 것이기에 흔히 ‘산가지’라 부른다. ‘산’은 물론 계산(計算)의 뜻이다.
한편 숫자 ‘여섯’을 뜻하는 六은 본래 ‘집’이었다. 유심히 보면 지붕과 벽면의 모습이 완연하다. 현재는 ‘덮을-멱’(冖)으로 글꼴이 변했다.
따라서 학(學)의 초창기 뜻은 ‘계산을 배우는 집’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산가지 양쪽으로 손가락을 추가했다. 직접 손으로 가르쳐 주면 따라서 배운다는 뜻이다.
누가 이런 집에 가서 배울까? 시간이 흐르면서 집 안에 자(子)를 추가하여 ‘어린아이’가 배운다는 점을 표시했다. 그 과정에서 산가지를 늘어나 위아래로 겹쳐 효(爻)가 되었다.
어린아이는 주의가 산만하기에 종종 ‘사랑의 매질’도 있었는가 보다. 글꼴에 따라서는 ‘막대기를 든 손’의 모양인 복(攵=攴)이 우측에 붙기도 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따라서 학(學)의 본뜻은 ‘계산을 가르치는 집에서 어린이가 배우다’이며, 이로부터 ‘배우다’의 뜻이 나왔다. 학생(學生), 학습(學習), 학업(學業), 유학(留學)등이 그런 뜻으로 쓰였다.
물론 명사로 ‘배우는 곳’의 뜻도 있다. 학교(學校), 학원(學院), 진학(進學), 휴학(休學) 등이 그러하다.
배우는 것은 ‘지식’이므로 ‘학문’의 뜻도 있다. 학술(學術), 문학(文學), 과학(科學), 철학(哲學) 등이 그러하다. 박학다식(博學多識)은 좋으나 곡학아세(曲學阿世)는 나쁘다.
◇학교(學校) : 학생에게 교육을 실시하는 기관
◇학습(學習) : 배워서 익힘
◇학우(學友) : 같이 공부하는 벗
◇학자(學者) : 학문(學問)을 연구한 사람
◇입학(入學) : 학교에 들어감
◇박학다식(博學多識): 학문에 대한 소양이 넓고 아는 것이 많음
◇곡학아세(曲學阿世): 배운 것을 구부려 세상에 아부하다. 학문을 올바르게 펴지 못하고 그것을 왜곡해 가며 세상에 아부하여 출세하려는 태도나 행동을 가리키는 말
[곡학아세(曲學阿世):출전]
원고생(轅固生)은 제(齊)나라 사람으로 《시경(詩經)》에 정통해서 효경제(孝景帝, 재위 BC157∼BC140) 때 박사가 되었다. 그는 성품이 강직해 평소 어떤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고 직언으로 간하는 성격이었다.
어느 날 노자(老子)의 글을 좋아하던 두태후(竇太后, 경제의 어머니)가 원고생을 불러 노자의 글에 대해 묻자 원고생이 대답했다. “그것은 하인들의 말일 뿐입니다.” 두태후는 격노하여 원고생에게 날카로운 병기를 주며 돼지를 찌르게 했다. 원고생이 돼지의 심장을 정확하게 찌르자 돼지는 한칼에 쓰러졌다. 태후는 아무 말이 없었으며 더 이상 죄를 묻지 않았다. 얼마 후 경제는 원고생을 정직하고 청렴한 사람으로 인정하여 청하왕의 태부로 임명했다. 오랜 후에 원고생은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금상(今上)이 즉위해 다시 현량(賢良)으로서 원고생을 불렀으나, 아첨하는 선비들이 그를 헐뜯으며 원고생이 늙었다고 말했으므로 황제는 그를 돌려보냈다. 당시 원고생은 아흔이 넘은 나이였다. 원고생이 부름을 받았을 때 설(薛) 사람 공손홍(公孫弘)도 역시 부름을 받았는데, 곁눈질을 하며 원고생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바라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원고생은 공손홍에게 말했다. “공손자여, 힘써 학문을 바르게 하여 세상에 옳은 말을 하고, 학문을 굽혀 세상에 아부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이 뒤부터 제나라에서 《시경》을 논하는 사람들은 모두 원고생의 말을 바탕으로 했는데, 《시경》으로 귀하게 된 제나라 사람들은 모두 원고생의 제자였다.(今上初卽位, 復以賢良征固. 諸諛儒多疾毁固曰, 固老, 罷歸之. 時固已九十余矣. 固之征也, 薛人公孫弘亦征, 側目而視固. 固曰, 公孫子, 務正學以言, 無曲學以阿世. 自是之後, 齊言詩皆本轅固生也. 諸齊人以詩顯貴, 皆固之弟子也.)」
이 이야기는 《사기(史記) 〈유림열전(儒林列傳)〉》에 나오는데, 원고생이 공손홍에게 충고한 말에서 학문을 굽혀 세상에 아첨한다는 뜻의 ‘곡학아세’가 유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