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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급제한 후 唐에서의 10년 風霜
최치원은 당나라 황제까지 감동시킬 정도로 뛰어난 글 솜씨로 장원급제하였으나 실제로 받은 벼슬은 미관말직에 불과하였고 그마저도 잠시 뿐이었다. 먹고사는 것조차 쉽지 않아 당나라의 지인들에게 신세를 지는 일이 많았다. 특히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에게 도움을 청하여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했다.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황소(黃巢) 토벌에 나설 때 그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서기의 책임을 맡아 하였다. 그후 고변의 천거로 도통순관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都統巡官承務郞殿中侍御史內供奉)에 임명되고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았다는데 이것이 사실상 당나라에서 받은 최고의 벼슬이 아니었나 짐작된다. 이때 군무(軍務)에 종사하면서 지은 글들이 뒤에 그 유명한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으로 엮여진다.
이상은 높고 현실은 암담
바위 봉우리를 보고 읊은 시(石峯)에는 孤雲의 높은 기상이 엿보인다.,
巉嵒絶頂欲摩天(참암절정욕마천) : 가파른 봉우리 하늘에 닿을 듯
海日初開一朶蓮(해일초개일타련) : 바다의 해 처음 떠오르니 한 떨기 연꽃이라
勢削不容凡樹木(세삭부용범수목) : 깎아지른 산세 평범한 나무는 받지 않고
格高唯惹好雲烟(격고유야호운연) : 격조 높아 오직 좋은 구름과 안개를 일으킨다
*조선조 4대 명필 중의 한 분인 한호의 호가 석봉(石峯)인데 이 시와의 관련성은 확실치 않음
백사장(沙汀)을 노래한 구절은 盛唐시절의 이백이나 두보의 시를 연상 할 만큼 아름답다.
煙籠靜練人行絶(연농정련인항절) : 안개가 비단같이 퍼지니 사람 발길 끊어지고
日射凝霜鶴步遲(일사응상학보지) : 햇살이 엉킨 서리에 비치니 학의 걸음 더디구나
別恨滿懷吟到夜(별한만회음도야) : 가슴 가득한 이별의 한 밤 이르도록 읊조리는데
那堪又値月圓時(나감우치월원시) : 또 달마저 둥구니 어찌 견딜 수 있으리오
애닲은 이별의 시(芋江驛亭-우강역 정자에서)도 있고,
沙汀立馬待廻舟(사정입마대회주) 물가 모래밭에 말 세우고 배 오길 기다리는데
一帶烟波萬古愁(일대연파만고수) 한 줄기 물안개 만고의 시름이로다
直得山平兼水渴(직득산평겸수갈) 산이 평평해지고 물이 다 마를 양이면
人間離別始應休(인간이별시응휴) 인간 세상의 이별 비로서 없어지련만
*이 시는 고려 중기 서정시인 정지상의 大東江과 흡사한 정감을 준다 :
雨歇長堤草色多 비 개인 강둑에 봄 풀은 짙어가는데
送君南浦動悲歌 님 보내는 남포엔 슬픈 노래 울리네
大洞江水何時盡 대동강 물은 어느 때나 마를가
別淚年年添綠波 이별의 눈물 해마다 물결 위에 덧뿌리니
고국 신라로 돌아가고 싶으나 성공하기 전에는 갈 수 없는 심정을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東飄西轉路岐塵(동표서전로기진) : 동서로 떠도는 몸 먼지이는 갈림길에
獨策羸驂幾苦辛(독책리참기고신) : 홀로 여윈 말 채직질하며 얼마나 고생하였나
不是不知歸去好(부시부지귀거호) : 돌아가는 것이 좋은 줄 모르는 바 아니지만
只緣歸去又家貧(지연귀거우가빈) : 다만 돌아가도 집이 가난하기 때문이라네
당나라에서 자신을 도와준 사람(上太尉)에게 보낸 시에도 객지의 고달픔과 고향에 대한 향수가 묻어난다.
海內誰憐海外人(해내수연해외인) : 중국 안에서 누가 외국사람 가엾이 여겨주리
問津何處是通津(문진하처시통진) : 어느 곳이 나루로 통하는지 길 물어봅니다
本求食祿非求利(본구식록비구이) : 먹고 살기 위함이지 명리를 구함이 아니고
只爲榮親不爲身(지위영친불위신) : 어버이 영광을 위함이지 나 자신을 위함이 아닙니다
客路離愁江上雨(객로이수강상우) : 떠도는 나그네 시름 강위에 비처럼 내리고
故園歸夢日邊春(고원귀몽일변춘) : 고향으로 돌아가는 꿈 봄 햇살 같습니다
濟川幸遇恩波廣(제천행우은파광) : 어려울 때 도와주어 다행이 고난을 잘 넘겨
願濯凡纓十載塵*(원탁범영십재진) : 이제 십년 세속 티끌 묻은 갓끈 씻기 원합니다.
*纓十載塵(영십재진) ...굴원의 어부사에 나오는 구절, 강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탁하면 발을 닦는다
唐을 떠나 신라로 돌아 가기로 하고
그러나 그의 시 진달래(杜鵑)에서는 唐에 대한 미련과 원망을 엿볼 수 있다.
可惜含芳臨碧海(가석함방임벽해) 가엽어라 꽃다움 품고 바닷가에 피었지만
誰能移植倒朱欄(수능이식도주란) 어느 누가 대가집 난간에 옮겨 심어줄까
與凡草木還殊品(여범초목환수품) 여느 초목과는 다른 품격을 지녔건만
只恐樵夫一例看(지공초부일례간) 다만 나무꾼이 모두 똑같이 볼까 두렵네
그리고 음탕하고 빈둥거리기만 하는 강남의 여자들(江南女)도 보기 싫고,
江南湯風俗(강남탕풍속) : 강남은 그 풍속이 음탕하여
養女嬌且憐(양녀교차련) : 딸자식을 교태스럽고 여리게 키우네
性冶恥針線(성야치침선) : 성품이 바느질 하는 걸 부끄럽게 여기고
粧成調管絃(장성조관현) : 단장하고 악기 연주만 배운다네
所學非雅音(소학비아음) : 배우는 건 건전한 음악도 아니고
多被春心牽(다피춘심견) : 대부분 춘심을 불러일으키는 것들
自謂芳華色(자위방화색) : 스스로 일러 자신의 꽃다운 자색
長占艶陽年(장점염양년) : 오래토록 농염한 젊은 시절 간직할 것처럼 말하지
唐에 함께 유학한 벗들과 함께 신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與君相見且歌吟(여군상견차가음) : 그대들과 만나면 노래 부르고 시 읖조리나
莫恨流年挫壯心(막한류년좌장심) : 흐르는 세월에 웅지 꺾였다 한탄 말라
幸得東風已迎路(행득동풍이영노) : 다행히도 벌써 길에 봄바람 불어오니
好花時節到雞林(호화시절도계림) : 꽃 피는 좋은 시절에는 계림(경주)에 닿으리
큰 기대를 안고 돌아 왔으나
고운 최치원이 唐에서 돌아 왔을 때는 금의환향을 고대하던 그의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 후라고 전해진다. 이는 장원급제한 후 10년 그리고 유학을 떠난 후로는 17년 만인데, 신라로 돌아와 헌강왕으로 부터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에 임명되어 외교문서 등의 작성을 담당하게 된다. 그리고 당나라에서 지은 저술들을 정리하여 왕에게 헌상한다. 문장가로서 능력을 인정받기는 했으나 골품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으로 당나라에서 배운 바를 자신의 뜻대로 펴볼 수가 없었다. 더욱이 이 시기는 사회가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었는데, 중앙귀족들의 권력쟁탈로 지배체제가 흔들리면서 지방세력의 반발과 농민들의 봉기로 이어지면서 신라사회는 전면적인 붕괴의 국면에 접어들었다. 특히 양길(梁吉)과 궁예(弓裔)가 동해안의 군현을 공략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견훤(甄萱)은 백제의 재건을 도모하는 시기였다. 중앙정치에서 한계와 염증을 느낀 최치원은 지방 태수(군수)를 자원하여 외지로 돌며 많은 공적을 세우기기도 하였다. 귀국후 10년, 외직을 두루 거친 후 이를 바탕으로 대대적인 개혁정책인 시무책 10여 조를 올리고 진성여왕은 이를 가납(嘉納)하고 그에게 아찬의 관등을 내렸으나 신라는 이미 이를 시행할 만한 능력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절망은 신라에서도 마찬가지
그는 당나라에 있을 때나 신라에 돌아와서나 모두 난세를 만나 포부를 마음껏 펼쳐보지 못하는 자신의 불우함을 한탄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나 산과 강, 바다를 소요자방(逍遙自放)하며 지냈다. 그가 유람했던 곳으로는 경주 남산(南山), 강주(剛州) 빙산(氷山), 합주(陜州) 청량사(淸涼寺), 지리산 쌍계사(雙溪寺), 합포현(合浦縣) 별서(別墅) 등이 있다. 또 함양과 옥구, 부산의 해운대 등에는 그와 관련된 전승이 남아 있다
권력과 利財에 표변하는 군상들을 보며 지은 시(古意)
狐能化美女(호능화미녀) : 여우는 능히 미녀로 변하고,
狸亦作書生(리역작서생) : 삵괭이도 서생으로 둔갑한다오
誰知異種物(수지이종물) : 누가 알랴, 인간과 다른 종자들이
幻惑同人形(환혹동인형) : 사람과 같은 형상으로 변하여 홀리는지
變化尙非艱(변화상비간) : 형태를 바꾸는 것은 오히려 어렵지 않지만
操心良獨難(조심량독난) : 마음을 부리는 것은 진실로 어렵소.
欲辨眞與僞(욕변진여위) : 참과 거짓을 분별하려거든
願磨心鏡看(원마심경간) : 마음의 거울을 닦고 보시오
또 다른 시(寓興) 에서는 속세에서 이전투구하는 이들을 보고 탄식하여,
願言扃利門(원언경이문) : 바라거니 이욕의 문에 빗장 걸고
不使捐遺體(불사연유체) : 부모님께 받은 몸을 버리지 말라
爭柰探珠者(쟁내탐주자) : 어찌하여 진주 캐는 사람처럼 다투어
輕生入海底(경생입해저) : 목숨 가벼이 여기며 바다 밑에 드는가.
身榮塵易染(신영진이염) : 몸이 영화로우면 속세에 물들기 쉽고
心垢水難洗(심구수난세) : 마음의 때는 물로도 씻기 어렵다네
澹泊誰與論(담박수여론) : 단백한 삶 누구와 더블어 이야기할까
世路嗜甘醴(세로기감례) : 세상살이 달콤한 술만 즐기려 하니
고국 산천을 유람하며 지은 시 중에 낙동강 가 臨鏡臺를 읊은 것이 빼어나다.
시의 분위기가 성당 시절 이백의 山中問答이나 두보의 絶句를 떠올린다.
烟巒簇簇水溶溶(연만족족수용용) 안개낀 메뿌리 웅굿중굿 강물은 넘실넘실
鏡裏人家對碧峰(경리인가대벽봉) 집과 산봉우리 거울인듯 마주 비추네
何處孤帆飽風去(하처고범포풍거) 외로운 돛단배 바람 가득 안고 어디로 가나
瞥然飛鳥杳然踪(별연비조묘연종) 날아가는 새는 어느 결에 아득히 자취를 감추네
지금의 김용사(金龍寺)의 옛 이름인 운봉사(雲峰寺)란 제하의 시,
塔影日邊雪(탑영일변설) : 탑 그림자 해 가장자리의 눈
松聲天畔風(송성천반풍) : 소나무 소리 하늘 가에 부는 바람
煙霞應笑我(연하응소아) : 안개와 노을은 응당 나를 비웃으리
迴步入塵籠(회보입진롱) : 발걸음 돌려 속세로 돌아가는 것을
*운봉사는 경북 문경의 김룡사(金龍寺)의 전신으로 신라 진평왕 10년(588년)에 운달조사가 운달산 자락에 지은 절
속세를 떠나 산속으로
孤雲은 당나라에서 유학을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스님이나 불교에 대한 시를 많이 남겼는데, 이는 유랑하면서 많은 명승사찰을 두루 구경하였기 때문도 있지만 산속으로 들어가 티끌 세상과 담을 쌓고 살고 싶은 소망이 더 컸는지도 모른다. 在唐시절엔 장안 부근 종남산(宗南山) 제곡사(梓谷寺)에 혼자 사는 스님에게 준 시(贈梓谷蘭若獨居僧)도 있다.
除聽松風耳不喧(제청송풍이불훤) : 솔바람 소리 들리는 것 외에는 조용한데
結茅深倚白雲根(결모심의백운근) : 얽은 띠풀집 흰 구름속 깊이 기대어 있네
世人知路翻應恨(세인지로번응한) : 세상사람 길을 알고 번거로이 찾을까 걱정인데
石上莓苔汚履痕(석상매태오리흔) : 벌써 바위 위 이끼 신발 자국으로 더럽혔구나
50년 가까이 참선하고 있는 운문사 지광스님에게 준 시(贈雲門蘭若*智光上人),
雲畔構精廬(운반구정려) : 구름 덮힌 두둑에 오두막을 짓고
安禪四紀*餘(안선사기여) : 조용히 참선한지 근 50년이라.
筇無出山步(공무출산보) : 지팡이는 산 밖에 나 본 일 없고
筆絶入京書(필절입경서) : 붓은 서울 가는 글월 쓰지 않았네
竹架泉聲緊(죽가천성긴) : 대나무 홈통에서 샘물 소리 빠르고
松欞日影疏(송령일영소) : 소나무 창에는 해그림자 성글어지누나.
境高吟不盡(경고음불진) : 높은 경지를 읊다 못하여
瞑目悟眞如(명목오진여) : 눈 감고 眞如*의 진리를 깨우치려 한다
*난야(蘭若)란 불교 용어로 참선하기 좋은 시끄럽지 않고 한적한 곳으로 깊은 산속이나 넓은 들 또는 모래사장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 운문난야는 청도 운문산 운문사 부근의 참선하는 곳이 아닐지.
*기(紀) : 옛날 중국에서 쓰던 시간을 가라키는 단위로 1紀는 12년에 해당
*眞如 : 불교 철학에서 본체를 말한다. 眞이란 허망(虛妄)하지 않음이요, 如는 평등하고 차별이 없음이라.
산속 중에게 주는 시(贈山僧, 또는 入山詩)
僧乎莫道靑山好(승호막도청산호) 중아, 청산이 좋다 말하지 마라
山好何事更出山(산호하사경출산) 산이 좋다면 왜 산에서 다시 나오시나
試看他日吾踪跡(시간타일오종적) 나중에 내 발자취를 살펴 보시게
一入靑山更不還(일입청산갱불환) 한번 청산에 들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
*이 시는 해운대(海雲臺 : 海雲은 최치원 자이다)에 가면 秋夜雨中 이라는 시와 함께 시비로 새겨져 있음
그리고 고운의 시 중에서 가장 널리 회자되고 있는 시 題伽倻山讀書堂(가야산 독서당에 붙이는 글)은 가야산 해인사 부근 홍유동 계곡의 농산정(籠山亭)에도 새겨져 있다
狂奔疊石吼重巒(광분첩석후중만) 미친듯 첩첩 바위 사이를 달려 겹겹 산을 울리니
人語難分咫尺間(인어난분지척간) 사람의 말소리는 지척에서도 알아듣기 어렵네
常恐是非聲到耳(상공시비성도이) 옳다 그르단 세상 시비소리 귀에 들릴까봐
故敎流水盡籠山(고교류수진농산) 흐르는 물로 하여금 온 산을 에워쌓게 하였네
*이은상의 우리말 새김은 아주 간략하다.
미친 물 바위 치며 산을 울리어
지척에서 하는 말도 분간 못 하네.
행여나 세상 시비 귀에 들릴까
흐르는 물을 시켜 산을 감쌌네 ( 이은상 옮김)
*孤雲이 가야산에 든지 700년이 지나 이곳에 온 이항복(李恒福, 1556~1618 조선 선조시)은
伽倻山中作(가야산중작, 가야산 속에서 짓다)란 시로 고운을 떠 올린다.
蒼然暮色來霜藤(창연모색래상등) 창연한 저문 빛은 서리 낀 등나무에 내리고
新月出林西日下(신월출림서일하) 초승달은 숲에서 나오고 서산에 해가 진다
問爾山中老樹精(문이산중로수정) 묻노니, 너 산중의 늙은 나무 정령아
今宵應見孤雲過(금소응견고운과) 오늘 밤 응당 고운이 지나는 것을 보겠지
-孤雲이 지금도 이 가야산 속에 살아 있으리란 얘긴데, 실제로 기록에는 고운이 언제 돌아가셨는지 나와 있지 않음
孤雲은 만년에는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모형(母兄)인 승려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도우(道友)를 맺고 지냈다. 904년(효공왕 8) 무렵 해인사 화엄원(華嚴院)에서 〈법장화상전 法藏和尙傳〉을 지었으며, 908년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 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를 지었고 그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의 入山詩에서 다짐했듯이 가야산이 든 후 다시는 세상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 일설에 의하면 100살에 홀연히 학이 되어 날아갔다고 전해진다.
후대에 더 평가받은 孤雲
최치원의 문학적인 업적에 대하여 고려시대 이인로(李仁老)는 파한집(破閑集)에서 "중국에서 아름다운 이름을 떨친 이로는 최학사(崔學士) 고운(孤雲)이 앞에서 선창(先唱)하였다"라고 찬미했다. 그리고 이규보(李奎報)는 백운소설(白雲小說)에서 당서 예문지(唐書藝文志)에는 최치원의 사륙일권(四六一卷)을 실었으나, 문예열전(文藝列傳)에 최치원의 전(傳)을 설치하지 않았음을 개탄하고 그 이유를 "어찌해서 문예열전에 유독 최치원의 전을 세우지 않았는가? 나의 사의(私意)로는 옛사람들도 시문에 있어서 서로 시기함이 없지 않은데 하물며 최치원은 외로운 외국인의 몸으로 중국에 들어가서 당시의 명사를 압도했음에랴!" 라고 말할 정도로 최치원은 당대의 최상급 문인이였다.
최치원에 대한 이같은 높은 평가는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1495~1594)은 그의 상이회재서(上李晦齋書)에서 "최치원 선생의 문조(文藻)는 신이(神異)하고 그 견문과 실천은 진실로 백세의 스승이라 일컬을 만하다. 변방에서 태어나 문학을 창성하게 한 공은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은 즉 선성(先聖)에 배향하기를 이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를 하겠는가?"라고 하여 최치원을 탁월한 문장가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특히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秋夜雨中(가을 밤 비는 내리고)라는 시, "가을 바람에 괴로이 읊나니, 세상에 날 알아 줄이 적네, 창 밖에는 한 밤의 비가 내리는데, 등 앞의 마음은 만리를 달리네(秋風唯苦吟 世路少知音 窓外三更雨 燈前萬里心)"에 대하여 허균과 이수광이 모두 가장 훌륭한 시라고 평가를 했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들지 않은 수많은 그의 시에 대한 국내외의 평가는 최치원이 시에서 이룩한 높은 경지를 여지없이 웅변해 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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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秋夜雨中 願磨心鏡看 가을저녁비내리듯떨어지는어둠을보며내마음의거울에비친지난날들여다보니살아있음에더없이감사하여 一入靑山更不還
호 孤雲이 정말 어울리는 고운다운 삶을 살은......
그런데 1100년 전 그의 삶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세세히 기록되어 있는지?
우리 박 거사! 고고학내지 역사학에도 심취하고 계신 듯~~~
순수하고 청렴한 일생으로 한조각 외로운 구름되어 신선처럼살다 구름처럼 흩어졌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