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협정 60주년– 뜨거웠던 3년 전쟁의 실상을 전해주는 솔직한 고백
지난 주말 6·25전쟁 ‘백마고지 영웅’인 고 임익순 예비역 대령의 회로록 ‘내 심장의 파편’을 가벼운 마음으로 읽다가 깜짝 놀랄 대목을 발견했다. 이 책은 그의 딸인 임진 씨가 아버지가 남겨 놓은 유고를 정리해 7월 초에 출간한 것이다. 우리 군은 패배하거나 실패한 것, 실수 한 것에 대한 기록은 잘 남겨놓지 않는다. 개인이 쓴 회고록은 더욱 그러해서 대부분이 자기 자랑 일색이다. 진짜 교훈은 실패한 것과 실수한 것을 털어놓고 그 이유를 제대로 분석해야 얻을 수 있는데.
고(故) 임익순 예비역 대령(이하 임대령)은 6·25전쟁이 끝나기 직전인 1953년 5월 5일 대령 계급을 달고 육군 수도사단의 부사단장에 부임했다. 그리고 7월 13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공격을 막는 전투(일명 금성전투)를 하다가 7월15일 중공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가 사라진 14일 뒤인 7월 27일 정전협정이 발효되었다. 덕분에 정전협정으로 인한 포로교환으로 37일 뒤인 8월 21일 그는 귀환하게 되었다. 그는 적의 포로가 되었을 때 겪은 것을 회고록에 담담히 기술해 놓은 것이다. 백마고지 영웅에서 적 포로까지를….
그는 포로가 된 시절을 ‘청룡의 실추’라는 제목으로 묶고, 구체적으로는 ‘지옥문’ ‘지옥로 2가’ ‘지옥로 3가’…’지옥로 8가’로 풀어 상세히 정리해놓았다. 포로가 된 그는 아군이 패주하고 적이 차지한 지역을 통과하면서 소총과 카메라는 물론이고 음식까지도 놓여 있는 아군의 식탁과 포탄을 장전하고 조준상태로 있는 미군의 8인치 포 등을 보면서 아군이 완벽히 기습을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군은 자체 경비도 하지 않고 있다가 적의 습격을 허용한 것이다. 이동하는 중공군을 보면서 그들이 미군기의 공습을 피해 전방으로 물자를 보낸 위장술의 실체도 발견했다.
그때 그는 몸에 작은 권총을 숨기고 있어 죽을 기회를 노렸지만,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고 전전긍긍했다고 적어놓았다. 눈을 감을 때마다 떠오르는 아버지의 모습과 기필코 탈출해야 한다는 투지 등이 자살을 막았다는 솔직한 설명과 함께. 북한은 생포한 국군포로 가운데 전향한 이들을 ‘해방전사’로 불러줬는데, 그는 해방전사들이 목청껏 노래를 부르며 지나가는 것도 목도했다. 그리고 그보다는 여덟 살이 적지만 그와는 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 2기 동기인 강태무 인민군 대좌를 만난 것도 기술해 놓았다(임대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동갑으로 우리 나이로 30인 1946년 경비사관학교 2기생 중 최고령으로 합격했다).
6·25전쟁 발발 1년 전인 1949년 5월 4일 한국군은 동부전선과 서부전선에서 큰 사건을 겪어야 했다. 그날 서부전선의 1사단 11연대는 송악산 전투에서 육탄10용사가 적 토치카로 뛰어드는 사건이 있었다. 동부전선에서는 정반대의 사건이 일어났다. 춘천에 주둔하는 6여단 8연대 1대대의 대대장인 표무원 소령이 대대원을 이끌고 월북을 해버린 것. 자정을 막 넘긴 5일 새벽에는 현리(현재는 인제군 기린면)에 주둔한 6여단 2대대가 강태무 대대장의 인솔로 또 월북해버렸다. 표-강 두 대대장이 대대원을 이끌고 월북한 것 때문에 이응준 육군 총참모장이 사퇴하는 등 한 바탕 소동이 일었다.
그러한 강태무가 임대령을 찾아온 것이다. 사관 후보생 시절 임대령은 동기인 그와 성격이 맞아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강태무는 “국방군 대령이고 2기생인 임모가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가 아는 사람이 분명하다고 판단해 자원해서 그를 찾아왔다고 했다. 강태무는 그를 상대로 잠시 세뇌공작을 하다 중좌를 소개하고 사라졌는데, 그것이 그를 본 마지막이 되었다. 그후 강태무는 인민군 중장(한국군 소장에 해당)까지 하고 군을 나와 2007년 82세로 사망했다.
그는 좋아했던 선배인 송호 장군도 만났다. 송호는 광복 전 중국에서 광복군 5지대장을 했다. 광복 후에는 ‘송호성’이라는 이름으로 경비사관학교 2기로 임관한 다음 바로 소령 계급을 달고 진급해 조선경비대 총사령관이 되었다. 조선경비대 총사령관 시절 송호성은 준장으로 진급해 한국 육군 최초의 장군이 되는 영광을 누렸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하면서 조선경비대는 육군으로 변모하는데 그는 준장 계급으로 초대 육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러다 육군 14연대가 여수-순천사건(1948년 10월)을 일으키자 총사령관직을 내놓게 되었다.
그리고 송호성은 군 핵심권에서 멀어져 호국군 사령관과 초대 5사단장, 초대 청년방위대 고문단장 등을 하다 6·2전쟁을 맞았다. 서울에 살고 있었던 그는 인민군이 서울에 들어오기 전에 서울을 탈출하지 못했다. 그러한 그는 인천상륙작전 후 패퇴하는 인민군과 함께 북한으로 가(납북인지, 월북인지는 불분명) 의용군 부대인 해방전사여단의 단장을 하며 대남방송에 참여했다. 그리고 1959년 타계했는데, 2003년 북한은 납북인사 묘역에 송호성 씨 무덤을 썼음을 사진과 함께 공개한 바 있다.
6·25전쟁이 나기 전 그는 송호성 장군으로부터 큰 신임을 받았다. 임대령은 빨치산 토벌전에 큰 공을 세웠기에 송사령관은 빨치산 토벌전을 해야 할 때마다 그를 찾았다. 그러한 송호성이 북한으로 가서 친북활동을 했는데, 그러한 그를 중공군의 포로가 된 그가 다시 만난 것이다. 임대령은 송호성씨를 만났을 때 왈칵 치미는 눈물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왔다고 적어놓았다.
8월 21일 아침 그를 필두로 한 한국군 포로들이 북한군이 준 진남색 작업복을 입고 판문점으로 갔다. 건너편에 있던 미군 장교가 그의 이름을 불러 앞으로 나갔더니, 그 장교는 서툰 한국말로 “어디 아픈 곳은 없어요?”라고 물었다. 그는 ‘마음이 아프다’는 뜻으로 심장을 가리켰다. 그리고 진남색 작업복과 모자를 벗어 북쪽으로 던져 버리고 맨발에 팬티 차림으로 우리 측 자동차에 올랐다. 그는 환희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는 뜨거운 눈물을 쉴새없이 흘리나왔다고 적어놓았다.
이윽고 귀환용사 환영이라는 깃발이 휘날리는 곳에서 내리자 여성이 포함된 많은 외신기자들이 그를 에워쌌다. 그때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아내가 다가왔다. 그는 아내를 껴안지 않고 아내 품에 있던 둘째 딸을 받아 안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다 안면이 있는 최석 소장(교환귀환자 인수본부장)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 외신기자들은 부인은 본체만체하고 남을 보고 울음을 터뜨리는 그를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때 최소장이 “임대령! 답례를 해-”라고 했다.
그리고 보니 의장대와 군악대가 그를 향해 경례를 하고 있었다. 그는 팬티 바람으로 의장대를 향해 거수경례를 했다. 그는 팬티 차림으로 의장대 경례를 받은 사람은 그가 전무후무할 것이다라고 적어놓았다. 그는 지옥여행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임대령은 회고록에서 경비사관학교 시절 동갑내기(1917년생) 박정희 대통령은 103번, 그는 104번이어서 나란히 앉아 수강했다는 것과, 그는 애국가 3절을 알고 있지 못했는데 박정희는 정확히 알고 있어 기입했기에, 그것을 베껴 썼다가 둘 다 커닝 혐의로 걸렸던 것 등의 에피소드를 개했다. 학생과에 불려간 두 사람은 ‘누가 베껴 썼는가’란 질문에 서로 베껴 썼다고 주장해, 친해진 과정도 소개했다. 박정희 후보생과 몰래 사관학교를 빠져나가 술을 마시고 당당히 정문으로 들어온 것도 적어 놓았다.
임대령은 당시에는 군인이라면 누구나 즐겼던 술과 담배를 멀리한 원칙주의자였다. 여순사건 후 빨치산 토벌전에서 큰 공을 세웠던 그는 6·25전쟁 중인 1951년 9월 철원에 주둔하게 된 9사단 30연대장을 맡아 유명한 백마고지 전투를 치름으로써 ‘백마고지의 영웅’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원래 그 고지는 이름이 없고 높이가 395m이기에 395고지 등으로 불렸다. 그는 그 고지를 뺏는 전투에서 이기려면 고지 이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참모들과 회의를 가졌다. 그 회의에서 그 고지는 적의 포격을 하도 많이 받아 산등성이가 하얗게 드러났기에 ‘백마(白馬)의 등’ 같다고 하여 ‘백마고지’로 부르자는 합의가 나왔다.
1951년 10월 중공군 38군(우리의 군단에 해당)과 30연대를 중심으로 한 국군 9사단이 이 고지를 놓고 12번 뺏고 빼앗는 전투를 거듭했다. 하도 많이 주인이 바뀌었기에 이 전투를 30연대는 ‘피스톤 작전’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30연대를 중심으로 한 9사단이 최종적으로 이 고지를 확보했다. 백마고지 신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한국군이 단독으로 전방의 중요 고지를 격전 끝에 차지한 것이다. 미군은 한국군을 믿지 않았다. 미군 10군단장은 한국군 9사단으로 백마고지를 확보하지 못한다고 보고 미군 사단을 투입하려고 했으나 김종오 사단장 이하 9사단 간부들이 반대해서 이룬 승리였다.
이 승리 덕분에 9사단은 ‘백마 부대’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가장 큰 공은 세운 30연대장 임대령에게 외국인에게 주는 최고 훈장인 Reason of Merino를 수여했다. 백마고지 전투는 미 육군 교재에 격전사례로 올라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회고록에 백마고지의 영웅이 된 작전보다는 적의 포로가 됐던 시절에 대해 더 많이 적어놓았다.
북한에서 돌아온 임대령은 그때까지도 암약하던 빨치산을 토벌하는 작전에 투입돼 모든 빨치산을 소탕했다. 그러나 포로 출신이라는 것이 약점이 돼 더 이상 진급하지 못했다. 그는 전쟁터에서는 영웅이었지만 일상적인 생활에서는 쉽게 타인에게 동조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는 군에 만연돼 있는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 꼬장꼬장하게 따졌던 것이다. 그리고 5·16 직후 만 10년의 대령 생활을 끝내고 예편했다.
7월 27일은 정전협정 체결60주년이 되는 날이다. 1953년의 한반도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알고 싶다면, 그 시절의 20~30대들은 어떤 생각과 고민을 하고 살았는지 알고 싶다면 고 임익순 대령의 회고록 ‘내 심장의 파편’을 일독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많은 전쟁 회고록이 미담과 자화자찬 일색이지만 이 회고록은 자아비판을 포함한 많은 비판을 담고 있다. 실재로 그는 북한군이 쏜 포탄 파편을 심장 근처에 박아놓고 평생을 살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