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읍 두암교회
순교터
1977년 교단 지방회에서 순교정신을 기리기 위해 순교기념탑
|
두암교회는 1949년 1월 7일에 세워졌다.
아들 김용은 전도사(전 군산중동교회 원로목사, 2008년 7월 소천)의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게된 윤임례 집사의 가정을 중심으로
윤임례 집사의 집에서 함께 모여 기도하며 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교회가 창립된 지 얼마 안 되어 임동선 전도사를 초청해 반공강연 겸 부흥집회를 가졌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정읍에도 공산군이 들어왔고
특히 임동선 전도사를 초청해 부흥집회를 열었다는 이유로
김용은 전도사를 체포하기 위해 가족과 성도들을 위협하고
날마다 가택수색을 벌이면서 예배 중지령까지 내렸다.
그러나 성도들은 굴하지 않고 끌려가 고문을 당하면서까지 교회를 굳건히 지켰다.
그러자 기독교 반동들은 씨를 말려야 한다면서
1950년 9월 10일 부터 10월 26일 사이
몽둥이와 대창을 든 공산주의자들은 성도들과 그 가족들 심지어 아이들까지 개 패 듯 하여
결국 윤집사와 아이들은 순교했고
김용은 전도사 동생 김용채 집사는 총에 맞아 고부로 옮겨 치료하던 중 순교하였으며
교회와 교인들의 집안에 짚을 넣고 불을 질러 태워 버렸다.
김용은 전도사의 친구 박호준 집사도 이 때 살해되었다.
이들은 죽는 순간에도 공산당에게
“예수 믿고 천당 가야 한다” 며 전도를 하며 순교를 했다고 전한다.
이 때 학살된 교인은 모두 23명으로 후에 공산군이 철수한 후
서명선 목사와 김용례 사모가 두암 마을을 방문해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했다고 한다.
순교자들은 거의 모두 윤임례 집사의 가족이었다.
6명이 가족이고 16명이 친척들이었다.
윤임례 집사와 둘째 아들 김용채 집사, 며느리 조선환 집사 등 일가족
정읍농업고등학교 학생회장이던 김용술 씨와 그의 가족
김용은 전도사의 친구 박호준 등 23명이다.
그후 1964년 두암 마을 출신인 김태곤 전도사가 고향집에서 주일학교를 열면서 두암 교회는 재건됐다.
66년에는 교회를 새로 건축했을 뿐만 아니라
가매장했던 순교자들의 무덤을 교회 동산으로 이장하고 ‘순교자 묘’로 합장했다.
순교의 피가 밑거름이 되어
윤임례 집사의 아들인 김용은 목사와 김용칠 목사 형제는, . .
성결교회 총회장을 역임 등 이 집안에서 22명의 목회자가 배출되었다.
동생 김용칠 목사님이 먼저 소천하시고
순교 당시 전도사였던 김용은 목사님은 2008년 7월 30일 91세의 일기로 군산 중동교회에서 소천하셨다.
2008. 9. 18. 오 영 석
故
김용은 목사님이 마지막 남기신 글
배고팠습니다.
배울 수 없었습니다.
외로웠습니다.
울고 싶어도 울 수 없었습니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었습니다.
홀로 되신 어머님과 어린 동생들과
아버님이 남기고 가신 빚 때문입니다.
빚을 재촉할까 무서웠습니다.
눈치를 보며 피해 다녔습니다.
아버지 없는 16세의 소년이었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것을 본 어른들이
‘오그라진다’ 걱정을 하셨습니다.
손이 큰 것, 발이 큰 것, 일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나에게 예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여 집사님을 통하여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부르지 못한 나는 하나님 아버지를
여러 번 불렀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 아버지····!
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맹수가 있는 월명산에 올랐습니다.
밤새도록 부르짖었습니다.
정오쯤에 빛이 나타났습니다.
바닷가로 인도를 받았습니다.
일본 후쿠오카행 배를 타고 일본에 갔습니다.
주경야독을 하며 향학열을 불태웠습니다.
꿈을 접어야 할 위기가 왔습니다.
어머님의 중화상이었습니다.
들판으로 나가서 밤새워 울었습니다.
우리 어머님을 살려 주세요 우리 엄마가 죽으면 안 돼요
빛이 나타났습니다.
그 빛이 현해탄을 건너 고향에 비추었습니다.
어머님이 살아나셨습니다.
돈을 보내고 계속 공부하였습니다.
함경남도 흥남으로 와서 큰 사업을 하였습니다.
두 가지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빚을 갚았습니다.
어머니에게 기와집을 지어드리겠다는 약속을 지켰습니다.
제 생애에 큰 기쁨 중 하나입니다.
고향에 있는 가족들과 친지들이 흥남으로 와서 돈을 벌었습니다.
돌아갈 때는 송아지 값을 주어 고향으로 보냈습니다.
나라를 잃은 아픔을 가지고 고향으로 피신해 왔습니다.
농민들도 먹지 못하는 쌀을 일본을 위해
공출하는 것을 보고 면장 책상을 뒤엎었습니다.
갈비뼈가 부러지도록 맞았습니다.
기절을 했습니다.
공산당이 어머님과 아들을 죽였습니다.
사랑하는 동생 내외와 어린 조카들이 총에 맞아 죽고 우물에 수장되었습니다.
7번의 총상 앞에서 살아난 나는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있습니까?
물어도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하바국 선지자도 말했습니다.
사람 살려! 아무리 외쳐도 주님은 들어주지를 않으시고
사람 죽이네! 하고 소리 질러도 주님은 구출해 주지를 않으시니
이런 일이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합니까?
하바국의 외침은 저의 외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서 6절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서를 떠난 천사를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라는
말씀을 듣고 눈물을 펑펑 흘렸습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나올 때 빛이 나타났습니다.
빛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갔더니 사람이 나타나
중동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증동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놀라운 부흥을 체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병든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났습니다.
사람들을 모아 주셨습니다.
3번의 교회 건축을 하였습니다.
성도들의 기도로 세웠습니다.
38년 동안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기쁨도 즐거움도 고통도 아픔도 많았습니다.
나는 어머님을 사랑합니다.
홀로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돌보았습니다.
배고픈 사람들의 옆에 있었습니다.
동생을 생각하고 갇힌 자를 돌아보았습니다.
몸이 불편한 장애우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복음이 필요한 곳은 어디든지 달려갔습니다.
은퇴 후에도 계속하였습니다.
집도 땅도 통장도 없습니다.
주님이 저의 전부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약한 것을 아시고 가시를 주셨습니다.
정금 같게 하시려고 단련하시려고 ······
나의 가시를 보고 사람들은 우셨습니다.
나에게 필요한 가시를 주셨기에 가시를 버릴 수 없었습니다.
끝까지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마지막까지 힘들고 외로운 길이었습니다.
나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옆에서 힘이 되어주신 분들이 있습니다.
이제 사랑의 빚만 남기고 떠나야 하겠습니다.
집중형의 기질 때문에, 뜻을 세우면 반드시 이루려고 힘썼습니다.
주위 사람들을 잘 돌아보지 못했습니다.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을 용서해 주세요.
장미에 가시가 있어도 사랑하듯
저의 약한 것을 보고도 끝까지 사랑하심을 감사합니다.
저는 영원한 것을 위하여 영원하지 못한 것을 버렸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하고 살려고 했습니다.
나는 본향 집으로 갑니다.
그리운 어머니도 볼 것입니다.
가족들, 성도들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천국에서 만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