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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 마 24:1-14
사람을 가리켜 “시간속의 존재”라고도 말합니다. 그 이유는 오직 인간만이 시간을 알고, 시간을 정하고, 시간을 헤아리고, 지키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우리 인간은 시간속에서 태어나서, 시간과 더불어 살다가, 영원한 시간속으로 사라져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시간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막상 “시간이 무엇이냐”고 묻게 되면 정확하게 대답하기가 매우 어려워지게 됩니다. 시간이 어떤 것인가를 알려면, 만질 수 있거나 눈에 볼 수 있어야만 하는데, 시간은 그 흔적도 없을 뿐 아니라, 그림자도 없는 무형, 무취, 무색의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같은 신학자는 그의 참회록에서 “도대체 시간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묻는 이가 없으면 아는 듯도 하다가, 막상 묻는 이에게 설명하려 들려면 말문이 막히고 만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과거를 거쳐 현재를 살아가고 있으며 내일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에 대해서는 분명히 말할 수 있지만 미래의 시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할 수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인간의 약점이 있고, 제한성이 있으며 고통스러운 비극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시간에는 끝이 있고, 한 개인의 삶에 끝이 있듯이 이세상도 끝나게 되는 시점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날과 그때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것도 알려주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날은 천사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심으로써, 그날과 그때가 철저히 하늘의 비밀로 지켜지고 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누군가가 그 시간에 대해 말하거나 그날을 정한다고 하면, 그는 비성경적이요, 사이비요, 거짓 그리스도요, 이단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 끝날에 일어나게 될 여러 가지 사건과 현상, 그리고 징조들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세상 끝날을 향해 걸어가고 있으며,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에게는 중요한 교훈이요, 생명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금주, 단주를 희망하는 사람들의 카페 ‘나는 알콜중독자다’에 올라온 글입니다. “다 좋을 수만은 없는 게 세상살이입니다. 때론 져야하고, 손해 봐야 하는 일이 부지기수로 찾아올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조금은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야지요. 그럼요. 모든 것은 담담함속에서 피어나는 것이니까요. 힘들지요. 나보다 당신이 더 힘들겠지요. 그렇지만 나도 힘들게 견디니까요. 당신도 견딜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힘내서 담담하게 오늘만, 딱 오늘만 견디면서 살았으면 합니다.”
술을 배우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끊는 것은 너무 힘듭니다. 한잔 두잔 하던 것이, 나중에 알코올중독에 이를 수 있습니다. 15살 이전에 술을 먹은 사람은, 알코올중독에 이를 가능성이 50%나 높다고 합니다. 알코올중독은 의학적인 용어로 ‘알코올남용, 알코올의존’이라고 합니다. 알코올 남용은 과도한 음주로 인한, 정신적, 신체적, 사회적 기능에 장애가 오는 것을 일컫는 말이며, 알코올 남용이 심한 경우 알코올 의존에 이르게 됩니다. (1) 알코올 남용은 개인 건강이나 사회생활에 지장을 주는 상태입니다. 알코올 남용은 알코올 의존과는 달리, 신체적 의존이나 술의 양이 증가하는 현상이나, 금단 증상이 없는 상태입니다. (2) 알코올 의존은 술을 끊임없이 마시려 합니다. 같은 음주 효과를 얻기 위한 술의 양이 날이 갈수록 증가하게 됩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금단증상이 나타나는 상태입니다.
알코올 중독자 치료를 돕는 기관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치료가 쉽지 않습니다. 프로그램에 참여한다고, 단번에 성공하는 경우는 사실상 없습니다. 어렵게 성공한 사람들이, 또는 치료 과정에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격려하며 응원합니다. 카페에 올라온 글처럼, “힘들지요. 나보다 당신이 더 힘들겠지요. 그렇지만 나도 힘들게 견디니까요. 당신도 견딜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힘내서 담담하게 오늘만, 딱 오늘만 견디면서 살았으면 합니다.” 맞습니다. 딱 오늘만 견디는 것입니다. 멀리 생각하면 엄두가 안 나지만, 딱 오늘만 견디자고 하면, 용기와 의욕이 생깁니다. 가정생활도 견뎌야 할 때가 있습니다. 부부관계도 꼭 좋을 때만 있는 게 아닙니다. 부모자식관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돌아보면 좋을 때도 있었지만, 고통스러울 때도 있었습니다. 좋을 때 즐거울 때는 누렸고, 고통스러울 때 아플 때는 견뎠습니다. 힘들 때 잘 견뎌준 여러분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절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화를 선포하셨던 예수님이 성전에 나오셨습니다. 그런 외식과 위선을 일삼는 종교지도자들이, 똬리를 틀고 있는 성전에, 주님이 무슨 미련이 있겠습니까? 주님은 그곳에서 한 시라도 빨리 벗어나고픈 마음 밖에 없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화를 선포하신 예수님도 마음이 불편하였고, 힘이 빠졌습니다. 예수님 마음이야 축복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받아야 할 영광까지도 가로채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을 어떻게 축복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외식의 가면을 쓰고 살았습니다. 사람들 앞에 가면을 쓰고 섰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가면을 벗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들의 가면을 벗기셨습니다. 가면 뒤에 감춰진 그들의 실제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누구도 보지 못한, 심지어 자신들조차 느끼지 못한,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그런 모습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지적을 누가하느냐에 따라, 그 지적이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들이 존경하는 랍비도 아니고, 랍비로 인정하기도 어려운 사람이 와서, 자신들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화를 선포하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표현입니다. 아주 예수님이 날 잡으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의 반응이 궁금할 정도입니다. 도끼눈을 하고, 이를 갈고 있었을 게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성전에 남겨둔 채, 유유히 성전을 빠져나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는 달리 제자들은 성전 건물에 마음이 팔려 있었습니다. 성전 건물을 가리키며, 예수님께 “저 성전 좀 보세요” 했습니다. 사실 성전 건물이 대단하긴 했습니다. 당대에 그만한 건물이 없었습니다. 헤롯이 성전 건물을 짓기 위해, 보통 심혈을 기울인 게 아닙니다. 온 국력을 동원하여 사십 몇 년 동안 지었습니다. 건물적인 가치만 놓고 보면, 최고의 건축물이었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의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감탄에 시큰둥했습니다.
2절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과한 리액션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그래도 “어, 그래, 건축물로는 최고지. 세계 어디 가도 이만한 건물이 흔하지 않지.”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재미없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예수님은 제자들더러 보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분명히 보고 말하는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보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성전 건물의 외형은 봤는데, 성전 건물이 장차 어떻게 될지 몰랐던 것입니다. 사실 제자들이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정치 지도자들도 종교 지도자들도, 성전 건물의 운명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 웅장한 건축물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질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더구나 그 건물이 이방 우상의 신전도 아니고, 만군의 하나님을 모신 성전 아닙니까?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이 지나쳐 보입니다. 다른 말씀은 몰라도, 성전 파괴, 성전 멸망에 대해서는, 수습이 불가능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아 올무에 걸려고 하는데, 들으라는 듯이 작심 발언을 하신 것입니다. 그 자리에 종교지도자들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몸싸움이 일어났을 게 분명합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대로, 성전이 파괴되어 돌 하나에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졌느냐입니다. A.D.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이 이끄는 로마 군대에 의해, 실제로 그렇게 되고야 말았습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그게 성전이 완공된 후 7-8년 후의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성전이 신앙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충격이 컸겠습니까? 그들에게 성전이 무너졌다는 것은, 모든 것이 무너진 것입니다. 세상이 끝났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나와서 가신 곳은 감람산이었습니다.
3절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감람산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즐겨 찾던 곳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얼마 남지 않는 시간을,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쓰셨습니다. 제자들이 느끼기에, 예수님이 보통 때 같지 않습니다. 발언 수위가 높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을 대놓고 공격하십니다. 그들에게 화를 선포하십니다. 성전이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될 거라고 하십니다. 지켜보는 제자들은 불안하기만 했습니다. 너무나 거침없는 주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현기증이 날 정도였습니다. 마침 편안한 장소에 왔습니다. 감람산은 제자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줬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궁금하던 바를 편안하게 물었습니다.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사실 그 대단하고 웅장한 성전 건물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뜨려질 정도면, 다른 건물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와중에 사람이라고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제자들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어했습니다. 그래서 그 때라도 알고 싶어 했습니다. 때를 안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마는, 그게 사람들의 심리입니다. 제자들의 걱정스런 질문에,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정확한 날짜가 아닌, 그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주의시키셨습니다.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 있을 징조로, 미혹하는 자들이 많이 일어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임하심이 없다고 말하는 자도 있습니다. 세상 끝이 없다고 말하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미혹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경계 대상은 불신자들이 아닙니다. 타종교인도 아닙니다. 그들에게 미혹될 가능성은 아주 낮습니다. 기독교가 경계해야 할 대상은, 이단들과 사이비 집단입니다. 자신들도 기독교인양 가면을 쓰고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가짜가 더 진짜 같은 행세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고 어중간히 알면 미혹될 수 있습니다. 긴장하지 않고 넋 놓고 있다가는 미혹될 수 있습니다. 깨어 있지 않고 영적으로 잠들어 있다가는 미혹될 수 있습니다. 어차피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옵니다. 우리가 아무리 오지 말라고 기도해도 옵니다. 우리는 그 날이 올 것을 알고, 그 때를 대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미혹의 내용이 무엇인지도 알려주셨습니다.
5절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서로 자기가 그리스도라고 주장할 거라는 것입니다. 한두 사람이 아니고 많은 사람이 자기가 예수라고 하고, 내가 그리스도라고 주장할 거라는 것입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루살렘 멸망 직전인 A.D. 66-70년경에, 실제로 많은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났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 것으로 압니다. 세상의 끝이 가까워질수록, 그런 사람들이 늘어났으면 늘어났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상식적인 사고만 해도 분별이 가능할 법한데, 황당한 교리에 미혹 당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배움이 부족한가 하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다수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많이 빠집니다. 특히 대학생들이 많이 넘어갑니다. 고등부 때 진학 핑계로 교회와 담쌓았던 애들이, 대학에 가서 이단 동아리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다 등록금까지 갖다 바치고, 동아리 활동하느라 학사 경고까지 받습니다. 특히 집 떠나 기숙사 생활, 또는 자취하는 자녀들을 위한 기도제목 중에 하나가, 이단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아예 동아리에 가입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단이 동아리를 활용하여, 포교영역을 넓혀가기 때문입니다. 특히 대면수업이 진행됨에 따라, 더욱 기승을 부린다고 합니다.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 있을 징조로, 난리와 난리 소문이 들릴 거라고 했습니다.
6절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난리는 전쟁을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전쟁이 일어날 뿐만아니라, 전쟁의 소문이 퍼질 거라는 말입니다. 역시 요세푸스에 의하면, A.D. 70년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까지, 수많은 전쟁과 전쟁 소문이 퍼졌다고 합니다. 전쟁에 비할 수 없겠지만, 전쟁 소문도 사람에게 공포를 줍니다. 지금 전 세계는 테러 공포로 떨고 있습니다. 이슬람 수니파 무장단체인 IS의 묻지마식 무차별 테러에 공포를 느끼고 있습니다. 이제 세계 여행을 떠나려면, 생명보험은 필수로 들고 가야 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한 때는 중동이 세계의 화약고로 불렸지만, 이제는 한반도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유엔의 반복된 제재에도 북한은 핵개발을 포기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우리도 핵으로 무장해야 한다며 전술핵 배치를 주장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도 핵개발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무모한 정치적 주장인지 알 수 있는데, 그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모양새입니다. 확실한 것은, 우리나라를 둘러싸고 있는 강대국인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그 어떤 나라도 남북이 통일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도 높지 않습니다.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날에 일어날 징조로, 기근과 지진이 있습니다.
7절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기근은 당시 흔했습니다. 저수시설이 충분하지 못했고, 그쪽 지역이 우기에만 비가 왔기에, 기근을 극복하는 것이 무척 힘들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지난 여름 비가 안 와서 고생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혹시 제한급수까지는 아니더라도 비가 오지 않아 비가 오기를 고대했었습니다. 그런데 작년와 올해 부산에서는, 태풍으로 반지하방과 차량이 침수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와는 떨어져 있지만, 미국과 그 인접 국가들은 허리케인으로 인해, 엄청난 인명 재산 피해가 있습니다. 불과 한 달 사이에 몇 개씩 허리케인이, 그 나라들을 덮친 것입니다. 지진은 어떤가요? 지진 역시 예루살렘이나 로마, 라오디게아, 그레데 주변 지역에서 종종 발생했다고 합니다. 몇 년전 경주에 5.8, 포항에 5.4 지진이 발생한 후, 오랜 여진으로 잠못 이루는 시간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이 지역이 원자력발전소 밀집 지역이라서, 특히 불안감이 더해졌습니다. 원자력발전소의 내진 설계가 6.5라고 하는데, 그게 최대치라면 5.8에도 영향이 전혀 없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5.8이나 5.4가 왔다면, 6.5가 오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아시아투데이에 실린 기사를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기상청 관계자는 “아직까지 확정된 것은 없지만 현재 최고 수준을 6.2까지 보고 있다”며, “하지만 학계에서는 6.5~6.8까지 발생할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보고 있어, 그에 맞게 최고 수준도 올려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더 이상 지진 안전지대가 아닙니다. 최근에 필리핀 남부, 칠레 태평양연안,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멕시코 중남부 지역에서 6.5에서 8.1의 강진이 잇달아 발생하여, 적게는 수십명, 많게는 수백명의 인명 피해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재산 피해를 냈습니다. 문제는 지진 발생횟수가 부쩍 잦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BBC 방송이, 2004년 인도네시아 쓰나미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닌, 미국 알래스카에 설치된 대규모 안테나 장치, 하프(HAARP) 연구소가 기후를 조작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한 바 있습니다. 2008년 중국 쓰촨 대지진, 2010년 아이티 대지진 등이, 하프의 소행이라는 설도 있을 정도입니다. 이쯤되면 인간 스스로가, 종말의 시간을 앞당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합니다.
8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더 큰 일이 다가옵니다.
9절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자연적인 재해가 아닌 직접적인 박해입니다. 예수 믿으면 조금 살기 불편해진다는 정도가 아니다. “너희를 죽이리니” 심지어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순교로서 신앙을 지켜야 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떠날 신대륙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믿음의 변절자가 한 둘이 아닐 거라고 했습니다.
10절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실족한 자, 곧 신앙공동체로부터 떨어져나간 사람들이 힘들게 할 거라는 것입니다. 꼭 보면 변절자들이 있습니다. 안팎으로 공격을 받아, 생각보다 흥행에 실패한 영화 ‘군함도’에서도, 변절자 윤학철로 인해,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이 고통을 받고 죽임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그게 영화속의 장면이 아닌, 실제로 그런 일이 그때 믿음의 공동체 내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내부의 적이 더 무서운 법입니다. 그 와중에 또 거짓 선지자까지 설칩니다.
11절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그러니 많은 사람이 미혹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신앙을 지키는 것은 죽음밖에 없다는, 사즉생의 각오가 없는 한, 거의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가족 중 변절자가 생겨, 회유와 협박을 해올 때, 보통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 때는 법도 필요없습니다.
12절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불법이 성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법을 만들면 뭐합니까? 법을 지키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법망은 보면 조금은 뚫려있습니다. 그런데 불법이 일상화됩니다. 불법이 상식이고, 불법이 정상이 됩니다. 거기에 사랑이 식어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사랑과 율법의 관계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롬 13:10절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의 완성으로서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율법을 잘 지켜도, 사랑이 없으면 미완성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새계명을 주셨습니다. 요 13: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새 계명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서로 사랑하라.” 새 계명은 바로 사랑의 계명인 것입니다. 사랑이 식어진 시대야말로, 가장 불행한 시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시대는 사랑이 점점 식어가고 있습니다. 사랑의 온도, 사랑의 열기가 점차 떨어지고 있습니다. 점점 이웃에 대해 무관심해합니다. 괜히 관심을 가져봤자 좋을 거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집에 큰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굳이 신경쓰지 않습니다. 누가 아무리 사랑을 외쳐도 반응이 별로 없습니다.
13절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런 시대에서도 구원을 얻는 자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끝까지 견디는 자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씀에는 구원을 얻을 자가 많지 않을 거라는 뜻이 있습니다. 키질이 없이는 알곡과 쭉정이를 가릴 수 없습니다. 이런 재난과 고통은 하나님의 키질인 셈입니다. 끝까지 키질에서 견디는 사람이 알곡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처음에 키 안에 있었다고, 끝까지 키 안에 있으리란 보장이 없습니다.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중도에 포기하면 안 됩니다. 끝까지 붙어있어야 합니다. 중간에 떨어져나가면 안 됩니다. 믿음이란 다른 말로 견디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거기서 거기입니다. ‘얼마나 잘 견디느냐’에서 결정됩니다. ‘언제까지 견디느냐’에서 승부가 판가름납니다. 이제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14절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이 땅에 미전도종족이 얼마남지 않았다고들 합니다. 가깝게는 수십년 내에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날과 그 시는 천사들도 모르지만, 여러 징조들을 통해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이, 꽤 가까워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끝지점을 살아가는 마지막 주자들입니다. 세상 끝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뿐입니다. 믿음입니다. 그 믿음 끝까지 잘 지켜야 합니다.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유대전쟁이라는 대재난 앞에서, 당혹스러워하던 믿음의 형제자매들에게, 마태복음 기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빌려서 전해준, 충고를 들었습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 크고 작은,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대재난의 위협 아래 놓여 있습니다. 그것을 사뿐히 뛰어넘어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현실을 그대로 직면해야 합니다. 마지막에 행하실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희망의 빛 안에서, 그 모든 현실을 견뎌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주님이 약속하신대로, 끝까지 견디므로 구원을 받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인간이 세상을 바르게 사는 길은 우리에게 마지막이 있음을 기억하고, 그것을 준비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그러나 그 마지막을 넘어서서,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길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희생과 겸손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 주님을 따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생명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달려갈 길로 힘차게 달려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마지막 환난의 때 끝까지 견딤으로, 승리의 주님과 함께, 구원 받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까지 버티는 것이 믿음입니다. / 마 24:15-31
우리나라에도 잘못된 사상을 가진 이단들이, 종말론을 국민들에게 잘못 심어주어, 건전한 교회들이 말세나 종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려면, 상당히 부담을 가지게 됩니다. 정작 말세의 징조를 외쳐야 될 교회들이, 이단들의 떠드는 소리에 주눅들어 말하기 힘든 시대를 맞았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이 시대를 성경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참으로 예측할 수 없는 혼돈의 시대입니다. 세상은 너무도 급변하고 있고, 전쟁과 기근, 지진들로 지구촌 전체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종말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렇다고 이단들이 즐겨 쓰는 것처럼 직장을 그만두고, 가정도 포기한 체 산으로, 어떤 특정한 장소로 갈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이어 말세의 징조들을 보면서, 예수님이 어떻게 다시 오시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보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꾸 이상한 소리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본문을 통하여 말세의 징조를 더 살펴보고, 신랑이신 예수님을 맞을 신부처럼 더욱 깨어 있어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03호 세입자’라는 블러그에 올려진 글입니다. “그럼에도 사는 것은 버티기 아니겠는가? 무엇을 버텨야할지, 그것을 버텨서 무엇이 남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할 말이 없지만, 나는 버티기로 승부할 생각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징징대는 것도 하루 이틀이고,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 누워있는 나를 경멸하는 것도, 이젠 부질없어 보인다. 그저 지금을 버텨야한다. 뭐, 니가 그렇게 무슨 걱정이 있어 버티냐고 묻는다면, 사람들 거의 모두에게 보이지 않는 짐 덩어리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쉽게 남의 인생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하고 싶다. 공부가 되든 안되든 붙잡고 있어야 하고, 돈이 벌리는 족족 나가야하는 현실이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상황인지 가늠이 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쉽게 무너지지도 않는다. 처음 사는 인생이라지만, 지금 이거 어디서 본 것만 같다. 꼭 해본 것만 같다. 그래서 오늘도 엉덩이 꼭 붙잡고 앉아, 뭐라도 해볼 참이다. 이미 몇 번 ‘이게 뭐라고?, 주말인데?’에 약해졌지만, 결국 포기하지 않음으로서 지금 자리를 지켜내고 싶구나.”
그렇습니다. 인생은 누림과 버팀의 연속극입니다. 누리는 일만 있다면 지루할 것이고, 버티는 일만 있다면 주저앉게 될 것입니다. 가정생활도 교회 생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커브길 하나 없고 경사길 하나 없이, 일직선으로 쭉뻗은 평탄한 길을 몇 시간 째 달려야 한다면, 운전자는 극도로 지루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생길에 커브길도 주시고, 경사길도 주신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지루한 인생이 아닌, 깨어 있는 인생을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람은 지루하면 죄 짓습니다. 다윗이 깨어 있을 때는, 그의 눈에 하나님밖에 안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낮잠을 자고 일어난 후, 지루하여 옥상을 거닐 때, 목욕하는 여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 잠깐 누리는 것입니다. 우승 했을 때 잠깐 기분을 만끽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상심으로 돌아가 다음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찾아오는 고난을 일부러 달려나가 영접할 필요는 없지만, 예상은 하고 대비는 해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붙들고, 주의 임하심과 세상의 끝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전에 어떤 징조가 있을지를 예고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지금까지 예수님 때문에 많은 것을 누렸습니다. 물론 고생도 했지만, 고생에 비하면 누린 것이 더 컸습니다. 하루살이 인생을 살고 있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따르던 예수님이 가장 유명한 랍비가 되었습니다. 덩달아 자신들도 유명세를 타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누릴 때가 있었으면 버틸 때가 찾아오는 법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버텨야 할 때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앞으로 몇 년 내에 일어날 일과, 세상 끝날에 일어날 일을 섞어서 말씀하셨기에 분별이 필요하긴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들에게는 전적으로 미래에 대한 말씀이지만, 우리에게는 과거에 일어난 일과 미래에 일어나게 될 일이 뒤섞여 있습니다. 과거에 일어난 일을 통해서는 교훈을 받아야 하고,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앞에 일어날 일에 대해 미리 알아버리면 재미가 없을텐데, 또 인간이 미래를 점쳐서 아는 것을 원하시지 않을텐데, 주님이 왜 미래에 임할 일에 대해 말씀하셨을까요? 주의 임하심과 세상의 끝에 임할 환난을 갑작스럽게 당하면, 버텨낼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리 언질을 주어, 단단히 준비하게 했던 것입니다.
15절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머잖아 닥칠 환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다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이 더럽혀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해야할 성전이, 우상을 숭배하는 곳으로 바뀌게 될 거라는 말씀입니다. 예전에도 성전이 더럽혀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B.C. 168년에 수리아의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의 상을 세우고, 그 제단에 돼지를 제물로 바쳤었습니다. 예전에 있었던 일을 상기시키며, 또 다시 그런 치욕스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무너진 A.D. 70년 전에, 열심당원들이 성전에서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들은 대제사장을 살해했습니다. 매일 드리는 제사를 훼방했습니다. 합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자기들 맘대로 대제사장을 임명했습니다. 그나마 형식이라도 남아 있던 성전이 무너져내린 것입니다. A.D.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고, 성전을 파괴한 후에, 성전 동편 문쪽에 로마 군기를 세우고 경의를 표하게 했습니다. 마치 일제 때의 신사참배가 연상시킵니다. 일제의 조선 식민화정책에 가장 걸림돌이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결정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려고, 신사참배를 하게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우상숭배라며 신사참배를 거부할 것을 알고, 물리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강제로 참배하게 했습니다. 그 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투옥되고 순교를 당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신사참배에 동참하고 말았습니다. 이게 한국교회사에 가장 큰 치욕으로 남아있고, 그 후유증으로 해방 후 교단이 분열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16절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다가오는 재난이 예루살렘만이 아닌, 유대 전체에 임할 것임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가올 재난을 예고만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살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그 사는 길은 산으로 도망하는 거였습니다. 옛부터 그들은 산을 하나님의 도움의 근원으로 생각했습니다. 시 121:1-2절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그들은 산을 보며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정말 도움이 필요할 때, 산을 향하여 눈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산으로 피하는 것과 하나님께 피하는 것을 동일시했습니다. 시 11:1절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그렇다고 이 말씀이 상징적인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재난을 만났을 때,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산으로 도망한 자들은 살았습니다. A.D. 68년 베스파시안 장군이 예루살렘을 공략했을 때, 성내에 거주하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베레아 지역의 펠라산으로 도망하여 생명을 건졌다고 합니다.
강단에서 경고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좀체 싫은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아서입니다. 어떤 교회는 목회자를 청빙할 때, 이런 주제의 설교는 하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이유인 즉슨 교인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좋은 말씀 들으려고 교회 왔는데, 귀에 거슬리는 소리 들으면, 기분 나빠서 다른 교회 간다는 것입니다. 강단은 좋은 말씀 전하는 곳이 아닙니다. 복음 곧 복된 소식 전하는 곳입니다. 생명의 말씀 곧 살리는 말씀 전하는 곳입니다. 강단은 교인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곳이 아닙니다. 교인들이 궁금해하는 정보를 제공해주는 곳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바르게 살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영원히 살 수 있는지, 그 원리를 알려주는 곳입니다. 더 나아가 강단은 교인들의 신앙생활을 건강하게 이끄는 곳입니다. 그러려면 균형잡힌 식단을 제공해야 합니다. 편식 시키지 않고, 영양소를 골고루 줘야 합니다. 이제 말씀드리지만, 마 23-24장을 강해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건너 뛰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런 유혹을 스스로 이겨냈습니다. 마태복음을 순서대로 설교를 하는데 23-24장만 쏙 빼놓을 수 없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에 살 길이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면 죽는 것 같아도 안 죽습니다. 말씀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을 목숨처럼 붙들기 바랍니다.
17-19장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 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가진 것이 재난 때에는 복이 아닐 수 있습니다. 집이 있다는 것은 복입니다. 집 없는 설움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살 집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복인지 모를 것입니다. 집 한칸 장만하는 게 평생의 소원인 사람이, 이 나라에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녀는 또 어떤가요? 자녀가 복입니다. 자식으로 인해 속이 썩어 문드러질 때,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하지만, 그건 예외입니다. 자녀는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복입니다.
집과 자녀의 상관관계가 있다는 흥미로운 기사를 봤습니다. 전·월세를 사는 여성이, 자기 집에 거주하는 여성보다 자녀를 덜 낳는 경향이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두 집단 간 자녀 수 격차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내집 마련 전까지 자녀 출산을 미루는 가정이 많다는 의미로, 주거 안정이 출산율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주목됩니다. 현택수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전세 가정이 자녀 출산을 꺼리는 가장 큰 이유는, 내집 마련 때까지 생활비라도 아끼려는 경제적 이유 때문이다. 집 없이 떠도는 상황에서 자녀가 있다면, 이사 때마다 학교를 옮겨다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고, 그런 불안정한 생활을 피하고 싶은 심리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평화로울 때, 이 땅에서 최고의 복 중에 하나인 내 집과 자녀가, 재난 때에는 복이 아닐 수 있습니다. 꼭 집이나 자녀만 그러겠습니까? 우리의 모든 소유가 다 그럴 것입니다. 소유를 죄악시해서는 안 되지만, 자칫 소유가 나를 생명에서 멀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소유 때문에 영생을 놓칠 수 있습니다. 언젠가는 소유와 생명 중에 택일해야 하는 날이 올 수 있습니다. 그 날을 위해, 작은 것을 버리는 연습, 자기를 포기하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20절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예수님은 환난의 때에 대해서도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겨울과 안식일은 재난 때에 취약할 수 있습니다. 겨울은 우기입니다. 땅이 질고, 식량 문제도 있습니다. 안식일은 1.8Km 이상은 이동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럼 안식일에 침공을 받으면, 산으로 도망할 수도 없습니다. 실제로 B.C. 168년 수리아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침공이 있던 날이 안식일이었고, 유대인들은 무방비상태로 살육을 당했다고 합니다. 안식일에 침공을 받았을 때, 안식일을 지키다가 죽어야 하는지, 아니면 적과 맞서 싸워야 하는지, 어떤 것이 옳은지 의견이 나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도망갈 일이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환난의 때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면, 죽음의 때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봅니다. 화창한 봄날에 죽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사실 날씨가 궂으면 장례 치르는데 불편합니다.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교우들과 조객들에게 불편이 따릅니다. 그러므로 좋은 날씨를 위해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수명을 위해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무조건 오래 사는 게 복이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에게, 수명을 위한 기도는 더욱 절실한 기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평균 수명 늘어나는 것에, 나는 솔직히 기쁘지 않습니다. “좀 더 살아야 하는데” 할 때 죽어야지, “이제 안 죽나, 아직도 살아있나” 할 때까지 살면, 서로 힘듭니다. 예수님은 큰 환난 중에서도 자기 백성을 보호해주십니다.
21-22절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환난의 규모가 보통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한 환난입니다. 환난을 맞아서 살아남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도망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소낙비는 피하고 보라는 말씀입니다. 소낙비는 하루 종일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억수같은 소낙비를 피하지 않고 맞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환난이 임할 때 피하지 않고 있다가, 예수님이 안 도와주신다고 원망할 일이 아닙니다. 물론 피해있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날들을 감하시겠다고 했습니다. 환난과 맞딱뜨려 이길 사람도 없고, 환난을 피해 끝까지 견딜 사람도 없기에, 환난의 날들을 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환난의 날들이 감해지면, 그건 순전히 택하신 자들 덕입니다.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세상이 숨을 쉬는 것입니다. 지금은 세상이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욕하지만, 그 날에는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자기들이 삽니다. 그때 우리가 세상을 향해 큰소리칠 수 있습니다. “이게 다 우리 덕인 줄 아시오!” 그때까지 우리는 잘 버텨야 합니다. 믿음은 버티는 것입니다. 믿음은 버티는 능력입니다. 믿음의 훈련은 버티는 능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넉넉해서 헌금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믿습니다. 십일조한 만큼 생활비가 줄어드는 게 사실입니다. 그만큼 줄어든 생활비로 한 달을 버티는 것입니다. 그게 십일조의 행복입니다.
23-24절 ‘그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환난의 날이 이르면 민심이 흉흉해집니다. 유언비어도 퍼집니다. 근거가 불확실한 소문들이 나돕니다. 미혹하는 말들이 꼬리를 뭅니다. 환난 때가 되면 구원자를 절실히 찾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구원자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입니다. 하루 이틀 기다려온 게 아닙니다. 몇 백년을 기다려 왔습니다. 힘들 때마다 행여나 오시려나 했습니다. 환난 때마다 이제는 오실 때가 되지 않았나 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이미 오신 줄도 모르고 계속 기다렸습니다. 그러다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전무후무한 환난 앞에, 더 절실하게 그리스도를 기다렸습니다.
‘남한산성’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병자호란에서 서로 상반된 입장의 두 충신을 그린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주의자 예조판서와, 현실주의자 이조판서가 끝까지 자기 입장을 굽히지 않습니다. 감독은 어느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관객에게 선택하게 합니다. 이조판서 최명길은 영화 후반에 이런 말을 합니다. “삶이 있은 다음에야 새 길이 있을 것이고, 오랑캐의 발밑을 기어서라도 제 나라 백성이 살아서 갈 길을 열어줄 수 있는 임금만이, 비로소 백성이 마음으로 따를 수 있는 임금일 것이다.” 인조가 삼전도에 가서, 청나라의 칸에게 무릎을 꿇을 때, 이상주의자 예조판서는 눈물로 자결을 선택했고, 현실주의자 이조판서는 왕과 함께 치욕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누구의 눈물이 더 피에 가까웠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분이 ‘남한산성’을 본 소감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2016년부터 사드문제로 대외적으로 시끄럽다. 중국은 사드 배치에 따른 암묵적인 중국 내 기업들에게 압박을 주고 있으며, 미국은 이번에 한미 FTA 재협상을 내걸었다. 나라의 왕, 대한민국의 리더가 부디 현명한 선택을 현실주의적인 선택을 해주길 바란다.” 영의정에게서 군사지휘권을 물려받은 예조 판서는, 칙서를 보내 지원군을 요청합니다. 역사에 가정이 무의미하지만, 그 지원군의 규모가 몇 만명이니, 만약 그 지원군만 왔어도, 어떻게 됐을지 모릅니다. 남한산성에서는 다들 눈이 빠지게 지원군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에게 지원군은 그리스도인 셈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당도한 것은 지원군이 아닌 적의 대포알이었습니다.
환난 때에 사람들이 정신줄을 놓기 쉽습니다. 그래서 심력이 중요합니다. 심력이 강하지 않으면, 믿음도 흔들릴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믿음이 확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위대한 지도자 모세를 이어 백성을 지휘해야 할 때, 마음이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심력을 강하게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씀을 거듭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수 1:6-7절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수 1:9절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심력을 강하게 하는 것이, 리더에게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25-26절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환난을 앞두고 주님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강하고 담대하지 않으면, 환난 때에 귀가 약해집니다. 그럼 흔들리게 됩니다. 광야로 나가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님 골방으로 가야 하나, 흔들리게 됩니다. 큰 어려움을 몇 번 겪어보면, 어지간한 어려움에는 별 대수롭게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서 순간순간의 어려움은, 그 날을 위한 훈련입니다. 어려운 순간에 그리스도가 부재한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불러도 불러도 그리스도께서 묵묵부답일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창조 이래 가장 큰 환난 때에, 그리스도를 얼마나 애타게 부르겠습니까? 그런데 유언비어만 있습니다. 근거도 없는 소문만 풍성합니다. 거짓 그리스도는 표적과 기사로 미혹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대답은 없습니다. 그때 심력이 강하지 않으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과 함께 심력을 길러야 할 이유입니다. 믿음이 버티는 능력이라면, 심력은 더 잘 버틸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심력과 함께 또 한 가지가 필요한데 그게 지력입니다.
27-28절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니라.’
지금 우리는 지식 정보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지식이 힘인 시대, 정보가 돈인 시대입니다. 그런데 환난 때의 지식과 정보는 힘과 돈 그 이상입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주님은 재림이 어떻게 임하는지를 알려주셨습니다. 번개를 통하여 재림 시기는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갑작스럽게, 재림 장소는 제한이 없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모여드는 독수리를 통하여, 환난 후에 있을 재림의 임박성을 말씀하셨습니다. 환난의 밤이 깊어지면, 영광의 새벽이 가까운 것입니다. 지금 환난의 깊은 밤을 지내며, 눈물로 기도하고 있습니까? 영광의 새벽이 머잖았음을 믿고, 조금만 더 버티기 바랍니다. 결국 버티는 자가 승리합니다. 버티는 자가 재림의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29-31절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은 최후 환난입니다. 이쯤되면 주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이제는 드디어 끝장났구나 하는 통곡입니다. 재림주 앞에서 모든 불신자는 희망을 버려야 합니다. 그때도 꿋꿋이 버티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의 사람입니다. 버틸 때 주님을 만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빈무덤 앞에서 버텼던 마리아가,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믿음으로 버티는 자가, 구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시는 재림의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종말적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환난, 질고, 죽음 많은 세상입니다. 내일 내 순서가 올지 모릅니다. 나는 젊다, 나는 건강하다, 나는 괜찮다 할 때에, 갑자기 죽음이 나를 찾아오게 됩니다. 주님이 생각하지 않는 그 시간에 갑자기 우리 앞에 서실 것입니다. 주님 앞에 설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신령한 것을 심고, 그때에 신령한 것을 거두어야 합니다. 영적인 것을 심고, 그때에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주님이 구름을 타시고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에, 세상에서 자기 백성들을, 영광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 위하여 모으실 것인데, 그때에 구원에 반열에 설 수 있도록 준비하여야 합니다. 내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해서 영원한 저주와 형벌의 장소에 던져지지 않기 위하여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의 돌 위에 돌 하나 남김 없이 다 무너져 내리리라 말씀하셨는데 말씀하신 그대로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다시 오마 말씀하셨는데,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주님은 다시 오십니다. 그리고 지금, 주님께서 다시 오실 시간이 가까이 왔습니다. 일상에서 믿음으로 버티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평상 시 말씀과 기도로 버티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담대하게 주님 앞에 서기 위하여 준비하는 삶, 믿음의 삶, 신령한 것을 심는 삶, 주의 일에 힘쓰는 삶,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 최후에 웃는다는 것을 기억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메시야 홍수시대라고 하는 유혹의 시대를 저희들이 살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님께서 저희들의 영 가운데 늘 함께 하여 주셔서, 올바른 진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찾고, 주님을 믿는 믿음의 승리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고, 모든 족속에게 그리스도가 전해진 후에 주님의 재림이 있으며, 그때에야 비로서 세상 끝이 오리라고 하셨사오니, 복음과 진리에 대한 유혹이 가중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도래가 더욱 가까 왔음을 알고서,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소망중에 인내하면서, 세상의 집착에서 벗어나 깨어 근신하게 하옵소서. 종말이 다가올수록 흔들리지 말고 믿음으로 굳게 서서, 끝까지 버티므로 최후에 승리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너희는 깨어 있으라. / 마 24:32-51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에 영국의 유명한 화학자로, 안전등을 발명한 데이비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그는 연구에 몰두한 나머지, 자신의 결혼식 날도 잊을 정도였습니다. 결혼식은 시작되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신랑이 결혼식장에 나타나지 않아, 결국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화가 난 신부가 연구실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무엇을 잊으신 것이 없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데이비드는 “무엇을 말입니까?” 하고 되물었습니다. 기가 막힌 신부는 “결혼식은 어떻게 되었죠?”라고 따져 물었습니다. 그제야 데이비드는 오늘이 바로 자신의 결혼식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단단히 화가 난 신부는, 자신의 결혼식 날조차도 잊어버리는 사람과 평생을 함께 할 수 없다며, 신랑과의 결혼을 포기했습니다. 그리하여 데이비드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맡은 일에 전심전력을 다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랑되신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힘들어도, 절대로 이 사실만은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요즘은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다들 바쁩니다. 오늘날 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사람의 혼을 빼놓는 것 같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예수님의 재림을, 깜빡 잊어버리고 살기 쉽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예수님의 재림을 잊어버리고 살면 안됩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말씀이 구약에 1,845번, 신약에 318번 언급되어 있습니다. 왜 이렇게 많이 강조하고 있을까요? 그만큼 예수님의 재림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재림하실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분명한 것은 천국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면 끝이 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이 세상은 심판을 받습니다. 죄를 물먹듯 범하고, 악독한 짓을 서슴없이 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멸시하고 비판한 사람들을, 반드시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님과 함께 왕노릇하며, 영생복락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더 이상 회개할 기회가 없습니다. 회개도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예수 믿고 구원받을 기회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모든 기회가 끝이 납니다. 그때는 아무리 후회해도 쓸데없고, 울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더 이상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있어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깨어 있으라”는 말을, 농담으로, 거짓말로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습니다. 문제는 흘려듣는 것입니다. 대수롭지 않게 듣는 것입니다. 나와 무관한 일로 듣는 것입니다. 다소 추상적인 가르침으로 듣는 것입니다. 아득히 먼 훗날에나 일어날 일로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받았다가, 불벼락 맞은 사람이 있습니다. 롯의 사위입니다. 하나님이 롯이 살고 있던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려고 했습니다. 이 사실을 아브라함에게 미리 알려줬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봐서 롯은 살려주려고 했습니다. 대신 롯은 가만 있으면 안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얼른 빠져나와야 했습니다. 그래서 천사를 보내 롯에게 알렸고, 롯에게 속한 자를 성 밖으로 이끌어내게 했습니다. 롯에게는 아내와 두 딸 그리고 결혼할 사위들이 있었습니다. 롯은 그들을 다 모아놓고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그러나 예비 사위들은 롯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그 결과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이 비같이 내릴 때, 그 성과 함께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깨어 있으란 말을 농담으로 믿고, 주님과 그 몸된 교회를 조롱하다가는, 어느 날 롯의 예비 사위들 꼴 납니다. 그때 가서 땅을 쳐도 소용없습니다. 권토중래(捲土重來)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어떤 일에 실패하였으나, 힘을 축적하여, 다시 그 일에 착수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권토중래는 본래 당나라 시인 두목이 항우(項羽)가 유방(劉邦)과 패권을 다투다, 패하여 자살한 오강에서 항우를 생각하며 지은 한시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 한시를 풀어보면, “승패란 병가에서 기약할 수 없는 일이니, 부끄러움을 안고 참을 줄 아는 것이 사나이라네. 강동의 젊은이 중에는 준재가 많으니, 흙먼지 일으키며 다시 쳐들어왔다면 어찌 되었을까?” 항우가 패전의 좌절을 딛고 훗날을 도모하였다면, 다시 한번 패권을 얻을 기회를 얻을 수 있었으리라는, 진한 아쉬움을 토로한 것입니다. 인생은 실패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실패로 끝인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깨어 있어야 할 때 깨어있지 않는 일입니다. 깨어 있어야 할 결정적일 때 잠들어 있는 일입니다.
나는 군대생활을, 조치원, 지금은 세종시에서 했으니, 후방에서 한 셈입니다. 후방에서는 별 할 일이 없으며, 특히 통신부대로 인원도 적은데다가 파견부대라서 편하게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추운 1월에 입대하여 30연대 배치받았다가, 하사관으로 착출되어 여산 2하교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하사관 훈련이다보니 훈련이 강했고, 군기도 엄청 셌습니다. 고된 훈련을 받고 잠자리에 들면 시체처럼 뻗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다 말고 중간에 일어나, 경계 근무를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계 근무 중에서도 대표적인 게, 야간에 내무반에서의 불침번을 서는 것입니다. 겨울철 불침번의 첫째 임무는 난로를 관리하는 것입니다. 훈련받을 때의 난로는 석탄난로로 석탄가루를 물에 개어 난로에 넣고 얇게 펴서 구멍을 서너군데 뚫어놓아 불을 살리는 것입니다. 만일 난로 불이 꺼지게 되면 소대원 전원이 기상하여 팬티바람으로 밖에 나와 얼차려를 받았습니다. 또한 보초를 서려면 근무 시간보다 최소 20분 전에는 일어나야, 근무복장으로 준비할 수 있고, 또 근무 끝나고도 바로 잠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면 실제로 잠잘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줄어듭니다. 한참 잠 많은 나이에, 또한 낮의 고된 훈련에, 밤에 근무를 서고 있으면,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고 해도 졸음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졸음을 이겨보려고, 허벅지를 꼬집고, 속으로 노래를 불러보고, 갖은 수를 써가면서 졸음을 쫓아냅니다.
아마 군대를 다녀온 사람은, 보초를 서다가 깜박 졸아서, 몇 번쯤 얼차려를 받아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후방이니까 그나마 편안하게 군생활을 한 것 같습니다. 최전방에서는 경계 근무자가 졸면 부대원 전체가 죽을 수 있다고 교육을 받습니다. 최전방에서 근무자가 졸고 있을 때, 북한군이 침투하여 내무반에서 곤히 자고 있던 군인들 목을 따갔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실화인지 만든 얘기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얼마나 섬뜩한지 모릅니다. 확실한 건 보초가 깨어 있어야 산다는 것입니다. 깨어 있어야 내가 삽니다. 깨어 있어야 모두가 삽니다. “나는 자도 당신은 깨어 있으시오” 해도 안 되지만, “내가 깨어 있을테니 당신은 자도 되오” 해도 안 됩니다. 영적으로는 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의 오심과 마지막 때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의 답이 24장입니다. 오늘 말씀은 24장 마지막 부분입니다. 먼저 무화과나무를 비유로 드셨습니다.
32절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에서 흔합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나무입니다. 주의 오심은 비밀스럽지 않다는 것입니다. 재림 징조도 누구나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특별 대우를 받고 싶어하지만, 그래서 재림 조차 자신에게만 특별히 알려주길 기대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해지고 잎사귀가 나는 것은, 결코 특별하지 않습니다. 그 무렵이면 여름이 다가오는 게 일반적입니다. 어느 한 해만 특별하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의 재림의 징조는 계속 있어왔습니다. 주의 재림이 지연되는 것은, 주님이 아직 준비가 덜 돼서가 아닙니다.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받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인내입니다. 벧후 3:9-10절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기다리는 것이 쉽겠습니까, 심판하는 것이 쉽겠습니까? 심판하는 것이 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심판이 아닌 기다림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위한 선택이 아닌, 우리를 위한 선택인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32절 말씀을 이스라엘의 독립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이 독립하면 예수님의 재림이 가깝다는 식으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독립은 우리나라보다 3년 늦습니다. 1948년에 독립했으니, 이미 74년이 지났습니다. 그래도 확실한 건 재림의 날이 더 가까워졌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문 앞에 이르렀다는 사실입니다.
33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문 앞에 이르렀다는 말은, 들어올 준비가 됐다는 말입니다. 문 열고 들어오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니 얼마나 가까운지 알 수 있습니다. 누워 있을 시간이 없다는 말입니다. ‘조금만 더 자겠다’고 할 여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지금 깨어 있어야 합니다. 지금 깨어 있어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자고 있는데 주님이 문 열면,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게 됩니다. 몇 년에 한 두 번 일어나는 일이긴 하지만, 새벽에 못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보통은 새벽기도회가 5시 30분인데, 5시에 일어납니다. 그런데 자다가 눈을 뜨니, 5시 30분이었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정신없이 허둥댑니다. 예전 목사님들 목회의 숨은 이야기를 들으면, 너무 급해서 런닝셔츠에 넥타이를 하고 가기도 하고, 위의 양복에 잠옷바지 차림을 하고 가기도 했다고 합니다. 보통 때 깨어 있지 않으면, 주의 재림 때 그 꼴 납니다. 하물며 깨어 있으라는 말을 농담으로 여겼던 사람들의 결말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34-35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예전에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 5:17-18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예수님이 뭐가 아쉬워서, 허튼 소리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불변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은 분명합니다. 깨어있으라는 말은, 결코 농담이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지금이야 무슨 말을 못하겠습니까? 교회와 기독교가 전체적으로 욕먹고 있는데, 무슨 소리인들 못하겠습니까? 재림하여 심판하실 예수님 앞에서는, 고개를 떨구고 가슴을 치며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멋대로 욕하게 버려두기 바랍니다. 그들 앞에서 교회와 기독교를 변호하려고도 하지 마세요. 그래봤자 더 못되게 나옵니다. 대신 우리가 바로 믿고 바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깨어 있어 주의 재림을 준비하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재림의 시기를 다시 환기시키셨습니다.
36절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는 말을 혹 오해할까 싶어서, 다시 정리를 해주셨습니다. 재림 정확한 시기를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재림 징조에 대해서는 알려주셨습니다. 그럴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적당한 긴장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깨어 있습니다. 재림의 정확한 때를 알면, 꾀를 부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설계하신 분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간사하고 계산에 능하며 잔꾀를 부릴 수 있는지, 다 파악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재림의 때를 비밀에 부치셨습니다. 천사도 아들도 모르게, 철저히 비밀에 부치신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 알고 누가 모르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재림의 때가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더 이상 논란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재림의 때에 대해서 논란이 있어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그럴듯한 주장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줄여서 안식교에서 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윌리엄 밀러(William Miller)라는 침례교 목사가 시작한 재림 예언 운동이, 후에 안식일교의 출현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많이 연구하던 사람으로, 특히 주님의 재림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Miller는 다니엘 8:14에 나오는, “그가 내게 이르되 2300 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 하였느니라”는 말씀을, “2300년 후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예언”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예언의 시점을, 이닥사스왕이 성전재건의 영을 내린 주전 457년으로 보고, 그때부터 계산하여 주님의 재림의 때가, 1843년 3월 21일과 1844년 3월21일 사이에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날을 주님이 재림하실 날로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그때가 되어도 주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Miller는 계산을 잘못했다면서, 다시 재림 날짜를 수정했습니다. 1844년 10월 22일로 재림일자를 수정해서 발표했습니다. 그래도 주님의 재림은 없었습니다. 이에 Miller는 실의에 찼고, 그의 동역자들은 그를 떠나 새로운 모임들을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모임들 중에 하나가, 바로 안식교의 모체가 된 것입니다.
Ellen G. White와 그의 남편인 James White는, 1844년 주님이 재림하신다고 주장하도록 Miller를 부추긴, 밀러니즘의 핵심간부였습니다. Miller를 따르던 무리가 모두 흩어지자, 나머지 사람들을 모아 Miller의 가르침을 다시 재해석하여 만든 것이, Ellen G. White라는 여자가 만든 안식교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주님은 이 땅에 눈에 보이게 오시지 않은 것일 뿐, 실제로 주님은 하늘의 성소에 재림하였다고 주장합니다. 하늘의 성소에 재림한 주님은, 그곳에서 이른바 ‘조사심판’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정작 재림하실 당사자가 “나도 모른다”고 하는데, 예수님을 억지로 재림했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입니다.
37-39절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예수님은 재림의 시기를 비밀에 부치며, 노아의 때에 비유하셨습니다. 노아의 때는 죄악이 세상에 가득한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대의 의인 노아에게 심판을 예고하셨습니다. 구원의 방주를 예비하게 하셨습니다. 노아는 오랜 해에 걸쳐, 산위에 방주를 지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노아를 조롱하고 놀리고 손가락질했습니다. 사람들의 죄는 세상에 점점 더 차서, 이제는 넘치게 되었습니다. 노아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누구하나 귀 기울여 듣지 않았습니다. 죄짓기에 바빴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그들을 보며 근심이 쌓여갔습니다. 그 근심을 잊으려고 방주를 짓는데 집중해 보지만, 하나님의 혹독한 심판 앞에 죽게될 그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노아를 불쌍하게 생각했습니다. 허구헌날 세 아들과 함께 산 꼭대기에 방주를 짓고 있는, 노아가 제정신일까 싶었습니다. 지금까지도 문제 없이 잘 살아왔는데 무슨 심판이냐며, 앞으로도 문제없을 거라고 호언했습니다. 이렇게 날씨가 좋기만한데 무슨 홍수 심판이 있겠느냐며, 또 비가 얼마나 와서 온 세상을 심판할 수 있겠느냐며, 괜한 소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노아는 비가 조금만 와도 덜컥 겁이 났습니다. 아직 방주가 덜 지어지긴 했지만, 혹 홍수가 시작되는 거 아닌가 싶어, 가슴이 콩닥거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비가 얼마간 오다가 그치니, “거 봐라”며 “홍수 심판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했습니다. 그러기를 120년입니다.
그런데 드디어 심판의 비가 시작되었습니다. 노아는 알았습니다. 방주를 다 지은 후에 내리는 비였기 때문입니다. 빗줄기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하루 이틀 오다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동물을 두쌍씩 방주로 집어넣은 후에, 가족과 함께 방주에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방주의 문이 닫혔습니다. 노아가 닫은 게 아니라, 하나님이 닫으셨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잘못하면 홍수나겠는데 하는 생각을 했지, 그게 하나님의 심판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뒤늦게 아차 싶었습니다. 노아와 그가 짓고 있었던 방주를 떠올렸습니다. 그들은 차오르는 물을 피해, 방주가 있는 산으로 젖먹던 힘을 다해 올라왔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빠르게 차오르는 물에 잠기고 말았지만, 소수는 방주에 도달했습니다. 와서 노아를 부르며, 방주 문을 열어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이봐요, 노아씨. 문좀 열어줘요. 당신 말이 맞았어요. 우리가 잘못 했어요. 그러니 제말 문 좀 열어주세요.” 그러나 방주의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주의 재림 때도 그와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문 앞에 이르렀을 때까지도, 사람들이 깨닫지 못할 거라는 것입니다. 재림 직전까지도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날이 그 날 같습니다. 그제나 어제나, 어제나 오늘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여전히 부지런히 죄 지으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일상을 예로 드셨습니다.
40-41절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두 사람이 밭에 갑니다. 밭을 갈고 밭 이랑을 만들고 씨앗을 뿌립니다. 두 사람은 앞집 뒷집 살면서 형님 동생 하는 사이입니다. 그런데 구원받는 사람은 한 사람입니다. 한 사람만 천국에 데려가고, 다른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합니다.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합니다. 손맷돌은 두 사람이서 돌립니다. 여기서 두 여자는 엄마와 딸일 수도 있고, 시어머니와 며느리일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족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은 한 사람입니다. 한 사람만 구원을 받고, 다른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합니다.
42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아무리 가족이라도, 그 날에는 갈라질 수가 있습니다. 옆 사람 믿고 있으면 안 됩니다. 스스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마지막 날의 징조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그 날은 누구도 모릅니다. 그래서 한사코 깨어 있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43절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어느 날 도둑이 집주인에게 예고장을 보냈습니다. “내가 당신 집에 가겠소.” 그런데 도둑은 시간을 말해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집주인은 하루종일 깨어 있어야 합니다. 지레 짐작하여 언제쯤 오겠지 하고 방심하고 있다가는, 생각지도 않았던 때에 도둑이 다녀갑니다. 그런데 도둑이 몇 시에 온다는 것을, 집주인이 알게 됐습니다. 그럼 집주인은 깨어 있어 도둑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44절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주님이 재림 예고장을 보내왔습니다. 준비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뭐 별 다른 준비는 할 거 없습니다. 깨어 있는 것이 준비입니다. 그렇다고 밥도 거르고 기도만하고 있으란 말이 아닙니다. 생업도 접고 어떤 산에 올라가 흰옷 있고 기다리란 말이 아닙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라는 말입니다.
45-46절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주님이 우리를 충성되이 여겨, 그 집 사람들을 맡겨주셨습니다. 우리는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줘야 할 사람들입니다. 먼저는 교회 안에 있는 영혼들을 잘 돌보고 섬겨야 합니다. 또한 교회 바깥에서도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그 결과는 이렇습니다. 47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48-50절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악한 종처럼 살면 안 됩니다. 달리 악한 종이 아닙니다. 주인이 더디 올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악한 종입니다. 처음부터 악한 종이 아닙니다. 주인이 더디 올 거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악한 종이 되었습니다. 주인이 더디 올 거라고 생각이 들면, 제 멋대로 삽니다. 교회 안에서 밖에서, 자기가 주인 노릇하며 삽니다. 그 결과는 이렇습니다. 51절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종말의 클라이막스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시대적인 흐름이나 지구촌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한결같이 주님이 예언한대로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아의 시대는 오늘 이 지구촌 구석구석마다 재연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의 재림은 반드시 있는 확실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들만 신령하다고 해서 직접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그 날을 알 수 있다고 현혹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속지 말기를 바랍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은 농담이 아닙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깨어 있어야 삽니다. 깨어 있어야 내가 살고 우리 모두가 삽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재림을 대망하면서, 이 어두운 시대에 깨어 있어,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충성하는 성도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재림이 언제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삶의 태도는 오늘 이 시간 주님의 재림이 있을 것임을 믿게 하옵소서. 그리고 충성된 종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노아의 시대 사람들처럼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고, 롯의 시대 사람들처럼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되지 말고, 그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는 생활로, 주 재림의 날에 약속된 놀라운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항상 깨어 기도하게 하옵소서. 주님 오실 때 언제든지 들림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며 찬송하며 살게 하옵소서. 또한 하나님이 맡기신 일들을 최선을 다할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