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정보라
*줄거리
어느 날 여자는 화장실에서 자기를 바라보는 ‘머리’를 만난다. 화장실을 쓰고 나면 변기 안에서 자신을 멀뚱히 바라보는 기분 나쁜 머리. 점점 더 형태를 갖추어가고 자신의 몸의 상태를 반영하는 머리를. 게다가 머리는 여자가 버린 것들로 자신을 이루어간다며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른다. 가족들에게 이야기했지만 ‘알을 스는 것도 아니고 무는 것도 아니면 그냥 두지 그러니’라는 반응이다. 변비가 생겼다. 가능하면 집에서 화장실을 가지 않으려 했더니 변비가 생겼다. 그러던 어느 날 직장에서도 머리가 나타나자 다음날 그녀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변비가 심해지고 방광염도 생겼다.
가족들은 직장을 그만둔 김에 결혼하라고 했다. 그녀는 어머니의 권유대로 선을 보고, 남자 쪽에서 강행하다시피 하여 만난지 6개월만에 결혼했다. 새생활에 적응하느라 바쁜 와중에 그녀는 머리를 차츰 생각하지 않게 되었고 얼마 후 아이가 생겼다. 그녀는 머리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아이가 태어나고 얼마가 지난 후 아이를 목욕시키고 있을 때 머리가 다시 나타났다. 머리는 조금 더 커져서 평균적인 사람 머리 크기로 자라 있었다. 여자는 머리에게 ‘나를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 건 세상에서 이 아이뿐’이라며 사라지라고, 안 그러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없애버리겠다고 했다. 그러나 머리는 한 번 나타나자 끈질기게 다시 출몰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머리를 비닐에 싸서 쓰레기통에 버리기도 하고, 말려 죽이려고 작은 통에 담아 베란다의 햇볕 잘 드는 곳에 두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머리가 돌아왔다.
그 뒤 한동안 머리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남편과 아이를 위해 살림을 하고 아무 특징 없는 평화로운 날들에 파묻혔다. 남편은 승진을 하고 아이는 고만고만한 고등학생이 되었다. 아이가 머리를 많이 봤다며, 너무 싫다고 없애버리고 싶다고 말하자, 여자는 ‘신경 쓰지마. 물 내리면 되잖아.’라고 반응했다.
딸이 대학생이 되었을 무렵 남편은 일에 치여 살았고 아이도 바빠서 셋이 모이는 날은 거의 없어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녀는 가족들이 모두 잠든 후에도 애국가가 울릴 때까지 텔레비전을 보았다. 이유는 “움직이는 화면에 집중하면서 마음 한구석에 언제나 자리잡은 공간을 조금이나마 줄여 보기 위해서였다. 텅 빈 듯하기도 하고 꽉 찬 듯하기도 하고 쓰린 듯 저린 듯하기도 한 그 야릇한 공간은 잠시라도 잊어버리고 있으면 이내 더럭 커져서 그녀를 점령하곤 했다.”
그날도 혼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화장실에 갔다. 손을 씻다가 거울에서 늙은 자신의 모습을 보던 중 변기 뚜껑이 열리면서 탐스러운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진 젊은 여자가 벗은 몸으로 나와 거울 앞의 그녀 옆에 섰다. 젊은 날의 자신과 똑같은 얼굴이 옷을 벗어주면 부끄러운 데를 가리고 얼른 사라지겠다고 했다. 늙은 그녀가 옷을 벗어주고 화장실을 나가려 할 때 젊은 그녀가 막아섰다. 그리고 늙은 몸을 변기 속에 거꾸로 처넣고 물을 내렸다.
*감상
우리에게 이질적이고 위협적으로 여겨지는 어떤 것, 우리에게 혐오를 야기하는 비체(卑體 abject) 개념을 연결시키게 되는 이야기다. ‘내가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나온 구토물과 오열, 언어화되지 못한 잔여물로서 모호한 나의 경계를 창출하는 그것. 결코 대상화할 수 없으며 경계 구성체로서 언제나 우리의 삶과 함께 하는 것.
한편으로 ‘머리’는 배설물처럼 따라다니는 인생의 고민과 갈증을 상징하는 것 아닐까 생각했다. 살면서 평범하게, 남들 하는 대로 의문 없이 따라가다가도 ‘이거 아닌 거 같은데’ 하며 뭔가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느낄 때가 많다. 소설 속에서 “텅 빈 듯하기도 하고 꽉 찬 듯하기도 하고 쓰린 듯 저린듯하기도 한 그 야릇한 공간은 잠시라도 잊어버리고 있으면 이내 더럭 커져서 그녀를 점령하곤 했다.” 이 부분이 더욱 크게 다가왔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한 공허감을 발견할 때 적극적으로 직시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고, 그저 모른 척 하루하루 지나가는 사람도 있다. 때로는 일상에서 해 내야 할 일과 역할이 많아서 이 소설 속 주인공처럼 멍하니 텔레비전을 볼 시간도 없이, 정신없이 시간이 지나가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시기가 오면 누구나 거울 속 내 모습 옆에 똑바로 선 ‘머리’를 발견하듯이 혐오나 좌절을 자아내는 삶의 균열 부위를 직시하게 되는 것 같다.
일생을 걸쳐 ‘머리’를 피하려 했을 뿐, 자신의 삶 전체에서 적극적인 의지를 발휘하거나 상상력을 품어보지 못한, 또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 여자의 모습이 서글프게 다가왔다. 여자는 머리를 피하려고 직장을 그만두었으며 어머니의 권유대로 선을 보고 ‘당연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사물 외에는 아무것도 상상할 능력이 없어 보이는, 소박하고 건실한 남자’가 이끄는 대로 결혼을 했다. 머리를 베란다에 내놓을 때 ‘다른 방법은 알 수도 없었거니와 알고 싶지도, 시도해 보고 싶지도 않았다’는 등으로 누가 가두지 않아도 삶의 한계에 갇혀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은 오랫동안 나의 모습이기도 했다.
첫댓글 다시 읽어도 좋네요.
인용하신 문장의 그런 마음으로 제가 지금 대기 상태인데, 늘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다가 갈 곳이 없어지니 눈이 더 일찍 뜨여집니다.
그런 불안을 안고 책 한 권 들고 걸어서 도서관에 가볼까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이사를 앞두고 바쁜 시간에 다녀가셨네요. 종미님이 늘 글을 읽고 생각하고 사회의 일원으로 알게 모르게 타인에게 손을 내미는 모습을 보며 좋은 자극을 받았어요. 불안의 시기도 잘 이겨내시리라 믿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