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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나물이사금 즉위조 기사 |
이와같이 신라의 동성·근친혼(同姓·近親婚)에 대하여 중국 예속의 도리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흉노만큼은 아니지만 도리에 크게 어긋나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렇게 고려시대 사람인 김부식에게조차 비판을 받고 있는 동성·근친혼은 얼마 전까지 동성동본의 혼인조차 금지했던 현대 한국인의 관점에서 보면 상당히 이해가 안 되는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동시대 주변국인 고구려나 백제의 왕은 근친혼이 아닌 다른 귀족들과의 혼인이 이루어지고 있었기에 신라의 동성·근친혼은 더욱 특이하게 생각된다. 주변의 고구려나 백제에서도 취하지 않았던 동성·근친혼, 왜 신라에서만 이러한 혼인방식을 취했던 것일까?
신라는 하늘에서 내려온 박혁거세와 그를 왕으로 세운 6촌의 촌장들로 인하여 건국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런데 신라에는 박혁거세의 건국신화 외에도 시조신화가 2개가 더 추가로 내려온다. 석탈해와 김알지 신화이다.
이로인하여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신라에는 건국신화 외에 시조신화라고 하는 2개의 신화가 더 있음으로써 3개의 신화를 보유하고 있는 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신라의 실제 국가 운영에도 반영이 되어 박씨, 석씨, 김씨라고 하는 세 성씨가 돌아가며 왕위를 계승하는 독특한 구조로 운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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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왕실 가계구성 추정도. 가계 내에서 연장자계승의 원리로 계승이 이루어졌다 |
신라의 초기 왕위계승은 박씨와 석씨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박씨는 석씨와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동일 가계 내에서 아들과 사위가 있으면 연장자계승, 아들이나 사위의 나이가 어리면 형제계승의 형식으로 왕위계승이 이루어지는 원리를 유지했다. 그리고 이러한 왕위계승권은 두 성씨의 혼인관계 속에서 세대를 내려가며 계승되었다.
김알지 신화에 따르면 김알지가 석탈해에 의해 거두어졌고, 궁에서 성장하여 왕실의 인척으로 인정받은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왕위계승권을 받기위해선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에 걸친 노력이 필요했다.
박씨와 석씨가 왕위계승권을 혼인관계를 통해 유지해나가는 동안 김씨계도 점차 박씨, 석씨와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계승권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왕위계승을 성취해낸 것은 13대 왕인 미추이사금대에 이르러서였다. 12대 석씨 왕인 첨해이사금이 아들이 없었다는 점, 그리고 다음 세대의 왕위계승 서열에 박씨나 석씨가 없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때 미추이사금은 전대 왕이었던 조분이사금의 사위이자 박씨계의 외손이라는 자격을 갖추고 있었기에 첨해이사금 다음 세대의 1순위 왕위계승자였다.
결국 신라 3대왕인 석탈해 시기(65년)에 등장한 김씨계는 200여년이 지나 13대인 미추이사금(262년)대에 이르러서야 사위의 자격으로 왕위를 계승하게 된 것이다.
미추이사금이 즉위한 이후 김씨계에서는 이전까지 박씨와 석씨가 왕위를 계승하였기에 연이어 왕위를 계승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미추이사금이 즉위한지 23년이 되어 사망할 때에는 그동안 유지되어온 박씨, 석씨를 중심으로 한 왕위계승의 원칙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연장자계승의 원칙에 따라 조분이사금의 아들이었던 유례가 상위계승권자로써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다시 왕위계승은 석씨계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356년 당대 왕이었던 흘해이사금이 후계가 없이 죽었다. 더구나 다른 석씨나 박씨의 상위왕위계승권자가 없었다. 이때 왕위계승권에 가장 가까웠던 인물이 미추이사금의 동생인 말구 각간의 아들이자 미추이사금의 사위였던 나물이었다.
이 시점에 김씨계는 박씨와 석씨와 혼인관계를 맺게 되면 박씨나 석씨에게 차기 왕위계승권이 넘어갈 수 있다는 위험성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추이사금의 동생이었던 말구각간은 같은 김씨계의 여인을 부인으로 삼았고, 그것은 나물도 마찬가지였다. 나물 또한 자신의 큰아버지인 미추이사금의 딸인 보반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동성혼을 함으로써 왕위계승권을 독점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즉, 자신의 사촌과 혼인을 함으로써 왕위계승권에 다른 성씨를 가진 인물이 사위나 다른 혈연관계를 통해 왕위계승권을 가질 수 있는 여지를 없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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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왕위 계보 ('삼국유사' '삼국사기'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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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왕위 계보 ('삼국유사' '삼국사기' 참고) |
왕위계승권의 독점은 어떠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일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나물 이후부터의 왕에 대한 고유명칭이 다르게 표기되어있다. '삼국사기'의 경우 나물의 2대 뒤인 19대 눌지부터를 마립간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에 반해 '삼국유사'는 나물부터를 마립간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사금에서 마립간으로의 왕에 대한 호칭의 변화,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사금이라는 말은 남해차차웅의 차기 왕위계승자를 결정할 때 유리와 석탈해가 겨루는 이야기에서 그 어원이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유리와 석탈해에게 왕위계승권이 동등하게 존재하였고 이에 두 사람이 동시에 떡을 물어서 잇자국이 많은 쪽이 왕위를 계승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잇금이라는 명칭이 이사금으로 되었다고 '삼국사기'에는 나와 있다. 즉, 왕위계승의 기본 원리가 연장자계승이었다는 것을 표방한 것이다.
그렇다면 마립간이란 무엇인가? 김대문은 마립간의 마립을 왕의 궐, 신하의 궐이라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 계급에 따라 순차를 두어 서게 하는 표식과 같은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간이라는 말은 몽골의 칭기츠칸의 칸과 같이 왕을 뜻하는 고유의 말로써 마립간은 결국 서열화 된 간, 간 중의 간, 왕 중의 왕이라는 뜻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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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금관(국보 제191호). 이 금관을 차지하기 위하여 김씨계는 동성, 근친혼을 선택하였다 |
따라서 이사금에서 마립간으로 그 명칭이 변경되었다는 것은 김씨계가 왕위계승을 독점함으로써 다른 성씨계보다 우위에 섰음을 나타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이러한 결과를 이끌어낸 것이 가계 상의 연장자계승원칙이라는 신라의 기본적 왕위계승원리를 이용한 전략이었다. 그리고 그 전략은 연장자계승원칙의 대상이 되는 왕위계승권을 갖는 가계를 김씨계로 한정하는 것, 즉 동성·근친혼을 통한 가계의 제한이었다. 이러한 동성혼·근친혼 전략은 김씨계가 왕위를 지속적으로 계승하여 왕위를 독점하는 바탕이 되었다.
이렇듯 김씨 가계 내에서 시행된 동성·근친혼은 중국의 법속체계에 가까운 행정제도와 법률인 율령을 반포한 이후에도 행해졌다. 그리고 그들의 권력을 영원히 유지하기 위해 혈통을 중시하는 골품제라는 제도가 시행하였다. 진골간의 통혼, 성골간의 통혼이라는 원리 속에서 동성·근친혼은 더욱 심화되어 갔다.
결국 김씨계는 김부식이 부도덕하다고 비판한 동성·근친혼을 전략적으로 선택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왕위계승권의 독점에 성공하여 김씨만의 신라를 이룩하는데 성공했다. 이것은 도덕이라는 명분보다 실리를 택한 행위였고 결과적으로는 김씨계에 있어서 성공한 정책이자 전략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사랑은 존재했다. 동성·근친혼을 통한 결혼, 김씨계의 왕위계승을 독점하기 위한 전략이었는데 이들은 사촌간 혹은 조카와의 관계 속에서 서로를 정말 사랑할 수 있었을까?
이와 관련된 당대의 기록이 남아있어 살펴볼 수 있는데, 바로 울산광역시 울주군에 있는 '천전리서석'이다. 여기에는 수많은 신라인들의 낙서와 기록들이 있는데, 우리가 살펴볼 것은 많은 기록 중에서 소위 '원명(原銘)' 그리고 '추명(追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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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전리서석. 당대인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담겨있다. |
원명이란 을사년(525)에 법흥왕과 사탁부의 갈문왕이 골짜기에 놀러와서 서석곡이라 이름을 지었는데, 이때 부인과 누이 등을 데리고 놀러왔던 일을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추명은 기미년(539)에 다시 이곳에 와서 지난 을사년에 왔던 기억을 되새기며 죽은 왕비를 사랑하며 기리는 내용을 추가로 기록한 것을 말한다.
이 기록을 통해 전략적으로 선택한 동성·근친혼이었지만 전략을 넘어선 실제의 애틋한 사랑이 혼인 당사자간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후대로 갈수록 동성·근친혼은 신라인들의 인식에서 특수한 것이 아니라 당연히 행해지는 일상적인 일이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김씨는 박씨, 석씨에게서 왕위계승권을 독점하기 위한 수단으로 동성·근친혼을 선택하였다. 이 혼인방식은 결국 왕위계승권을 가질 수 있는 가계를 축소하는 효과를 가져왔으며, 후에 장자계승으로 대표되는 태자제가 시행되기 이전까지 효과적인 성과를 발휘했다.
물론 신라에서 실제로 김씨, 석씨, 박씨 등의 성을 칭한 것은 법흥왕 이후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법흥왕이 중국 남조인 양나라에 사신을 보낸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신라 왕의 성은 모(募), 이름은 진(秦)이라 되어있다.
또한 법흥왕이 왕위에 있을 때 만들어진 울진봉평리 신라비(524, 법흥왕11)에 모즉지(牟卽智)라고 이름이 기록되어있어 이 시기까지 성을 사용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중국과의 교류를 시작하는 과정에서 외교적 필요에 의해서 김씨라고 칭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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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직공도 제기. 신라 왕의 성은 '모' 이름은 '진'이라 나와있다 |
이러한 성을 칭하는 과정이 늦었다는 점 때문에 '삼국사기'내에 기록된 모든 김씨 간의 혼인이 반드시 동성혼이었을 것이라는 장담은 할 수 없다. 하지만 '삼국사기'에서 신라 왕의 즉위기사에 대부분 모친과 비의 가계사실을 기록하고 있고 그 기록을 신뢰한다면 전대 왕의 딸 혹은 동생의 딸과의 혼인, 즉 근친혼을 행하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동성·근친혼에 대한 유교·윤리적 의식, 혹은 현대인과 같은 윤리의식이 신라내부에 존재하고 있었을까? 주변국인 백제나 고구려에서도 동성혼의 사례가 보이지 않고 국가로 성장하지 못한 옥저나 동예에서도 족외혼이 시행되었다는 기록을 볼 때, 한반도 내에서 일반적인 혼인 풍습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시기 신라에 현대인의 윤리의식이나 유교·윤리적 의식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현대인의 관점에서 신라의 동성·근친혼을 비윤리적인 행위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다만 주변국의 상황이나 다른 성씨의 혼인 기록을 보았을 때 김씨계가 일반적이지 않은 혼인방식을 선택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결국 김씨계는 예외적이라 할 수 있는 방식인 동성·근친혼을 행하여 신라의 왕위계승권을 독점하는데 성공했다.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이러한 선택을 한 지배층. 그리고 그것을 시행할 수 있게 한 그들의 권력에 대한 욕구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주변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글ㅣ이성호 (만인만색연구자네트워크 시민강좌팀)
<출처: 스토리펀딩 /by 만인만색 연구자 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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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내를 맞이함에 있어 같은 성씨를 취하지 않는 것은 분별을 두터이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노공(魯公)이 오(吳)나라에 장가들고 진후(晉侯)가 사희(四姬)를 취한 것을 진(陳)나라의
사패(司敗)와 정(鄭)나라의 자산(子産)이 매우 나무란 것이다. 신라의 경우에는 같은 성씨를
아내로 맞이할 뿐만 아니라 형제의 자식과 고종·이종 자매까지도 모두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다.
비록 외국은 각기 그 습속이 다르다고 하나 중국의 예속(禮俗)으로 따진다면 도리에 크게 어긋났다고 하겠다.
흉노(匈奴)에서 그 어머니와 아들이 간음하는 것은 또한 이보다 더욱 심하다.
햇살은 화창한데 공기는 많이 차갑네요?.
이한주는 비교적 따스하다 합니다.못다한 년말 마무리 잘하시고 좋은 한주 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