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한공신(三韓功臣) /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삼한공신제도(三韓功臣制度)는 고려 태조 20년(937)을 전후한 시기에 제정된 것으로
보이며, 주로 후삼국 통일에 공이 있는 개국공신이나 태조공신에게 부여한 공신
호칭이다.
삼한공신에 책봉된 사람은 통일전쟁에 직접 참여한 태조의 막료(幕僚)들뿐만 아니라
태조에게 협력한 각 지방의 호족 및 그의 막료들에게 부여했고 삼한공신들에게는
직첩(職牒)이 내려지고 이를 전승(상속)하게 해 그 후손들은 문음(門蔭)과 식읍(食邑)
•녹읍(祿邑) 또는 역분전(役分田) 등 경제적 기반이 보장되었다.
태조 왕건은 936년(태조 19) 후삼국을 통일한 뒤 940년 신흥사(新興寺, 神興寺)를
중수하면서 이곳에 공신당(功臣堂)을 두고 동쪽과 서쪽 벽에 삼한공신을 그려 넣었다.
삼한공신 중 공신당에 그려진 공신을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라 일컬었다.
삼한공신과 공신당에 그려진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사이에는 위계상의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이를 구별하지 않고 삼한벽상공신도 삼한
공신으로 표현하였다.
삼한공신의 수는 공신당 설치(940년) 이후부터 태조 왕건의 재위기간(918~943)이 3년
정도인 것으로 보아 태조대와 공신전체 수인 3,200명과 비슷한 정도일 것으로 추정된다.
삼한공신들은 사심관(事審官)이 되어 자기 본거지에서 이전의 지위를 그대로 보장
받았고 고려왕실을 구심점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지배세력의 중심이 되었다.
태조대의 공신을 삼한전공신 또는 삼한전벽상공신이라하고 태조데 이후 삼한후공신
또는 삼한후벽상공신으로 구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두 공신을 병렬시켜 삼한전후
공신(三韓前後功臣)·삼한전후벽상공신삼한전후공신(三韓前後壁上功臣)으로 표현해
삼한공신이 고려 공신제도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정착되었다.
고려시대 초 태조 왕건 시대 외에 무인집권기(1170-1270년)에 공신호를 받은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의 초상을 조정의 벽에 붙여
벽에 그린 삼한공신이라 의미로 이들도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불렀다.
* 문음(門蔭)
: 고려ㆍ조선 시대에 관리 선발 제도의 하나로 공신이나 전ㆍ현직 고관의 자제를
과거에 의하지 않고 관리로 채용했다. 즉, 선조나 친척이 국가에 큰 공을 세웠거나
고관직을 얻으면 후손이 일정한 벼슬을 얻게 하는 제도로 조상이 세운 공훈으로 자손이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문음은 과거•천거와 함께 중요한 관리 선발 제도의
하나였다. 시대에 따라 범위와 기준이 달랐다. 일반적으로 음서(蔭敍), 음서제(蔭敍制),
음서제도(蔭敍制度)로 불린다.
[유사어] 공음(功蔭). 승음(承蔭). 음서(蔭敍). [참고어] 음직(蔭職).
* 식읍(食邑)
: 식읍(食邑)은 식봉(食封), 봉읍(封邑)이라고도 하며 중국과 한국 등 동아시아 역대
왕조에서 왕족·공신·봉작자(封爵者)에게 조세(세금)를 거두고 노동력을 징발할 수 있는
수조지(收租地), 수조호(收租戶)를 지급한 일정한 지역을 말한다. 식읍(食邑)은 하사받은
땅이지만 녹읍(祿邑)과 마찬가지로 소유권은 나라에 있다. 다만, 식읍(食邑)은 녹읍(祿邑)과
달리 봉작(封爵)과 함께 상속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식읍이 존속하였다. 그러나 식읍의 성격은 시대에 다라 달랐다. 식봉(食封)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진(秦) ·한(漢)시대부터 봉작(封爵)에 따라 채읍(采邑)을 주었다.
* 녹읍(祿邑)
: 녹읍제(祿邑制)는 급여제도의 하나로 관직(官職) 복무(직무)의 대가인 녹(祿)을 지급한
일정한 지역으로 신라 및 고려 초기에 관료(官僚)들에게 녹(祿,급료)으로 일정한 지역의
경제적 수취(收取)를 허용해 준 특정한 지역이다. 식읍(食邑)과 마찬 가지로 하사받은
땅에서 조세(세금)를 거두고 노동력을 징발할 수 있었 국가소유였다, 식읍(食邑)과 달리
상속할 수 없다.
* 역분전(役分田)
: 역분전(役分田) 고려 초기의 토지제도. 940년(태조 23) 후삼국의 통일에 공을 세운
조신(朝臣) ·군사(軍士) 등에게 관계(官階)의 고하에 관계없이, 인품과 공로에 기준을 두어
지급한 수조지(收租地)를 말한다.
고려 삼한공신 명단
자료출처: 1988년-'전라문화논총'(전북대 전라문화연구소가 발행)
박천식 교수님의 논문 중 '삼한공신 일람표'중에서 발취
배현경(裵玄慶) 경주인 (태조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 곡성인 (개국벽상공신)
김 락(金 樂) 賜中和 (태조통합공신)
김 철(金 哲) 本순천인(태조통합공신)
복지겸(卜知謙) 면천인 (고려개국공신)
유금필(庾黔弼) 무송인 (태조익찬공신)
박술희(朴述熙) 혜성군인(개국공신)
최 응(崔 凝) 토선인 (훈공 많음)
윤 선(尹 瑄) 염주인 (歸附北岡以安)
왕 유(王 儒) 광해주인(공훈 많음)
왕순식(王順式) 명주인 (삼한공신)
왕 렴(王 廉) 명주인 (왕순식 아들)
왕관경(王官景) 명주인 (강릉우일파시조)
박수경(朴守卿) 평주인 (삼한공신)
박연윤(朴遲胤) 又竹州人(삼한공신)
박수문(朴守文) 평주인 (삼한공신)
박승위(朴承位) 평주인 (삼한공신)
박영규(朴英規) 승주인 (개국공신)
이총언(李총言) 拜碧晉장군(삼한공신)
서 필(徐 弼) 이천인 (刀筆進.奕世大殿)
강궁진(姜弓珍) 긍주인 (삼한벽상공신)
전종회(田宗會) 영광현인(태조공신)
윤 봉(尹 逢) 수안현인(삼한공신)
김유렴(金庾廉) 閼智후손(歸태조위공신)
윤신달(尹莘達) 파평현인(삼한공신)
김인윤(金仁允) 경주인 (삼한공신) 김극렴(金克廉) 강릉인 (삼한공신)
최영휴(崔英休) 충주인 (삼한공신)
최준옹(崔俊邕) 창원군인(삼한공신)
김 길(金 吉) 광산현인(佐태조유공)
박기오(朴奇悟) 연창군인(삼한공신)
이희목(李希穆) 수주인 (벽상공신)
이능희(李能希) 청주인 (定삼한위공신)
이겸의(李謙宜) 청주인 (삼한공신)
류차달(柳車達) 유주인 (삼한공신)
왕희순(王希順) 개성인 (定삼한위공신)
함 규(咸 規) 항양인 (삼한공신)
염형명(廉邢明) 봉성현인(삼한공신)
왕만세(王萬歲) 개주인 (태조종제녕해공)
금용식(琴容式) 賜籍김포(삼한공신)
나총례(羅聰禮) 나주인 (삼한공신)
이 의(李 誼) 금마인 (개국공신)
한 란(韓 蘭) 청주인 (삼한공신)
원극유(元克猷) 원주인 (삼한공신)
권 행(權 幸) 안동인 (삼한공신)
이금서(李金書) 경주인 (삼한공신)
이 도(李 棹) 전의인 (삼한공신)
왕 예(王 乂) 강릉인 (佐태조유공)
왕 경(王 景) 명주인 (삼한공신)
홍은열(洪殷悅) 남양인 (삼한공신)
임 희(林 曦) 진천인 (벽상공신)
이견원, 안 락, 김 지, 김 래, 오금길, 김근겸, 이부율, 윤신복, ㅇ궁열, 이견웅,
장원지, 최정헌, 이길권,조 맹, 김예겸, 김선평, 김훤술, 이극인, 이 서, 박 욱,
박윤웅, 장금용, 장 길, 정 예, 황보능, 전이갑,조 정, 이능일, 이대평, 이배환,
방수홍, 최필달, 유천궁, 유긍달, 홍 규, 홍 유, 황보제공,김억렴, 유덕용,ㅇ명필,
이 원, 왕 규, 왕 유, 김행파, 강기주, ㅇ영장, 김선궁, 평 준, 김긍율, 배은우,
최언위, 신능길,신 보, 최지몽, 최상흔, 현 일, 왕식렴, 왕평달, 견 금, 능 식,
연 익, 흥 현, 태 평, 흥 달,강여청(姜餘淸), 손긍훈(孫兢訓), 방계홍(房係弘),
문다성(文多省), 허선문(許宣文),
벽상공신
고려사 세가(世家) 태조 34년조에 처음 나타난다. 936년(태조 19)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
940년 신흥사(新興寺)를 중수하고 이곳에 공신당(功臣堂)을 세우면서 공신당의 동서 벽에
삼한공신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벽에 그린 삼한공신이라 하여 이들을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
功臣)으로 부르는데, 벽상공신은 바로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이후 벽상공신 칭호는 고려시대 전체에 걸쳐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명종이 무신난의
주동자들에게 내린 예 외에는 없다. 또 무신 집권 때 벽상공신 칭호가 내린 인물은 정중부
(鄭仲夫)·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 3인으로 1170년(의종 24) 이른바 정중부의 난을 일으킨 뒤,
사흘 만에 의종을 거제도로 내쫓고 의종의 동생 호(晧)를 왕으로 추대하였는데, 이가 바로
명종이다. 벽상공신은 명종이 즉위하면서 이들 3인의 초상을 그려 조정의 벽에 붙인 데서
연유한다
공신당에 그려진 삼한벽상공신은 고려의 개국공신 가운데서도 큰 공을 세운 인물들이다.
1. 홍유(洪儒:殷悅의성)
2. 배현경(裵玄慶 성산)
3. 유금필(庾금弼무송인)
4. 복지겸(卜智謙 목주)
5. 신숭겸(申崇謙 평산인)
6. 김선필(金宣弓 선산인)
7. 이총언(李총言 벽진인)
8. 김선평(金宣平 안동인)
9. 권행(權幸 안동인)
10. 장정필(張貞弼 안동인)
11. 윤신달(尹莘達 파평인)
12. 최준옹(崔俊邕 동주인)
13. 문다성(文多省남평인)
14. 이능희(李能希 청주인)
15. 이도(李棹 김의인)
16. 허선문(許宣文 양천인)
17. 구존유(具存裕 능성인)
18. 원극유(元克猷 원주인)
19. 금용식(琴容式 봉화인)
20. 김훤술(金萱術 해평인)
21. 한란(韓蘭 청주인)
22. 강여청(姜餘淸 냉천인)
23. 손긍훈(孫兢訓 밀양인)
24. 방계홍(房係弘남양인)
25. 나총례(羅聰禮 금성)
26. 이희목(李希穆 부평)
27. 염형명(廉邢明 서원-파주)
28. 최필달(崔必達 강릉)
29. 김홍술(金弘述)
30. 김락(金樂) 등이다
고려의 공신
기록이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의 개국공신이다. 왕건이 고려를 개국한 후 4인을
1등공신에 봉했고 고려 태조때 삼한통일에 공이 있는 자에게 삼한공신의 작호를
내렸다. 또한 삼한공신이 널리 퍼져 고려시대에 공신은 모두 삼한공신을 지칭하는
말로 퍼졌다. 고려 현종 때에 강감찬 등 5인에게 거란토벌의 공으로 공신칭호를
내리며 이때부터 공신에게 토지와 노비를 내리는 제도가 상례화되었다. 무신정권
후에는 당사자에게만 주던 공신호를 조부나 자제에게까지 추증하는 관례가
생겼다. 최충헌의 부친과 동생에게 공신작호를 내려준 것이 그 예이다. 공신의
자손에게 특권을 내리는 상례와 군현을 올려주는 상례도 도입되었다. 충렬왕
시대에는 소수인원만 공신에 봉하다가 일시에 많은 인원을 공신에 봉하게 되었다.
고려의 공신 명단
고려의 공신은 고려에 대한 공으로 사람들에게 내려주는 관직이다.
염상 개국 공신
강감찬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
강지연
구존유 삼한벽상공신
김방경 삼한벽상 추충정난정원공신 선충협모정난정국공신
김은부 창국공신(昌國功臣)
김지서
박수경
박수문
배현경 개국 공신
신돈
신숭겸 개국 공신
심덕부
염제신
오연총
완풍대군
왕식렴 개국공신 광국익찬공신
왕자지
왕평달 개국공신 삼한공신
왕희순 (고려)
윤관 (고려) 추충좌리평융 척지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 拓地鎭國功臣)
이공수
이금서
이색 문충보절찬화공신(文忠保節贊化功臣)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
이자겸 양절익명공신(亮節翼命功臣) 익성공신(翼聖功臣) 동덕공신(同德功臣) 추성좌리공신
(推誠佐理功臣) 협모안사공신(協謀安社功臣)
이제현 1320년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
장보지
정도전
정습명
조원길
최안도
최영 안사공신(安社功臣)
최우 1228년 오대진국공신(鼇戴鎭國功臣) 1228년 오대진국공신(鼇戴鎭國功臣)
최원호 (고려)
최충1050년 추충찬도공신(推忠贊道功臣), 1053년에는 추충찬도협모동덕치리공신
(推忠贊道恊謀同德治理功臣), 1055년에는 추충찬도좌리동덕홍문의유보정강제공신
(推忠贊道佐理同德弘文懿儒保定康濟功臣)
최충헌 1197년(명종 27) 충성좌리공신(忠誠佐理功臣) 정국공신
http://blog.daum.net/hyunj4322/236
|
첫댓글 세상은 호사다마,새옹지마,전화위복,이라 하지요.
남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아니됨니다.기쁨 충만하소서..
사람에게 늘 부족한 것은 성실이다.
성실하면 지혜도 생기지만,
성실치 못하면 있는 지혜도 흐려지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