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97) 원종 2
- 원종 갈팡질팡.
1260년 2월 계해일 원나라에서 고려로 돌아오던 원종은 동행하던 원의 장수 야속달로부터 3월 상순까지는 강화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개경으로 나와야 한다는 강압적인 말을 들은 이래 계속되는 개경 환도를 요구하는 원나라의 독촉에 전체 관헌과 백성 승려로 하여금 개경에 집을 지으라고 명령한바가 있습니다. 이에 폐허로 남아 있던 개경에는 궁궐을 비롯하여 사찰과 가옥 등의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강화에 뿌리를 내리고 30년째 살아오며 모든 권세를 틀어쥐고 있는 김준과 그 측근들은 이미 감을 잡고 있었습니다. 원나라를 등에 업고 개경천도와 함께 원종이 왕권을 행사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이는 무신정권의 붕괴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원종의 친원 정책이 애초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김준은 고려의 자주성 확보라는 명분을 내세워 원종의 정책에 전적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즉 강화도라는 지리적 여건에 의지한 채 차근차근 군사력을 키워 원나라의 군대를 이 땅에서 내몰고 강한 고려를 재탄생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닥달하는 원나라와 왕의 명령을 외면한 채 강화도에서 꼼짝도 않는 김준, 비록 자신의 신하라고 하지만 힘으로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원종은 좌절하고 맙니다. 고려사 1260년 12월 경신일 기록을 보면 “왕이 궁녀들을 수방에 모아놓고 음란 방자하여 절도가 없으므로 어사대부 김인준이 수방을 바깥으로 옮겼다”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원종은 무엇하나 뜻대로 할 수가 없으니 궁녀들을 상대로 음란행위에나 몰두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원종이 실의에 빠져있을 때 원에서는 쿠빌라이가 자신과 정권다툼을 벌이던 동생 아래패가를 제압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왕의 권위를 찾는 길은 원나라에 의지하는 길 뿐이라고 생각해 오던 원종은 원과의 유대강화를 위하여 태자 심을 원나라에 파견하여 축하표문을 전하는 등 원종은 원나라와의 유대에 각별히 공을 들입니다.
1654년 5월 신사일 몽고의 사신이 쿠빌라이의 친서를 가지고 고려에 도착합니다. 그동안 귀순한 여러 나라 왕들이 몽고 수도 연경에 모여 조근의 예를 거행하려 하니 고려의 왕도 참석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에 원종은 8월 계축일에 몽고로 출발하여 9월 경자일에 연경에 도착하여 원나라 왕 쿠빌라이를 예방하고 우의를 다지게 됩니다.
그러나 원종과 쿠빌라이 사이를 잠시 멀어지게 한 사건이 발생 하였는데, 그것은 원나라가 일본과 친교를 맺으러 사신을 보내고자 하니 고려 관원이 책임지고 일본까지 원의 사신을 안내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고려의 추밀원부사 송군비와 시어사 감찬에게 원의 사신인 흑적을 안내토록 합니다.
그런데 일행이 1267년 정월에 송변포에 도착하니 풍파가 너무 험악하여 도저히 배를 띄울 형편이 되질 않아 다시 개경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사신들이 배도 타지 못하고 되돌아오자 걱정이 된 원종은 송군비를 몽고에 보내 기상악화로 일본에 가지 못했다고 보고를 하지만, 몽고왕 쿠빌라이는 의심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몽고에 머무르는 고려 사람들이, 고려가 일본과 힘을 합쳐 몽고에 맞서려고 준비 중이라는 얘기를 하고 있다고 들은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쿠빌라이는 한술 더떠서 일본이 몽고에 항복 하고 귀순할 수 있도록 고려가 책임지고 다리를 놓으라고 윽박 지릅니다.
이리하여 원종은 어쩔 수 없이 몽고의 사신과 함께 대신 반부로 하여금 일본으로 떠나도록 합니다. 그러나 일본에서 얻은 것 하나없이 반년 가까이 일본에 머무르던 사신 일행은 돌아오고 맙니다. 일행이 일본에 도착은 하였으나 일본인들은 수도에는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하고는 서쪽 구석인 테제부라는 곳에 머무르게 하고는 5개월이 넘도록 관심조차 주지 않았고, 원종과 쿠빌라이의 친서와 국서를 주어도 아무런 답이 없었으며 심지어는 값비싼 선물까지 주며 타일러도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쿠빌라이는 잔뜩 화가나서 다시 일본에 사신을 보낼 것을 명하는 한편, 고려로 하여금 일본을 침략하도록 군대를 정비하고 선박을 건조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또 한편으로는 몽고의 관원을 흑산도로 보내 일본으로 가는 바닷길을 시찰하도록합니다. 바야흐로 일본 정벌의 분위기가 무르 익어가는 시점이었습니다.
고려왕조실록(98) 원종 3
- 권신의 손에 원종 폐위되다.
한편 몽고는 1268년 3월 송나라 정벌을 준비하면서 고려에 원병과 병선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에따라 쿠빌라이는 김준(김인준)과 그의 아우 김충으로 하여금 모든 준비를 갖추어 연경으로 입조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몽고에 들어가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김준은 원나라 사신을 죽이고 원종마저 제거해 버리려합니다.
그러나 김충의 반대로 김준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김준은 동생과 같이 원나라에 다녀 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김준의 행동거지가 못마땅한 원종은 임연에게 김준을 죽이라고 넌지시 이릅니다. 이에 임연은 김준과 김충 형제를 죽여 버립니다. 그러나 김준 형제가 죽었다고 원종에게 왕권이 넘어온 것은 아닙니다. 정권을 잡은 임연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기 때문에 원종은 전과 별 다름없는 허수아비 왕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1268년 2월 몽고에서 돌아온 하정사 이순익이 심상치 않은 말을 전합니다.
“전하, 몽고왕 쿠빌라이가 우리 고려를 매우 의심하고 있사옵니다. 몽고의 조서를 빙자하여 선박을 건조하고 군대를 재정비하고 있는 것은 장차 고려가 바다 한가운데에 들어가 몽고에 대항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고 서인에게 직접 물어 보았사옵니다”
이는 고려의 개경 환도가 완전히 이루어 지지 않았음을 트집 잡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전에 일본에 가는 사신이 파도를 이유로 되돌아갔을 때도 쿠빌라이는 개경 환도를 서두르지 않는 이유를 강하게 질책한바가 있었습니다.
이에 원종은 개경 환도를 서두르려 합니다. 그러나 무신정권이 떡 버티고 있는 상태에서 원종이 독단적으로 개경 환도를 이룰 수는 없는 상황이었고 이로 인해 원종과 임연의 사이에 갈등이 깊어지게 됩니다.
임금의 조치에 불만이 쌓인 임연은 1269년 6월 재상들을 모아놓고 반역을 모의하여 원종을 폐위시키고 안경공 창을 찾아가 왕으로 추대합니다. 완전 무신들 마음대로였던 샘이지요. 그리고는 원종을 별궁으로 쫓아내버립니다.
왕으로 추대된 안경공창은 임연을 교정별감으로 임명함으로서 모든 실질적인 권한을 임연에게 쥐어주게 됩니다. 모든 권력을 한손에 움켜쥔 임연은 바로 중서사신 곽여필을 몽고에 파견하여 원종이 병에 걸려 국사를 볼수가 없으니 창에게 양위하였다고 거짓 보고를 합니다. 당시 태자 왕심은 몽고에 볼모 신세로 있었는데 왕이 바뀌었다는 말을 접하자 바로 고려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태자가 파사부에 이르렀을 때 정주관청의 정오부가 강을 몰래 건너와 임연이 원종을 폐하고 새 왕을 세웠다는 사실을 일러바치면서
“고주사 곽여필이 지금 영주에 와있으니 사람을 시켜 그를 만나보게 하십시요”하고 알려 줍니다. 이에 태자는 동행 중이던 몽고의 사신 일곱명을 영주로 보내 곽여필을 잡아 사실을 확인하고 통곡하며 몽고로 되돌아갑니다.
되돌아온 태자에게 모든 사실을 전해 들은 쿠빌라이는 사신들과 태자를 함께 고려로 보내 사건의 진위를 캐내어 바로 잡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임연은 원종에게 병이 있어 양위케 하였다고 때거지를 씁니다. 이에 몽고는 그해 11월 다시 고려의 사정에 정통한 사랑 흑적을 보내 사건의 당사자들이 모두 몽고에 입조하여 사실을 고하도록 하라고 하자 임연을 비롯한 당사자들은 당혹감을 금치 못하게 됩니다.
몽고의 사신 일행을 위해 배푼 연회에서 흑적이 임연에게 원종을 복귀시킬 것을 넌지시 권하자 바로 다음날 임연은 원종을 복귀시킵니다. 하룻밤 사이에 또 왕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정말 요지경 속이나 마찬가지네요. 신하의 손에 일국의 왕이 하룻밤 사이에 바뀌곤 하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