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감리회 선교 백주년 기념대회와 제16대 김봉록 감독회장
감리교 선교 100주년이 되는 1984년 10월 29일~31일까지 정동제일교회에서 제16회 총회가 개회되었다. 여전히 감리교 안의 분위기는 100주년기념사업이 팽배했다. 이러한 때 총회는 다음 감리교회를 이끌 지도자들을 선출하였다. 그 결과 서울연회는 김봉록 목사가, 중부연회는 이복희 목사가, 동부연회는 임순목 목사가, 남부연회는 이준용 목사가, 삼남연회는 이호성 목사가 각각 연회 감독에 당선되었다. 감리회를 이끌 대표자로 감독회장을 선거하였는데 김봉록 감독이 356표를 얻어 감독회장에 당선되어 100주년을 맞는 한국감리교회를 이끌게 되었다.
1985년은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가 1885년 4월 5일에 제물포 항에 첫 발을 내디딘 지 꼭 10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에 5개 연회가 인천 숭의교회에서 연합연회로 모였으며 각 연회는 숭의, 내리, 창영, 중앙, 도화교회에서 각각 연회를 개최하였고, 인천실내체육관에서는 연합하여 100주년 기념대회를 성대하게 열었다. 이로써 감리교회는 한국 개신교 제2의 교단으로 발전하여 선교 2세기를 바라보게 되었다.
김봉록(金奉祿) 감독회장은 1925년 7월 10일에 경기도 부천군 북도면 신도리 612번지에서 태어났다. 1950년 성결교 서울신학교를 졸업한 후 1953년에 강화 조산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면서 강화 동광중학교를 설립했다. 1956년 인천 화도교회, 1962년에 인천 기독교병원 이사장, 1963년 율목교회에서 목회를 하였으며 그해 제6대 인천서지방 감리사로 활동하였다. 1968년에 서울 세검정교회를 담임하였고 1972년 서울북지방 감리사를 역임하였다. 그 후 1984년에 제3대 서울연회 감독과 제16대 감독회장에 선임되어 기독교 대한감리회 유지재단 이사장, 협성신학교 운영이사장, 태화사회관 운영위원장직을 맡아 활동하였다. 감독의 임기를 마치고 1988년 정동제일교회를 담임하였다. 그 후 1996년 3월 12일~14일까지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16회 서울연회(배동윤 감독)에서 은퇴하였다.
김봉록 감독은 서울연회 감독 재임 시 제5회 서울연회(1985년 4월 3일~5일, 연합연회로 인천숭의교회 개최)와 제6회 서울연회(1986년 3월 12일~14일, 서울광림교회 개최)를 개최하였다. 감독회장으로서 제16회 총회 특별총회(1985년 10월 29일~31일, 정동제일교회 개최), 제17회 총회(1986년 10월 28일~30일, 정동제일교회 개최)를 주관하였다.
평생 ‘진실’을 좌우명으로 삼고 달려온 김봉록 감독은 1996년 은퇴 이후 경기도 군포에 거주하였고 2017년 향년 92세의 일기로 별세하였다. 유순희 사모와 슬하에 남매(김태식, 김정신)를 두었다. 저서로는 「소명의 순간들」,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이 있다.
이복희(李福熙) 감독은 1933년 8월 21일 경기도 시흥군 소래면 대야리에서 태어났다. 경복중학교 5학년 때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1950년 12월에 학도병으로 용약(勇躍) 군문에 입대하였다. 어린 나이에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을 경험하면서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 가눌 길 없는 마음을 군인교회에 가서 풀었다. 그것이 기독교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때 그는 열성적인 교인으로 교회에 출석하여 1953년 7월에 세례를 받고 전역했다. 1955년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신학대학에 입학하여 1959년 졸업과 함께 인천 송현교회에 부임하였다. 1965년에 부천성광교회를 부임하여 10년을 담임하였다. 1973년에는 일본 아시안 학원(Asian Institute)를 수료하였다.
1975년 그의 나이 42세에 감리교 모 교회 인천 내리교회에 부임하였다. 1977년에 감리교인천선교대회 대회장, 1978년 제11대 인천서지방 감리사를 역임하였다. 그 후 1984년에 제17대 중부연회 감독에 당선되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재단이사, 한국기독교교역자협의회 인천지회장, 1985년 감리교신학대학 이사, 1986년 아세아 농촌선교 협의회 이사, 전국청소년전도협의회 이사를 역임했다. 감독 재임 시 제44회 중부연회(1985년 4월 3일~5일, 연합연회로 인천숭의교회 개최)와 제45회 중부연회(1986년 3월 19일~21일, 부천제일교회 개최)를 개최하였다.
감독의 임기를 마친 후 1987년에 인천기독교연합회 제26대 회장에 피선되었다. 1989년 인천성시화운동본부 이사장, 재단법인 사랑의 장기기증운동 경인지역본부 이사장, 1993년 의료법인 성민병원 이사, 인천 중국선교연구협회 이사장, 기독교선교문화연구회 이사, 1995년 인천미신도종족입양본부 이사장, 인천호스피스이사장, 1996년 기독교대한감리회 복지재단 이사, 1997년 한국 OM선교회 법인이사, 한국외항선선교회 법인이사, 1998년 방글라데시개발협회 법인이사, 1999년 ‘엑스폴로99’대표대회장을 역임하였다. 2004년 4월 12일~14일까지 숭의교회에서 개최된 제65회 중부연회(전양철 감독)에서 정년 은퇴하고 2006년 7월 9일 향년 73세의 일기로 별세하였다. 이동숙 사모와의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임순목(林淳穆) 감독은 1926년 6월 경기도 여주에서 출생하였다. 중앙신학교를 졸업하고 북내, 오천, 석사, 문막, 태장, 학성교회를 담임하였으며 원주지방 감리사를 역임했다. 원주시 기독교연합회 회장으로 일하였고 원주 우산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 1984년 제17대 동부연회 감독에 당선되었다.
임순목 감독은 농어촌 및 광산 등 특수 지역에 선교를 추진할 것, 원주를 중심한 감리교 미개척지역에 개척 사업을 추진할 것, 교단 100주년 기념관 건립에 적극 협력할 것, 은급제도를 정착시키고 북한 선교정책을 수립할 것을 다짐하며 감독의 업무에 들어갔다. 임순목 감독은 제37회 동부연회(1985년 4월 3일~5일, 연합연회로 인천도화교회 개최)와 제38회 동부연회(1986년 3월 18일~20일, 속초교회 개최)를 개최하였다.
임순목 감독은 1996년 3월 19일~21일까지 충주남부교회애서 개최된 제55회 동부연회(백명호 감독)에서 은퇴하였으며 그 후 원주에서 거주하였다가 2005년 향년 79세의 일기로 별세하였다.
이준용(李俊鏞) 감독은 1923년 6월 8일에 황해도 신계군 다율면 구만리에서 아버지 이달웅(李達雄)과 어머니 박소청(朴少靑)의 아들로 태어났다. 1949년에 성결교 서울신학교를 졸업, 1975년에 목원대학 교역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49년 경기도 장단읍교회 전도사로 일했으며 1950년 개성 남부교회 전도사로 목회를 하였다. 1952년 충남 광천교회, 1953년 전의교회 1954년 대전 성남교회에서 목회했다. 1956년에 대전 사회사업 애육원 재단 이사장, 1957년 대전 사회사업 성실영아원 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하였다. 1965년 3월 16일~22일까지 대전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11회 남부연회에서 이환신 감독의 집례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65년 안수 받고 대전선화교회에 부임하여 1994년 은퇴할 때까지 담임했다. 1968년 대전시 기독교연합회장과 대전지방 감리사, 1969년 호수돈여고 재단이사, 1971년 목원대학 재단이사, 1972년 청양청신여중 재단이사, 1975년 배재대학 재단이사, 1976년 배재초급대학 학장, 1983년 감리회 사회복지 재단이사, 기독교연합 봉사회 재단이사로 활동하다가 1984년에 제5대 남부연회 감독에 당선되었다. 감독 재임 시 제31회 남부연회(1985년 4월 3일~5일, 연합연회로 인천창영교회 개최)와 제32회 남부연회(1986년 4월 2일~4일, 대전선화교회 개최)를 개최하였다.
1986년에는 기독교대한감리회유지재단 이사, 1992년에 삼천리교육원 원장으로 있다가 1994년 3월 23일~25일까지 대전 선화교회에서 개최된 제40회 남부연회(박철규 감독)에서 은퇴하고 선화교회 원로목사가 되었다. 은퇴 시 이준용 감독은 장학금을 기부하여 ‘이준용 감독 장학재단’을 설립하여 활동했다.
이준용 감독은 다수의 수상 경력이 있는데 감독회장 표창, 모범교역자상, 법무부장관 표창, 배재학당 공로표창, 목원대학 공로표창을 수상하였으며, 그 외에도 감리교단과 기독교학원, 기독교연합 기관에서 헌신적인 봉사 활동한 공적을 인정받아 다수의 공로 표창을 받았다. 평생 ‘경천애인(敬天愛人)’을 좌우명으로 삼은 이준용 감독은 2013년 6월 8일 향년 90세의 일기로 별세하였다. 강윤신 사모와 슬하에 2남 1녀(이선은 장로, 이미혜 사모(사위 이기복 감독), 이진은 권사)를 두었다.
이호성(李浩成, 호 巨山) 감독은 1928년 8월 28일에 경기도 부천군 다주면 주안리 223번지(현재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주안동)에서 부친 이갑석 목사와 모친 홍사라 사모의 5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1949년 서울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인천 연희교회에 부임하였고 1950년 4월에 제10회 중부연회에서 김유순 감독의 파송을 받았다. 연희교회는 그의 부친 이갑석 목사가 제12대 담임자로 있었고 그는 14대 담임자로 부임하여 부자가 대를 이어 섬기게 되었다. 1951년 10월 1일에 육군 군목으로 입대하여 1965년 4월 30일 육군 소령으로 전역했다. 1965년 부산 성일교회를 담임하였으며 1975년 삼남연회 부산지방 감리사, 1980년 삼남연회 고시위원장을 역임했다. 1984년 제3대 삼남연회 감독에 당선되었다. 감독 재임 시 제5회 삼남연회(1985년 4월 3일~5일, 연합연회로 인천중앙교회 개최)와 제6회 삼남연회 (1986년 4월 1일~3일, 대구제일교회 개최)를 주관하였다.
1985년 7월 10일 감리교신학대학 이사, 1989년 3월 11일 감리교신학대학 이사장 직무대리, 1990년 3월 10일 삼남연회 자격심사위원장, 1995년 2월 17일 부산지방 경찰청 경목실장을 역임했다. 이호성 감독은 1996년 3월 27일~29일까지 대구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16회 삼남연회(박문순 감독)에서 은퇴하고 부산에 거주했다. 2018년 향년 90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이호성 감독은 하정희 사모와 슬하에 자매(이공주, 이은주)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