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생명력과 신록과 꽃의 계절이면서 새들의 계절이기도 하다. 봄이 되면 온갖 새들이 활발하게 노래한다. 대부분의 새들은 음성으로 의사소통을 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음성중심주의자들이다. 한편 개미들도 봄이 되면 활발하게 활동하지만 그들은 목소리가 없고 따라서 말이 없다. 개미들은 주로 페로몬이라고 불리는 복잡한 화학적 신호 체계를 통해서 의사소통을 한다고 한다. 그들은 어찌나 과묵한지 종종 요란한 난장이나 격렬한 전쟁을 벌이는데도 그들의 세계는 고요하기만 하다.
인간인 우리는 소통을 위해서 말도 하고 글도 쓴다. 게다가 글을 써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걸 읽도록 하기도 하고, 남이 쓴 글을 읽기도 한다. 말과 글을 통해서 남들이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 알고 싶고, 내가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있고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를 남들에게 알리고도 싶다.
그런데 말과 글이 기능하는 방식이 서로 사뭇 다르다. 말은 머릿속에서 생겨나서 혀를 거쳐 나오는데 머릿속과 혀까지의 거리가 어찌나 가까운지 그 전달 과정을 확인할 수 없으며, 말의 구성성분이 어찌나 휘발성이 강한지 노출되는 순간 흩어져 사라져 버린다. 그에 비해 글은 머릿속에서 생겨나 손을 통해 나오는데 머릿속과 손과는 거리가 꽤 되니 그것이 나오는 과정에 그것의 진위나 품질을 따져 볼 시간이 다소라도 주어진다. 게다가 그 결과물이 흩어져 사라지지 않고 거기 남아 있기 때문에 맘에 들지 않으면 얼마든지 고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요즘 우리가 날로 쓰는 모바일 문자 채팅은 말인지 글인지 애매하다.
말의 찰나성과 글의 지속성이 자신의 속마음을 표현하는 데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거짓말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이 적용된다, 우리는 거짓‘말’을 순식간에 하지만 거짓‘글’은 의도를 갖고 천천히 지어내서 사용한다. 우리는 남의 말을 듣거나 글을 읽으면서 그 말이나 글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할 뿐만 아니라 그걸 실행하는 사람 자체를 파악하려고 든다. 그렇게 해서 어느 정도 상대방의 인격을 파악하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그것의 대부분은 파악되지 않는다. 그만큼 글은 자체 검열과 각색의 과정을 거친 것이다. 어떤 한 편의 글이 저자에 관해 드러내는 부분 대 드러내지 않는 부분에 대한 비율이 아마 가르마처럼 2대8이나 빙산처럼 1대9 정도쯤 될까? 그럼에도 한 개인 평생 동안 쓴 글의 총합은 결국 그의 자서전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말의 즉시성과 글의 지연성이 그 후과를 가지기도 한다. 말은 어찌나 순식간인지 나는 종종 아차 하는 순간 말실수를 하고 나서 후회하곤 한다. 나는 글을 쓰면서도 자꾸 틀린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글은 그 지연성 때문에 다행히 얼마든지 고칠 수 있다. 고치면 고칠수록 좋아진다. 고친 게 더 안 좋아졌다는 평가를 가끔 받기도 하지만 글은 대체로 고친 만큼 좋아진다. 미국의 독립선언서는 토마스 제퍼슨 등 당대 미국 최고의 지성이자 문장가들이 모여서 작성한 것인데도, 그걸 완성하는 데 무려 86번이나 고쳐 썼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나는 고개가 숙여졌다.
그런데 우리가 해야 하는 말과 글의 양은 어느 정도가 적당량일까? 사람들 중에는 홈쇼핑 채널의 쇼 호스트처럼 계속해서 수다를 떠는 이도 있고 묵언정진 하는 스님처럼 과묵한 사람도 있다. 말을 많이 하면 아무래도 실언도 많게 된다. 나도 실언을 하거나 실없는 말을 하고 나서 후회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처럼 후회하는 내가 위안 겸 반면교사로 삼는 어떤 친구가 있다. 그는 나보다 훨씬 더 많이 말을 하고 그만큼 자주 말실수를 한다. 그는 좌중의 말판을 독차지하려 든다. 그런 증상은 나이가 깊어 갈수록 더욱 심해진다. 더욱 가관인 것은 말로 그렇게 민폐를 끼치고 나서 곧 후회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문제는 그 후회의 말도 빈도가 너무 잦다는 것이다. 후회를 하다하다 지쳤는지 이제는 후회를 후회한다.
말의 빈도와 관련해서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건, 대면해서는 떠버리이거나 수다쟁이인 사람이 단톡방 등 SNS 문자로는 말을 극도로 삼가는 경우가 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대면해서든 카톡으로든 말이 많은 사람도 있고, 그 두 경우에 다 말을 거의 안 하는 사람도 있다. 왜 그런 현상이 생기는지 무척 궁금하다.
식당이나 카페에서의 친교 모임에서 내내 발언권을 독차지하고 다른 사람들을 지겹게 만드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그 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자신의 입장이나 속내를 일절 드러내지 않는 친구도 있다. 그 후자의 아내가 그러는데 바깥에 나가서는 그렇게 입에 자물쇠를 채우는 사람이 집안에서는 잔소리가 그렇게 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참 신기하다. 한편 바깥에만 나오면 떠버리가 되지만 집안에 들어가면 바윗돌처럼 입을 닫는 친구들도 간혹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 양극단이 아니라 그 중간 어디에 속한다.
어제 오전에는 산책 중에 음성중심주의자인 방울새 소리를 귀 기울여 들었다. 녀석의 말은 굉장히 즉흥적이다. 방울새도 거짓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실수를 하고 후회하는 것 같지는 않다. 방울새의 말은 오류가 없으니 고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어제 저녁에는 온라인 글쓰기 모임에서 갖는 오프라인 대면 모임에 참석했다. 인터넷으로 글을 써 주고받으며 교류하다가 뭔가 부족하다고 느껴, 만나서 말로 친교를 다지는 시간이다. 나는 그 모임에서 반가운 사람들과 만나 두어 시간 동안 식사도 하고 소소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런데 말이든 글이든 일단 표현해 놓으면 표현한 사람이 을이 되고 듣거나 읽은 사람이 갑의 입장이 된다. 표현한 사람이 평가의 대상이 되고 청자나 독자가 평가의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될수록 신중하고 그 양을 줄여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층처럼 과묵하게, 천천히 글만 써야 하나. 지층은 어마어마하게 신중하다. 생각을 하고 또 해가며 수천 년 동안에 한 줄 적고 절대로 고치지 않는다. 그래서 그게 백만 년이고 천만 년이고 남아 있게 된다. 어쨌든 말이든 글이든 그 양의 많고 적음보다도 더 문제가 되는 건 그 무게인가 보다. 말과 글의 무게는 그 사람의 생각의 무게이고, 생각의 무게는 실천이나 경험의 무게이기 때문이다.
밀턴의 『실낙원』 「제2권」에 “노래는 감각을 매혹시키고 웅변은 영혼을 매혹시킨다.”(Eloquence the Soul, Song charms the Sense.)는 표현이 있다. 그에 비해 문학적인 글의 의도는 독자를 매혹시키려는 게 아니고 저자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게 저자 자신의 어두운 마음의 방에 한 줄기 빛을 들이고, 지친 독자의 마음의 방에 스며들어 그의 감각과 영혼을 달래 주려는 시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첫댓글 hanafeel 님이 호미 님의 글을 읽으시고 넘치는 감흥을 정리해 보시고자 ai를 동원하셨나 봅니다. ^^
말과 글의 무게가
어린이의 웃음처럼 가벼웠으면.
실천과 경험 그것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었으면.
AI녀석은 낯 뜨거운 거짓말을 서슴지 않고 합니다.
데이터회로란게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