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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 입문] 다음 시간 자료입니다.
제 18강
1958. 7. 24.
이분법적 의식·310 | 변증법적 매개는 양시론이 아니다·312 | 극단들의 비판적 자기반성으로서의 매개·313 | 사회과학들 속의 양자택일·314 | 변증법의 부정적 진리 개념·316 | 가치들은 피안의 것도 단순히 상대적인 것도 아니다·318 | 진리의 척도는 객체에 내재적이다·319 | 변증법은 입장에 따른 사유가 아니다·320 | 변증법은 처방을 거부한다·322 | 논리적 형식으로서의 정의·322
오늘 이제 여러분에게 계속해서 변증법적 사유가 직면하고 있는 난관들 가운데 한 가지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이로써 나는 아마 관리적 사유를 통해 가장 확연하게 규정된 것으로 보이는 현재 의식의 계기를 다루게 될 것입니다. 즉 노골적인 양자택일을 하는 사유, 말하자면 설문 형식에 따르는 사유, 혹은 전체주의 국가들에서 사람들에게 아리아인이냐 비-아리아인이냐, 프롤레타리아냐 비-프롤레타리아냐, 올바른 입장을 가진 자냐 삐딱한 자냐 혹은 그와 유사한 형태로 신분증을 요구하는 사유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속에서 인간의 운명은 그런 식으로 가능한 한 확고하게 정의에 의해 규정된 계급으로 각각 분류되는 데에 대체로 따라갑니다. 이는 오늘날 일반적으로, 인간의 실제 삶에서 본래 관리행위로부터 유래하여 인간적인 영역에 적용되는, 가능한 모든 범주적 형식들이, 즉 가능한 모든 단순 질서형식들이 이제 직접 권력으로, 그것도 두려운 권력으로 되는 한에서,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이라는 관념론의 테제가 끔찍하게 아이러니컬한 상태로 실현된 것과도 같습니다.(입문310)(262)
아무튼 나는 어린 시절에 이미 “나의 편이 아닌 자는 나의 적이다”라는 명제에 대해 극히 격하게 반발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또 사실 그러한 명제 속에는 윤리를 구실로, 그러니까 미온적이어서는 안 되고 결단을 해야 한다는 구실 아래 어떤 양자택일 혹은 어떤 결정을 내리도록 강요당한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결정들이라는 것은 본래 결정의 개념을 통해 호소하는 자율적 사유라는 심급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타율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외부로부터 미리 제시된 것입니다. (…) 일반적으로 아마 최상위의 차^원에서 오늘날 지배적인 사유의 퇴행을 타율성으로의 후퇴라고 특징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입문311-312)(263)
변증법적 사유는 이것이냐-저것이냐, 곧 미리 주어진 대안들 사이에서 고르는 것도 아니고, 이것이면서-또한-저것, 곧 서로 갈등하는 가능성들을 놓고 저울질하고 그 다음에는 그것들 사이에서 중간노선을 찾아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헤겔에게서 유래하는 변증법의 역사적 운명은, 사람들이 그 중심 개념, 즉 매개 개념을 바로 내가 여러분에게 암시하는 의미에서 오해했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은 변증법적 사유라는 것이 모든 사태에는 어떤 좋은 면과 또한 그릇된 면이 있다고 실제로 말하는 사유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런 식으로 마침내 순응주의적 의식의 일반적인 잡탕 속에 변증법까지 끌어들이고, 모든 사태에는 무엇인가 중요한 점이 있지만, 그 반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좋은 면과 나쁜 면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선의의 상대주의와 변증법을 화해시켰습니다. 나는 대상들을 그 복합상태 속에서 제대로 대하려고 시도하는 변증법의 고찰방식에는 이러한 모티프도 함께 포함되어 있음을 결코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그 속에는 인도주의적인 면도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면서-또한-저것이라는 이 사고방식에서는 의식이 현존하는 것에 맞섬으로써 이제 일종의 심판관 기능을 수행해야 하고 대상들을 선과 악으로 구분한다는 요구가 최소한 부정되는 한에서 그렇습니다.(264)(입문312)
우리가 예컨대 ‘매^개’라는 말로 지칭한 것이 변증법에서는 양극단 사이의 중간노선이 아니라, −그리고 이 점은 내게 물론 이 맥락에서 결정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변증법적 사고 자체가 단지 그 극단을 통해 자체와 동일하지 않은 계기를 향해 운동해간다는 것, 그러니까 일단 동역학적으로 표현하자면 변증법적 매개는 대립물들 사이의 중간치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극단 속으로 들어가고 극단 자체 속에서 그것을 최대한으로까지 밀고가 그 자체의 대립을 지각함으로써만 야기된다고 하겠습니다.(입문312-313)
오늘 나는 이제 극단들을 통한 이 운동 속에서 이루어지는 변증법의 논리적 측면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 도덕적이라고 칭할 수 있는 측면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즉 우리가 어떤 진보적 현상에서 그 역사적 한계 혹은 일반적으로 그 의심스러운 성격을 지적할 경우, 이는 전위적인 것 혹은 진보적인 것을 상대로 더 온건한 것, 온건주의적인 것을 더 나은 것이라고 지칭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해당 현상으로 하여금 자체 반성하도록 하고, 가능하다면 그것이 그때까지보다 스스로 더 순수하고 더 일관된 형태를 갖추게 함으로써, 이런 식으로 그렇게 교정되도록 함으로써, 비판적으로 그 의심쩍은 계기들을 교정할 수 있[도록] 계속 밀고가야만 하는 것입니다.(입문313)(265)
이 세상에는 비판적 사고를 중지시켜도 되는 어떤 권력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때그때 변증법 자체가 예컨대 이른바 ‘반성적 사유’에 대한 비판에서처럼, 자체의 어떤 모티프들에서 비판적 반성을 중단시키기 시작했을 때, 이는 사실상 변증법의 원죄였던 것이며, 바로 이 계기 때문에 사람들은 헤겔의 변증법에 머물 수 없게 된 것입니다.(입문313-314)
하지만 비판적 사고가 이제 자체로 진보적인 현상을 장악할 경우, 이는 우리가 그 현상을 상대로 친숙한 상태의 어중간한 인간이성에 호소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어떤 현상의 부적절성과 우리가 관여할 때 우리가 그 현상으로 하여금 자체의 원칙을 더욱 밀고가게 함으로써 그것을 교정하고자 시도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을 뿐입니다. 다른 말로 좀 더 내용적으로 표현하자면, 우리가 되풀이하여 계몽의 변증법에 부딪칠 경우, 즉 계몽의 과정에서, 계몽의 노정에서 희생과 불의로 남아 있는 모든 것을 확인할 수밖에 없는 식으로 합리성의 변증법에 부딪칠 경우, 이는 우리가 이 계몽의 뒤로 다시 돌아가서 어떤 비합리성들의 자연보호공원을 구상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없고 의미해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그것은 계몽이 남겨 놓는 이 상흔들이 동시에 언제나 계몽 자체가 아직 부분적인 것, 말하자면 충분히 계몽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계기들이기도 하다는 점, 또 단지 계몽의 원칙을 일관되게 계속 추구함으로써만 이 상처들이 어쩌면 치유될 수 있으리라는 점을 의미할 수 있을 뿐입니다.(입문314)(266)
한편으로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사회학적-경험주의적으로 사유하고 역사주의적으로 사유해야 하며, 그럴 경우 확실히 어떤 확고한 것은 일반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확고한 것은 모두 바로 그 역동적 상태에 대한 통찰을 통해 상대화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모든 정신과학 혹은 인간에 관한 모든 과학은, 멋지게 말해서 한 ‘세트(set)’의, 번역하자면 ‘일련’의, 확고한 가치들, 이른바 영원한 가치들을 지향해야 한다는 견해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입문315)(267)
나는 파레토(Pareto) 스타일이나 그를 모방하는 만하임 스타일의 상대주의적 사회학자들과도 엄격히 대립한다고 느끼지만, 그와 꼭 마찬가지로 셸러(Scheler)의 것이든 하이데거의 것이든 혹은 겔렌(Gehlen)의 것이든, 오늘날의 인간학적 존재론들에 대해서도 엄격히 대립한다고 느낍니다. 또 내가 여러분을 위해 여기^서 구상하려고 하는 사유의 모델은 바로 이 양자택일을 실제로 인정하지 않는 모델입니다. 즉 변증법 이론은 진리의 이념을 고수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각각의 개별 인식에 엄격히 진리의 척도를 적용하고 바로 이로써 이 개별 인식이 무산되기에 이르도록 하지 않는 변증법은 변증법적 과정 일반이 파악될 수 있기 위해 꼭 필요한 힘을 처음부터 지니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허위에 대한 통찰, 즉 본래 변증법의 결정적 모티프인 비판적 모티프 속에는 그 필수 조건으로서 진리의 이념이 담겨 있습니다. 비판을 수행하면서 이때 그것이 지칭하는 바의 허위 자체를 규정하지 않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경우 이 자리에 끼어드는 이 진리 개념은 결코 현상들 너머의 것이 아닙니다. 변증법 전체에서 관건이 되는 것, 즉 한편으로 이 비판의 계기, 더욱 밀고 나가는 사유의 계기 속에 거부할 수 없고 제거할 수 없게 진리의 모티프가 정립되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때 진리를 현상들 너머의 어떤 사물화된 것, 견고한 것으로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를 현상들 자체의 생명 속에서 찾는다는 점, 따라서 개별 현상 그 자체에 대해, 그 자체의 일관성에 대해 질문하고 바로 이로써 그 허위를 설복한다는 점, 이 점을 실제로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다름 아닌 오늘날의 이분법적 의식이 겪는 실제 어려움입니다.(268)(입문315-316)
사물들의 질서와 사태들의 직접적 동일성에 대한 요구 속에서만 보장될, 어떤 긍정적이고 사물처럼 손에 잡히는 진리 개념은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당연하게 허위에 대한 통찰이 생명을 부지하게 해 주는 힘은 바로 진리의^ 이념입니다. 다만 우리는 이 이념 자체를 어떤 주어진 것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 그 이념은 단지 특정한 부정, 즉 특정한 허위에 대한 통찰이 실제로 이루어지도록 해주는 광원과도 같은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달리 말하면, 변증법은 발생과 타당성의 전통적 구분 또한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또 변증법은 예컨대 극단적 심리주의 혹은 일반적으로 어떤 부류의 심리주의든 모두 옹호하는 바와 같은, 모든 종류의 진리가 그 기원으로 완전히 설명된다는 생각, 또 일단 진리를 발생시킨 것에 대해 알게 되면 진리 자체를 차지하게 된다는 생각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전통적 의식은 발생한 것이 결코 참일 수 없다고, 즉 발생한 것은 그 기원을 이루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를 수 없다고 가르친다고 매우 타당하게 비난한 니체의 인식을 이 자리에서 나는 분명하게 끌어들이고자 합니다. 하지만 내가 여러분을 위해 근원철학에 맞서 전개하려 시도한 변증법적 사고를 일단 받아들일 경우, 즉 어떤 것에서 기원하는 것이 사실상 그 기원이 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일 경우, 이로써 또한 이 정신적 내용의 발생을 통해 동시에 그것의 진리도 끝나고 폐기되었다는 믿음 또한 사라집니다.(269)(입문316-317)
그러나 역으로 또한 진리의 생명이 담겨 있는 과정, 진리가 생겨나고 진리가 몰락하는 과정, 진리가 그 자체의 내용을 지니고 있는 과정을 도외시하는 가운데 어떤 진리를 실체화하는 것, 진리의 생성에 맞서 진리를 그처럼 실체화하는 것, 그러니까 기원에 맞서 타당성을 절대화하는 것도 단순한 기원에 근거해 상대화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허위입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도 변증법적 분석은 실제로 그것이 얽혀 들어가 있는 양자택일 자체를 부셔버려야 하며, 이 양자택일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택일 자체를 단순히 표면적인 것으로, 사물화된 사유의 산물로 파악해야 합니다.(입문317)
한편으로 내게는 실증주의 과학이 그토록 강조하며 옹호하는, 또 막스 베버가 인식론적으로 정식화한, 이른바 가치중립적 사유라는 생각은 참과 거짓의 구분 자체가 일종의 가치구분이라 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이미 매우 문제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내가 어떤 방식으로든 참을 거짓보다 우위에 두지 않는다면, 내가 거짓에 대한 참의 우선성 같은 것을 고수하지 않는다면, 바로 가치중립성이라는 생각이 자랑하는 사유의 객관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아예 그 의미를 잃어버립니다.(270)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어떤 가치들이든 단순히 역사의 피안에 있는 것으로 신봉하고 예컨대 셸러의 경우에 그렇듯이 바로 이 경직된 가치들의 형태로 어떤 척도를 외부로부터 끌어들이고 이에 비춰 내용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평가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독단적입니다. 이는 무엇보다 시대착오적인 사유로 귀결됩니다. 그러니까 예컨대 ‘의무’ 따위의 척도들이 추상적으로 사회적 상황들과 행동방식들에 적용되는데, 이러한 것들은 본래, 그 본연의 의미에 비춰볼 때, 결코 그러한 척도에 비춰 평가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변증법은 여기서도 전혀 이 두 개념 사이를 매개하는 과제를 맡고 있지 않습니다.(입문318)
가치 개념 자체에 대한 분석은 바로 이 가치 개념의 조건들과 그것의 불충분성으로 귀결되지만, 반면에 그와 꼭 마찬가지로 가치중립성의 개념도 그것을 엄격히 구현할 경우 불가능하다는 점이 입증되며, 따라서 이 범주들 자체를 그렇게 생산된 상태로 이해하는 사유는 이 개념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위해 다른 것을 부정하지 않고 이 양자택일을 아예 넘어서며, 이때 물론 그 추상적이고 사물화된 형식으로 가치 개념에 의해 일반적으로 파악되는 규범적 계기들을 어떤 특정한 의미에서 파악하려고도 시도하는 것입니다.(271)(입문319)
나는 여러분에게 척도, 혹은 변증법이 척도로 보는 유일한 가능성은 바로 내재적인 척도라고 말했습니다. 또 내가 믿기로는 어떤 현실적인 사유가 헤겔의 사유에서 가장 결정적인 것을 어디서든 배운다면 바로 이 대목에서 배워야 한다고 믿습니다. 즉 사유는 이 시대의 징표가 된 것처럼 외부로부터 어떤 사태에 척도들을 가져다 적용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사태 자체에 내맡겨야 하고, 척도는 사태 자체로부터, 헤겔이 명명하듯이, ‘순수한 바라봄’을 통해 비로소 얻을 수 있다는 헤겔의 요구로부터 가장 결정적인 것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변증법적 사유가 지향하는 객체가 자체로서 아무 성질도 지니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데에, 우리가 그것에 범주적 그물을 뒤집어씌움으로써 비로소 그 규정들을 찾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자체 내적으로도 이미 어떤 규정된 것이라는 데에, 달리 말해 어떤 대상도 그것이 우리에게 특정한 것으로 대립하는 한 자체 내에 또한 사유를, 자체 내에 주체를 포함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데에 변증법의 결정적 계기가 들어 있습니다.(입문319-320)
그러니까 달리 말하자면, 이 대목에서 변증법 자체 속에는 관념론의 한 계기가, 즉 매개된 것으로서의 주관성에 대한 암시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세계를 자신에 근거해 파악하거나 산출한다는 관념론의 요구 전체를 아무리 비판적으로 혹은 회의적으로 대한다 해도 고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견해는 다음의 이유 때문에 관념론적인 것이 아닙니다. 즉 내가 방금 주관적 계기로 지칭한 그 계기 자체가 이 경우 단지 하나의 계기를 나타내고, 이때 그 주관성 자체의 기초가 되는 개념은 일종의 추상물을, 살아 있는 주체들 혹은 살아 있는 인간들로부터의 추상을 나타내기 때문에, 또 이 인간의 사유가 그러한 대립들의 규정에 포함되기 때문에, 그리고 그 사유는 바로 이 추상성 때문에, 이 허위라고 할 수 있는 것 때문에, 그 나름 또한 절대화될 수 없고 즉자-로-존재하는 것으로 만들어질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주체가 객체에 의해 필연적으로 매개된 것이고, 역으로 이와 꼭 마찬가지로 객체 또한 사유에 의해 매개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272)(입문320)
오늘날 지배적인 사유습관, 즉 이분법적으로 처리하는 −그러니까 한편으로 사실들을 수집하고 다음에 다른 한편으로 “그래, 하지만 그밖에 우리에게는 그것을 관련지을 수 있는 하나의 가치체계도 필요하지.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사실상 그 사실들을 처리할 수가 없기 때문이야”라고 말하는− 사유습관, 이 이분법적 사유에도 −또 다름 아니라 그것이 절대주의적이고 독단론적인 체할 경우에− 어떤 우연과 자의의 계기가 기입됩니다. 즉 이 경우 가치부여 혹은 내가 관여하는 단순히 주어진 것의 상대성과 우연성을 넘어선다고 믿는 사유, 그런 사유에 대해서는 필연적으로 이른바 어떤 입장이 관련되며, 이때 이런 입장을 취하거나 선택하는 것은 암암리에 사실상 어떤 우연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입문320)
여러분이 ‘~로서 나는’이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여러분은 자신이 일반적으로 이 ‘~로서 나는’이라는 형식을 통해 어떤 절대적 진리로 주장하려고 하는 그 진리를 스스로 상대화하며, 이로써 말하자면 자신의 뒷덜미를 치는 셈입니다. 더구나 이로써 여러분은 어쩌면 사람들을 쪼개놓는, 인간의 의식을 과학자로서, 국민으로서, 기독교인으로서, 개인으로서, 직업인으로서, 기타 등등으로서의 그들의 의식으로 쪼개놓는 사회적 정신분열을 승인하고 더욱 강화시키는 것입니다.(273)내가 이 사회적 정신분열이라고 묘사한 이 현상 자체가 물론 우리 직업생활의 기능화와 궁극적으로는 오늘날 통용되고 있는 경제적 경향에 근거를 둔다는 점, 따라서 그것을 단순한 의식행위나 단순한 철학적 칙령으로는 아무튼 바꿀 수 없다는 점을 나는 아주 잘 의식하고 있습니다.(입문321)
나는 실제로 처음부터 사유가 흔히들 말하듯이 무엇인가를 주리라는 것을 포기하고 그 대신 사유에 무엇인가를, 즉 자기 자신을 내주려고 하는 자만이, 아무튼 변증법과 관여해야 하리라고 믿습니다.(274)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나는 전통적 사유형식들에 머물라고 절실히 권장할 것입니다. 전통적 사유형식들은 일반적으로 인정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일종의 쾌적한 확실성도 주는데, 이 변증법 문제들과 아무튼 일단 관여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런 확실성을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입문322)
사실 칸트, 헤겔, 니체 등의 위대한 철학이 정의의 개념을 극력 거부했는데, 무수한 영역에서의 과학내적 실제 사유는 −더구나 결코 자연과학에서만 아니라 예컨대 법학이나 오늘날의 이론적 수학적 국민경제학 혹은 수많은 이른바 ‘하이픈-철학들(Bindestrich-Philosophien)’이라 해야 할 것들, 수리논리학적 방법과 관련 있는 철학들의 경우에도− 정의를 신봉하고 있다는 점, 즉^ 어떤 개념을 단지 깨끗하고 확고하게 정의하기만 하면 그로써 그 밖의 모든 걱정거리에서 벗어나 이제 절대적으로 확실한 영역에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는 점은 매우 기이한 일입니다. 그러한 확실성은 기만입니다. 그리고 변증법의 과제들 가운데에는 무엇보다 이처럼 정의에 의존하는 사유의 기만을 흔들어놓는 것도 있습니다.(입문322-323)
사실상 ‘정의’는 개념들을 통한 개념들의 규정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275) 오늘날 얼마나 빈번히 일반적으로, 또 완전히 무반성적으로 개념들을 통해 개념들을 규정하는 이 방법을 구속력 있다고 보면서 이때 실제로 사람들이 이미 일종의 무한 소급에 빠지고 이로 인해 그들이 소유하고 싶어 하는 확실성이 무너진다는 점은 생각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 우리는 개념들을 사실상 원칙적으로 두 가지 방식으로, 즉 다른 개념들을 통해서, 혹은 (…) 사실들을 지적하고 이것들을 개념들을 통해 요약하는 방식으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전통적 논리학에 따르면 모든 개념은 개념들로 환원되는 가운데, 결국 해당 개념으로 뜻하는 사태를 직접 지시하는 식의 궁극적 충족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단순한 것만 말하자면, 여러분은 ‘빨강’이라는 개념을 정의할 수 없고, ‘빨강’이라는 개념으로 뜻하는 바를, 그것을 설명해 주려는 사람들의 눈앞에 빨강의 다양한 뉘앙스들을 제시하고 그들이 지각심리학의 가능성 내부에서 이 모든 개별적 빨강에 대한 지각들에 공통적인 계기를 빨강이라는 개념으로 파악하도록 함으로^써, 단지 가리켜 보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달리 말해서 우리는 개념들을 정의할 수 있거나 아니면 인식론에서 지칭하는 바처럼 ‘지시적으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만 해도 벌써 흔한 정의 개념의 제한성이 담겨 있습니다.(276)(입문323-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