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 면회 / 송덕희
지난해 12월 25일 저녁, 남편이 전화를 했다. 임종 면회를 해야 한다며 병원으로 오라고 한다. 목소리가 다급하다. 살아계신 시어머니와 이별하고 죽음을 지켜보는 순간이 온 건가. 한참 동안 머릿속이 하얘진다. 기독병원으로 가는 길은 막히고 날은 추웠다.
시어머니는 돌아가시기 6개월 전에 요양병원에 입원하셨다. 부엌 바닥을 닦다가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는데 고관절이 부러졌다. 엉덩이에 살이 없으니 삭정이 같은 뼈가 충격을 이겨내지 못했다. 그 때 87세였다. 85세부터 빠르게 늙어갔다. 식사를 많이 못 해 살이 빠진 때도 그 무렵부터다. 또 계속 사실이 아닌 말을 하면서 우기셨다. 입에 담기 민망하지만, 시아버지가 바람을 피운다고도 했다. 시어머니 대신 시아버지께서 끼니를 챙기고 잡다한 집안일들도 곧잘 하셔서 며느리로서 부담감이 덜 했다. 그런데 하필 고관절이라니, 걱정이 많았다. 노인들은 수술도 어려워 6개월을 못 넘긴다고들 했다. 입원하던 날, 시어머니는 ‘엉치뼈가 아퍼야.’ 하면서도 휴대전화기를 꼭 쥐고 계셨다. 다음날부터 아들, 며느리, 손주들에게 돌아가며 전화하기 시작했다. 얼른 나가게 해주라, 니 시아버지 뒤 조사하러 가야 한다, 집에 가고 싶다... 밤낮없이 걸려 오는 전화에 점점 지쳐갔다. 시어머니가 바깥과 연결된 단 하나가 전화라는 걸 알면서도 툭 끊어버리기도 했다. 전화를 못 하게 하면 간호사를 할퀴고 욕을 한단다. 병원에서는 나쁜 치매가 왔다고 했다. 코로나 때문에 한 달에 한 번 만나는데, 병원 복도 끝에서 잠깐 볼 수 있었다. 몸은 앙상해져 뼈만 남았다. 손, 발이 묶여 있었다. 부러진 뼈가 붙으려면 움직이지 않아야 하니까 그렇다고 했다. 시어머니의 곱던 모습은 간데없다. 면회하고 돌아온 날은 밤새 뒤척거린다. 며칠간은 손에 일이 안 잡힌다. 내가 시어머니께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시어머니는 4개월 후에 종합 병원의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폐에 염증이 생겨서 숨을 제대로 못 쉰다고 했다. 그날 나는 직장 일로 병원에 못 갔다. 의사는 남편에게 코에 줄을 끼우는 데 동의해 달라고 했단다. 어머니는 연명 치료를 안 받겠다는 서약을 했다니까, ‘그럼, 굶어서 돌아가십니다.’ 하더란다. 세상에 어느 자식이 어머니를 굶어 죽는 걸 원하겠는가. 남편은 아들로서 차마 거부할 수 없었다고, 눈물을 훔쳤다. 몇 주만에 중환자실로 가셨고, 면회가 더 어려워졌다. 딱 한 번 보았다. 피골이 상접한다는 한자 표현이 가장 맞으리라. 팔, 다리는 무수한 주사 자국으로 퍼렇게 멍이 들었다. 손은 풍선처럼 부풀어 있었다. 말초 신경으로 피가 제대로 흐르지 못해서다. 코와 입, 배까지 호스가 꽂혀 있다. 몇 분마다 가래를 빼내 줘야 숨을 쉴 수 있다. 굵은 관이 들어간 입은 내내 벌어져 있다. 의료 기기가 어머니를 '살려내고' 있었다. ‘뭐 하러 왔냐, 얼른 가서 밥해라, 바쁜데 얼른 가라.’ 내쫓듯 손사래를 쳤다. 귀를 바짝 대고서 들은 마지막 목소리였다. 시어머니 기억 속에 나는 늘 바쁜 며느리였나 보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간호사는 어머니도 자주 우신다고 했다. 이토록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프고 의사들이 원망스러웠다. 마지막 남은 시간을 이렇게 병원에서 보내는 게 맞는가. 어머니의 가쁜 숨소리를 뒤로하고 병실을 나왔다.
임종을 지키는 건 처음이라 눈앞에 펼쳐질 일을 상상하며 병원에 도착했다. 추위 때문인지 두려움 탓인지 온몸이 떨렸다. 병실로 들어서니,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의사가 어머니 상태를 설명한다. 요 며칠 병세가 좋아져서 일반 병실로 옮기려 했는데, 2시간 전부터 혈압이 30 아래로 떨어졌다. 산소포화도도 낮아져 혼자 숨을 쉬지 못한다. 산소 공급이 안 되면 모든 장기가 썩는다고. 의사는 어머니 침대 옆에 세워진 모니터를 가리켰다. 혈압, 산소량, 맥박수를 체크하는 기계다. 내가 그쪽으로 다가가자 혈압 수치가 40에서 60, 93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어?, 혈압이 정상으로 돌아오네요." 의사는 순간적으로 혈압이 왜 변하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기계 장치만 빼면 그대로 돌아가신다. 하지만 의사가 그걸 빼는 건 불법 행위다. 자연적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빠르게 설명했다. 혈압이 정상으로 돌아왔으니 며칠은 더 사실 거란다. "어떤 사람들은 임종 면회를 다섯 번까지 해요." 별것 아닌 듯 말했다. 사람 목숨은 하늘이 거두는 거겠지. 아무리 의사라도 돌아가실 때를 어찌 정확하게 알겠는가. 의사의 말을 이해해 보려고 했다. 간호사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어머니 가방을 내밀었다. 안에는 속옷, 양말과 함께 낡은 휴대전화기가 들어 있었다. 가슴을 쓸어내리고 병원을 나오면서 남편은 땅을 치며 후회한다고 했다. 비위관(콧줄) 삽입에 동의한 것을. 아프지 않은 세상으로 빨리 보내드리고 싶다며 한숨을 토한다. 침울한 분위기를 바꾸려고 "왜 내가 병실에 들어갔을 때 어머니 혈압이 좋아지셨을까?" 내에 힘을 주며 물었다. "못된 며느리 얼굴 보니까 혈압 오르신 게지?" 남편의 뼈있는 농담에 웃음이 나왔다. “그럼 내가 어머니 살린거네?” 남편은 그랬나보다며 내 손을 꼭 잡았다.
1주일 후에 임종 면회를 한 번 더 했다. 그러고도 시어머니는 3일을 더 사셨다. 정작 진짜 임종은 아무도 지키지 못했다. 병원에서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첫댓글 꺼내기 어려운 마음 아픈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공감하며 읽어주신 희연님, 고맙습니다.
나이듦이 무섭네요.
우리 부모님도 비슷하게 병원에서 생을 마감해서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의 마지막은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뜻대로 될런지요?
나이들어가는 우리들 자화상이라 더 슬픕니다.
공감해주신 미숙님, 고마워요.
잘 읽었습니다. 사람의 일생을 생각해 봅니다. 저도 편안히, 가족들 걱정 안 시키고 죽는 복을 달라고 기도해야겠어요.
향라님의 기도가 이루어질겁니다ㅎ
고마워요.
너무 슬픕니다.
절대 죽지 않을 것처럼 사는 내 모습이 좀 웃기기도 하고. 그렇네요. 잘 읽었습니다.
공감하며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아직 젊으신 선영님, 패기 넘치게 살아야죠ㅎ
이렇게 힘든 길이라 노인들이 죽을 일이 제일 걱정이라고 하나 보네요.
임종 면회라는 말만으로도 맘이 무겁네요. 피할 수 없는 길인데...
고생하셨습니다.
선애님,
고생했다는 말씀, 고맙습니다.
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네요.
임종 면회.
제목만으로도 마음이 무겁네요.
"못된 며느리 얼굴 보니 혈압이 오르신 게지."
웃습니다.
재치 있는 남편 말에 저도 웃었네요.
관찰력이 뛰어납니다. 본인이 판단력에 문제가 없을 때 연명치료를 안 받겠다고 서약을 했는데도 가족이 동의하면 되는 것인지 궁금하네요.
저는 잘 모르지만, 입원하는 것은 곧 병원 처치를 받는다는 의사 표현이라고 보는것 같아요.
본인 서약과 관계없이 가족은 동의를 할 수 밖에요. 당장 치료해야 하고 콧줄을 꽤서라도 영양공급을 해야하니까요.
저도 많이 놀랐어요.
숨가쁜 순간들을 담담하고 세세히 쓰셨네요. 평소에 시모님을 공경하셨나봐요. 친정부모님과 시어머님의 마지막 길이 생각나서 착찹해집니다. 애쓰셨습니다.
얼마전 일이라서요. 어머니의 마지막 6개월은 참으로 아프고 외로웠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