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자에게 주신 은혜 / 사 49:5-13, 엡 3:1-13
겨자씨는 땅위에서 가장 작은 종자이지만 큰가지를 낸다. 마가복음에서는 ‘작은 생선 두어마리’로도 빈들에서 4천명이 배불리 먹었다. 소알은 작은 성이지만 유황불에서 롯을 구하고, 앨리야의 갈멜산 이야기에서는 ‘손만한 적은 구름’이 지중해의 큰비를 몰고 온다. 신구약성서 어디에서든지 작은 것은 업수히 여김을 받거나 멸시를 당하지 않는다. 사랑의 노래집인 아가에서는 아직 ‘유방이 없는 작은 누이’가 가장 아름다운 여자이며, 열왕기의 나아만을 구원한 자도 ‘이스라엘의 작은 계집아이’였다. 키가 작은 사람 여리고의 석개오는 복음서에서 가장 큰 칭찬을 받은 사람 중의 하나이다. 작은 자도 소외되지 않고 크게 높임을 받는다. 보석은 아주 작다. 그러나 무척 아름답다. 별들은 작게 보이나 신비롭게 반짝인다. 원자는 물질이 가장 작은 알맹이지만 그것이 깨질 때는 놀라운 힘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작은 것은 쓸모없는 것들이 아니라 귀히 여김을 받아야 할 것들이다. 이 세상은 큰 것에만 눈길이 쏠려있는 것이 사실이다. 고래만 보고 크릴 새우는 보지 못한다. 독수리에 놀라고 찌르레기는 못본척 한다. 그러나 시인 이호우는 ‘개화’라는 그의 시에서 ‘꽃이 피네, 한잎 한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라고 했다. 그는 피고 있는 작은 꽃 한송이에서 큰 하늘을 볼줄 아는 밝은 눈을 가진 자임에 틀림없다. 작은 것은 한낱 밟히기 위해서 태어나지 않았다. 세상에 골리앗처럼 큰 자나 삼손처럼 힘센 자는 흔하지 않다. 네피림과 같은 용사도 많지 않다. 오히려 작고 작은 자임을 아는 자가 복이 있다. 이제 우리는 작은 것의 보배로움과 그것의 놀라운 가능성을 헤아려 보고 거기서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기를 바란다.
1. 바울
먼저 바울은 자신을 작은 자로 여겼다. 그래서 엡의 본문에서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했다. 그는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같은 말을 하고 있는데 거기에서는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또는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서슴없이 자기를 소개하고 있다. 당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게바파와 아볼로파 등 반대자들의 공격을 받고 있었으나 그들 앞에서 자기가 아주 작은 자임을 말하는데 보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때 에베소에서의 그의 명성은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행 19:12)라고 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으나 그는 여전히 자기가 작은 자임을 고집하고 있다. 살펴보면 바울에게는 자랑거리가 적지 않다. 그가 사도로 부름을 받기 전에는 언제나 자기의 큰 것을 자랑하는 자였다. 난지 8일만에 할례 받은 것, 이스라엘 족속인 것, 베냐민 지파인 것, 바리새인 된 것, 그리고 심지어는 교회를 박해한 것까지 자랑으로 여겼다고 했다. 이외에도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출신인 것과 가말리엘의 문하생인 것, 그리고 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것까지 그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스라엘의 첫 임금에게서 따온 히브리 이름 사울을 버리고 ‘보잘 것 없다’는 뜻의 로마 이름 바울을 내세울만큼 자랑과는 담을 쌓고 산 사람이었다. 그는 자랑은 어리석은 것이라는 명제와 자랑할 때는 약한 것을 자랑한다고 하는 역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지나치게 자기확대에 골몰하고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모두 큰 자요 작은 자는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프랑스의 작가 싸르뜨르는 말한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모든 인간은 가면을 스고 있다.’ 가면이나 탈은 거짓된 얼굴이다. 요란한 위선의 마스크를 쓴 얼굴로는 누구든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이제 우리는 각각 ‘나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나’ 보다 자기가 훨씬 작은 자라는 자각의 눈을 떠야 한다. 그것은 보조도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얼마만큼 실망을 안겨줄 수도 있지만 사람들로 진실되게 하고 또 향상을 위해 노력하게 만든다. 오히려 수치됨은 작은 자가 큰 자처럼 착각하는데 있다. 그래서 라 로시푸꼬의 잠언에서는 ‘참된 자는 한결같이 자랑하는 일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작은 자라는 것을 구실로 마땅히 행해야 할 책임과 의무에서 마저 면제받고자 하는 유혹을 받아서는 안된다. 작다고 하는 것은 인생의 지혜와 겸손의 덕목이지 결코 나태와 변명의 특전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마태가 그의 복음서에 기록한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가 그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비록 내 몫이 한 달란트일 때라도 우리는 그것을 결코 땅에 묻어버려서는 안된다. 사람은 이 유혹을 이기지 못하면 헛된 인생을 살게 된다.
바울은 많은 달란트를 가진 큰 자였다. 그러나 그는 항상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았다. 자신이 힘써서 성취한 일조차 그는 하나님의 은헤로 된 것이라고 감사했다. 그것은 시종 그의 꾸밈없는 인생의 태도였다. 바로 그것이 다소 출신의 바울로 하여금 위대한 생애를 살게한 바탕이며 원동력이다. 지금 여러분도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임을 어서 시인하라. 큰 바벨탑은 무너져도 작은 제단은 쓰러지지 않는다. 작은 자로서의 겸손과 성실을 몸에 지니고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아름다운 열매와 큰 승리가 떠나지 않게 될 것이다.
2. 베들레헴
다음은 작은 고을 베들레헴이다. 미 5:2절에는 주전 8세기의 선지자 모라셋 사람의 예언의 한구절이 담겨져 있다. 그는 거기서 말하기를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라고 하였다. 유대 땅의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8km 떨어진 석회석의 고원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이 성읍은 사해 골짜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유대의 여러 고을들 가운데 한 작은 동네에 지나지 않는다. 베들레헴이란 이름은 ‘떡집’이라는 뜻으로 우리나라의 떡전거리를 생각나게 하는 소박한 마을이기도 하다. 따라서 베들레헴은 사마리아나 예루살렘처럼 왕궁이 있는 큰 도시가 아니다. 시온산처럼 성전이 있는 거룩한 성읍도 아니다. 또 이방의 고을 두로와 시돈처럼 그때 세계의 상권을 손에 쥔 황금의 땅도 아니었다. 마기의 말 그래도 유다 족속 중에 한 작은 고장이었다.
요즘 우리니라의 프로야구나 프로축구의 구단들은 모두 자랑할만한 대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갈릴리의 나사렛이 나다나엘에게 멸시를 받은 산골이었던 것처럼 베들레헴도 자랑할 데가 없는 작은 고을이었다. 그런데도 선지자는 이 작은 마을 베들레헴이 천히여김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바로 그곳에서 크신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가 탄생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에 보면 헤롯이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라고 물었을 때 서기관들이 부지런히 미가의 예언서 두루마리를 펼쳐서 ‘유대 베들레헴’이러고 대답하지 않았는가? 지금 베들레헴은 널리 알려진 명소가 되었다. 온세계의 순례자들이 붐비는 성지가 되었다. 저 북방 얼음산과 또 대양 산호섬까지 이 작은 고을 베들레헴을 모르는 자가 없다. 그만큼 그곳은 뭇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곳이다. 그러므로 개인이나 민족이나 그 덩치가 얼마나 크고 작으냐 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과 인류를 위해 얼마나 봉사했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작은 자가 크게 되는 비밀은 섬김에 있다. 봉사가 크고 헌신이 뛰어나면 그는 큰 자가 될 것이다. 결단코 성도들은 자신이 작은 자라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만일 작다는 것을 이유로 아예 봉사할 생각조차 품지 않고 있다면 그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흑인영가에 ‘때때로 나는 고아처럼 느끼네’라는 노래가 있다. 하나님에게서 떠난 자는 우주의 고아가 된다. 그는 절대로 행복한 피조물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섬기며 이웃을 위하여 봉사하는 삶을 산다면 천애의 고아라도 외롭지 않고 우주의 왕자처럼 만족을 누리게 될 것이다. 작은 자가 마침내 큰 자가 되는 기적이 일어난다. 텍사스의 휴스톤에서 우주선을 타는 자는 38.7kg의 우주복을 갈아 입는다.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에 가려는 자들도 그보다 더한 무게의 봉사의 옷을 입어야 할 것이다. 존 웨슬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돕는 동안에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신다’고 하였다. 여러분도 베들레헴처럼 작고 작을지라도 큰 자가 될 수 있다. 아무쪼록 섬기고 또 봉사하는 자들이 되라. 그러면 천국에서 큰 자들이 받는 축복과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3. 요셉
끝으로 요셉도 작은 자로 출발한다. 그는 위로 열명의 향들이 있는 집안에 태어난 어린 소년이었다. 그때 라헬은 오랜 세월을 기다려 이 아들을 낳고 ‘’는 소원이 있어서 그에게 ‘더함’이라는 뜻의 요셉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렇다면 그는 출생 때부터 오히려 부족하다고 하는 한이 서린 어머니의 모자라는 아들이었다. 이토록 요셉은 작은 자였지만 그는 홀로 큰 꿈을 품고 자랐다. 그는 지칠줄 모르는 꿈의 소년이었다. 그는 형들이 묶은 곡식단은 물론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다. 이러한 요셉의 꿈이야기는 아버지 야곱을 놀라게 했고, 소위 형들로부터는 큰 미움을 사게 했다. 그후 요셉은 빈들에서 노예로 팔리고 보디발의 집에서는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는 데까지 고난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마침내 힉소스 왕조의 애굽 총리가 되어 흉년을 다스린다. 하루 아침에 옥중의 죄수가 바로의 버금수레를 탄다. 우리는 이 요셉이 이야기에서도 지극히 작은 자가 크게 되는 인생의 교훈을 배운다. 비록 작을지라도 꿈을 꾸는 자가 이긴다. 그늘 속에 있는 자라도 꿈을 말하는 자가 아름다운 앞날을 맞이한다. 형편이 뒤틀리고 사정이 복잡해도 인내하면서 끝까지 견디는 자가 드디어 크게 된다.
그래서 시인 박목월은 그의 ‘불이 켜진 창마다’라는 글에서 ‘밤 깊도록 불을 켜놓고 수학을 풀고 외국어를 익히고 역사를 공부한 그 넉넉한 문맥 속에서 우리의 인생은 눈물어린 눈동자에 미소를 머금고 다가온다. 그 날을 위한 오늘의 발돋움 오늘의 열중, 밤늦도록 불이 켜져 있는 창마다 신이 축복이 서려있다’라고 노래했다. 사무엘도 어린 시절에 불이 켜진 실로의 성막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하나님의 음성과 엘리 제사장의 목소리를 구별할 줄도 몰랐던 어린 나이의 작은 아이였지만 사사시대 말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이스라엘 왕국의 산파역을 담당한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다. 한나의 아들인 이 소년도 유년시절부터 제사복인 예봇을 입고 성막에서 이스라엘의 이상을 꿈꾸던 자였다. 다윗도 똑같았다. 그는 이새 집안의 막내둥이로 천대받는 양치기 소년이었다. 그의 형들은 그를 전쟁 구경꾼으로 몰아 꾸짖기를 쉬지 않았다. 그러나 다윗은 홀로 골리앗을 타도하는 꿈을 불태우고 있었다. 엘라 골짜기에서 참으로 다윗은 작은 자였으나 만만의 승리를 거두는 큰 일을 해냈다. 단테의 신곡 속의 지옥문에는 다음과 같은 현판이 걸려있다. ‘여기는 슬픔의 거리에 이르는 곳, 영겁의 고뇌에 이르는 입구, 여기는 멸망의 사람들을 위한 현관이니라. 너희들 여기로 들어오는 자들은 모든 희망을 버릴지니라.’ 그러므로 피렌체의 시인이 본 지옥에는 꿈이 없다. 누구든지 희망을 잃은 자는 지옥의 백성이다. 작고 작은 자라도 희망을 가지라.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일지라도 꿈을 꾸라. 그들은 죽지않고 살아 숨쉬는 자들이다. 요셉처럼 꿈 이야기에 취한 자들이 큰 자가 된다. 하나님은 광야에 사는 히브리 족장들에게 꿈을 꾸게 하셨다. 부디 여러분도 희망의 큰 날개죽지를 가진 힘찬 일꾼들이 되기를 바란다.
한때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표어가 전세계적으로 크게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그 무렵 우리나라의 이어령 교수가 쓴 ‘축소지향적인 일본인’이라는 책이 일본에서 베스트 셀러가 되기도 했다. 거기에는 일본인들이 작은 것에 관심을 두고 성실할 때는 번영하지만, 스스로 큰 것에 눈독을 들일때 에는 멸망하고 만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현해탄 건너편 사람들만의 것이겠는가? 역사의 무대에 올랐던 대제국들의 멸망은 그들이 모두 큰 것을 자랑하다가 당한 실패가 아니었나? 650만 년전에 지구생물의 패권을 차지했던 엄청나게 큰 공룡은 지금 화석으로만 남아있을 뿐 모두 멸종하고 말았다. 그러나 작은 생물들은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 있다. 일찍이 나폴레옹은 ‘사람은 그가 입은 제복대로의 인간이 되고 만다’는 의미 있는 말을 남겼다. 지금 우리는 어떤 모양의 옷을 입었나? 스스로 큰 자의 옷을 입고 공룡처럼 기우뚱거리지는 않는가?
만일 여러분이 바울처럼 충분히 낮아지지 뭇한다면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히지 못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베들레헴처럼 섬기는 자를 내놓지 못한다면 쓸모없는 삶으로 끝장이 나고 말 것이다. 만일 성도들이 요셉처럼 역경 속에서라도 꿈을 꾸며 그것을 이룰 힘을 지니지 못한다면 한낱 열매없는 을씨년스런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이제 여러분은 자신들의 작고 작음을 알아차리도록 하라. 거기에서 우리의 삶은 새롭게 시작되어야 한다. 더욱 겸손하라. 섬기는 일에 나서라. 그리고 끝까지 희망을 가지도록 하라. 그러면 지극히 작은 자보다 작은 자라도 결단코 버림을 당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에게 오히려 큰 구원을 안겨주시고 그들로 빛나는 영광을 얻게 하실 것이다. (1996-052)